[經]五年春
에 하다注+稱晉侯 惡用讒 書春 從告
[經]
하다注+無傳 伯姬來寧 寧成風也 朝其子者 時子年在十歲左右 因有諸侯子得行朝義 而卒不成朝禮 故繫於母而曰 朝其子
[經]夏
에 하다注+叔孫戴伯娶於牟 卿非君命不越竟 故奉公命聘於牟 因自爲逆 [附注] 林曰 牟 小國
[經]公及齊侯宋公陳侯衛侯鄭伯許男曹伯會王世子于首止
하다注+惠王大子鄭也 尊之也 首止 衛地 陳留襄邑縣東南有首鄕 [附注] 林曰 衣裳之會七 殊會世子 不以世子夷於諸侯 所以定世子也
[經]秋八月
에 諸侯盟于首止
하다注+ 王之世子尊與王同 齊桓行霸 翼戴天子 尊崇王室 故殊貴世子
[經]楚人滅
하니 子奔黃
하다注+弦國 在弋陽軑縣東南
[經]冬
에 晉人執虞公
하다注+虞公貪璧馬之寶 距絶忠諫 稱人以執 同於無道於其民之例 所以罪虞 且言易也 晉侯修虞之祀 而歸其職貢於王 故不以滅同姓爲譏
傳
[傳]五年春王正月辛亥朔
에 日南至
하다注+周正月 今十一月 冬至之日 日南極
公旣視朔
하고 遂登觀臺以望而書
하니 禮也
注+視朔 親告朔也 觀臺 臺上構屋 可以遠觀者也 審別陰陽 叙事訓民 魯君不能常修此禮 故善公之得禮라
凡分至啓閉
에 必書雲物
注+分 春秋分也 至 冬夏至也 啓 立春立夏 閉 立秋立冬 은 爲備故也
라注+素察妖祥 逆爲之備
傳
[傳]晉侯使以殺大子申生之故來告
하다注+釋經必須告乃書
初
에 晉侯使士蔿爲二公子築蒲與屈
이러니 不愼
하고 置薪焉
注+不謹愼 [附注] 林曰 寘薪於土 雜而築之 不堅實이어늘 夷吾訴之
한대
臣聞之
컨대 無喪而慼
이면 憂必讎焉
注+讎 猶對也하고 無戎而城
이면 必保焉
注+保而守之이라하니 寇讎之保
를 又何愼焉
이릿가
守官廢命
은 不敬
注+[附注] 林曰 言若不往築 則守官而廢君之命이요 固讎之保
는 不忠
이니 失忠與敬
이면 何以事君
이릿가
詩云懷德惟寧
이오 宗子惟城
注+詩 大雅 懷德以安 則宗子之固若城이라하니 君其修德而固宗子
면 何城如之
릿가注+言城不如固宗子
三年將尋師焉
이리니 焉用愼
이릿가注+尋 用也 [附注] 林曰 蓋當時驪姬欲殺三公子之謀已露
狐裘尨茸
하니 一國三公
이로소니 吾誰適從
가注+士蔿自作詩也 尨茸 亂貌 公與二公子爲三 言城不堅則爲公子所訴 爲公所讓 堅之則爲固讎不忠 無以事君 故不知所從 [附注] 林曰 以狐腋爲裘 貴者之裘也 尨茸 亂貌 言貴者之多 蒲屈大都耦國 故獻公與二公子鼎立爲三公 朱曰 言以狐皮爲裘 其毛亂雜 以興下句之意
重耳曰 君父之命不校
注+[附注] 林曰 言披以君父之命來伐 不敢與校强弱勝負라하고 乃徇曰校者
는 吾讎也
라하고 踰垣而走
하니 披斬其袪
하다
傳
[傳]夏
에 公孫玆如牟娶焉
하다注+因聘而娶 故傳實其事
傳
[傳]會于首止
하야 會王大子鄭
하니 謀寧周也
라注+惠王以惠后故 將廢大子鄭而立王子帶 故齊桓帥諸侯會王大子 以定其位
傳
[傳]陳轅宣仲怨鄭申侯之反己於召陵
이라注+宣仲轅濤塗
大名也
注+[附注] 林曰 城虎牢而美設樓櫓之備 可以存莫大之名니 子孫不忘
하리라
吾助子請
하리라하고 乃爲之請於諸侯而城之
하니 美
注+樓櫓之備 美設어늘
傳
吾撫女以從楚
하고 輔之以晉
하리니 可以少安
이리라注+周公 宰孔也 王恨齊桓定大子之位 故召鄭伯使叛齊也 晉楚不服於齊 故以鎭安鄭
輕則失親
注+孔叔 鄭大夫 親 黨援也하고 失親
이면 患必至
하리이다
病而乞盟
이면 所喪多矣
리니 君必悔之
리이다 弗聽
하고 逃其師而歸
하다注+[附注] 林曰 君行師從 時鄭文公已會首止 故逃其師而歸
傳
於是江黃道栢方睦於齊
하니 皆弦姻也
라注+姻 外親也 道國在汝南安陽縣南 栢 國名 汝南西平縣有栢亭
傳
虢
은 虞之表也
注+[附注] 林曰 以虢爲表 以虞爲裏 言虢爲虞之外護니 虢亡
이면 虞必從之
하리이다
晉不可啓
요 寇不可翫
注+翫 習也 [附注] 林曰 晉心無厭 不可開啓 晉兵爲寇 不可翫習이니
一之謂甚
이어늘 其可再乎
잇가注+爲二年假晉道滅下陽
諺所謂輔車相依
하고 脣亡齒寒者
는 其虞虢之謂也
니이다注+輔頰輔 車牙車
大伯虞仲
은 大王之昭也
로되 大伯不從
이라 是以不嗣
注+大伯虞仲 皆大王之子 不從父命 俱讓適吳 仲雍支子 別封西吳 虞公其後也 穆生昭 昭生穆 以世次計 故大伯虞仲 於周爲昭하고 虢仲虢叔
은 王季之穆也
注+王季者 大伯虞仲之母弟也 虢仲虢叔 王季之子 文王之母弟也 仲叔 皆虢君字로 爲文王卿士
하여 勳在王室
하야 藏於盟府
注+盟府 司盟之官로되 將虢是滅
하니 何愛於虞
릿가
不唯偪乎
잇가注+桓叔莊伯之族 晉獻公之從祖昆弟 獻公患其偪 盡殺之 事在莊二十五年 [附注] 林曰 桓叔莊伯之子孫 皆獻公之曾祖父母祖父母之黨也 言晉若有愛祖宗之心 桓莊二公之子孫 以何得罪於獻公 獻公圍聚盡殺
親以寵偪
으로도 猶尙害之
온 況以國乎
잇가注+[附注] 林曰 至親而以恃寵逼害晉國 獻公猶尙盡殺害之 況以虞有一國之寵利 晉豈無幷呑虞公之心
又曰
이라하니이다注+黍稷牲玉 無德則不見饗 有德則見饗 言物一而異用 [附注] 林曰 民不易物以祭 而神有享有不享者 惟有德則是物而神享之 無德則雖有其物而神不享
如是則非德이면 民不和하고 神不享矣니 神所馮依는 將在德矣리이다
在此行也
니 晉不更擧矣
리라注+不更擧兵 [附注] 林曰 言將滅虢而遂滅虞
八月甲午
에 晉侯 圍上陽
注+上陽 虢國都 在弘農陝縣東南하고 問於卜偃曰
童謠云 丙之晨
에 龍尾伏辰
注+龍尾 尾星也 日月之會曰辰 日在尾 故尾星伏不見이어든 均服振振
하야 取虢之旂
로다注+戎事 上下同服 振振 盛貌 旂 軍之旌旗
鶉之賁賁
하고 天策焞焞
하며 火中成軍
하야 虢公其奔
注+鶉 鶉火星也 賁賁 鳥星之體也 天策 傳說星 時近日 星微 焞焞 無光曜也 言丙子平旦 鶉火中 軍事有成功也 此已上皆童謠言也 童齔之子 未有念慮之感 而會成嬉戲之言 似若有馮者 其言或中或否 博覽之士 能懼思之人 兼而志之 以爲鑒戒 以爲將來之驗 有益於世敎하리라하니 其九月十月之交乎
注+以星驗推之 知九月十月之交 謂夏之九月十月也 交 晦朔交會ㄴ저
丙子旦
에 日在尾
하고 月在策
注+是夜日月於尾 月行疾 故至旦而過在策하고 鶉火中
하니 必是時也
리이다
冬十二月丙子朔
에 晉滅虢
하니 虢公醜奔京師
하다注+不書 不告也 周十二月 夏之十月 [附注] 朱曰 醜 虢公名也 皆如童謠之言 然所謂童謠者 恐無此理 恐好事者附會爲之 未可信也
師還
에 館于虞
라가 遂襲虞滅之
하고 執虞公及其大夫井伯
하야 以媵秦穆姬
하다注+秦穆姬 晉獻公女 送女曰媵 以屈辱之 而
하다
故書曰 晉人執虞公
이라하니 罪虞
요 且言易也
라注+虞所命祀
5년 봄에
진후晉侯가 그
세자世子신생申生을 죽였다.
注+진후晉侯라고 칭한 것은 참소를 따른 것을 미워해서이고, 봄이라고 기록한 것은 진晉나라가 통고通告한 대로 따른 것이다.
기백희杞伯姬가 와서 그 아들을
노희공魯僖公에게
조현朝見시켰다.
注+전傳이 없다. 백희伯姬가 귀녕歸寧한 것은 성풍成風에게 귀녕歸寧한 것이다. 그 아들을 조현朝見시켰다는 것은 이때 아들의 나이가 10세 좌우였다. 제후의 아들은 조현朝見하는 의리가 있으므로 인해 조현시켰으나, 끝내 조현의 예禮를 제대로 행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그 어머니에게 매어 “그 아들을 조현시켰다.”고 한 것이다.
여름에
공손자公孫玆가
모牟나라에 갔다.
注+숙손대백叔孫戴伯이 모牟나라에서 아내를 맞이해 왔다. 경卿은 임금의 명命을 받지 않고는 국경國境을 넘을 수 없기 때문에 희공僖公의 명을 받들고 빙문聘問하는 사신使臣으로 모牟나라에 간 기회에 스스로 아내를 맞이한 것이다. [부주]林: 모牟는 소국小國이다.
희공僖公이
제후齊侯‧
송공宋公‧
진후陳侯‧
위후衛侯‧
정백鄭伯‧
허남許男‧
조백曹伯과 함께
수지首止에서
왕세자王世子를
회견會見하였다.
注+왕세자王世子는 혜왕惠王의 태자太子정鄭이다. 세자世子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회견會見을 달리 기록한 것은 세자世子를 높인 것이다. 수지首止는 위衛나라 땅이다. 진류陳留양읍현襄邑縣 동남쪽에 수향首鄕이 있다. [부주]林: 이것이 일곱 번째의 의상지회衣裳之會이다. 세자와의 회견會見을 달리 기록한 것은 세자를 제후와 대등하게 여기지 않은 것이니, 이는 세자世子를 정하기 위함이었다.
가을 8월에
제후諸侯가
수지首止에서
결맹結盟하였다.
注+중간에 다른 일이 없었는데도 다시 제후諸侯라고 칭한 것은 왕세자王世子가 결맹結盟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왕王의 세자世子는 그 존귀尊貴함이 왕王과 같다. 제환공齊桓公이 제후의 맹주盟主가 되어 천자天子를 보좌輔佐하고 왕실王室을 존중尊重하였기 때문에 특별히 세자世子를 존귀尊貴하게 여긴 것이다.
정백鄭伯은 도망해 돌아가고
결맹結盟에 참여하지 않았다.
注+그 군대는 그대로 두고 혼자 도망해 돌아간 것이다. 도망에 관한 예例는 문공文公 3년에 보인다.
초인楚人이
현弦나라를
격멸擊滅하니,
현자弦子가
황黃나라로 도망갔다.
注+현弦나라는 익양弋陽대현軑縣 동남쪽에 있다.
9월
무신삭戊申朔에
일식日食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겨울에
진인晉人이
우공虞公을 잡았다.
注+우공虞公이 옥玉과 말을 탐하고, 충신忠臣의 간언諫言을 거절하였기 때문에 ‘진인晉人’이 잡았다고 기록하여, 백성에게 무도無道한 자를 기록하는 예例와 같이 기록하였다. 예例는 성공成公 15년에 보인다. 우공虞公에게 죄를 돌리고, 또 힘들이지 않고 쉽게 멸滅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진후晉侯는 우虞나라의 제사를 지내고, 우虞나라의 직공職貢을 주왕周王에게 바쳤기 때문에 동성국同姓國을 멸滅한 것으로 비난하지 않은 것이다.
傳
5년 봄
주왕周王 정월
신해삭辛亥朔에
동지冬至가 들었다.
注+주周나라의 정월正月은 지금의 11월이다. 동지일冬至日에는 태양太陽이 남쪽 끝에 있다.
희공僖公이
시삭視朔하고서 드디어
관대觀臺에 올라
운물雲物을
관망觀望하고서 기록하였으니
예禮이다.
注+시삭視朔은 친히 곡삭告朔하는 것이다. 관대觀臺는 멀리 관망觀望할 수 있게 대臺 위에 지은 집이다. 11월 삭일朔日의 동지冬至가 역수曆數의 시작이기 때문에 역曆을 추산推算하는 자가 이에 의거해 역曆을 정하면 그 술수術數를 명확明確히 하고 음양陰陽을 분별하여 일의 순서를 정하여 백성을 교훈敎訓할 수 있다. 노魯나라 임금들이 항상 이 예禮를 거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희공僖公이 이 예禮를 행한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분分‧
지至‧
계啓‧
폐閉에 반드시
운물雲物을 기록하니,
注+분分은 춘분春分‧추분秋分이고, 지至는 동지冬至‧하지夏至이며, 계啓는 입춘立春‧입하立夏이고, 폐閉는 입추立秋‧입동立冬이다. 운물雲物은 운기雲氣와 재변災變이다. 전傳에 거듭 주周나라의 구전舊典를 말하고, 공公을 말하지 않은 것은 일관日官이 그 직무職務를 맡았기 때문이다. 이는
재해災害를
예비豫備하기 위함이다.
注+평소에 요상妖祥을 살피는 것은 미리 대비對備하기 위함이다.
傳
진후晉侯가
사자使者를
노魯나라에 보내와서
태자太子신생申生을 죽인 일을 고하였다.
注+반드시 알려 온 뒤에야 경經에 기록한다는 것을 해석한 것이다.
당초에
진후晉侯가
사위士蔿에게 두
공자公子를 위해
포蒲와
굴屈에 성을 쌓게 하였는데,
사위士蔿가
신중愼重히 쌓지 않고 흙 속에 섶을 넣으니,
注+근신謹愼하지 않은 것이다. [부주]林: 섶을 흙에 섞어 견실堅實하게 쌓지 않은 것이다.이오夷吾가 이를
고소告訴하였다.
헌공獻公이 사람을 보내어
사위士蔿를 책망하니
注+견책譴責한 것이다.사위士蔿가 머리를 조아리며 대답하였다.
“신이 듣건대
상사喪事가 없는데 슬퍼하면 근심스러운 일이 반드시
응대應對하고
注+수讎는 대對와 같다.전쟁戰爭이 없는데 성을 쌓으면 원수가 반드시 그곳을
보루保壘로 삼는다고 하니,
注+그곳을 보루로 삼아 지킨다는 말이다.구수寇讐의 보루를 무엇 때문에 신중히 쌓겠습니까.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군명君命을 어기는 것은
불경不敬이고,
注+[부주]林: 만약 가서 쌓지 않는다면 관직官職에 있으면서 임금의 명을 버리는 것이 된다는 말이다. 적의 보루를 견고하게 쌓는 것은
불충不忠이니 충성과 공경을 잃는다면 무엇으로 임금을 섬기겠습니까.
《
시경詩經》에 ‘
덕德으로
회유懷柔하면 국가가 안정되고
종자宗子가
견고堅固한
성城이 된다.’고 하였으니,
注+시詩는 《시경詩經》 〈대아大雅판편板篇〉이다. 덕德으로 국가를 안정시키면 종자宗子의 견고堅固함이 성城과 같다는 말이다. 임금님께서는 덕을 닦으시고
종자宗子의
위치位置를 견고히 하신다면 이만한 성이 다시 어디 있겠습니까.
注+성을 쌓는 것이 종자宗子의 위치를 견고히 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3년 안에 군사를 쓰게 될 것이니 무엇 때문에 신중히 쌓겠습니까.”
注+심尋은 쓰는 것이다. [부주]林: 이때 세 공자公子를 살해殺害하고자 한 여희驪姬의 음모陰謀가 이미 드러났다.
“여우 갖옷에 털이
난잡亂雜하여 한 나라에
공公이 셋이니 내 누구를 오로지 믿고 따를까?”
注+사위士蔿의 자작시自作詩이다. 방용尨茸은 어지러운 모양이다. 셋은 헌공獻公과 두 공자公子이다. 성을 견고히 쌓지 않으면 공자公子의 고소告訴를 당하여 헌공獻公의 견책譴責을 받고, 성을 견고히 쌓으면 원수의 보루를 견고히 쌓는 것이어서 불충不忠이 되어 임금을 섬길 수 없기 때문에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말이다. [부주]林: 여우 겨드랑의 가죽으로 만든 갖옷은 존귀尊貴한 사람의 갖옷이다. 방용尨茸은 어지러운 모양이니, 존귀한 자가 많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포蒲와 굴屈은 국도國都와 맞먹는 대도大都이기 때문에 헌공獻公이 두 공자와 더불어 세 발 솥처럼 삼공三公이 되었다는 말이다.[부주]朱: 여우 가죽으로 만든 갖옷에 그 털이 난잡하다는 것을 말하여 아래 글귀의 뜻을 일으킨 것이다.
난이 일어나자 헌공獻公은 시인寺人피披를 보내어 포蒲를 치게 하였다.
중이重耳는 “
군부君父의 명은
대항對抗[校]해서는 안 된다.”고 하고서
注+[부주]林: 시인寺人피披가 군부君父의 명으로 와서 치기 때문에 감히 그와 강약强弱승부勝負를 겨룰 수 없다는 말이다. 대중에게 “
대항對抗하는 자는 나의 원수이다.”고
선포宣布하고는 담을 넘어 도주하니 시인 피가 도주하는
중이重耳의 소맷자락을 잘랐다.
중이重耳는 드디어
적翟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注+거袪는 소매이다.
傳
여름에
공손자公孫玆가
모牟나라로 가서 아내를 맞이하였다.
注+빙문聘問 간 기회를 이용하여 아내를 맞이했기 때문에 전傳에 그 일을 사실대로 기록한 것이다.
傳
제후諸侯가
수지首止에서
회합會合하여
왕태자王太子정鄭을
회견會見하였으니, 이는
주周나라
왕실王室의
안정安定을
모의謀議하기 위함이었다.
注+혜왕惠王이 혜후惠后 때문에 태자太子정鄭을 폐廢하고 왕자王子대帶를 태자太子로 세우려 하였다. 그러므로 제환공齊桓公이 제후를 거느리고 왕태자王太子와 회합하여 그 위치를 안정시킨 것이다.
傳
진陳나라
원선중轅宣仲은
정鄭나라
신후申侯가
소릉召陵에서 자기를 배반한 것을 원망하였다.
注+선중宣仲은 원도도轅濤塗이다.
그러므로
신후申侯에게 하사받은
읍邑에 성을 쌓으라고 권하기를
注+제환공齊桓公이 하사한 호뢰虎牢이다. “아름답게 성을 쌓아라.
명성名聲을 크게 하는 것이니
注+[부주]林: 호뢰虎牢에 성을 쌓고서 망루望樓 등의 설비設備를 아름답게 꾸미면 큰 명성을 보존할 수 있다는 말이다. 자손들이 잊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대를 도와 청하겠다.”고 하고서,
신후申侯를 위해
제후諸侯에게 요청하여 성을 쌓으니 그 성이 아름다웠다.
注+망루望樓의 설비를 아름답게 꾸민 것이다.
그러자 원선중轅宣仲은 드디어 정백鄭伯에게 “신후申侯가 하사 받은 읍邑에 성을 아름답게 쌓았으니, 이는 장차 그 성을 근거지根據地로 삼아 배반하려는 것입니다.”고 참소하였다.
신후申侯는 이로 인해
죄罪를 얻었다.
注+7년에 정鄭나라가 신후申侯를 죽인 전傳의 배경이다.
傳
가을에 제후가 결맹結盟할 때에 주혜왕周惠王이 주공周公을 보내어 정백鄭伯을 불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내가 그대를
위무慰撫해
초楚나라를 따르게 하고 또
진晉나라에게 그대를 돕게 할 것이니, 그러면 그대 나라가 조금은 평안해질 것이다.”
注+주공周公은 재공宰孔이다. 혜왕惠王은 제환공齊桓公이 태자太子정鄭의 위치를 안정시킨 것을 통한痛恨으로 여겼기 때문에 정백鄭伯을 불러 제환공齊桓公을 배반하게 한 것이다. 이때 진晉나라와 초楚나라는 제齊나라에 복종하지 않았기 때문에 정鄭나라를 안정시키게 한 것이다.
정백鄭伯은 왕명王命에 대해서는 기뻐하였으나 제齊나라에 조현朝見하지 않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도망해 돌아오고 맹약에 참여하지 않으려 하였다.
그러자 공숙孔叔이 말리며 말하기를 “국군國君은 경솔히 행동해서는 안 됩니다.
경솔하면 가까운 나라를 잃고,
注+공숙孔叔은 정鄭나라 대부大夫이다. 친親은 한 편이 되어 구원救援하는 나라이다. 가까운 나라를 잃으면
환란患亂이 반드시 닥칩니다.
환란이 닥친 뒤에 맹약하기를
구걸求乞한다면 잃는 것이 많을 것이니 임금님께서는 반드시 후회하게 될 것입니다.” 라고 했으나 듣지 않고서 군대는 그대로 두고서 혼자 도망해 돌아갔다.
注+[부주]林: 임금이 거둥하면 사단師團이 따른다. 이때 정문공鄭文公이 이미 수지首止에 회합會合하였기 때문에 그 군대는 그대로 두고서 혼자서 도망해 돌아간 것이다.
傳
초楚나라 투누오도鬪穀於菟가 현弦나라를 격멸擊滅하니 현자弦子가 황黃나라로 도망갔다.
이때에 강江‧황黃‧도道‧백栢나라가 바야흐로 제齊나라와 화목和睦하였으니 모두 현弦나라의 인척姻戚이었다.
현자弦子가 이를 믿고
초楚나라를 섬기지 않고, 또
방비防備도
설치設置하지 않았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注+인姻은 외친外親이다. 도국道國은 여남汝南안양현安陽縣에 있다. 백栢도 국명國名으로 여남汝南서평현西平縣에 백정栢亭이 있다.
傳
진후晉侯가 다시 우虞나라에 길을 빌려 괵虢나라를 치려 하니, 궁지기宮之奇가 간諫하였다.
“
괵虢나라는
우虞나라의 울타리이니,
注+[부주]林: 괵虢나라는 밖에 있고 우虞나라는 안에 있으니, 괵虢나라는 밖에서 우虞나라를 보호하는 울타리라는 말이다.괵虢나라가 망하면
우虞나라도 반드시 따라 망합니다.
진晉나라에게 길을 열어 주어서도 안 되고 적을 가벼이 보아서도 안 됩니다.
注+완翫은 가벼이 여겨 무시하는 것이다. [부주]林: 진후晉侯의 욕심은 끝이 없으니 길을 열어 주어서는 안 되고, 진병晉兵의 침략을 가벼이 보아서도 안 된다는 말이다.
한 번 길을 빌려 준 것도 심하다 할 수 있는데 다시 빌려 줘서야 되겠습니까.
注+희공僖公 2년에 우虞나라는 진晉나라에게 길을 빌려 주고, 진晉나라와 연합聯合해 괵虢나라를 쳐서 하양下陽을 멸망시켰다.
속담에 ‘광대뼈[輔]와 잇몸[車]은 서로 의지하고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은
우虞나라와
괵虢나라를 두고 한 말입니다.”
注+보輔는 광대뼈이고. 거車는 잇몸이다.
“진晉나라는 우리의 동종同宗이니 어찌 우리를 해치겠는가.”
“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태왕太王의 아들[昭]이었으되
태백泰伯이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왕위王位를
계승繼承하지 못하였고,
注+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모두 태왕太王의 아들로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않고, 함께 왕위王位을 사양하고서 오吳로 갔다. 뒤에 주周가 중옹仲雍의 지자支子를 서오西吳에 봉하였는데, 우공虞公은 바로 그 후손이다. 목穆이 소昭를 낳고 소昭가 목穆을 낳으니, 세계世系의 차례로 계산하면 태백泰伯과 우중虞仲은 주태왕周太王의 소昭가 된다.괵중虢仲과
괵숙虢叔은
왕계王季의 아들[穆]로서
注+왕계王季는 태백泰伯‧우중虞仲의 동모제同母弟이고, 괵중虢仲‧괵숙虢叔은 왕계王季의 아들로 문왕文王의 동모제同母弟이다. 중仲과 숙叔은 모두 괵군虢君의 자字이다.문왕文王의
경사卿士가 되어
주周나라
왕실王室에
공훈功勳을 세워
봉封함을 받을 때의
맹약문서盟約文書가
맹부盟府에 간직되어 있는데도
注+맹부盟府는 사맹司盟의 관부官府이다.괵虢나라를 멸망시키려 하는데, 어찌 우리
우虞나라에
애정愛情을 두겠습니까?
또 우虞나라가 환숙桓叔‧장백莊伯의 자손보다 더 친근親近할 수가 있습니까?
진후晉侯가 동종同宗을 사랑한다면 환숙桓叔‧장백莊伯의 자손[族]은 무슨 죄가 있기에 죽였다는 말입니까?
자신을 위협한다고 여겨서가 아닙니까?
注+환숙桓叔과 장백莊伯의 자손은 모두 헌공獻公의 6촌 형제인데, 헌공獻公은 그들의 위협을 근심하여 다 살해殺害하였다. 이 일은 장공莊公 25년에 보인다. [부주]林: 환숙桓叔과 장백莊伯의 자손은 모두 헌공獻公의 증조부모曾祖父母와 조부모祖父母의 친당親黨이다. 진후晉侯가 조종祖宗을 사랑하는 마음을 가졌다면 환숙桓叔과 장백莊伯의 자손이 어찌 헌공獻公에게 죄를 얻었겠으며, 헌공獻公은 어찌 취읍聚邑을 포위包圍하고서 그들을 다 죽였겠느냐는 말이다.
친족親族이
권세權勢로 자신을 위협하는 것도 오히려
살해殺害하였는데 하물며 나라를 가지고 위협하는 것이겠습니까?”
注+[부주]林: 지친至親이 총애寵愛를 믿고 진晉나라 공실公室을 위협한 것도 헌공獻公은 오히려 다 살해하였는데, 하물며 우공虞公은 한 나라의 군위君位와 이록利祿을 가졌으니 진晉나라가 병탄幷呑할 마음이 어찌 없겠느냐는 말이다.
“나는 풍성하고 깨끗한
제물祭物로 제사를 지냈으니,
신神이 반드시 우리나라를 편안하도록 도와 줄 것이다.”
注+거據는 안安과 같다.
“신臣이 듣건대 귀신鬼神은 사람을 친애親愛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덕德 있는 사람에게 의지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
주서周書〉에 ‘하늘은 특별히
친애親愛함이 없고 오직
덕德 있는 사람을 돕는다.’고 하고,
注+〈주서周書〉는 일서逸書이다.
또 ‘
서직黍稷이 향기로운 것이 아니라 밝은 덕이 향기로운 것이다.’
注+형馨은 향기가 멀리까지 퍼지는 것이다. 고 하고
또 ‘백성이
제물祭物을 바꾸지 않아도 오직
덕德이 제물이다.’라고 하였으니
注+제사에 서직黍稷‧희생犧牲‧옥벽玉璧을 올려도 덕이 없으면 신神은 흠향歆饗하지 않고, 덕이 있으면 흠향하니, 제물은 동일해도 그 작용作用이 다르다. [부주]林: 백성이 제물을 바꾸지 않고 제사를 지내도 신神이 흠향하기도 하고 흠향하지 않기도 하는 것은 오직 덕이 있으면 이 제물이 올바른 제물이 되어 신이 흠향하지만 덕이 없으면 아무리 제물을 차려 놓아도 신神이 흠향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이 말대로라면 덕德이 없으면 백성이 화목和睦하지 않고 신神이 흠향歆饗하지 않을 것이니, 신神이 의지하는 곳은 아마 덕德에 있을 것입니다.
만약 진晉나라가 우虞나라를 취하여 밝은 덕으로써 향기로운 제물을 올린다면 신神이 어찌 토吐해 내겠습니까.”
우공虞公은 듣지 않고 진晉나라 사신使臣에게 길을 허락했다.
궁지기宮之奇는
가족家族을 이끌고 떠나며 말하였다.
注+행行은 떠나는 것이다.
“
우虞나라는
납제臘祭를 지내지 못하게 될 것이다.
注+납臘은 세말歲末에 여러 신神에게 지내는 제사 이름이다.
진晉은 이번 걸음에
우虞를
병탄幷呑할 것이니 재차 군대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다.”
注+다시 군대를 일으키지 않는다는 말이다. [부주]林: 장차 괵虢나라를 격멸擊滅하고는 드디어 우虞나라를 격멸擊滅할 것이라는 말이다.
8월
갑오일甲午日에
진후晉侯가
상양上陽을 포위하고서
注+상양上陽은 괵虢나라의 국도國都이다. 홍농弘農섬현陝縣의 동남쪽에 있다.복언卜偃에게 물었다.
“
동요童謠에 ‘
병자일丙子日 새벽
용미성龍尾星이 태양 가까이에 있어 보이지 않을 때에
注+용미龍尾는 미성尾星이다. 해와 달이 만나는 곳을 신辰이라 한다. 해가 미성尾星의 위치에 있기 때문에 미성尾星이 빛을 내지 못하여 보이지 않은 것이다.군복軍服을 씩씩하게 차려 입고서
괵虢나라의 깃발을 빼앗는다.
注+전사戰事에는 높은 장군과 졸개가 같은 옷을 입는다. 진진振振은 성대한 모양이다. 기旂는 군대의 정기旌旗이다.
순화성鶉火星이 새의 깃처럼 펼쳐지고
천책성天策星이 빛을 잃고
순화성鶉火星이 남쪽 하늘에 뜰 때 군대가
승전勝戰하여
괵공虢公이 도망갈 것이다.’라고 하니
注+순鶉은 순화성鶉火星이다. 분분賁賁은 조성鳥星의 형체形體이다. 천책天策은 부열성傅說星이다. 이때 순화성鶉火星이 태양 가까이에 있으므로 빛이 희미하다. 돈돈焞焞은 빛이 없는 것이다. 병자일丙子日 새벽 순화성鶉火星이 남쪽 하늘에 뜰 때 군사軍事를 성공成功한다는 말이다. 이상은 모두 동요童謠의 말이다. 이갈이 나이 어린 아이들은 무엇을 생각해 느끼기에는 아직 이른데도 함께 모여 놀면서 희롱하는 말을 만들어 내니, 신빙성信憑性이 있을 듯하다. 그 말이 혹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지만 박람博覽한 선비와 과거의 실패를 두려워하여 반성해 생각하는 사람이 이런 말을 모두 기억하여 경계로 삼고 장래의 징험徵驗으로 삼는다면 세교世敎에 도움이 있을 것이다. 아마 구시월 어름일 것입니다.
注+별의 징험徵驗으로 미루어 구시월 어름일 것임을 안 것이다. 하정夏正의 구시월이다. 어름[交]은 그믐과 초하루가 교차하는 시기이다.
병자일 아침에 해는
미성尾星 자리에 있고 달은
천책성天策星 자리에 있고
注+이날 밤에 해와 달이 미성尾星의 위치에서 합삭合朔한다. 달은 운행이 빠르기 때문에 새벽이 되면 미성尾星을 지나 천책天策성의 위치로 온다.순화성鶉火星이 남쪽에 뜨니 반드시 이때일 것입니다.”
겨울 12월 병자일 초하루에
진군晉軍이
괵虢나라를
멸滅하니
괵공虢公추醜가
경사京師로 달아났다.
注+괵공虢公이 도망간 것을 《춘추春秋》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노魯나라에 알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주周의 12월은 하夏의 10월이다. [부주]朱: 추醜는 괵공虢公의 이름이다. 모두 동요童謠의 말처럼 되었다. 그러나 이른바 동요란 것이 이처럼 맞을 리가 없다. 호사자好事者가 부회附會해서 만든 것인 듯하니, 신빙信憑할 만하지 못하다.
진군晉軍이 돌아올 때에
우虞나라에 머물다가 드디어
우虞나라를 습격하여 멸망시키고
우공虞公과 그
대부大夫정백井伯을 사로잡아
목희穆姬의
잉신媵臣으로 삼고,
注+진목희秦穆姬는 진헌공晉獻公의 딸이다. 시집가는 여자를 호송護送하는 것을 ‘잉媵’이라 한다. 우공虞公을 잉신媵臣을 삼아 모욕한 것이다.우虞나라의 4제사를 대신 지내고, 또
우虞나라의
직공職貢을
주왕周王에게 바쳤다.
注+우虞나라가 주왕周王의 명을 받아 지내던 제사이다.
그러므로 경經에 ‘진인晉人이 우공虞公을 잡았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우공虞公에게 죄를 돌리고, 또 진晉나라가 우虞나라를 힘들이지 않고 멸망시켰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