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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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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八年春王正月 公會王人齊侯宋公衛侯許男曹伯陳世子款盟于洮하다注+王人與諸侯盟 不譏者 王室有難故 洮 曹地 [附注] 林曰 兵車之會一
[經]鄭伯乞盟하다注+新服未與會 故不序列 別言乞盟
[經]夏 狄伐晉하다
[經]秋七月 禘于大廟하야 用致夫人하다注+禘 三年大祭之名 大廟 周公廟 致者 致新死之主於廟 而列之昭穆 夫人淫而與弑 不薨於寢 於禮不應致 故僖公疑其禮 歷三禘 今果行之 嫌異常 故書之 [附注] 林曰 向曰夫人氏之喪而不言姜 見絶於國之辭也 今曰致夫人而不言氏 見絶於宗廟之辭也
[經]冬十有二月丁未 하다注+實以前年閏月崩 以今年十二月丁未告
[傳]八年春 盟于洮하니 謀王室也
鄭伯乞盟하니 請服也
襄王定位而後發喪하다注+王人會洮 還而後王位定
[傳]晉里克帥師하고 梁由靡御하고 虢射爲右하야 以敗狄于采桑하다注+傳言前年事也 平陽北屈縣西南有采桑津
梁由靡曰
狄無恥하니 從之 必大克注+不恥走 故可逐하리다
里克曰
懼之而已 無速衆狄이라注+恐怨深而群黨來報
虢射曰
期年狄必至리니 示之弱矣로다注+[附注] 林曰 不追其師 是我先示之弱矣
狄伐晉하니 報采桑之役也
期月이라注+明期年之言驗
[傳]秋 禘而致哀姜焉하니 非禮也
注+寢 小寢 同 同盟 將葬又不以殯過廟 據經哀姜薨葬之文 則爲殯廟赴同祔姑 今當以不薨于寢 不得致也
[傳]冬 하니 難故也 是以緩하다注+有大叔帶之難
[傳]宋公疾 大子玆父固請曰 目夷長且仁하니 君其立之하소서注+玆父 襄公也 目夷 玆父庶兄子魚也
公命子魚한대 子魚辭曰 能以國讓하니 仁孰大焉릿가
臣不及也 且又不順注+立庶 不順禮이니이다하고 遂走而退하다


8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희공僖公왕인王人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허남許男조백曹伯진세자陳世子회합會合하여 에서 결맹結盟하였다.注+왕인王人제후諸侯결맹結盟하였는데도 비난하지 않은 것은 왕실王室화난禍難이 있었기 때문이다. 나라 땅이다. [부주]林: 첫 번째 병거지회兵車之會이다.
정백鄭伯결맹結盟하기를 청하였다.注+나라가 새로 항복하여 회합會合에 참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서차에 따라서 열기列記하지 않고, 따로 결맹結盟을 요청했다고 말한 것이다.
여름에 적인狄人나라를 쳤다.
가을 7월에 태묘太廟체제禘祭를 지내고서 부인夫人신주神主태묘太廟에 들여 모셨다.注+는 3년마다 한 번씩 지내는 대제大祭명칭名稱이다. 태묘太廟주공周公사당祠堂이다. 신사자新死者신주神主태묘太廟로 모시고 가서 소목昭穆에 따라 배열配列하는 것이다. 부인夫人공중共仲간음奸淫하여 민공閔公시해弑害하는 일에 참여하였고, 또 정침正寢에서 하지 않았으니, 에 의하면 그 신주神主종묘宗廟에 모실 수 없다. 그러므로 희공僖公은 그 를 의심하여 부인夫人이 죽은 뒤 세 번 째의 체제禘祭인 이번 체제禘祭에서 비로소 신주를 종묘에 모셨는데, 이것이 상례常禮와 다른 혐의가 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부주]林: 전에 ‘부인씨夫人氏’이라 기록하고 부인강씨夫人姜氏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드러낸 문사文辭이고, 이번에 ‘부인夫人하였다.’고 기록하고 ‘부인씨夫人氏’로 기록하지 않은 것은 종묘宗廟의 버림을 받았다는 것을 드러낸 문사文辭이다.
겨울 12월 정미일丁未日천왕天王하였다.注+사실은 작년 윤월閏月하였는데, 금년 12월 정미일丁未日한 것으로 부고訃告하였기 때문에 12월로 기록한 것이다.
8년 봄에 에서 결맹結盟하였으니, 이는 나라 왕실王室안정安定모의謀議하기 위함이었다.
정백鄭伯결맹結盟을 청하였으니 이는 나라가 나라에 복종服從하기를 청한 것이다.
양왕襄王왕위王位확정確定한 뒤에 혜왕惠王을 발표하였다.注+왕인王人에서 회맹會盟하고 돌아온 뒤에 왕위王位안정安定된 것이다.
나라 이극里克이 군사를 거느리고 양유미梁由靡가 되고 괵석虢射가 되어 적군狄軍채상采桑에서 패배敗北시켰다.注+에 말한 것은 전년前年의 일이다. 평양平陽북굴현北屈縣 서남쪽에 채상진采桑津이 있다.
양유미梁由靡가 말하였다.
적인狄人은 도망가는 것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으니 추격追擊하면 반드시 대승大勝할 것입니다.”注+패주敗走하는 것을 수치羞恥로 여기지 않기 때문에 추격追擊할 수 있다는 말이다.
이극里克이 대답하였다.
“저들에게 겁만 주면 그만이지, 많은 적군狄軍을 불러들일 필요는 없다.”注+원한怨恨이 깊어지면 많은 무리가 쳐들어와 보복할 염려가 있다는 말이다.
괵석虢射이 말하였다.
注+[부주]林: 적군狄軍을 추격하지 않는 것은 우리가 먼저 저들에게 함을 보여 준 것이라는 말이다.
여름에 적인狄人나라를 침벌侵伐하였으니, 이는 채상采桑전쟁戰爭에서 패배敗北한 것을 보복報復한 것이다.
기월期月’이라고 한 괵석虢射예언預言이 들어맞았다.注+1년 뒤에 다시 쳐들어 올 것이라는 말이 들어맞았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가을에 체제禘祭를 지내고서 애강哀姜(文公妃)의 신주神主종묘宗廟에 들여 모셨으니, 가 아니다.
범례凡例에 의하면 부인夫人에서 하지 않고, 종묘宗廟하지 않고, 동맹국同盟國부고赴告하지 않고, 고묘姑廟하지 않았으면 그 신주神主종묘宗廟에 들여 모시지 않는 것이다.注+소침小寢이고, 동맹국同盟國이다. 장사葬事 지내려 할 때에 또 빈궁殯宮에서 출관出棺하여 종묘宗廟알현謁見하지 않은 것이다. 에 ‘부인강씨훙夫人姜氏薨’과 ‘장아소군애강葬我小君哀姜’이라고 기록한 글에 의거하면 애강哀姜종묘宗廟하고, 동맹국同盟國부고赴告하고, 고묘姑廟하였으나, 소침小寢에서 하지 않았으니 그 신주神主종묘宗廟에 들여 모시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겨울에 왕인王人이 와서 혜왕惠王하였으니, 왕실王室에 난리가 있었기 때문에 부고赴告가 늦어진 것이다.注+태숙太叔의 난리가 있었다.
송공宋公의 병이 위독危篤해지자 태자太子자부玆父가 “목이目夷는 나이가 저보다 많고 또 인자仁慈하니 임금님께서는 그를 임금으로 세우소서.”라고 굳이 청하였다.注+자부玆父양공襄公이다. 목이目夷자부玆父서형庶兄자어子魚이다.
송공宋公자어子魚에게 승계承繼하라고 명하니, 자어子魚는 “태자太子는 능히 나라를 남에게 사양하니 이보다 더 큰 이 어디에 있습니까.
태자太子에 미칠 수가 없고, 또 신이 임금이 되는 것은 순리順理도 아닙니다.”注+서자庶子를 임금으로 세우는 것은 를 따르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고 사양하고서 드디어 빠른 걸음으로 물러났다.


역주
역주1 天王崩 : 元나라 學者吳澄은 “左氏는 惠王이 이미 崩한 것으로 말하였으나, 天王의 喪은 천하가 다 알아야 하는 일인데 어찌 1년씩이나 비밀에 붙이고서 喪을 발표하지 않았을 리가 있겠는가? 내 생각에는 天王이 비록 崩하지는 않았으나 혹 병을 앓고 있으므로 襄王은 어느 날 갑자기 天王이 崩하면 叔帶가 簒立할 것을 염려하였고, 周나라의 大臣 중에도 襄王의 즉위를 위해 꾀하는 사람이 있었기 때문에 下士를 보내어 齊桓公에게 禍難을 告한 것인 듯하다. 王人은 본래 諸侯의 會盟에 참여하지 않는 것이지만 이번 회맹에서 謀議한 일이 바로 王室의 일이었고, 王人도 특별히 이 일을 위해 왔기 때문에 회맹에 참여한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2 : 楊伯峻의 說에 “말을 실천하는 것을 復이라 하고, 또 預言이 들어맞는 것을 復이라 한다.”고 하였다.
역주3 우리가 弱함을……쳐들어올 것입니다 : 이 句는 우리말 語順에 따라 倒置해 飜譯하였다.
역주4 禘而致哀姜焉……則弗致也 : 徐壽錫은 “哀姜이 비록 國外에서 殺害되었으나, 夫人의 禮로 장사 지냈으니 어찌 不殯, 不赴, 不祔하였겠는가? 그런데 죽은 지 8년이 지나서야 그 神主를 宗廟에 모셔 들였을 理가 있겠는가? 左氏의 설은 妄言이다. 公羊氏는 ‘聲姜(僖公妃)’을 가리킨 것이라고 하였으나 그 설이 穿鑿에 가깝고, ‘成風(僖公母)’이라고 한 穀梁氏의 설이 두 설에 비해 약간 사리에 맞기 때문에 劉向 이후로 諸儒가 모두 이 설을 따랐다.”고 하였다.
역주5 王人來告喪 : 李震相은 “惠王의 崩과 襄王의 卽位에 대해 ‘7년 閏月에 惠王이 崩하였으나 襄王은 太叔이 환란을 일으킬 것을 꺼려 喪을 발표하지 않고 齊나라에 禍難을 通告하여 王位가 정해진 뒤에 상을 발표하고서 겨울에 王人이 魯나라에 와서 喪을 通告하였다.’고 한 左氏의 말은 옳지 않다. 惠王은 叔帶를 총애하여 항상 太子를 바꾸려 하였고 보면 惠王이 崩하기 전에는 叔帶가 곁에서 모셨을 것이고, 또 朝廷에 叔帶의 黨與가 많았을 것이니 惠王이 崩한 것을 몰랐을 리가 없는데, 襄王이 어찌 비밀에 붙여 喪을 발표하지 않을 수 있었겠는가? 설혹 王位를 다투는 일이 있어 13개월 뒤에 喪을 통고하였다 하더라도 史官은 실제로 崩한 날로 기록하는 것이 마땅한데, 무엇 때문에 赴告를 보낸 날로 기록하였겠는가? 左氏는 단만 ‘王人이 洮에서 結盟하였다.’고 한 經文만을 보고서 喪을 숨겼다는 설을 만들어 냈으니, 어찌 傳을 믿고서 經을 의심해서야 되겠는가?”라고 하였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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