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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4)

춘추좌씨전(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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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元年春王正月 公卽位注+無傳 於是公年四歲 하다
[經]仲孫蔑會晉欒黶宋華元衛寗殖曹人莒人邾人滕人薛人圍宋彭城注+魯與謀於虛朾 而書會者 稟命霸主 非匹敵故 하다
[經]夏 晉韓厥帥師伐鄭하다
仲孫蔑會齊崔杼曹人邾人杞人次于鄫注+鄫 鄭地 在陳留襄邑縣東南 書次 兵不加鄭 次鄫以待晉師 [附注] 林曰 亦以見復霸之難하다
[經]秋 하다
[經]九月辛酉 天王崩注+無傳 辛酉 九月十五日 하다
[經]邾子來朝하다
[經]冬 衛侯使公孫剽來聘注+剽 子叔黑背子 하다
[經]晉侯使荀罃來聘注+冬者 十月初也 王崩 赴未至 皆未聞喪 故各得行朝聘之禮 而傳善之 하다
[傳] 圍宋彭城注+下有二月 則此己亥爲正月 正月無己亥 日誤 하다
非宋地로되 追書也注+成十八年 楚取彭城以封魚石 故曰非宋地 夫子治春秋 追書繫之宋
於是爲宋討魚石이라
하고 注+登 成也 不與其專邑叛君 故使彭城還繫宋 하니 注+稱宋 亦以成宋志
彭城降晉하니 晉人以宋五大夫在彭城者歸하야 寘諸瓠丘注+彭城降不書 賤略之 瓠丘 晉地 河東東垣縣東南 有壺丘 五大夫 魚石向爲人鱗朱向帶魚府하다
齊人不會彭城이라하야 晉人以爲討하니 二月 齊太子光爲質於晉注+光 齊靈公太子 하다
[傳]夏五月 晉韓厥荀偃帥諸侯之師伐鄭하야 入其郛注+荀偃不書 非元帥 하야 敗其徒兵於洧上注+徒兵 步兵 洧水 出密縣東南至長平入潁 하다
於是東諸侯之師次于鄫하야 以待晉師注+齊魯曹邾杞 하다
晉師自鄭以鄫之師侵楚焦夷及陳注+於是孟獻子自鄫先歸 不與侵陳楚 故不書 하고 晉侯衛侯次于戚하야 以爲之援注+爲韓厥援 하다
[傳]秋 楚子辛救鄭하야 侵宋呂留注+呂留二縣 今屬彭城郡 하고 鄭子然侵宋하야 取犬丘注+譙國酇縣東北有犬丘城 迂廻 疑 하다
[傳]九月 邾子來朝하니 禮也注+邾宣公
[傳]冬 衛子叔晉知武子來聘하니 禮也
凡諸侯卽位 小國朝之注+小事大 하고 大國聘焉注+大字小 하야 以繼好結信謀事補闕 禮之大者也注+闕 猶過也 禮以安國家利民人爲大


원년元年주왕周王정월正月양공襄公즉위卽位하였다.注+이 없다. 이때 양공襄公의 나이가 네 살이었다.
중손멸仲孫蔑나라 난염欒黶나라 화원華元나라 영식寗殖조인曹人거인莒人주인邾人등인滕人설인薛人회합會合하여 나라 팽성彭城포위包圍하였다.注+노군魯君허정虛朾모의謀議에 참여하였으니 〈‘’으로 기록해야 하는데도〉 ‘’로 기록한 것은 패주霸主명령命令을 받았으므로 대등對等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여름에 나라 한궐韓厥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토벌하였다.
중손멸仲孫蔑나라 최저崔杼조인曹人주인邾人기인杞人과 회합하여 에 주둔하였다.注+나라 땅으로 진류陳留양읍현襄邑縣 동남쪽에 있다. ‘’라고 기록한 것은 나라를 공격攻擊하지 않고 에 주둔하여 진군晉軍를 기다렸기 때문이다. [부주]林: 여기에서도 나라가 패업霸業회복恢復하기 어려웠음을 볼 수 있다.
가을에 나라 공자公子임부壬夫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침공侵攻하였다.
9월 신유일辛酉日천왕天王하였다.注+이 없다. 신유일辛酉日은 9월 15일이다.
주자邾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다.
겨울에 위후衛侯공손公孫를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注+는 〈위정공衛定公의 아우〉 자숙흑배子叔黑背의 아들이다.
진후晉侯순앵荀罃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注+겨울은 10월 초이다. 천왕天王하였으나 부고赴告가 아직 이르지 않아서, 모두 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에 각각 조빙朝聘의 예를 행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에는 이를 좋게 여겼다.
원년元年기해일己亥日나라 팽성彭城포위包圍하였다.注+아래에 ‘2월’이란 가 있으니, 이 기해己亥정월正月이다. 그러나 정월正月에는 기해일己亥日이 없으니 날짜의 간지干支오기誤記된 것이다.
팽성彭城나라 땅이 아닌데도 〈에 ‘송팽성宋彭城’으로 기록한 것은〉 추서追書(遡及해 기록記錄함)한 것이다.注+성공成公 18년에 나라가 팽성彭城을 취하여 어석魚石에게 해 주었기 때문에 ‘비송지非宋地’라고 한 것이다. 부자夫子가 《춘추春秋》를 정리整理[治]하면서 소급遡及나라에 매어 기록한 것이다.
이때 나라를 위해 어석魚石토벌討伐하였다.
그러므로 ‘나라 팽성彭城’이라 하고 반인叛人의 뜻을 이루어 주지 않았으니,注+이다. 그 전유專有하여 임금을 배반背叛한 것을 인증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팽성彭城을 도로 나라에 매어 기록한 것이다. 이는 송인宋人의 뜻을 표현表現한 것이다.注+’으로 칭한 것도 송인宋人의 뜻을 이루어 주기 위한 것이다.
팽성彭城나라에 항복降服하니, 진인晉人팽성彭城에 있던 나라의 다섯 대부大夫를 잡아 가지고 돌아가서 호구瓠丘안치安置하였다.注+팽성彭城이 항복한 것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하게 여겨 생략省略한 것이다. 호구瓠丘나라 땅이다. 하동河東동원현東垣縣 동남쪽에 호구壺丘가 있다. 다섯 대부大夫어석魚石, 상위인向爲人, 인주鱗朱, 상대向帶, 어부魚府이다.
제인齊人팽성彭城회전會戰에 참여하지 않았다 하여 진인晉人토벌討伐하려 하니, 2월에 나라는 태자太子나라에 인질人質로 보냈다.注+제영공齊靈公태자太子이다.
여름 5월에 나라 한궐韓厥순언荀偃이 제후의 군사를 거느리고 나라를 토벌하여 그 외성外城까지 쳐들어가서注+순언荀偃을 기록하지 않은 것은 원수元帥가 아니기 때문이다.나라의 도병徒兵유수洧水 가에서 패배敗北시켰다.注+도병徒兵보병步兵이다. 유수洧水밀현密縣 동남쪽에서 발원發源하여 장평長平에 이르러 영수潁水로 들어간다.
이때 동방東方제후諸侯의 군대는 에 주둔하여 진군晉軍을 기다리고 있었다.注+동방東方제후諸侯나라, 나라, 나라, 나라, 나라이다.
진군晉軍나라에서 에 주둔해 있던 제후諸侯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의 나라를 침공侵攻하고,注+이때 맹헌자孟獻子에서 먼저 귀국歸國하고 나라와 나라를 침공侵攻하는 데 참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진후晉侯위후衛侯주둔駐屯하여 진군晉軍후원後援하였다.注+한궐韓厥을 위해 응원應援한 것이다.
가을에 나라 자신子辛나라를 구원救援하기 위해 나라의 여현呂縣유현留縣침공侵攻하고,注+이 지금은 팽성군彭城郡하였다.나라의 자연子然나라를 침공侵攻하여 견구犬丘하였다.注+초국譙國찬현酇縣 동북쪽에 견구성犬丘城이 있다. 우회迂廻한 것이 의심스럽다.
9월에 주자邾子가 와서 조현朝見하였으니 에 맞았다.注+주선공邾宣公이다.
겨울에 나라 자숙子叔나라 지무자知武子가 와서 빙문聘問하였으니 에 맞았다.
대체로 제후諸侯즉위卽位하면 소국小國은 와서 조현朝見하고注+소국小國대국大國을 섬기는 이다. 대국大國은 와서 빙문聘問하여,注+대국大國소국小國을 사랑하는 이다. 두 나라 사이의 우호友好를 계속하고 신의信義를 맺고, 국사國事상의商議하고 과오過誤보완補完하는 것이 중에 중대重大한 것이다.注+(허물)와 같다. 국가國家안정安定시키고 인민人民을 이롭게 하는 것을 중대重大하게 여긴다.


역주
역주1 楚公子壬夫帥師侵宋 : 壬夫는 子反의 아우 子辛이다. 晉나라가 宋나라를 위해 鄭나라를 쳤기 때문에 楚나라도 宋나라를 쳐서 鄭나라를 救援한 것이다. 徐壽錫 《潁水全集》
역주2 元年春己亥 : 傳의 春 아래에 ‘正月’이란 두 자가 빠졌다. ‘己’는 ‘乙’의 誤字인 듯하다. 長曆으로 推算하면 금년 정월 초하루가 庚戌日이니, 乙亥日은 26일이다. 己와 乙은 서로 誤記되는 경우가 많다. 《左氏會箋》
역주3 於是爲宋討魚石 故稱宋 : 宋나라를 討伐한 것이 아니라 宋나라를 위해 叛人을 토벌한 것이다. 그러므로 ‘송나라를 토벌하여 팽성을 포위하였다.[伐宋圍彭城]’고 기록할 수 없었으니, 이것이 ‘宋彭城’으로 기록한 이유이다. 《左氏會箋》
역주4 且不登叛人也 : ‘宋나라 彭城’이라 하지 않고 ‘彭城’이라고만 기록하면 楚나라가 이 땅을 占領하여 魚石 등 叛人에게 封해 준 하나의 나라로 인증하는 것이 되니, 이는 叛人들의 뜻을 이루어 주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宋彭城’이라고 기록하여 叛人들의 뜻을 이루어 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역주5 謂之宋志 : 宋人의 뜻은 彭城을 취하는 데 있었기 때문에 현재는 宋나라의 땅이 아니지만 宋나라에 매어 기록하여 宋人의 뜻을 이루어 주었다는 말이다.

춘추좌씨전(4)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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