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三年春王正月
에 公會晉侯宋公衛侯曹伯伐鄭
注+宋衛未葬 而稱爵以接鄰國 非禮也 하다
[經]甲子
에 新宮災
하니 三日哭
注+無傳 三年喪畢 宣公神主新入廟 故謂之新宮 書三日哭 善得禮 宗廟 親之神靈所馮居 而遇災 故哀而哭之 하다
[經]乙亥
에 葬宋文公
注+無傳 七月而葬 緩 하다
[經]鄭公子去疾帥師伐許
注+[附注] 林曰 鄭始書大夫將 하다
[經]秋
에 叔孫僑如帥師圍棘
注+棘 汶陽田之邑 在濟北蛇丘縣 하다
[經]丙午
에 及荀庚盟
注+[附注] 林曰 聘而遂盟之 於是始 하다
[經]丁未
에 及孫良夫盟
注+先晉後衛 尊霸主 하다
[經]鄭伐許
注+無傳 不書將帥 告辭略 [附注] 林曰 狄鄭也 楚之伯 鄭爲之也 由齊桓以來 爭鄭於楚 桓公卒 鄭始朝楚 諸夏之變於夷 鄭爲亂階也 至辰陵 鄭帥諸夏而事楚矣 敗晉于邲 盟十四國之君大夫于蜀 皆鄭爲之 是故狄秦而後狄鄭君 秦鄭 中國無左衽矣 하다
傳
[傳]三年春
에 諸侯伐鄭
하야 次于伯牛
하니 討邲之役也
注+伯牛 鄭地 邲役 在宣十二年 라
遂東侵鄭
注+晉潛軍深入 하니 鄭公子偃帥師禦之
注+偃 穆公子할새 使東鄙覆諸鄤
注+覆 伏兵 하야 敗諸丘輿
注+鄤丘輿 皆鄭地 晉偏軍爲鄭所敗 故不書 하다
傳
[傳]夏
에 公如晉
하니 拜汶陽之田
注+前年晉使齊歸魯汶陽田故이라
傳
[傳]許恃楚而不事鄭
하니 鄭子良伐許
注+[附注] 林曰 子良卽公子去疾 하다
傳
[傳]晉人歸楚公子穀臣與連尹襄老之尸于楚
하고 以求知罃
注+邲之戰 楚獲知罃 하다
於是荀首佐中軍矣
注+荀首 知罃父라 故楚人許之
하다
王送知罃曰 子其怨我乎
아 對曰 二國治戎
에 臣不才
하야 不勝其任
하야 以爲
이로되 不以釁鼓
注+以血塗鼓爲釁鼓 하고 使歸卽戮
하니 君之惠也
注+[附注] 林曰 使歸就戮于晉 라
對曰 二國圖其社稷
하고 而求紓其民
注+紓 緩也 하야 各懲其忿
하야 以相宥也
注+宥 赦也하야 兩釋纍囚
하야 以成其好
注+纍 繫也나
二國有好
는 臣不與及
하니 注+言二國本不爲己 이릿가
王曰 子歸
면 何以報我
오 對曰 臣不任受怨
하고 君亦不任受德
注+[附注] 林曰 任 當也 言臣不當受怨楚之名 楚君亦不當受德臣之名 하니 無怨無德
이라 不知所報
니이다
對曰 以君之靈
으로 纍臣得歸骨於晉
이면 寡君之以爲戮
이라도 注+戮其不勝任 오
若從君之惠而免之
하야 以賜君之
注+稱於異國君曰外臣 [附注] 林曰 首 荀首 면 首其請於寡君而
이라도 亦死且不朽
오
若不獲命
注+君不許戮하야 而使嗣宗職
注+嗣其祖宗之位職하야 次及於事
注+[附注] 林曰 以次第而及於晉國之政事 하야 而帥偏師
注+[附注] 林曰 卿當帥師 曰偏師者 不敢言全軍하야 以修封疆
이면
雖遇執事
注+遇楚將帥라도 其弗敢違
注+違 辟也하고 其竭力致死
하야 無有二心
하야 以盡臣禮
니 所以報也
니이다
傳
[傳]晉郤克衛孫良夫伐廧咎如
하니 討赤狄之餘焉
注+宣十五年 晉滅赤狄潞氏 其餘民散入廧咎如 故討之이라
廧咎如潰
하니 上失民也
注+此傳 釋經之文 而經無廧咎如潰 蓋經闕此四字 라
傳
[傳]冬十一月
에 晉侯使荀庚來聘
하고 且尋盟
注+尋元年赤棘盟 荀庚 林父之子 하다
公問諸臧宣叔曰 中行伯之於晉也
에 其位在三
注+下卿 이오 孫子之於衛也
에 位爲上卿
이니 將誰先
고
對曰 次國之上卿
은 當大國之中
하고 中當其下
하고 下當其上大夫
注+降一等 하며
小國之上卿
은 當大國之下卿
하고 中當其上大夫
하고 下當其下大夫
注+降大國二等하니 上下如是
가 古之制也
注+古制 公爲大國 侯伯爲次國 子男爲小國 니이다
衛在晉
에 不得爲次國
注+春秋時 以强弱爲大小 故衛雖侯爵 猶爲小國 하고 晉爲盟主
하니 其將先之
注+計等則二人位敵 以盟主 故先晉하소서
傳
[傳]十二月甲戌
에 晉作六軍
注+爲六軍 僭王也 萬二千五百人爲軍하야 韓厥趙括鞏朔韓穿荀騅趙旃皆爲卿
하니 賞鞍之功也
注+韓厥爲新中軍 趙括佐之 鞏朔爲新上軍 韓穿佐之 荀騅爲新下軍 趙旃佐之 晉舊自有三軍 今增此 故爲六軍 라
傳
[傳]齊侯朝于晉
하야 注+行朝禮할새 郤克趨進曰 此行也
는 君爲
也
니 寡君未之敢任
注+言齊侯之來 以謝婦人之笑 非爲修好 故云晉君不任當此惠이니다
晉侯享齊侯
에 齊侯視韓厥
하니 韓厥曰 君知厥也乎
잇가 齊侯曰 服改矣
注+戎朝異服也 言服改 明識其人 로다
韓厥登擧爵曰
는 爲兩君之在此堂也
注+[附注] 林曰 言臣之致死力於行陳之間 爲欲齊晉和好 兩君之會聚于此堂也니이다
傳
[傳]荀罃之在楚也
에 鄭賈人有將寘諸褚中以出
注+[附注] 林曰 褚 絮也 鄭之賈人貿易于楚 有將藏荀罃於褚絮之中以出歸晉 하다
賈人如晉에 荀罃善視之하야 如實出己하니 賈人曰 吾無其功하니 敢有其實乎아
吾小人
이라 不可以厚誣君子
注+[附注] 林曰 不可以一時虛謀 重誣君子 受其實惠 라하고 遂適齊
注+傳言知罃之賢 하다
3년 봄
주왕周王 정월에
성공成公이
진후晉侯‧
송공宋公‧
위후衛侯‧
조백曹伯과
회합會合하여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송군宋君과 위군衛君이 선군先君의 장사葬事도 지내기 전에 작爵을 칭稱해 인국隣國과 교접交接하였으니, 예禮가 아니다.
신해일辛亥日에
위목공衛穆公을
장사葬事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2월에
성공成公이
정鄭나라
토벌討伐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갑자일甲子日에
신궁新宮이 불에 타니,
성공成公이 3일 동안
곡哭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삼년상三年喪이 끝나 선공宣公의 신주神主를 새로 종묘宗廟에 모셔 들였기 때문에 그곳을 ‘신궁新宮’이라 한 것이다. ‘3일 동안 곡哭하였다’고 기록한 것은 예禮에 맞은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종묘宗廟는 어버이의 영혼靈魂이 의지해 계시는 곳인데, 화재火災를 만났기 때문에 슬퍼서 곡哭한 것이다.
을해일乙亥日에
송문공宋文公을
장사葬事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일곱 달 만에 장사葬事 지냈으니 늦은 것이다.
정鄭나라
공자公子거질去疾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허許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부주]林: 정鄭나라 대부大夫가 군대를 거느린 것을 비로소 경經에 기록記錄하였다.
성공成公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가을에
숙손교여叔孫僑如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극棘을
포위包圍하였다.
注+극棘은 문수汶水 북쪽 땅의 읍邑으로 제북濟北사구현蛇丘縣에 있다.
크게
기우제祈雨祭를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때가 지난 뒤에 지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진晉나라
극극郤克과
위衛나라
손량부孫良夫가
장구여廧咎如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적적赤狄의 별종別種이다.
겨울 11월에 진후晉侯가 순경荀庚을 사자使者로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위후衛侯가 손량부孫良夫를 사자使者로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병오일丙午日에
순경荀庚과
결맹結盟하였다.
注+[부주]林: 빙문聘問하고서 드디어 결맹結盟하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정미일丁未日에
손량부孫良夫와
결맹結盟하였다.
注+먼저 진晉나라와 결맹結盟하고 뒤에 위衛나라와 결맹結盟한 것은 패주霸主를 존대尊待한 것이다.
정鄭나라가
허許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허許나라를 친 정鄭나라의 장수將帥를 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은 부고赴告에 생략省略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정鄭나라 장수將帥를 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은 정鄭나라를 융적戎狄으로 취급取扱한 것이니, 이는 정鄭나라가 초楚나라를 패주霸主로 만들어 주었기 때문이다. 제환공齊桓公 이래로 제齊나라는 정鄭나라를 자기편으로 만들기 위해 초楚나라와 서로 다투었는데, 환공桓公이 졸卒하자 정鄭나라는 비로소 초楚나라에 입조入朝하였으니, 제하諸夏(中國)가 이적夷狄으로 변變한 것은 정鄭나라가 난亂의 계기를 만든 것이다. 선공宣公 11년에 신릉辰陵에서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와 결맹結盟함에 이르러서는 정鄭나라가 제하諸夏를 이끌고서 초楚나라를 섬겼다. 성공成公 2년에 초楚나라가 필邲에서 진군晉軍을 패배敗北시키고서 14국國의 임금 및 대부大夫와 촉蜀에서 결맹結盟한 것도 모두 정鄭나라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그러므로 진秦나라를 융적戎狄으로 취급한 뒤에 정군鄭君을 융적戎狄으로 취급한 것이다. 만약 진秦나라와 정鄭나라가 아니었다면 중국中國이 오랑캐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傳
3년 봄에
제후諸侯가
정鄭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백우伯牛에
주둔駐屯하였으니, 이는
필邲의
전쟁戰爭에서
정鄭나라가
진晉나라를
배반背叛하고
초楚나라에
항복降服한 것을
징벌懲罰하기 위함이었다.
注+백우伯牛는 정鄭나라 땅이다. 필邲의 전쟁戰爭은 선공宣公 12년에 있었다.
드디어
동진東進하여
정鄭나라를
침공侵攻하니,
注+진晉나라가 군대를 은밀隱密히 이동移動시켜 깊이 들어간 것이다. 정鄭나라
공자公子언偃이 군대를 거느리고
방어防禦할 때
注+언偃은 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동쪽
변경邊境의 군대를
만鄤에
매복埋伏시켜
注+복覆은 복병伏兵이다. 제후군諸侯軍을
구여丘輿에서
패배敗北시켰다.
注+만鄤과 구여丘輿는 모두 정鄭나라 땅이다. 진晉나라 편사偏師(일부의 군대)가 정鄭나라에 패배敗北했기 때문에 경經에 패전敗戰했다고 기록記錄하지 않은 것이다.
傳
여름에
성공成公이
진晉나라에 갔으니, 이는
문양汶陽의 땅을 되찾아 준 일에
배사拜謝(謝禮)하기 위함이었다.
注+전년前年에 진晉나라가 제齊나라에게 문양汶陽의 땅을 노魯나라에 돌려주게 하였기 때문이다.
傳
허許나라가
초楚나라를 믿고
정鄭나라를 섬기지 않으니,
정鄭나라
자량子良이
허許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부주]林: 자량子良은 바로 공자公子거질去疾이다.
傳
진인晉人이
초楚나라
공자公子곡신穀臣과
연윤連尹양로襄老의
시신屍身을
초楚나라에 돌려주고
지앵知罃을 돌려보내 달라고
요구要求하였다.
注+필邲의 전쟁戰爭 때 초군楚軍이 지앵知罃을 사로잡았다.
이때
순수荀首가
진晉나라의
중군좌中軍佐였기 때문에
注+순수荀首는 지앵知罃의 아버지이다. 초인楚人이 이
요구要求를
허락許諾하였다.
초왕楚王이
지앵知罃을 보낼 때 “그대는 나를
원망怨望하는가?”라고 묻자,
지앵知罃이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교전交戰[治戎]할 때
신臣은
재능才能이 없어 자신의
임무任務를
감당堪當하지 못해
포로捕虜가 되었는데도
집사執事께서 나를 죽여 피를 받아
흔고釁鼓하지 않고
注+피를 받아 북에 바르는 것을 흔고釁鼓라 한다. 진晉나라로 돌아가
형륙刑戮을 받게 하시니, 이는
군왕君王의
은혜恩惠입니다.
注+[부주]林: 진晉나라로 돌아가서 죽음을 받게 하는 것이다.
신臣은 실로 재능才能이 없어 이리된 것이니, 감히 누구를 원망怨望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그렇다면 나에게 은덕을 입었다고 여기는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두 나라가
사직社稷의
안녕安寧을 꾀하고 백성의
고통苦痛을 풀어주기[紓] 위해
注+서紓는 느슨히 함이다. 각각
분노忿怒를
억제抑制[懲]하고 서로 용서하여,
注+유宥는 용서함이다. 양국兩國이 서로
포로捕虜[纍囚]를
석방釋放하고
우호友好를 이루기로 하였으나,
注+유纍는 옥獄에 갇힘이다.
두 나라가
우호友好를 맺은 것은
신臣과는
관계關係가 없으니, 그 누구에게 감히
은덕恩德을 입었다고 하겠습니까?”
注+두 나라가 우호友好를 맺은 것은 본래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그대가 돌아가면 무엇으로 나에게
보답報答하겠는가?”라고 묻자, 대답하기를, “
신臣은
군왕君王을
원망怨望한 일이 없고
군왕君王께서도
신臣에게
은덕恩德을 입힌 일이 없어
注+[부주]林: 임任은 당當이니, 신臣이 초楚나라를 원망怨望한다는 이름을 받는 것이 부당不當하고, 군왕君王께서도 신臣에게 은덕恩德을 입혔다는 이름을 받는 것이 부당不當하다는 말이다. 원망怨望도 없고
은덕恩德도 없는데,
보답報答할 바를 모르겠습니다.”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비록 그렇지만 그대의 생각을 반드시 나[不穀]에게 고告하라.”고 하자,
대답하기를, “
군왕君王의
은총恩寵[靈]으로
포로捕虜가 된
신臣이 몸[骨]을
보존保存해
진晉나라로 돌아가게 되었으니, 우리 임금께서
신臣을 죽이더라도 신은 몸은 죽어도
군왕君王의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고[死且不朽],
注+그 임무任務를 감당堪當하지 못한 죄罪를 물어 죽이는 것이다.
만약 우리 임금께서
군왕君王의
은혜恩惠를 생각해
신臣을
사면赦免하고서
신臣을
군왕君王의
외신外臣순수荀首에게 주시면
注+대부大夫가 이국異國의 임금에게 본국本國의 신하臣下를 지칭指稱할 때 외신外臣이라 한다. [부주]林: 수首는 순수荀首이다. 순수荀首가 우리 임금께
청請하여
신臣을
종묘宗廟에서 죽이더라도
신臣은 몸은 죽어도 은혜는 영원히 잊지 않을 것입니다.
만약
순수荀首가 임금의
명命을 받지 못해
注+진군晉君이 죽이기를 허락許諾하지 않는 것이다. 신臣을 죽이지 않고
종직宗職을
승계承繼시켜
注+그 조종祖宗의 지위地位와 관직官職을 승계承繼하는 것이다. 차례가 되어
군사軍事에 참여하여
注+[부주]林: 차례가 되어 진晉나라의 정사政事에 참여參與하는 것이다. 편사偏師를 거느리고
注+[부주]林: 경卿은 응당應當 군대를 통솔統率하는데, ‘편사偏師’라고 한 것은 감히 전군全軍이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봉강封疆을
수비守備하게 된다면
그때 비록
집사執事를 만나더라도
注+초楚나라 장수將帥를 만나는 것이다. 감히 피하지 않고
注+위違는 피避하는 것이다. 힘을 다해 싸우다가 죽을 것이고,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신하臣下의
예禮를 다하는 것으로
군왕君王께
보답報答하겠습니다.”고 하니,
초왕楚王은 “진晉나라와는 다툴 수 없다.”고 하고서 지앵知罃을 중重하게 예우禮遇하여 돌려보냈다.
傳
가을에 숙손교여叔孫僑如가 극棘을 포위包圍하여 문양汶陽의 땅을 취取하였다.
극인棘人이
복종服從하지 않기 때문에
포위包圍한 것이다.
注+교여僑如는 숙손득신叔孫得臣의 아들이다.
傳
진晉나라
극극郤克과
위衛나라
손량부孫良夫가
장구여廧咎如를
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적적赤狄의
잔여세력殘餘勢力을
토벌討伐하기 위함이었다.
注+선공宣公 15년에 진晉나라가 적적赤狄노씨潞氏를 격멸擊滅하니, 노씨潞氏의 여민餘民이 흩어져 장구여廧咎如로 들어갔다. 그러므로 이번에 장구여廧咎如를 토벌討伐한 것이다.
장구여廧咎如가
궤멸潰滅하였으니, 이는 윗사람이
민심民心을 잃었기 때문이다.
注+이 전傳은 경문經文을 해석解釋한 것인데, 경문經文에 ‘장구여궤廧咎如潰’라는 말이 없으니, 아마도 경經에 이 네 글자가 빠진 것인 듯하다.
傳
겨울 11월에
진후晉侯가
순경荀庚을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고 또
전일前日의
맹약盟約을
중수重修하였다.
注+성공成公원년元年에 적극赤棘에서 맺은 맹약盟約을 중수重修한 것이다. 순경荀庚은 순임보荀林父의 아들이다.
위후衛侯가
손량부孫良夫를 보내 와서
빙문聘問하고 또 전일의
맹약盟約을
중수重修하였다.
注+선공宣公 7년에 맺은 맹약盟約을 중수重修한 것이다.
성공成公이
장선숙臧宣叔에게 “
중행백中行伯은
진晉나라에서 그
지위地位가 세 번째이고,
注+하경下卿이다. 손자孫子는
위衛나라에서 그
지위地位가
상경上卿이니, 장차 누구와 먼저
예禮를
행行하여야 하겠는가?”라고 묻자,
선숙宣叔이 “
차국次國의
상경上卿은
대국大國의
중경中卿에
해당該當하고
중경中卿은
하경下卿에 해당하고
하경下卿은
상대부上大夫에 해당하며,
注+한 등급等級을 낮춘다.
소국小國의
상경上卿은
대국大國의
하경下卿에 해당하고
중경中卿은
상대부上大夫에 해당하고
하경下卿은
하대부下大夫에 해당하니,
注+대국大國에 비해 두 등급等級을 낮춘다. 위차位次의
상하上下가 이와 같은 것이 옛
제도制度입니다.
注+옛 제도制度에 의하면 공公의 나라는 대국大國이고, 후侯와 백伯의 나라는 차국次國이고, 자子와 남男의 나라는 소국小國이다.
위衛나라는
진晉나라에 비해
차국次國도 될 수 없고,
注+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나라의 강약强弱을 대소大小의 기준基準으로 삼았기 때문에 위衛나라가 비록 후작侯爵이었지만 오히려 소국小國이 된 것이다. 진晉나라는
맹주盟主이니, 아마도
진晉나라
사자使者와 먼저
예禮를
행行하는 것이 마땅할 것 같습니다.”
注+관등官等을 계산計算하면 두 사람의 지위地位가 대등對等하지만 진晉나라가 맹주盟主였기 때문에 먼저 진晉나라와 결맹結盟한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병오일丙午日에 진晉나라와 결맹結盟하고, 정미일丁未日에 위衛나라와 결맹結盟하니, 예禮에 맞는 일이었다.
傳
12월
갑술일甲戌日에
진晉나라가 군대를
육군六軍으로 만들어
注+육군六軍으로 만든 것은 참람僭濫하게 왕王의 제도制度를 사용한 것이다. 1만 2천 5백 인人이 군軍이다. 한궐韓厥,
조괄趙括,
공삭鞏朔,
한천韓穿,
순추荀騅,
조전趙旃을 모두
경卿으로 삼았으니, 이는
안鞍의
전공戰功을
포상褒賞한 것이다.
注+한궐韓厥이 새 중군中軍의 장將이 되고 조괄趙括이 좌佐가 되었으며, 공삭鞏朔이 새 상군上軍의 장將이 되고 한천韓穿이 좌佐가 되었으며, 순추荀騅가 새 하군下軍의 장將이 되고 조전趙旃이 좌佐가 된 것이다. 진晉나라에는 이전부터 삼군三軍이 있었는데, 지금 새로 삼군三軍을 더하였기 때문에 육군六軍이 된 것이다.
傳
제후齊侯가
조현朝見하기 위해
진晉나라로 가서
수옥授玉하려 할 때
注+조현朝見의 예禮를 거행擧行하려 한 것이다.극극郤克이 빠른 걸음으로 앞으로 나와
제후齊侯에게 말하기를, “
군君(齊侯를 가리킴)께서 이번에 오신 것은
부인婦人이 비웃어
모욕侮辱한 일을
사과謝過하기 위함이니, 우리 임금께서
담당擔當하실 일이 아닙니다.”고 하였다.
注+제후齊侯가 온 것은 부인婦人이 비웃은 것을 사과謝過하기 위함이고 수호修好하기 위함이 아니기 때문에 진군晉君이 이 혜사물惠賜物을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진후晉侯가
연회宴會를 열어
제후齊侯를
대접待接할 때
제후齊侯가
한궐韓厥을 눈여겨보니,
한궐韓厥이 “
군왕君王께서 나를 아십니까?”라고 묻자,
제후齊侯가 “
복장服裝이 바뀌었구려.”
注+군중軍中에 있을 때와 조정朝廷에 있을 때는 입는 복장服裝이 다르기 때문에 복장服裝이 바뀌었으나 그 사람은 분명히 알겠다는 말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한궐韓厥이
당상堂上으로 올라가서 술잔을 들고 말하기를, “
신臣이
안鞍의
전투戰鬪에서 목숨을 아끼지 않은 것은 바로 두 임금께서 이
당堂에서
연회宴會를 열어
우호友好하는 모습을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注+[부주]林: 신臣이 군진軍陣 사이에서 죽을 힘을 다한 것은 제齊나라와 진晉나라가 우호友好를 맺어 두 나라 임금이 이 당堂에 모이게 하고자 해서였다는 말이다. 하였다.
傳
순앵荀罃이
초楚나라에 잡혀 있을 때
정鄭나라
상인商人[賈人]이
순앵荀罃을 자루 속에 넣어
탈출脫出시키려고 하였다.
注+[부주]林: 저褚는 솜[絮]이다. 정鄭나라 상인商人이 초楚나라에 무역貿易하러 갔다가 순앵荀罃을 보고서, 그를 솜 속에 숨겨 탈출脫出시켜 진晉나라로 돌려보내려 한 것이다.
이미 계획計劃을 세웠으나, 그 계획計劃을 실행實行하기 전에 초인楚人이 순앵荀罃을 돌려보냈다.
그 상인商人이 진晉나라에 가자, 순앵荀罃이 그를 잘 대우待遇[視]하여 실제實際로 자기를 구출救出해 준 것처럼 대우하니, 상인商人이 말하기를, “나는 그런 공로功勞가 없는데, 감히 그런 공로功勞가 실제로 있었던 것처럼 대우待遇를 받을 수 있습니까?
나는
소인小人이니
군자君子를 속일 수 없습니다.”
注+[부주]林: 한 때의 허모虛謀로 거듭 군자君子를 속여 실제로 그런 일이 있었던 것처럼 은혜恩惠를 받을 수 없다는 말이다. 라고 하고서 드디어
제齊나라로 갔다.
注+전문傳文은 지앵知罃의 어짊을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