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有三年春
에 晉侯使郤錡來乞師
注+將伐秦也 侯伯當召兵 而乞師 謙辭 하다
[經]夏五月에 公自京師遂會晉侯齊侯宋公衛侯鄭伯曹伯邾人滕人伐秦하다
傳
[傳]十三年春
에 晉侯使郤錡來乞師
러니 將事不敬
注+將事 致君命 하다
禮는 身之幹也오 敬은 身之基也어늘 郤子無基하다
且先君之嗣卿也로 受命以求師는 將社稷是衛어늘 而惰하니 棄君命也라
不亡何爲
注+郤錡 郤克子 故曰嗣卿 爲十七年晉殺郤錡傳 [附注] 朱曰 郤克爲晉景公正卿 錡實嗣之 리오
傳
[傳]三月
에 公如京師
할새 宣伯欲賜
注+欲王賜己 하야 請先使
注+[附注] 林曰 宣伯請奉命先使于王 하니 王以行人之禮禮焉
注+不加厚 하고 孟獻子從
하니 王以爲介而重賄之
注+介 輔相威儀者 獻子相公以禮 故王重賜之하다
公及諸侯朝王
하고 遂從劉康公成肅公會晉侯伐秦
注+劉康公 王季子 劉成二公不書 兵不加秦 하다
成子受脤于社
에 不敬
注+脤 宜社之肉也 盛以脤器 故曰脤 宜 出兵祭社之名 이어늘 劉子曰 吾聞之
컨대 民受天地之中以生
하니 注+[附注] 朱曰 中者 此心不偏不倚之理 民稟受於天地 以有生者也 라
是以有動作禮義威儀之則
注+[附注] 朱曰 聖人因天地自然之理而爲之節文 以爲動作禮義威儀之法則 하야 以定命也
注+[附注] 林曰 所以安定上天所賦之命而使之勿失 라
敬在養神
注+[附注] 朱曰 君子無不致敬 而莫先於奉事神明 하고 篤在守業
이라
國之大事
는 在祀與戎
하니 이 神之大節也
注+交神之大節 어늘
今成子惰
하니 棄其命矣
注+惰則失中和之氣 라 其不反乎
注+爲成肅公卒于瑕張本 ᄂ저
傳
[傳]夏四月戊午
에 注+呂相 魏錡子 蓋口宣己命 曰
昔逮我獻公及穆公
注+晉獻公秦穆公 相好
에 戮力同心
하야 申之以盟誓
하고 重之以昏姻
注+穆公夫人 獻公之女 이라
天禍晉國
하야 注+辟驪姬也 不言狄梁 擧所恃大國이로되 無祿
하야 獻公卽世
注+[附注] 林曰 晉無福祿 卽世 卒也 하니 穆公不忘舊德
하야 俾我惠公用能奉祀于晉
注+僖十年 秦納惠公이로되
又不能成大勳
하야 而爲韓之師
注+僖十五年 秦伐晉 獲惠公 [附注] 林曰 又不能終始成就其立惠之大功 하니라
亦悔于厥心
하야 用集我文公
注+集 成也 [附注] 林曰 秦穆公亦悔艾于厥心 用能成我文公而納之于晉하니 是穆之成也
注+成功於晉 라
傳
文公躬擐甲冑
注+[附注] 林曰 擐 貫也 하고 注+草行爲跋 하야 踰越險阻
하야 征東之諸侯
注+[附注] 林曰 征伐東方之諸侯 秦居西方 故以諸侯爲東 하야 虞夏商周之胤
을 而朝諸秦
注+[附注] 林曰 東方諸侯皆四代之嗣 諸侯朝秦事 無所攷 想當是時 必有往朝于秦者 耳 하니 則亦旣報
矣
라
鄭人怒君之疆場
에 我文公帥諸侯及秦圍鄭
注+晉自以鄭貳於楚 故圍之 鄭非侵秦也 晉以此誣秦 事在僖三十年 이러니 秦大夫不詢于我寡君
하고 擅及鄭盟
注+詢 謀也 盟者秦伯 謙言大夫 하니 諸侯疾之
하야 將致命于秦
注+致死命而秦 時無諸侯 蓋諸侯遙致此意 이어늘
文公恐懼
하야 綏靜諸侯
하야 秦師克還無害
하니 則是我有
于西也
注+造 成也 言晉有成功於秦 라
傳
無祿
하야 文公卽世
에 穆爲不弔
注+不見하야 蔑死我君
하고 寡我襄公
注+寡 弱也 [附注] 朱曰 以文公死爲無知而輕蔑之 以襄公爲寡弱而陵忽之 하야 迭我殽地
하고 我好
注+[附注] 林曰 侵迭我晉國之殽地 奸犯斷絶我晉國舊日之和好 하야 伐我保城
하고 殄滅我費滑
注+伐保城 誣之 費滑 滑國都於費 今緱氏縣 하야 散離我兄弟
하고 撓亂我同盟
注+滑 晉同姓 [附注] 林曰 滑鄭皆從晉國 故云撓亂我同盟 하야 傾覆我國家
라
我襄公未忘君之舊勳
注+納文公之勳 이나 而懼社稷之隕
注+[附注] 朱曰 又恐晉爲秦所隕滅이라 是以有殽之師
注+在僖三十三年하니라
猶願赦罪于穆公
注+晉欲求解於秦 이로되 穆公不聽
하고 而卽楚謀我
하니라
天誘其衷
하야 成王隕命
注+秦使鬪克歸楚求成 事見文十四年 文元年 楚弑成王 하니 穆公是以不克逞志于我
注+逞 快也하니라
傳
穆襄卽世
하고 康靈卽位
注+文六年 晉襄秦穆皆卒 [附注] 林曰 秦康公文六年立 晉靈公文七年立라
康公
은 我之
注+晉外甥 이로되 又欲
我公室
하고 傾覆我社稷
注+[附注] 林曰 謂文七年秦納公子雍事 此亦文致之辭 闕 猶掘也 翦 截斷也 하야 帥我
以來
하야 蕩搖我邊疆
注+蝥賊 食禾稼蟲名 謂秦納公子雍하니
康猶不悛
하고 入我河曲
注+悛 改也 하야 伐我涑川
하고 注+涑水出河東聞喜縣 西南至蒲坂縣入河 [附注] 朱曰 王官 地名하며 翦我羈馬
注+[附注] 朱曰 羈馬 地名 其時秦取其地 하니
東道之不通
은 則是康公絶我好也
注+言康公自絶 故不復東通晉 니라
傳
庶撫我乎
注+望秦撫恤晉 ᄂ저 君亦不惠
注+不肯稱晉望而共盟 하고 利吾有狄難
注+謂晉滅潞氏時 하야 入我河縣
하고 焚我箕郜
注+[附注] 林曰 箕郜 晉二邑 焚 火攻之也 하야 芟夷我農功
注+夷 傷也하고 虔劉我邊垂
注+虔劉 皆殺也하니
我是以有
注+聚 衆也 在宣十五年 [附注] 林曰 晉魏顆敗秦師于輔氏 하니라
傳
君亦悔禍之延
注+延 長也하야 而欲徼福于先君獻穆
注+晉獻秦穆 하야 使伯車來命我景公
注+伯車 秦桓公子 曰 吾與女同好棄惡
하야 復修舊德
하야 以追念前勳
하리라
言誓未就
에 景公卽世
注+[附注] 朱曰 當時約誓之言 未及成就 하니
是以有令狐之會
注+令狐會在十一年 申厲公之命 宜言寡人 稱君誤也 하니라
君又不祥
注+祥 善也 하고 背棄盟誓
注+[附注] 林曰 十一年盟河西 秦伯歸而背晉成 하니라
白狄及君同州
注+及 與也 [附注] 林曰 白狄與秦同居西方雍州 나 君之仇讐
오 而
注+季隗 廧咎如赤狄之女也 白狄伐而獲之 納諸文公 [附注] 朱曰 白狄與晉爲昏姻 於傳無所考證 杜注以文公納季隗之事實之 然季隗乃赤狄之女 恐未必然 且此章多誣辭 蓋欲親狄以曲秦 故以狄爲昏姻耳 不足深辨 라 君來賜命曰 吾與汝伐狄
이라하니 寡君不敢顧昏姻
하고 畏君之威
하야 而受命于吏
하니라
秦背令狐之盟
하고 而來求盟于我
하야 昭告昊天上帝
와 秦三公楚三王
注+三公 穆康共 三王 成穆莊 [附注] 林曰 盟必告天地祖宗 此下兩句 乃秦楚誓辭 曰余雖與晉出入
注+出入猶往來 이나 注+[附注] 林曰 我唯視其利而從之 不以誠心與晉 라하니라
不穀惡其無成德
注+[附注] 林曰 不穀乃楚共告晉自稱 이라
是用宣之
하야 以懲不一
注+[附注] 朱曰 因以此言 宣示諸侯 欲以懲戒用心不一之人 하노라
傳
諸侯備聞此言
하고 하야 暱就寡人
注+疾 亦痛也 暱 親也 이라
寡人帥以聽命
은 唯好是求
注+[附注] 林曰 晉諸侯伐秦以聽和戰之命 惟欲與秦求爲和好 니 君若惠顧諸侯
하고 矜哀寡人
하야 而賜之盟
이면 則寡人之願也
니 其承寧諸侯以退
注+承君之意 以寧靜諸侯 리라
敢盡布之執事
注+[附注] 朱曰 敢以所懷盡布露於秦君之執事者 하야 俾執事實圖利之
注+俾 使也 하노라
傳
秦桓公旣與晉厲公爲令狐之盟
이로되 而又召狄與楚
하야 欲道以伐晉
하니 諸侯是以睦於晉
注+晉辭多誣秦 故傳據此三事以正秦罪 [附注] 朱曰 又召白狄而求盟於楚 欲引導白狄與楚同伐晉國하니라
晉欒書將中軍
하고 荀庚佐之
注+庚代荀首 하며 士燮將上軍
注+代荀庚 하고 郤錡佐之
注+代士燮 하며 韓厥將下軍
注+代郤錡하고 荀罃佐之
注+代趙同하며 趙旃將新軍
注+代韓厥하고 郤至佐之
注+代趙括하며 郤毅御戎
하고 欒鍼爲右
注+郤毅 郤至弟 欒鍼 欒書子하다
孟獻子曰 晉帥乘和
하니 師必有大功
注+帥 軍帥 乘 車士 이라
秦師敗績
하니 獲秦成差及不更女父
注+不更 秦爵 書戰 時公在師 復不須告 克獲有功 亦無所諱 蓋經文闕漏 傳文獨存 [附注] 林曰 戰敗績不書者 蓋以晉禀周命而伐秦 師有功 不使秦得與晉及諸侯戰也 하다
師遂濟涇
하야 及侯麗而還
注+涇水出安定 東南經扶風京兆高陸縣入渭也 하야 迓晉侯于新楚
注+迓 迎也 旣戰 晉侯止新楚 故師還過迎之 麻隧侯麗新楚 皆秦地 하다
傳
[傳]六月丁卯夜
에 鄭公子班自訾求入于大宮
이나 不能
하니 殺子印子羽
注+訾 鄭地 大宮 鄭祖廟 十年班出奔許 今欲還爲亂 子印子羽 皆穆公子 [附注] 林曰 不能得入 하고 反軍于市
注+[附注] 林曰 公子班自訾歸 屯軍于鄭國之市하다
己巳
에 子駟帥國人盟于大宮
注+子駟 穆公子하야 遂從而盡焚之
注+焚 燒之 [附注] 林曰 遂從公子班之師于市 而盡焚燒其市하고 殺子如子駹孫叔孫知
注+子如 公子班 子駹 班弟 孫叔 子如子 孫知 子駹子 하다
傳
[傳]曹人使公子負芻守
하고 使公子欣時逆曹伯之喪
注+二子 皆曹宣公庶子 하다
旣葬
에 子臧將亡
注+子臧 公子欣時 하니 國人皆將從之
注+不義負芻故 하다
成公乃懼
注+成公 負芻하야 告罪
하고 且請焉
注+請留子臧 [附注] 林曰 告罪於子臧하니 乃反
하야 而致其邑
注+還邑於成公 爲十五年執曹伯傳하다
13년 봄에
진후晉侯가
극기郤錡를 보내어
원병援兵을
청請하였다.
注+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서이다. 후백侯伯은 소병召兵하는 것이 마땅한데도 ‘걸사乞師’라고 한 것은 겸사謙辭이다.
3월에
성공成公이
경사京師에 갔다.
注+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러 가는 도중道中에 경사京師를 지나게 되었으므로 그 기회期會를 이용利用해 주왕周王께 조현朝見한 것이다.
여름 5월에 성공成公이 경사京師에서 출발出發해 가서 드디어 진후晉侯‧제후齊侯‧송공宋公‧위후衛侯‧정백鄭伯‧조백曹伯‧주인邾人‧등인滕人과 회합會合하여 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조백曹伯노盧가
군중軍中에서
졸卒하였다.
注+노魯나라와 다섯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가을 7월에
성공成公이
진秦나라
토벌討伐에서 돌아왔다.
注+전傳이 없다.
傳
13년 봄에
진후晉侯가
극기郤錡를 보내어
원병援兵을
청請하였는데, 일을
봉행奉行[將事]하는
태도態度가
공경恭敬스럽지 못하였다.
注+장사將事는 임금의 명命을 전傳하는 것이다.
이를 본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극씨郤氏는 아마도 망亡할 것이다.
예禮는 몸을 세우는 척골脊骨과 같고, 경敬은 몸을 지탱하는 기초基礎와 같은 것인데, 극자郤子는 기초基礎를 무시無視하였다.
그리고 극자郤子는 선군先君의 사경嗣卿으로, 임금의 명命을 받고 와서 출병出兵을 요청要請한 것은 사직社稷을 보위保衛하기 위함인데 태만怠慢하였으니, 이는 그 군명君命을 버린 것이다.
망亡하지 않고 어쩌겠는가?”
注+극기郤錡는 극극郤克의 아들이다. 그러므로 ‘사경嗣卿’이라 한 것이다. 성공成公 17년에 진晉나라가 극기郤錡를 죽인 전傳의 배경背景이다. [부주]朱: 극극郤克이 진경공晉景公의 정경正卿이었는데, 극기郤錡가 아비의 뒤를 이었다.라고 하였다.
傳
3월에
성공成公이
경사京師에 갈 때
선백宣伯이
주왕周王의
상사賞賜를 얻고자 하여
注+주왕周王이 자기에게 상사賞賜하기를 바란 것이다. 먼저
사자使者로 가기를
청請하여
注+[부주]林: 선백宣伯이 명命을 받들고 먼저 주왕周王에게 사자使者로 가기를 청請한 것이다. 경사京師로 가니,
주왕周王은
사자使者[行人]를
접대接待하는 예로
선백宣伯을
예우禮遇하고,
注+더 후대厚待하지 않은 것이다. 뒤에
맹헌자孟獻子가
성공成公을 따라
경사京師로 가니,
주왕周王은 그를
노군魯君의
개介(임금의
행례行禮를
보조輔助하는 사람)라 하여
후厚하게
예물禮物을 주었다.
注+개介는 위의威儀를 보좌輔佐하는 사람이다. 맹헌자孟獻子가 성공成公을 예禮로써 보좌輔佐[相]하였기 때문에 주왕周王이 후厚하게 상사賞賜한 것이다.
성공成公이
제후諸侯와 함께
주왕周王께
조현朝見하고서 드디어
유강공劉康公과
성숙공成肅公을 따라
진후晉侯와
회합會合하여
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유강공劉康公은 왕계자王季子이다. 유강공劉康公과 성숙공成肅公을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직접 진秦나라에 무력武力을 행사行使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출병出兵하기에 앞서
성자成子가
사社에서
제육祭肉[脤]을 받을 때
공경恭敬하지 않으니,
注+신脤은 의사宜社에 올렸던 제육祭肉인데, 신기脤器(자개로 장식한 그릇)에 담기 때문에 ‘신脤’이라 한다. 의宜는 출병出兵할 때 사社에 지내는 제사祭祀이다. 유자劉子가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사람은
천지天地의
중화中和된 기운을 받아 태어나니, 이것이 이른바 ‘
명命’이다.
注+[부주]朱: 중中은 마음이 한쪽으로 치우치지도 않고 기울지도 않는 이理이다. 백성은 천지天地에서 이 이理를 받아 태어난 자이다.
그러므로
동작動作(行動),
예의禮義(禮儀),
위의威儀(上下貴賤의
신분身分에 맞는 몸가짐) 등의
법칙法則이 있어
注+[부주]朱: 성인聖人이 천지天地자연自然의 이理에 따라 절문節文(일에 따라 알맞게 조리條理를 정定함)을 만들어 동작動作, 예의禮義, 위의威儀의 법칙法則을 제정制定하였다는 말이다. 명命을
안정安定시키는 것이다.
注+[부주]林: 하늘이 부여賦與한 명命을 안정安定시켜 잃지 않게 하는 것이다.
유능有能한
자者는 이를
수양修養하여
복福을 부르고[致]
注+위의威儀를 수양修養하여 복福을 부른다는 말이다. 유능有能하지 못한
자者는 이를
폐기廢棄[敗]하여
화禍를
취取한다.
그러므로 군자君子는 예禮에 진력盡力[勤]하고, 소인小人은 본업本業에 진력盡力해야 한다.
예禮에 진력盡力함에는 공경恭敬을 지극히 하는 것만 한 것이 없고, 본업本業에 진력盡力함에는 돈독敦篤만 한 것이 없다.
공경恭敬(공경을 행함)은
신명神明을
공양供養함에 있고,
注+[부주]朱: 군자君子는 공경恭敬을 지극히 하지 않는 곳이 없으나, 신명神明을 받들어 섬기는 일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돈독敦篤은
본업本業을 지킴에 있다.
국가國家의
대사大事는
제사祭祀와
전쟁戰爭에 있는데,
제사祭祀에는
집번執膰의
예禮가 있고,
注+번膰은 제육祭肉이다. 전쟁戰爭에는
수신受脤의
예禮가 있는 것이
신神을 섬기는 큰
예절禮節이다.
注+신神과 교접交接하는 중대重大한 일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지금
성자成子는 태만하여 그
명命을 버렸으니,
注+태만怠慢하면 중화中和의 기운을 상실喪失한다. 아마도 이번
출전出戰에서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注+성숙공成肅公이 하瑕에서 죽은 장본張本이다. 고 하였다.
傳
여름 4월
무오일戊午日에
진후晉侯가
여상呂相을
진秦나라에 보내어
절교絶交를
통고通告하며
注+여상呂相은 위기魏錡의 아들이다. 진후晉侯의 명命을 입으로 전傳한 것이다.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옛날 우리
선군先君헌공獻公과
귀국貴國의
선군先君목공穆公 때에 미쳐서는
注+진헌공晉獻公과 진목공秦穆公이다. 서로
우호友好하여,
양국兩國이 힘을 합치고 마음을 합쳐서
맹서盟誓로써
양국兩國의 관계를 밝히고[申]
혼인婚姻으로써
양국兩國의 관계를 거듭
공고鞏固히 하셨습니다.
注+진목공秦穆公의 부인夫人이 진헌공晉獻公의 딸이다.
그런데 하늘이 우리
진晉나라에
화禍를 내려
문공文公이
제齊나라로
출분出奔하고
혜공惠公이
진秦나라로
출분出奔하였는데,
注+여희驪姬를 피避해 도망간 것이다. 적국狄國과 양국梁國으로 갔던 것을 말하지 않은 것은 믿었던 큰 나라만을 들어 말했기 때문이다. 불행[無祿]하게 또
헌공獻公께서 세상을 뜨시니,
注+[부주]林: 진晉나라에 복록福祿이 없다는 말이다. 즉세卽世는 졸卒이다. 귀국貴國의
목공穆公은 옛
우호友好[舊德]를 잊지 않고 우리
혜공惠公으로 하여금
진晉나라의
제사祭祀를 받들게 하셨습니다.
注+희공僖公 10년에 진秦나라가 혜공惠公을 진晉나라로 들여보냈다.
그러나
대공大功을
완수完遂하지 않고 다시
한韓에서
전쟁戰爭하였습니다.
注+희공僖公 15년에 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쳐서 혜공惠公을 잡았다. [부주]林: 진秦나라는 또 끝내 혜공惠公을 진晉나라의 임금으로 세운 대공大功을 성취成就하지 못했다는 말이다.
뒤에
목공穆公은
진심眞心으로
후회後悔하고서 우리
문공文公을
성취成就시켰으니,
注+집集은 성成이다. [부주]林: 진목공秦穆公도 진심眞心으로 뉘우치고 허물을 고쳐 우리 문공文公을 도와 진晉나라로 들여보내어 임금이 되게 하였다는 말이다. 이는
목공穆公의 도움이었습니다.
注+진晉나라에서 성공成功했다는 말이다.
傳
그러므로
문공文公은 몸에
갑주甲冑를 두르고
注+[부주]林: 환擐은 꿰는 것이다.산山을 넘고 물을 건너 어렵고 험한 곳을 지나
注+풀이 우거진 길을 가는 것[草行]을 ‘발跋’이라 한다. 동방東方의
제후諸侯를
정벌征伐하여
注+[부주]林: 동방東方의 제후諸侯를 정벌征伐한 것이다. 진秦나라가 서방西方에 있기 때문에 제후諸侯를 ‘동방東方’이라 한 것이다. 우虞‧
하夏‧
상商‧
주周의
후손後孫들을
진秦나라에
조현朝見하게 하였으니,
注+[부주]林: 동방東方의 제후諸侯는 모두 우虞‧하夏‧상商‧주周[四代]의 후사後嗣이다. 제후諸侯가 진秦나라에 조현朝見한 일은 고증考證할 수 없으나, 당시에 반드시 진秦나라에 가서 조현朝見한 제후諸侯가 있었기 때문에 상대相對에게 죄罪를 씌우기 위해 꾸며낸 말로[因文致之] 생각된다. 이미 옛
은덕恩德을 갚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정인鄭人이
군君(秦君을 가리킴)의
변경邊境을
침범侵犯[怒]하였을 때에 우리
문공文公께서
제후諸侯의
군대軍隊를 거느리고 가서
진군秦軍과 함께
정鄭나라를
포위包圍하였는데,
注+진晉나라는 정鄭나라가 초楚나라에 붙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포위包圍한 것이고, 정鄭나라가 진秦나라를 침범侵犯한 것이 아닌데, 진晉나라는 침범侵犯했다는 말로 진秦나라를 속인 것이다. 정鄭나라를 포위包圍한 일은 희공僖公 30년에 있었다. 진秦나라
대부大夫가 우리 임금님과
상의商議하지도 않고 멋대로
정鄭나라와
결맹結盟하니,
注+순詢은 상의商議하는 것이다. 결맹結盟한 자는 진백秦伯이었는데, 겸손謙遜하게 ‘대부大夫’라고 한 것이다. 제후諸侯들은 이를 미워하여
진秦나라
토벌討伐에 목숨을 바치고자 하였습니다.
注+목숨을 바쳐 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겠다는 말이다. 이때 이곳에 제후諸侯가 없었으니, 제후諸侯가 멀리에서 이런 뜻을 전傳[致]한 것인 듯하다.
그러자 우리
문공文公께서는
귀국貴國이
해害를 입을까 두려워하여
제후諸侯들을 어루만져
안정安靜시켜
진군秦軍이
피해被害없이 돌아가게 하였으니, 우리가
서국西國(秦)에
대공大功[大造]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注+조造는 성成이니, 진晉나라가 진秦나라에 공功을 이룬 것이 있다는 말이다.
傳
불행不幸히 우리
문공文公께서 세상을 뜨신 뒤에
귀국貴國의
목공穆公은
조문弔問도 하지 않고
注+조상弔傷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죽은 우리 임금을
멸시蔑視하고 우리
양공襄公을 어리다고
무시無視하여
注+과寡는 약弱이다. [부주]朱: 문공文公을 죽어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겨 경멸輕蔑하고, 양공襄公을 유약幼弱하다고 하여 업신여겼다는 말이다. 우리의
효지殽地를
침범侵犯하고, 우리와의
우호友好를
거절拒絶[奸絶]하고서
注+[부주]林: 우리 진晉나라의 효지殽地를 침범侵犯해 습격襲擊[侵迭]하고, 우리 진晉나라와 맺은 옛 우호友好를 침범侵犯해 단절斷絶하였다는 말이다. 우리의
보성保城을
토벌討伐하고 우리의
비활費滑을
격멸擊滅하여,
注+보성保城을 토벌討伐했다는 것은 거짓말이다. 활국滑國은 비읍費邑에 도읍都邑하였기 때문에 ‘비활費滑’이라 한 것이다. 지금의 구지현緱氏縣이다. 우리
형제국兄弟國의
단합團合을
이산離散시키고 우리의
동맹同盟을
교란攪亂시켜
注+활滑은 진晉나라의 동성국同姓國이다. [부주]林: 활국滑國과 정鄭나라가 모두 진晉나라에 복종服從하였기 때문에 우리의 동맹同盟을 교란攪亂시켰다고 한 것이다. 우리
국가國家를
전복顚覆시키고자 하였습니다.
우리
양공襄公께서는
귀국貴國이 우리에게 끼친 옛
공덕功德을 잊지 않았지만
注+진문공晉文公을 진晉나라로 들여보낸 공功을 이른다. 사직社稷이
망亡할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에
注+[부주]朱: 또 진晉나라가 진秦나라에 멸망滅亡[隕滅]당할 것을 두려워한 것이다. 부득이
효殽에서
전쟁戰爭을 했던 것입니다.
注+효지殽地의 전쟁戰爭은 희공僖公 33년에 있었다.
비록
전쟁戰爭은 하였지만 우리
양공襄公께서는 오히려
귀국貴國의
목공穆公께
죄罪를
용서容恕받기 바랐는데,
注+진晉나라가 진秦나라에 화해和解를 구하고자 했다는 말이다. 목공穆公은
허락許諾하지 않고
초楚나라와
결합結合[卽]하여 우리
진晉나라를 치려고
계획計劃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늘이 우리
진晉나라를 도와[天誘其衷]
초성왕楚成王이 죽으니,
注+진秦나라가 투극鬪克을 초楚나라로 돌려보내어 화평和平을 구하게 하였다. 이 일은 문공文公 14년에 보인다. 문공文公원년元年에 초인楚人이 성왕成王을 시해弑害하였다. 목공穆公은 우리나라를 치려던 뜻을
실현實現[逞]하지 못하였습니다.
注+영逞은 쾌快이다.
傳
귀국貴國의
목공穆公과
아국我國의
양공襄公이
별세別世하고,
귀국貴國에는
강공康公이
아국我國에는
영공靈公이
즉위卽位하였습니다.
注+문공文公 6년에 진양공晉襄公과 진목공秦穆公이 모두 죽었다. [부주]林: 진강공秦康公은 문공文公 6년에 즉위卽位하고, 진영공晉靈公은 문공文公 7년에 즉위卽位하였다.
강공康公은
아국我國의
외생外甥(甥姪)인데도
注+진강공秦康公은 진晉나라의 외생外甥(甥姪)이다. 우리의
공실公室을
해害치고 우리의
사직社稷을
전복顚覆시키고자 하여
注+[부주]林: 문공文公 7년에 진秦나라가 공자公子옹雍을 진晉나라로 들여보낸 일을 이른다. 이 또한 상대相對에게 죄罪를 씌우기 위해 꾸며낸 말이다. 궐闕은 굴掘과 같고, 전翦은 절단截斷이다. 우리의
모적蝥賊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의
변경邊境을
소요騷擾시켰습니다.
注+모적蝥賊은 벼[禾]를 갉아먹는 해충害蟲인데, 진秦나라가 공자公子옹雍을 들여보낸 것을 이른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국貴國과
영호令狐에서
전쟁戰爭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注+영호令狐의 전쟁戰爭은 문공文公 7년에 있었다.
그런데도
강공康公은 잘못을 고치지 않고 우리의
하곡河曲으로 쳐들어와서
注+전悛은 회개悔改이다. 우리의
속천涑川을
토벌討伐하고, 우리의
왕관王官을
노략擄掠하고
注+속수涑水는 하동河東문희현聞喜縣에서 발원發源하여 서남西南으로 흘러 포판현蒲坂縣에 이르러 황하黃河로 들어간다. [부주]朱: 왕관王官은 지명地名이다. 우리의
기마羈馬를
격멸擊滅하였습니다.
注+[부주]朱: 기마羈馬는 지명地名인데, 그때 진秦나라가 그 땅을 취取하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귀국貴國과
하곡河曲에서
전쟁戰爭을 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注+하곡河曲의 전쟁戰爭은 문공文公 12년에 있었다.
동방東方의
도로道路가 막힌 것(秦나라와
진晉나라 사이에
사신使臣의
왕래往來가 끊긴 것)은
강공康公이 우리와
우호友好를
단절斷絶하였기 때문입니다.
注+진강공秦康公이 스스로 진晉나라와 국교國交를 단절斷絶하였기 때문에 다시 동쪽으로 진晉나라와 교통交通하지 못하였다는 말이다.
傳
군君(秦桓公을 가리킴)께서
군위君位를
계승繼承함에 미쳐
注+군君은 진환공秦桓公이다. 우리
경공景公께서는 목을 늘이고 서쪽을 바라보며 말하기를,
‘아마도[庶] 우리를
위무慰撫할 것이다.’
注+진秦나라가 진晉나라를 어루만져 구휼救恤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고 하였는데,
군君께서도 우리와
회맹會盟하려 하지 않고
注+진晉나라의 바람에 부응副應[稱]하여 동맹同盟하려 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우리에게
적인狄人의
난難이 있는 틈을
이용利用해
注+선공宣公 15년에 진晉나라가 적적赤狄노씨潞氏를 격멸擊滅할 때를 이른 것이다. 우리의
하현河縣으로 쳐들어오고, 우리의
기읍箕邑과
고읍郜邑을 불사르고
注+[부주]林: 기箕와 고郜는 진晉나라의 두 읍邑이다. 분焚은 불을 질러 공격[火攻]한 것이다. 우리의
농작물農作物을 베어 내고
注+이夷는 상해傷害이다. 우리의
변경邊境 백성들을 무찔러 죽였습니다.
注+건虔과 유劉는 다 살殺의 뜻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보씨輔氏에서
귀국貴國과
전쟁戰爭하였던 것입니다.
注+취聚는 군중軍衆이다. 보씨輔氏의 전쟁戰爭은 선공宣公 15년에 있었다. [부주]林: 진晉나라 위과魏顆가 진군秦軍을 보씨輔氏에서 패배敗北시킨 일을 이른 것이다.
傳
군君께서도
전쟁戰爭의
화禍가 길어지는 것을
후회後悔하여,
注+연延은 길어짐이다.양국兩國의
선군先君헌공獻公과
목공穆公께
복福을
기구祈求하기 위해
注+진헌공晉獻公과 진목공秦穆公이다. 백거伯車를
사자使者로 보내 와서 우리
경공景公께
명命하기를,
注+백거伯車는 진환공秦桓公의 아들이다. ‘나는 그대와 서로
우호友好[同好]하여
원한怨恨[惡]을 버리고, 다시 지난날의
우호友好를
중수重修하여
선군先君의
공덕功德을
추념追念하고자 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맹약盟約이 이루어지기 전에
경공景公께서
별세別世하였습니다.
注+[부주]朱: 당시當時에 서약誓約하는 말이 미처 완성完成되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 임금(晉厲公)께서
귀국貴國과
영호令狐에서
회맹會盟하였던 것입니다.
注+영호令狐의 회맹會盟은 성공成公 11년에 있었다. 진려공晉厲公의 명命을 진환공秦桓公에게 고告[申]한 것이니, 과인寡人이라고 말해야 하는데, ‘과군寡君’이라 칭稱한 것은 잘못이다.
그런데
군君께서는 또 좋지 못한 마음을 품고서
注+상祥은 선善이다. 맹약盟約을 저버렸습니다.
注+[부주]林: 성공成公 11년에 하서河西에서 결맹結盟하였으나 진백秦伯은 돌아가서 진晉나라와의 우호友好를 배반背反하였다.
백적白狄이
군君과 같은
옹주雍州에 살고
注+급及은 여與이다.[부주]林: 백적白狄이 진秦나라와 함께 서방西方의 옹주雍州에 거주居住한다는 말이다. 있지만
군君과는
원수怨讐이고 우리와는
혼인婚姻한 사이인데,
注+계외季隗는 장구여적적廧咎如赤狄의 딸인데, 백적白狄이 장구여廧咎如를 토벌討伐해 계외季隗를 잡아다가 진문공晉文公에게 아내로 바쳤다. [부주]朱: 백적白狄이 진晉나라와 혼인婚姻한 일을 전傳에서 고증考證할 수 없기 때문에 두주杜注에는 진문공晉文公이 계외季隗를 아내로 받아들인 일로 혼인婚姻한 사이임을 증명證明[實]하였으나, 계외季隗는 적적赤狄의 딸이니, 반드시 옳다고 할 수 없다. 그리고 이 장章에는 근거根據 없는 말[誣辭]이 많다. 대체로 진晉나라는 적狄을 가까이하여 진秦나라의 부정직不正直함을 드러내고자 하였기 때문에 적狄을 혼인婚姻한 사이라고 말한 것뿐이니, 깊이 변론辯論할 것이 없다.군君께서
사자使者를 보내 와서
명命을 내리기를, ‘나는 그대와 함께
백적白狄을
토벌討伐하고자 한다.’고 하니, 우리 임금께서는
군君의
위력威力이 두려워 감히
혼인관계婚姻關係를 돌아보지 않고
사자使者[吏]가
전傳하는
명命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런데 군君께서는 또 적인狄人에게 두 마음을 품고서 적인狄人에게 말하기를, ‘진晉나라가 너희 나라를 치려 한다.’고 하니, 적인狄人이 겉으로는 그 명命을 받아들였으나[應] 속으로는 신의信義를 지키지 않는 것을 미워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우리에게
통고通告하였습니다.
注+적狄이 비록 진秦나라에 응답應答하였으나, 마음속으로는 사실 진秦나라의 신의信義가 없는 것을 미워했다는 말이다.
그리고 초인楚人도 이랬다저랬다 하는 군君의 행위行爲[德]를 미워하여 역시 사자使者를 보내 와서 우리에게 통고通告하기를,
‘
진秦나라가
영호令狐의
맹약盟約을 저버리고 우리
초楚나라에
사자使者를 보내 와
결맹結盟을
요구要求하였는데,
맹약盟約할 때 저
진秦나라는
호천상제昊天上帝와
진秦나라의
삼공三公,
초楚나라의
삼왕三王께 밝게
고告하기를
注+삼공三公은 목공穆公, 강공康公, 공공共公이고, 삼왕三王은 성왕成王, 목왕穆王, 장왕莊王이다. [부주]林: 맹서盟誓할 때는 반드시 천지天地와 조종祖宗께 고告한다. 아래의 두 구句는 바로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맹서盟誓한 말이다. ‘내가 비록
진晉나라와
왕래往來하지만
注+출입出入은 왕래往來와 같다. 나는 오직 이익만을 볼 뿐이다.’
注+[부주]林: 우리는 오직 이익利益만을 보아 진晉나라와 상종相從할 뿐이고, 성심誠心으로 진晉나라와 우호友好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불곡不穀(楚王의
자칭自稱)은
진군秦君에게
성덕成德(美德)이 없는 것이 미웠다.
注+[부주]林: 불곡不穀은 초공왕楚共王이 진晉나라에 고告하면서 자칭自稱한 말이다.
그러므로 이를
공포公布[宣]하여
언행言行이
일치一致하지 않은 자를
징계懲戒하는 것이다.’
注+[부주]朱: 진군秦君의 이 말을 제후諸侯에게 공표公表해 용심用心이 한결같지 않은 사람을 징계懲戒하고자 한다는 말이다. 고 하였습니다.
傳
제후諸侯들도 모두[備] 이 말을 들었기 때문에
통분痛憤이
극極에 달하여[痛心疾首] 모두
귀국貴國을 버리고
과인寡人을 가까이하였습니다.
注+질疾도 통痛이다. 일暱은 친親이다.
과인寡人이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군君의
명命을 기다리는[聽] 것은 오직
우호友好를
구求하기 위함이니,
注+[부주]林: 진晉나라가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진秦나라를 토벌討伐하기 위해 와서 화전和戰의 명命을 기다리는 것은 오직 진秦나라와 화목和睦하게 지내기를 구求하고자 해서일 뿐이라는 말이다. 군君께서
제후諸侯를 돌아보고
과인寡人을 가엾게 여겨
결맹結盟해 주신다면 이는 바로
과인寡人의 바람이니,
군君의 뜻을 받들어
제후諸侯를
안정安靜시켜
퇴군退軍할 것입니다.
注+진군秦君의 뜻을 받들어 제후諸侯를 안정安靜시키겠다는 말이다.
어찌 감히
전란戰亂을 바라겠습니까?
注+요徼는 요要(바람)이다.
그러나 만약 군君께서 큰 은혜를 베풀지 않으신다면 부재不才한 과인寡人은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물러갈 수 없습니다.
감히 속마음을 다
집사執事(秦君을
지칭指稱함)께
토로吐露하여
注+[부주]朱: 감히 품은 생각을 진군秦君의 집사執事에게 다 토로吐露했다는 말이다. 집사執事로 하여금 어떻게 하는 것이
진秦나라를 이롭게 하는 것인지를
착실着實히 생각하게 하는 바입니다.”
注+비俾는 사使(하여금)이다. 라고 하였다.
傳
진환공秦桓公은 이미
진려공晉厲公과
영호令狐에서
결맹結盟했으면서도
적인狄人과
초인楚人를 불러 그들을
인도引導해
진晉나라를
토벌討伐하려 하니,
제후諸侯는 이로 인해
진晉나라와
화목和睦하였다.
注+진晉나라의 사명辭命은 진秦나라를 속인 것이 많기 때문에 전傳에 이 세 가지 일에 의거依據해 진秦나라의 죄罪를 다스린[正] 것이다. [부주]朱: 또 백적白狄을 부르고 초楚나라와 결맹結盟하기를 구求하여, 백적白狄과 초楚나라를 인도引導해 함께 진晉나라를 토벌討伐하려고 한 것이다.
이때
진군晉軍은
난서欒書가
중군中軍을 거느리고
순경荀庚이
좌佐가 되었으며,
注+순경荀庚이 순수荀首의 뒤를 이어 좌佐가 된 것이다. 사섭士燮이
상군上軍을 거느리고
注+사섭士燮이 순경荀庚의 뒤를 이어 상군上軍을 거느린 것이다. 극기郤錡가
좌佐가 되었으며,
注+극기郤錡가 사섭士燮의 뒤를 이어 좌佐가 된 것이다. 한궐韓厥이
하군下軍을 거느리고
注+한궐韓厥이 극기郤錡의 뒤를 이어 하군下軍을 거느린 것이다. 순앵荀罃이
좌佐가 되었으며,
注+순앵荀罃이 조동趙同의 뒤를 이어 좌佐가 된 것이다. 조전趙旃이
신군新軍을 거느리고
注+조전趙旃이 한궐韓厥의 뒤를 이어 신군新軍을 거느린 것이다.극지郤至가
좌佐가 되었으며,
注+극지郤至가 조괄趙括의 뒤를 이어 좌佐가 된 것이다. 극의郤毅가
융거戎車의
어御가 되고
난침欒鍼이
거우車右가 되었다.
注+극의郤毅는 극지郤至의 아우이고, 난침欒鍼은 난서欒書의 아들이다.
맹헌자孟獻子가 말하기를, “
진군晉軍은
장수將帥와
사졸士卒[乘]이
화목和睦하니,
진군晉軍은 반드시
대공大功을 세울 것이다.”
注+수帥는 군수軍帥이고, 승乘은 거병車兵이다. 고 하였다.
5월 정해일丁亥日에 진군晉軍이 제후군諸侯軍을 거느리고 진군秦軍과 마수麻隧에서 전쟁戰爭하였다.
진군秦軍이
대패大敗하니
진군晉軍이
진秦나라
성차成差와
불경不更여보女父를
포로捕虜로 잡았다.
注+불경不更은 진秦나라의 작명爵名이다. ‘전戰’과 ‘패적敗績’을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에 대해 〈두씨杜氏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진晉나라가 옳고[直]진秦나라가 그르기[曲] 때문이라고 하자니, 희공僖公 15년에 있었던 한韓의 전쟁戰爭은 〈진秦나라가 옳고 진晉나라가 그른데도〉 ‘전우한戰于韓’이라 기록하였고, 〈부고赴告하지 않았기 때문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하자니〉 그때 성공成公이 군중軍中에 있었으니 다시 고告할 필요가 없었고, 〈공功을 이루지 못하고 패전敗戰한 것을 숨기기 위해서라고 하자니〉 승전勝戰[克]해 포로捕虜를 잡은 공功은 《춘추春秋》에 숨긴 바가 없다. 〈재삼再三 헤아려 보아도 그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경문經文에는 누락漏落되고 전문傳文에만 실린 것인 듯하다. [부주]林: ‘전戰’과 ‘패적敗績’을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진晉나라가 주왕周王께 여쭈어 명命을 받고 진秦나라를 정벌征伐하였으므로 출사出師의 명분名分이 정당正當[直]하여 전공戰功이 있었기 때문이고, 또 진秦나라를 진晉나라 및 제후諸侯와 전쟁戰爭할 수 있는 위치位置로 인증認證하지 않기 위해서인 듯하다.
진군晉軍은 드디어
경수涇水를 건너
후려侯麗까지 쳐들어갔다가 돌아와
注+경수涇水는 안정安定에서 발원發源하여 동남쪽으로 부풍扶風경조京兆고륙현高陸縣을 거쳐 위수渭水로 흘러든다. 신초新楚에서
진후晉侯를 맞이하였다.
注+아迓는 맞이하는 것이다. 전쟁戰爭한 뒤에 진후晉侯는 신초新楚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에 진군晉軍이 돌아와 신초新楚로 가서 진후晉侯를 맞이한 것이다. 마수麻隧, 후려侯麗, 신초新楚는 모두 진秦나라 땅이다.
성숙공成肅公이
하瑕에서
졸卒하였다.
注+〈위 전문傳文에 ‘금성자타今成子惰기기명의棄其命矣기불반호其不反乎’라고 한〉 유자劉子의 말을 종결終結한 것이다. 하瑕는 진晉나라 땅이다.
傳
6월
정묘일丁卯日 밤에
정鄭나라
공자公子반班이
자지訾地에서
대궁大宮으로 들어가기를
청구請求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않자,
자인子印과
자우子羽를 죽이고
注+자訾는 정鄭나라 땅이다. 대궁大宮은 정鄭나라 조묘祖廟이다. 성공成公 10년에 자반子班이 허許나라로 출분出奔하였는데, 이번에 돌아와서 난亂을 일으키려 한 것이다. 자인子印과 자우子羽는 모두 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부주]林: 들어갈 수 없었던 것이다.회군回軍하여
시가市街에
주둔駐屯[軍]하였다.
注+[부주]林: 공자公子반班이 자지訾地에서 돌아와 정鄭나라의 시가市街에 군대를 주둔駐屯시킨 것이다.
기사일己巳日에
자사子駟가
국인國人을 거느리고
대궁大宮에서
결맹結盟하고서
注+자사子駟도 정목공鄭穆公의 아들이다. 드디어
자반子班을
추격追擊해 그
시가市街를 다 불태우고,
注+분焚은 불태우는 것이다. [부주]林: 드디어 공자公子반班의 군대를 추격追擊해 시가市街로 가서 그 시가市街를 모두 불태운 것이다.자여子如,
자방子駹,
손숙孫叔,
손지孫知를 죽였다.
注+자여子如는 공자公子반班이고, 자방子駹은 공자公子반班의 아우이며, 손숙孫叔은 자여子如의 아들이고, 손지孫知는 자방子駹의 아들이다.
傳
조인曹人이
공자公子부추負芻에게
거수居守(서울에 머물러 나라를 지킴)하게 하고,
공자公子흔시欣時를 보내어
조백曹伯의
상구喪柩를 맞이해 오게 하였다.
注+두 사람은 모두 조선공曹宣公의 서자庶子이다.
가을에
부추負芻가
태자太子를 죽이고 스스로 임금이 되었다.
注+조선공曹宣公의 태자太子이다.
제후諸侯가 그를 토벌討伐하기를 청하니, 진인晉人은 마수麻隧의 전쟁戰爭으로 피로疲勞하다는 이유로 후년後年을 기다리자고 하였다.
장사葬事를 마친 뒤에
자장子臧이
출분出奔하려 하니,
注+자장子臧은 공자公子흔시欣時이다. 국인國人(國都의
주민住民)이 모두 그를 따라가고자 하였다.
注+부추負芻를 의롭지 못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조성공曹成公(負芻)은 겁이 나서
注+성공成公은 부추負芻이다. 자기의
죄罪를
고告하고
출분出奔하지 말기를
요청要請하니,
注+자장子臧에게 머물기를 요청要請한 것이다. [부주]林: 자장子臧에게 죄罪를 고백告白한 것이다.자장子臧은 돌아와서 자기의
채읍采邑을
부추負芻에게 돌려주었다.
注+채읍采邑을 조성공曹成公에게 돌려준 것이다. 성공成公 15년에 조백曹伯을 잡은 전傳의 배경背景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