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春秋左氏傳(2)

춘추좌씨전(2)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춘추좌씨전(2)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四年春 諸侯城緣陵하다注+緣陵 杞邑 辟淮夷遷都於緣陵 [附注] 林曰 不序諸侯 也 是故但曰諸侯者 不係之伯者之辭也 但曰大夫者 不係之君之辭也
[經]夏六月 季姬及鄫子遇于防하야 使鄫子來朝하다注+季姬 魯女鄫夫人也 鄫子本無朝志 爲季姬所召而來 故言使鄫子來朝 鄫國 今琅邪鄫縣
[經]秋八月辛卯 沙鹿崩하다注+沙鹿 山名 平陽元城縣東有沙鹿土山 在晉地 災害繫於所災所害 故不繫國
[經]하다注+無傳
[經]冬 蔡侯肹卒하다注+無傳 未同盟而赴以名
[傳]十四年春 諸侯城緣陵而遷杞焉하다
注+闕 謂器用不具 城池未固而去 爲惠不終也 澶淵之會 旣而無歸 大夫不書 而國別稱人 今此總曰諸侯 君臣之辭 不言城杞 杞未遷也
[傳]鄫季姬來寧이어늘 公怒하야 止之하니 以鄫子之不朝也注+ 明公絶鄫昏 旣來朝而還
遇于防하야 而使來朝하다注+[附注] 林曰 季姬自與鄫子會遇 而使其來朝請己也
[傳]秋八月辛卯 沙鹿崩하다
晉卜偃曰
期年將有大咎하야 幾亡國하리라注+國主山川 山崩川竭 亡國之徵
[傳]冬 秦饑하야 使乞糴于晉한대 晉人弗與하다
慶鄭曰
背施無親注+慶鄭 晉大夫이요 幸災不仁이요 貪愛不祥注+[附注] 朱曰 幸人之災 是不仁也 貪惜己物 不以救灾 是不祥也이요 怒隣不義 四德皆失이면 何以守國이릿가
虢射曰
皮之不存이어니 毛將安傅리오注+虢射 惠公舅也 皮以喩所許秦城 毛以喩糴 言旣背秦施 爲怨以深 雖與之糴 猶無皮而施毛也 [附注] 朱曰 先時惠公許以五城賂秦 旣而背之
慶鄭曰
棄信背隣이면 患孰恤之릿가注+[附注] 朱曰 言棄許城之信 而背隣國之施 則國家有患 民亦棄之而不恤也
無信患作하고 失援必斃 是則然矣니이다注+[附注] 朱曰 此皆事理之必然者
虢射曰
無損於怨이오 而厚於寇 不如勿與니이다注+言與秦粟 不足解怨 適足使秦强
慶鄭曰
背施幸災 民所棄也注+[附注] 林曰 雖吾民亦不直其君而棄之
近猶讎之 況怨敵乎잇가注+[附注] 朱曰 平日相親近之國 猶足致讎怨也 何況素爲怨敵如秦者乎
弗聽하다
退曰
君其悔是哉리라


14년 봄에 제후諸侯연릉緣陵을 쌓았다.注+연릉緣陵나라 이다. 회이淮夷를 피해 연릉緣陵으로 옮긴 것이다. [부주]林: 제후諸侯를 대소의 순서에 따라 열기列記하지 않은 것은 산사散辭이다. 그러므로 단지 ‘제후諸侯’라고만 하면 후백侯伯에 매이지 않은 말이고, ‘대부大夫’라고만 하면 임금에게 매이지 않은 말이다.
여름 6월에 계희季姬증자鄫子에서 만나 증자鄫子에게 와서 조현朝見하게 하였다.注+계희季姬나라의 딸이고 증자鄫子부인夫人이다. 증자鄫子는 본래 나라에 조현朝見할 뜻이 없었으나 계희季姬의 부름을 받고 왔기 때문에 ‘증자鄫子에게 와서 조현朝見하게 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나라는 지금의 낭야琅邪증현鄫縣이다.
가을 8월 신묘일辛卯日사록산沙鹿山이 무너졌다. 注+사록沙鹿산명山名이다. 평양平陽원성현元城縣 동쪽에 사록토산沙鹿土山이 있는데 나라 땅이다. 재해災害는 재해가 발생한 곳에 매어 기록하기 때문에 나라에 매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적인狄人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注+이 없다.
겨울에 채후蔡侯하였다. 注+이 없다. 동맹同盟하지 않았으나 이름으로 부고赴告하였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14년 봄에 제후諸侯연릉緣陵을 쌓고서 나라를 그곳으로 옮겼다.
축성築城한 사람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궐문闕文이다. 注+기용器用을 갖추어 주지도 않고 성지城池견고堅固히 쌓지도 않고서 떠나 은혜를 끝까지 베풀지 않은 것이다. 전연澶淵회합會合을 마친 뒤에 나라에 재정財政지원支援하지 않았기 때문에 회합에 참여한 대부大夫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나라별로 ‘’으로 칭하였다. 지금 이곳에 제후諸侯라고 총칭總稱한 것은 군신君臣을 함께 이른 말이다. 나라에 을 쌓았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나라가 아직 옮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증계희鄫季姬귀녕歸寧하자, 희공僖公이 노하여 계희季姬억류抑留하였으니, 이는 증자鄫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지 않았기 때문이다.注+귀녕歸寧한 것은 기록하지 않고 후년後年에 ‘귀우증歸于鄫’이라고 기록하여, 마치 다시 시집보낸 것처럼 글을 만든 것은 희공僖公나라와의 혼인관계婚姻關係를 단절하였다가 증자鄫子가 와서 조현朝見한 뒤에 돌려보낸 것을 밝힌 것이다.
여름에 계희季姬에서 증자鄫子와 만나 와서 조현朝見하게 하였다.注+[부주]林: 계희季姬증자鄫子를 만나 증자鄫子에게 와서 조현朝見하고서 아내를 돌려 달라고 요청하게 한 것이다.
가을 8월 신묘일辛卯日사록산沙鹿山이 무너졌다.
나라 복언卜偃이 말하였다.
“1년 안에 큰 재난災難이 생겨 나라가 거의 망하는 지경에 이를 것이다.” 注+나라의 주인主人산천山川이니 이 무너지고 내가 마르는 것은 나라가 망할 징조이다.
겨울에 나라에 기근饑饉이 들어 나라에 사신使臣을 보내어 양곡구매糧穀購買를 요청하니 진인晉人은 들어주지 않았다.
경정慶鄭이 말하였다.
“은혜를 저버리는 것은 무친無親이고,注+경정慶鄭나라 대부大夫이다.재난災難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탐욕스럽게 아끼는 것은 불상不祥이고,注+[부주]朱: 남의 재난災難을 다행으로 여기는 것은 불인不仁이고, 탐욕스럽게 제 재물財物을 아껴 남의 재난災難구제救濟하지 않는 것은 불상不祥이라는 말이다. 이웃 나라를 노하게 하는 것은 불의不義니, 이 네 을 모두 잃는다면 무엇으로 나라를 지키겠습니까.”
괵석虢射이 말하였다.
“가죽이 남아 있지 않는데 털이 장차 어디에 붙겠습니까?”注+괵석虢射혜공惠公외숙外叔이다. 나라에게 주기로 허락했던 을 비유한 것이고, 나라가 요구한 양곡을 비유한 말이다. 이미 나라의 은혜를 저버려 원한怨恨이 깊어졌으니 비록 양곡을 준다 하더라도 가죽이 없는데 털을 붙이는 것과 같다는 말이다. [부주]朱: 혜공惠公나라의 도움으로 나라로 들어올 때 나라에 다섯 을 뇌물로 주기로 약속해 놓고는 들어온 뒤에는 약속을 저버리고 주지 않았다.
경정慶鄭이 말하였다.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이웃 나라를 배반한다면 우리에게 환난患難이 생겼을 때 누가 구원救援해 주겠습니까.注+[부주]朱: 을 주겠다고 허락한 신의信義를 버리고, 이웃 나라의 은혜를 저버린다면 국가國家환난患難이 생겼을 때 백성들도 임금을 버리고 구원救援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신의信義가 없으면 환란患亂이 생기고 응원應援하는 나라를 잃으면 패망敗亡하는 것은 필연必然의 이치입니다.”注+[부주]朱: 이것은 모두 사리事理필연必然이라는 말이다.
괵석虢射이 말하였다.
원한怨恨은 줄이지 못하고 에게 힘만 보태 줄 뿐이니, 주지 않는 것만 못합니다.”注+나라에 곡식을 준다 하더라도 나라의 원한怨恨을 풀 수 없고, 단지 나라를 하게 할 뿐이라는 말이다.
경정慶鄭이 말하였다.
“은혜를 저버리고 남의 재난을 요행으로 여기면 백성의 버림을 받습니다.注+[부주]林: 우리 백성들도 그 임금을 곧지 못한 사람으로 여겨 버린다는 말이다.
친근親近한 사람도 오히려 원수怨讐로 여길 것인데 하물며 원한怨恨을 품은 이겠습니까.”注+[부주]朱: 평소에 서로 친근親近했던 나라도 오히려 원수가 될 것인데, 평소 원한을 품고 있던 나라 같은 적국敵國이야 더 말할 게 있겠느냐는 말이다.
혜공惠公은 듣지 않았다.
경정慶鄭이 물러 나와 말하였다.
“임금은 이 일을 후회後悔하게 될 것이다.”


역주
역주1 散辭 : 한 사람에게 통솔되지 않고 제 각각 행동하는 것을 나타내는 말이다. 李震相은 “緣陵은 杞나라 邑이다. 杞나라가 淮夷를 피해 緣陵으로 遷都하였기 때문에 鹹에 會合했던 諸侯가 모두 군대를 보내어 성을 쌓은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2 狄侵鄭 : 李震相은 “狄人이 자주 近畿의 諸侯國을 侵攻하는데도 齊桓公이 능히 다스리지 못하였기 때문에 지금 또 狄人이 鄭나라를 침공한 것이다.”고 하였다.
역주3 不書其人 有闕也 : 闕을 杜注에는 器用을 갖추어 주지도 않고 城池를 견고히 쌓지도 않고서 떠나 은혜를 끝까지 베풀지 않은 뜻으로 해석하였으나, 譯者는 楊伯峻의 說을 취해 闕文으로 번역하였다. 《春秋左傳注》에 “毛奇齡의 《春秋傳》에 ‘闕은 闕文이다. 經에 諸侯라고만 말하고 諸國을 列記하지 않은 것은 회합에 참여한 여러 나라 사람의 姓名을 자세히 알지 못해서인 듯하다.’고 하였는데, 文義로 보면 毛氏의 설이 비교적 優秀하다.”고 하였다. 澶淵의 회합은 襄公 30년에 宋나라에 火災가 발생하자 諸侯의 大夫들이 宋나라에 財政支援을 협의하기 위해 모인 회합이다. 그러나 회합을 마친 뒤에 아무것도 지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信義를 지키지 않은 죄를 나무라는 뜻에서 經에 회합에 참여한 대부들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고 나라 별로 ‘人’으로 칭하였다.
역주4 來寧不書 而後年書歸鄫 更嫁之文也 : 徐壽錫은 “妻家 나라에 禮를 닦지 않은 것은 鄫子의 잘못이고, 朝見하지 않았다고 그 아내를 抑留한 것은 僖公의 잘못이고 父女는 至親인데 誠心으로 아버지 僖公의 마음을 돌리지 않고 멀리 郊外까지 나가서 남편 鄫子와 사사로이 의논한 것은 季姬의 잘못이다.”고 하였다.

춘추좌씨전(2)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50 서울시 종로구 삼봉로81, 1332호(두산위브파빌리온)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