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元年春王正月
에 公卽位
注+無傳 於是公年四歲 하다
[經]仲孫蔑會晉欒黶宋華元衛寗殖曹人莒人邾人滕人薛人圍宋彭城
注+魯與謀於虛朾 而書會者 稟命霸主 非匹敵故 하다
仲孫蔑會齊崔杼曹人邾人杞人次于鄫
注+鄫 鄭地 在陳留襄邑縣東南 書次 兵不加鄭 次鄫以待晉師 [附注] 林曰 亦以見復霸之難하다
[經]九月辛酉
에 天王崩
注+無傳 辛酉 九月十五日 하다
[經]冬
에 衛侯使公孫剽來聘
注+剽 子叔黑背子 하다
[經]晉侯使荀罃來聘
注+冬者 十月初也 王崩 赴未至 皆未聞喪 故各得行朝聘之禮 而傳善之 하다
傳
[傳]
에 圍宋彭城
注+下有二月 則此己亥爲正月 正月無己亥 日誤 하다
非宋地
로되 追書也
注+成十八年 楚取彭城以封魚石 故曰非宋地 夫子治春秋 追書繫之宋 라
하고 注+登 成也 不與其專邑叛君 故使彭城還繫宋 하니 注+稱宋 亦以成宋志 라
彭城降晉
하니 晉人以宋五大夫在彭城者歸
하야 寘諸瓠丘
注+彭城降不書 賤略之 瓠丘 晉地 河東東垣縣東南 有壺丘 五大夫 魚石向爲人鱗朱向帶魚府하다
齊人不會彭城
이라하야 晉人以爲討
하니 二月
에 齊太子光爲質於晉
注+光 齊靈公太子 하다
傳
[傳]夏五月
에 晉韓厥荀偃帥諸侯之師伐鄭
하야 入其郛
注+荀偃不書 非元帥 하야 敗其徒兵於洧上
注+徒兵 步兵 洧水 出密縣東南至長平入潁 하다
於是東諸侯之師次于鄫
하야 以待晉師
注+齊魯曹邾杞 하다
晉師自鄭以鄫之師侵楚焦夷及陳
注+於是孟獻子自鄫先歸 不與侵陳楚 故不書 하고 晉侯衛侯次于戚
하야 以爲之援
注+爲韓厥援 하다
傳
[傳]秋
에 楚子辛救鄭
하야 侵宋呂留
注+呂留二縣 今屬彭城郡 하고 鄭子然侵宋
하야 取犬丘
注+譙國酇縣東北有犬丘城 迂廻 疑 하다
傳
凡諸侯卽位
에 小國朝之
注+小事大 하고 大國聘焉
注+大字小 하야 以繼好結信謀事補闕
이 禮之大者也
注+闕 猶過也 禮以安國家利民人爲大 라
원년元年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에
양공襄公이
즉위卽位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이때 양공襄公의 나이가 네 살이었다.
중손멸仲孫蔑이
진晉나라
난염欒黶‧
송宋나라
화원華元‧
위衛나라
영식寗殖‧
조인曹人‧
거인莒人‧
주인邾人‧
등인滕人‧
설인薛人과
회합會合하여
송宋나라
팽성彭城을
포위包圍하였다.
注+노군魯君이 허정虛朾의 모의謀議에 참여하였으니 〈‘급及’으로 기록해야 하는데도〉 ‘회會’로 기록한 것은 패주霸主의 명령命令을 받았으므로 대등對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에 진晉나라 한궐韓厥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정鄭나라를 토벌하였다.
중손멸仲孫蔑이
제齊나라
최저崔杼‧
조인曹人‧
주인邾人‧
기인杞人과 회합하여
증鄫에 주둔하였다.
注+증鄫은 정鄭나라 땅으로 진류陳留양읍현襄邑縣 동남쪽에 있다. ‘차次’라고 기록한 것은 정鄭나라를 공격攻擊하지 않고 증鄫에 주둔하여 진군晉軍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부주]林: 여기에서도 진晉나라가 패업霸業을 회복恢復하기 어려웠음을 볼 수 있다.
가을에 초楚나라 공자公子임부壬夫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송宋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9월
신유일辛酉日에
천왕天王이
붕崩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신유일辛酉日은 9월 15일이다.
겨울에
위후衛侯가
공손公孫표剽를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注+표剽는 〈위정공衛定公의 아우〉 자숙흑배子叔黑背의 아들이다.
진후晉侯가
순앵荀罃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
注+겨울은 10월 초이다. 천왕天王이 붕崩하였으나 부고赴告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모두 상喪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각각 조빙朝聘의 예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전傳에는 이를 좋게 여겼다.
傳
원년元年 봄
기해일己亥日에
송宋나라
팽성彭城을
포위包圍하였다.
注+아래에 ‘2월’이란 구句가 있으니, 이 기해己亥는 정월正月이다. 그러나 정월正月에는 기해일己亥日이 없으니 날짜의 간지干支가 오기誤記된 것이다.
팽성彭城이
송宋나라 땅이 아닌데도 〈
경經에 ‘
송팽성宋彭城’으로 기록한 것은〉
추서追書(遡及해
기록記錄함)한 것이다.
注+성공成公 18년에 초楚나라가 팽성彭城을 취하여 어석魚石에게 봉封해 주었기 때문에 ‘비송지非宋地’라고 한 것이다. 부자夫子가 《춘추春秋》를 정리整理[治]하면서 소급遡及해 송宋나라에 매어 기록한 것이다.
이때 송宋나라를 위해 어석魚石을 토벌討伐하였다.
그러므로 ‘
송宋나라
팽성彭城’이라
칭稱하고
반인叛人의 뜻을 이루어 주지 않았으니,
注+등登은 성成이다. 그 읍邑을 전유專有하여 임금을 배반背叛한 것을 인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팽성彭城을 도로 송宋나라에 매어 기록한 것이다. 이는
송인宋人의 뜻을
표현表現한 것이다.
注+‘송宋’으로 칭한 것도 송인宋人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한 것이다.
팽성彭城이
진晉나라에
항복降服하니,
진인晉人이
팽성彭城에 있던
송宋나라의 다섯
대부大夫를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호구瓠丘에
안치安置하였다.
注+팽성彭城이 항복한 것을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천賤하게 여겨 생략省略한 것이다. 호구瓠丘는 진晉나라 땅이다. 하동河東동원현東垣縣 동남쪽에 호구壺丘가 있다. 다섯 대부大夫는 어석魚石, 상위인向爲人, 인주鱗朱, 상대向帶, 어부魚府이다.
제인齊人이
팽성彭城의
회전會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진인晉人이
토벌討伐하려 하니, 2월에
제齊나라는
태자太子광光을
진晉나라에
인질人質로 보냈다.
注+광光은 제영공齊靈公의 태자太子이다.
傳
여름 5월에
진晉나라
한궐韓厥과
순언荀偃이 제후의 군사를 거느리고
정鄭나라를 토벌하여 그
외성外城까지 쳐들어가서
注+경經에 순언荀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원수元帥가 아니기 때문이다.정鄭나라의
도병徒兵을
유수洧水 가에서
패배敗北시켰다.
注+도병徒兵은 보병步兵이다. 유수洧水는 밀현密縣 동남쪽에서 발원發源하여 장평長平에 이르러 영수潁水로 들어간다.
이때
동방東方제후諸侯의 군대는
증鄫에 주둔하여
진군晉軍을 기다리고 있었다.
注+동방東方제후諸侯는 제齊나라, 노魯나라, 조曹나라, 주邾나라, 기杞나라이다.
진군晉軍은
정鄭나라에서
증鄫에 주둔해 있던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초楚나라의
초焦‧
이夷와
진陳나라를
침공侵攻하고,
注+이때 맹헌자孟獻子는 증鄫에서 먼저 귀국歸國하고 진陳나라와 초楚나라를 침공侵攻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진후晉侯와
위후衛侯는
척戚에
주둔駐屯하여
진군晉軍을
후원後援하였다.
注+한궐韓厥을 위해 응원應援한 것이다.
傳
가을에
초楚나라
자신子辛은
정鄭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송宋나라의
여현呂縣과
유현留縣을
침공侵攻하고,
注+여呂와 유留 두 현縣이 지금은 팽성군彭城郡에 속屬하였다.정鄭나라의
자연子然은
송宋나라를
침공侵攻하여
견구犬丘를
취取하였다.
注+초국譙國찬현酇縣 동북쪽에 견구성犬丘城이 있다. 우회迂廻한 것이 의심스럽다.
傳
9월에
주자邾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예禮에 맞았다.
注+주선공邾宣公이다.
傳
겨울에 위衛나라 자숙子叔과 진晉나라 지무자知武子가 와서 빙문聘問하였으니 예禮에 맞았다.
대체로
제후諸侯가
즉위卽位하면
소국小國은 와서
조현朝見하고
注+소국小國이 대국大國을 섬기는 예禮이다. 대국大國은 와서
빙문聘問하여,
注+대국大國이 소국小國을 사랑하는 예禮이다. 두 나라 사이의
우호友好를 계속하고
신의信義를 맺고,
국사國事를
상의商議하고
과오過誤를
보완補完하는 것이
예禮 중에
중대重大한 것이다.
注+궐闕은 과過(허물)와 같다. 예禮는 국가國家를 안정安定시키고 인민人民을 이롭게 하는 것을 중대重大하게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