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八年春
에 公至自會
注+無傳 義與五年書過同하다
[經]夏六月
에 公子遂如齊
타가 至黃乃復
注+無傳 蓋有疾而還 大夫受命而出 雖死 遂以疾還 非禮也하다
辛巳
에 有事于大廟
러니 仲遂卒于垂
注+有事 祭也 仲遂卒 與祭同日 略書有事 爲繹張本 不言公子 因上行還間無異事 省文從可知也 稱字 時君所嘉 無義例也 하다
壬午
에 注+繹 又祭 陳昨日之禮 所以賓尸 萬 舞名 籥 管也 猶者 可止之辭 魯人知卿佐之喪不宜作樂 而不知廢繹 故內舞去籥 惡其聲聞하다
[經]晉師白狄伐秦
注+[附注] 林曰 白狄始見經 하다
[經]秋七月甲子
에 日有食之
하니 旣
注+無傳 月三十日食러라
[經]冬十月己丑
에 葬我小君敬嬴
注+敬 諡 嬴 姓也 反哭成喪 故稱葬小君할새 雨
하야 不克葬
하고 庚寅
에 日中而克葬
注+하다
傳
晉人獲秦諜
하야 殺諸絳市
러니 六日而蘇
注+蓋記異也 [附注] 林曰 諜 往來間探者 絳市 晉所都之市也 하다
傳
[傳]楚爲衆舒叛
이라 故伐舒蓼
하야 滅之
注+舒蓼 二國名하고
楚子疆之
注+正其界也하야 及滑汭
注+滑 水名 [附注] 林曰 水之隈曲曰汭 蓋楚拓疆至滑汭之界하고 盟吳越而還
注+吳國 今吳郡 越國 今會稽山陰縣也 傳言楚彊 吳越服從 하다
傳
[傳]晉胥克有蠱疾
注+惑以喪志 [附注] 林曰 胥克 晉下軍佐也하니 郤缺爲政
注+代趙盾 이라
秋
에 廢胥克
하고 使趙朔佐下軍
注+朔 盾之子 代胥克 爲成十七年胥童怨郤氏張本 하다
傳
[傳]冬
에 葬敬嬴
할새 旱
하야 無麻
하니 始用葛茀
注+記禮變之所由 茀 所以引柩 葬則以下柩 하다
傳
[傳]陳及晉平
하니 楚師伐陳
하야 取成而還
注+言晉楚爭强 하다
8년 봄에
선공宣公이
회맹會盟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선공宣公 5년 전傳의 ‘서과書過’와 같은 뜻이다.
여름 6월에
공자公子수遂가
제齊나라에 가다가
황黃에 이르러 되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병病이 나서 돌아온 것인 듯하다. 대부大夫가 임금의 명命을 받고 나갔으면 비록 죽더라도 이시장사以尸將事해야 하는데, 수遂는 병病으로 돌아왔으니 예禮가 아니다.
신사일辛巳日에
태묘太廟에
제사祭祀를 지내는데,
중수仲遂가
수垂에서
졸卒하였다.
注+유사有事는 제사祭祀이다. 중수仲遂가 제삿날에 죽었기 때문에 간략하게 유사有事라고 기록한 것이니, 이것이 역제繹祭를 지낸 장본張本이다. ‘공자公子’라고 말하지 않은 것은 위에 갔다가 돌아온 사이에 다른 일이 없기 때문이니, 글을 생략省略하여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자字를 기록한 것은 당시當時의 임금이 가상嘉尙히 여겼기 때문이고 의례義例는 아니다. 수垂는 제齊나라 땅이니 노魯나라의 경내境內가 아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임오일壬午日에 오히려
역제繹祭를 지내면서
만무萬舞만을 추고
약무籥舞는 버리고 쓰지 않았다.
注+역繹은 또 지내는 제사祭祀로, 어제의 예禮를 시행施行하여 어제 제사祭祀에 시尸가 되었던 사람을 접대接待하는 것이다. 만萬은 무명舞名이고 약籥은 관악기管樂器이다. ‘유猶’는 그만두어도 되는데 그만두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노인魯人이 경좌卿佐의 상喪에 음악音樂을 연주演奏해서는 안 된다는 것만을 알고 역제繹祭를 폐지廢止해야 한다는 것은 몰랐다. 그러므로 소리가 나는 것을 싫어하여 만무萬舞만을 바치고, 약籥은 쓰지 않은 것이다.
무자일戊子日에
부인夫人영씨嬴氏가
훙薨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선공宣公의 어머니이다.
진군晉軍이
백적白狄과
연합聯合해
진秦나라를 쳤다.
注+[부주]林: 백적白狄이 비로소 경經에 보인다.
초인楚人이 서국舒國과 요국蓼國을 격멸擊滅하였다.
가을 7월
갑자일甲子日에
일식日食하였는데
개기일식皆旣日食이었다.
注+전傳이 없다. 7월 30일에 일식日食하였다.
겨울 10월
기축일己丑日에 우리
소군小君경영敬嬴을
장사葬事 지내는데,
注+경敬은 시諡이고, 영嬴은 성姓이다. 반곡反哭하고 상례喪禮를 완비完備[成喪]하였기 때문에 ‘장아소군葬我小君’이라고 기록한 것이다. 비가 와서
장사葬事를 지내지 못하고,
경인일庚寅日정오正午에
장례葬禮를 지냈다.
注+극克은 마치는 것이다.
평양平陽에
성城을 쌓았다.
注+지금 태산泰山에 평양현平陽縣이 있다.
傳
8년 봄에 백적白狄이 진晉나라와 화평和平하였다.
여름에
백적白狄이
진晉나라와
연합聯合하여
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경經에 ‘진사백적벌진晉師白狄伐秦’이 ‘중수졸仲遂卒’ 아래에 있는 것은 진晉나라의 부고赴告를 따랐기 때문이다.
진인晉人이
진秦나라의
첩자諜者를 잡아
강絳의
시가市街에서 죽였는데, 6일 뒤에 다시 살아났다.
注+이변異變을 기록한 것인 듯하다. [부주]林: 첩諜은 두 진영陣營을 왕래往來하며 비밀秘密을 정탐偵探하는 사람이다. 강시絳市는 진晉나라 국도國都의 시가市街이다.
傳
태묘太廟에 제사祭祀를 지낼 적에 양중襄仲이 죽었는데도 역제繹祭를 지냈으니 예禮가 아니다.
傳
초楚나라는
서성舒姓의 여러 나라가
배반背叛했기 때문에
서국舒國과
요국蓼國을
토벌討伐하여 멸망시켰다.
注+서舒와 요蓼는 두 나라 이름이다.
초자楚子가 직접
국경國境을
획정劃定하여
注+그 경계境界를 바로잡은 것이다. 활수滑水의 굽이까지
영토領土로 삼고,
注+활滑은 수명水名이다.[부주]林: 물의 굽이를 ‘예汭’라 한다. 초楚나라가 강토疆土를 넓혀 활예滑汭의 경계境界까지 이른 것이다.오吳나라
월越나라와
결맹結盟하고서
환국還國하였다.
注+오吳나라는 지금의 오군吳郡이고, 월越나라는 지금의 회계會稽산음현山陰縣이다. 전문傳文은 초楚나라가 강彊하여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복종服從한 것을 말한 것이다.
傳
진晉나라
서극胥克에게
고질蠱疾이 있었으니,
注+혹란惑亂(混亂)하여 심지心志를 잃은 것이다. [부주]林: 서극胥克은 진晉나라 하군좌下軍佐였다. 이때
극결郤缺이
집정執政이었다.
注+조돈趙盾의 뒤를 이어 집정執政이 된 것이다.
가을에
서극胥克을
폐廢하고
조삭趙朔을
하군좌下軍佐로 삼았다.
注+조삭趙朔은 조돈趙盾의 아들로 서극胥克의 뒤를 이어 하군좌下軍佐가 된 것이다. 성공成公 17년에 서극胥克의 아비 서동胥童이 극씨郤氏를 원망한 장본張本이다.
傳
겨울에
경영敬嬴을
장사葬事 지내는데, 가뭄이 들어 삼(麻)이 없으니, 비로소 칡을 꼬아
관구棺柩를 끄는 줄로 사용하였다.
注+예禮가 변變한 유래由來를 기록한 것이다. 불茀은 관구棺柩를 끄는 줄인데, 빈殯할 때에는 이 줄을 순거輴車(관을 실은 수레)에 매어 두어 화재火災에 대비對備하고, 장사葬事 때는 이 줄을 사용해 관棺을 광중壙中으로 내린다.
비가 와서 장사葬事를 지내지 않은 것은 예에 맞는 일이다.
예禮에 의하면
점占을 쳐서
장일葬日을 정할 때 먼저 먼 날을 택하는 것은 죽은 이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비난을 피하기 위함이다.
注+회懷는 생각하는 것이다.
傳
평양平陽에 성城을 쌓았으니, 경經에 이를 기록記錄한 것은 때에 맞았기 때문이다.
傳
진陳나라가
진晉나라와
화평和平하니,
초군楚軍이
진陳나라를
토벌討伐하여
화친和親하고서[取成] 돌아갔다.
注+진晉나라와 초楚나라가 서로 강자强者가 되고자 다툰 것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