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十有七年春王二月庚午
에 邾子牼卒
注+無傳 宣公也 四同盟 하다
[經]秋
에 齊侯伐我北鄙
하야 圍桃
하고 高厚帥師伐我北鄙
하야 圍防
注+弁縣東南有桃虛 [附注] 林曰 伐我 大夫將 書大夫始此 自隱以來 齊伐我皆書人 君將書君 自文十五年始 大夫將書大夫 自高厚始 하다
[經]宋華臣出奔陳
注+暴亂宗室 懼而出奔 實以冬出 書秋者 以始作亂時來告 하다
傳
[傳]十七年春
에 宋莊朝伐陳
하야 獲司徒卬
하니 卑宋也
注+司徒卬 陳大夫 卑宋 不設備 [附注] 林曰 莊朝 宋微者 生死皆曰獲 라
傳
[傳]衛孫蒯田于曹隧
注+越竟而獵 孫蒯 林父之子 할새 飮馬于重丘
注+重丘 曹邑 라가 毁其甁
한대 重丘人閉門而訽之
注+訽 罵也 [附注] 林曰 但於飮馬 義類似不相干 未知是否 曰 親逐而君
하니 爾父爲厲
注+厲 惡鬼 林父逐君 在十四年 [附注] 林曰 而 汝也 言孫蒯之父親逐汝君 어늘 是之不憂
하고 而何以田爲
오
夏
에 衛石買孫蒯伐曹
하야 取重丘
注+孫蒯不書 非卿 [附注] 林曰 孫蒯不忍其詬 故伐曹攻重丘而取之 以報私忿 하니 曹人愬于晉
注+爲明年晉人石買傳 하다
傳
[傳]齊人以其未得志于我故
注+前年圍郕 辟孟孺子 로 秋
에 齊侯伐我北鄙
하야 圍桃
하고 高厚圍臧紇于防
注+防 臧紇邑 하다
師自陽關逆臧孫
하야 至于旅松
注+陽關 在泰山鉅平縣東 旅松 近防地也 魯師畏齊 不敢至防 하니 郰叔紇臧疇臧賈帥甲三百
하고 宵犯齊師
하야 送之而復
注+郰叔紇 叔梁紇 臧疇臧賈 臧紇之昆弟也 三子與臧紇共在防 故夜送臧紇於旅松 而復還守防하니 齊師去之
注+失臧紇故 하다
齊人獲臧堅
注+堅 臧紇之族 하니 齊侯使夙沙衛唁之
하고 且曰 無死
注+使無自殺 하라 堅稽首曰 拜命之辱
하노이다
호되 姑又使其刑臣禮於士
라하고 以杙抉其傷而死
注+言使賤人來唁己 是惠賜不終也 夙沙衛 奄人 故謂之刑臣 [附注] 林曰 杙 小木也 椽屬 臧堅義不受辱 乃以杙自抉其所傷而死 하다
傳
[傳]冬
에 邾人伐我南鄙
하니 爲齊故也
注+齊未得志於魯 故邾助之 라
傳
[傳]宋華閱卒
하니 華臣弱皐比之室
注+臣 閱之弟 皐比 閱之子 弱 侵易之 하야 使賊殺其宰華吳
한대 賊六人以鈹殺諸盧門
之後
注+盧門 宋城門 合 向戌邑 後 屋後 [附注] 林曰 鈹刀 劒屬 合左師 向戌也 하다
左師懼曰 老夫無罪
라 賊曰 皐比私有討於吳
라하고 遂幽其妻
注+幽吳妻也 曰 畀余而大璧
注+畀 與也 [附注] 林曰 而 汝也 하라
宋公聞之
하고 曰 臣也
는 不唯其宗室是暴
라 大亂宋國之政
이니 必逐之
注+[附注] 林曰 華臣與華閱爲兄弟 故言不唯侵暴其宗室 使賊私殺華吳 是大亂宋國之政刑하리라 左師曰 臣也
도 亦卿也
라
大臣不順
이 國之恥也
니 不如蓋之
注+[附注] 林曰 不如蓋掩其罪勿問 라한대 乃舍之
하다
左師爲己短策
하야 苟過華臣之門
이면 必騁
注+惡之 [附注] 林曰 策 馬捶也 向戌悔其初謀之失 乃自爲短馬捶助御鞭馬 惡華臣 不欲與相見 故過其門 必馳聘而去 하다
十一月甲午
에 國人
瘈狗
注+[附注] 林曰 瘈狗 狂狗也 러니 瘈狗入於華臣氏
어늘
國人從之
한대 華臣懼
하야 遂奔陳
注+華臣 心不自安 見逐狗而驚走 하다
傳
[傳]宋皇國父爲大宰
하야 爲平公築臺
하니 妨於農收
注+周十一月 今九月 收斂時 라
築者謳曰 澤門之晳
은 實興我役
注+澤門 宋東城南門也 皇國父白晳而居近澤門 하고 邑中之黔
은 實慰我心
注+子罕黑色而居邑中 이로다
子罕聞之
하고 親執扑
注+扑 杖 하야 以行築者
하며 而抶其不勉者
注+[附注] 朱曰 以巡行於築臺者之所 見有不勉力者 以杖擊之 曰
吾儕小人
도 皆有
하야 以辟燥濕寒暑
注+闔 謂門戶閉塞 어늘 今君爲一臺
로되 而不速成
이면 何以爲役
注+役 事也 이리오 謳者乃止
注+[附注] 朱曰 謳者 本稱譽子罕 今子罕親自秩之 故不謳也 하다
或問其故
注+[附注] 林曰 或問子罕本欲緩役 今更督役 何故 한대 子罕曰 宋國區區
로 而
이면 禍之本也
注+傳善子罕分謗 [附注] 朱曰 譽子罕者爲祝 謗皇國父者爲詛 ᄅ새니라
傳
[傳]齊晏桓子卒
注+晏嬰父也 [附注] 林曰 晏弱也 커늘 晏嬰麤縗斬
注+斬 不緝之也 縗在胸前 麤 三升布 하고 苴絰帶杖
하고 菅屨
注+苴 麻之有子者 取其麤也 杖 竹杖 菅屨 草屨 [附注] 林曰 以苴麻爲首絰及帶 하고 食鬻
하며 居倚廬
하야 寢苫枕草
注+此禮與士喪禮略同 其異唯枕草耳 然枕凷亦非喪服正文 [附注] 林曰 廬倚東牆而爲之 故曰倚廬 苫 編草也 寢於編草之上 以草爲枕 하니
其老曰 非大夫之禮也
注+時之所行 「反」士及大夫縗服各有不同 晏子爲大夫而行士禮 其家臣不解 故譏之 라 曰 唯卿爲大夫
注+晏子惡直己以斥時失禮 故孫辭略答家老 [附注] 林曰 諸侯之制降於天子一等 故唯卿然後得用大夫之禮 라하다
17년 봄
주왕周王 2월
경오일庚午日에
주자邾子경牼이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주자邾子는 주선공邾宣公이다. 노魯나라와 네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여름에
위衛나라
석매石買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조曹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매買는 석직石稷의 아들이다.
가을에
제후齊侯는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여
도읍桃邑을
포위包圍하고,
고후高厚는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여
방읍防邑을
포위包圍하였다.
注+변현弁縣 동남쪽에 도허桃虛가 있다. [부주]林: 우리나라를 침벌侵伐할 때 대부大夫가 군대를 거느리고 쳐들어온 경우, 대부大夫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은공隱公 이래로 제齊나라가 우리나라에 쳐들어온 것을 기록할 때 모두 ‘인人’으로 기록하였다. 임금이 직접 군대를 거느렸을 경우, 임금을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문공文公 15년부터 비롯하고, 대부大夫가 군대를 거느렸을 경우 대부를 기록하기 시작한 것은 고후高厚로부터 비롯하였다.
9월에
우제雩祭를 지냈다.
注+전傳이 없다. 시기時期가 지난 뒤에 지냈기 때문에 기록한 것이다.
송宋나라
화신華臣이
진陳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注+종실宗室에 잔포殘暴한 짓을 하고 〈송宋나라의 정령政令를〉 어지럽혔으므로 두려워서 출분出奔한 것이다. 사실은 겨울에 출분出奔하였는데 가을에 출분出奔한 것으로 기록한 것은 처음 난亂을 일으켰을 때에 와서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겨울에 주인邾人이 우리나라의 남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였다.
傳
17년 봄에
송宋나라
장조莊朝가
진陳나라를 토벌하여
사도司徒앙卬을 사로잡았으니,
진陳나라가
송宋나라를 얕보았기 때문이다.
注+사도司徒앙卬은 진陳나라 대부大夫이다. 송宋나라를 얕보아 방비防備를 설치設置하지 않은 것이다. [부주]林: 장조莊朝는 송宋나라의 미천微賤한 자이다. 생포生捕하거나 살해殺害하는 것을 모두 ‘획獲’이라 한다.
傳
위衛나라
손괴孫蒯가
국경國境을 넘어
조수曹隧에서 사냥할 때
注+국경國境을 넘어가 사냥한 것이다. 손괴孫蒯는 손임보孫林父의 아들이다. 중구重丘에서 말에 물을 먹이다가
注+중구重丘는 조曹나라 읍邑이다. 물 항아리를 깨트리자,
중구인重丘人이 문을 닫고 꾸짖기를
注+후訽는 꾸짖는 것이다. [부주]林: 혹 병甁을 음기飮器로 삼기는 하지만 사리事理로 미루어 보면 말에 물을 먹이는 그릇과는 관계가 없는 듯하니, 가부可否를 모르겠다. “네 아비가 친히 임금을
축출逐出하였으니 네 아비는
여귀厲鬼가 되었을 것인데,
注+여厲는 악귀惡鬼이다. 손임보孫林父가 임금을 축출逐出한 일은 양공襄公 14년에 있었다. [부주]林: 이而는 여汝(너)이다. 손괴孫蒯의 아비가 친親히 너의 임금을 축출逐出했다는 말이다. 너는 그것은 근심하지 않고 어째서 사냥을 다니느냐?”고 하였다.
여름에
위衛나라
석매石買와
손괴孫蒯가
조曹나라를 쳐서
중구重丘를
취取하니,
注+경經에 손괴孫蒯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경卿이 아니기 때문에다. [부주]林: 손괴孫蒯는 중구인重丘人의 후욕詬辱(꾸짖으며 욕설辱說함)을 참을 수 없었기 때문에 조曹나라를 토벌討伐하여 중구重丘를 공격攻擊해 취取(占領)하여 사사로운 분원忿怨을 보복報復한 것이다. 조인曹人이
진晉나라에
고소告訴하였다.
注+명년明年에 진인晉人이 석매石買를 잡은 전傳의 배경이다.
傳
제인齊人이 지난번에 우리를
침공侵攻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注+전년前年에 성읍郕邑을 포위包圍하였을 때 맹유자孟孺子를 피해 돌아갔었다. 가을에
제후齊侯는 우리나라의 북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여
도읍桃邑를 포위하고
고후高厚는
방읍防邑에서
장흘臧紇을
포위包圍하였다.
注+방防은 장흘臧紇의 채읍采邑이다.
우리 군대가
양관陽關에서
출발出發해
장흘臧紇을
영접迎接하기 위해
여송旅松에 이르니,
注+양관陽關은 태산泰山거평현鉅平縣 동쪽에 있고, 여송旅松은 방읍防邑 가까이 있는 땅이다. 노군魯軍은 제군齊軍이 두려워 감히 방읍防邑까지 가지 못한 것이다. 추숙흘郰叔紇‧
장주臧疇‧
장고臧賈가
갑사甲士삼백三百을 거느리고 밤에 〈포위를 뚫고 나와〉
제군齊軍을
습격襲擊하여
장흘臧紇을
여송旅松으로 보내고는 다시
방읍防邑으로 돌아가니,
注+추숙흘郰叔紇은 숙량흘叔梁紇이고, 장주臧疇와 장고臧賈는 장흘臧紇의 형제兄弟이다. 세 사람은 장흘臧紇과 함께 방읍防邑에 있었기 때문에 밤에 장흘臧紇을 여송旅松으로 보내고 다시 돌아가 방읍防邑을 지킨 것이다. 제군齊軍이
노魯나라를 떠났다.
注+장흘臧紇을 놓쳤기 때문에 떠나간 것이다.
제인齊人이
장견臧堅을 사로잡으니,
注+장견臧堅은 장흘臧紇의 족속族屬이다. 제후齊侯가
숙사위夙沙衛를 보내어
위문慰問하고 또 ‘죽지 말라’
注+자살自殺하지 못하게 한 것이다. 고 하자,
장견臧堅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임금님의
명命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임금님께서는 죽지 말라는 명을 내리시되 일부러
환관宦官을 보내어
사인士人인
신臣에게
위문慰問의
예禮를
표表하게 하셨으니, 〈이는
신臣의
모욕侮辱입니다.〉”라고 하고서 나무 꼬챙이로 상처를 쑤셔 죽었다.
注+천인賤人을 보내어 와서 나를 위로하게 하였으니, 이는 은혜를 끝까지 베풀지 않은 것이라는 말이다. 숙사위夙沙衛는 엄인奄人(宦官)이기 때문에 그를 ‘형신刑臣’이라고 한 것이다. [부주]林: 익杙은 작은 나무로 서까래 따위이다. 장견臧堅은 의리로 보아 모욕侮辱을 받을 수 없다 하여 작은 나무로 그 상처를 쑤셔 죽은 것이다.
傳
겨울에
주인邾人이 우리나라의 남쪽
변읍邊邑을
침벌侵伐하였으니, 이는
제齊나라 때문이었다.
注+제齊나라가 노魯나라에서 뜻을 이루지 못하였기 때문에 주邾나라가 제齊나라를 돕기 위해 우리나라를 친 것이다.
傳
송宋나라
화열華閱이 죽으니
화신華臣은
고비皐比의 집을
약弱하게 보아,
注+화신華臣은 화열華閱의 아우이고, 고비皐比는 화열華閱의 아들이다. 약弱은 경시輕視해 침해侵害한 것이다. 적賊을 시켜 그
가재家宰화오華吳를 죽이게 하자, 6
인人의
적賊이
검劒으로
화오華吳를
노문盧門합좌사合左師(向戌)의 집 뒤에서 죽였다.
注+노문盧門은 송宋나라 성문城門이다. 합合은 상술向戌의 읍邑이고, 후後는 상술向戌의 집 뒤이다. [부주]林: 피도鈹刀는 검劍 따위이다. 합좌사合左師는 상술向戌이다.
좌사左師가 두려워하여 말하기를 “나는
죄罪가 없다.”고 하니,
적賊이 말하기를 “
고비皐比가
사적私的으로
화오華吳를 죽인 것입니다.” 하고서 드디어
화오華吳의 아내를
유폐幽閉하고서
注+화오華吳의 아내를 유폐幽閉한 것이다. 말하기를 “너의 큰
벽옥璧玉을 나에게 주라.”
注+비畀는 여與(줌)이다. [부주]林: 이而는 여汝(너)이다. 고 하였다.
송공宋公이 이 소식을 듣고 말하기를 “
화신華臣은 제
종실宗室에게
잔포殘暴한 짓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송宋나라의
정령政令을 크게 어지럽혔으니 반드시
축출逐出할 것이다.”
注+[부주]林: 화신華臣이 화열華閱과 형제兄弟였기 때문에 그 종실宗室을 잔포殘暴하게 침해侵害하였을 뿐만이 아니라 적賊을 시켜 사사로이 화오華吳를 죽였으니, 이것이 송宋나라의 정형政刑을 크게 어지럽힌 것이라는 말이다. 고 하자,
좌사左師가 말하기를 “
화신華臣도
경卿입니다.
대신大臣이 서로
불화不和하는 것은
국가國家의
수치羞恥이니 덮어 두는 것이 좋겠습니다.”
注+[부주]林: 그 죄罪를 덮어 두고 묻지 않는 것이 좋겠다는 말이다. 고 하니,
송공宋公은 곧 그를 그냥 두었다.
좌사左師는 자신을 위해 짧은 채찍을 만들어서
화신華臣의 문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에 채찍질을 하여 빨리 달렸다.
注+화신華臣을 미워했기 때문이다. [부주]林: 책策은 말채찍이다. 상술向戌이 당초에 잘못 생각했던 것을 후회後悔하여 스스로 짧은 말채찍을 만들어 어자御者를 도와 말에 채찍질을 한 것이다. 화신華臣을 미워해 서로 만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그 문 앞을 지날 때면 반드시 말을 급히 달려 지나간 것이다.
11월
갑오일甲午日에
국인國人이 미친개를 쫓으니
注+[부주]林: 계구瘈狗는 미친개이다. 그 개가
화신華臣의 집으로 들어갔다.
사람들이 그 개를 따라 들어가자
화신華臣은 겁을 먹고 드디어
진陳나라로 도망갔다.
注+화신華臣은 스스로 마음이 불안不安하여 미친개를 쫓는 것을 보고서 놀라서 도망간 것이다.
傳
송宋나라
황국보皇國父가
태재太宰가 되어
평공平公을 위해
대臺를
축조築造하니
농사農事의
수확收穫에
방해妨害가 되었다.
注+주정周正의 11월은 지금의 9월로 수확기收穫期이다.
자한子罕이 농사農事가 끝나기를 기다려 축조築造하기를 청請하니 평공平公은 허락許諾하지 않았다.
대臺를
축조築造하는
역부役夫들이 노래하기를 “
택문澤門에 사는 피부가 흰 이는 우리를 부역에
징발徵發하고,
注+택문澤門은 송宋나라 동성東城의 남문南門이다. 황국보皇國父는 얼굴이 희고 택문澤門근처近處에 살았다. 읍내邑內에 사는 피부가 검은 이는 우리의 마음을 위로하시네.”
注+자한子罕은 얼굴이 검고 읍내邑內에 살았다. 라고 하였다.
자한子罕은 이 노래를 듣고 몸소 채찍을 들고서
注+복扑은 막대이다. 축조築造하는
역부役夫 사이를
순행巡行하며 힘써 하지 않는 자들에게 채찍질을 하면서
注+[부주]朱: 축대築臺를 쌓는 일을 하는 자들이 있는 곳을 순행巡行하면서 힘써 하지 않는 자가 있는 것을 보면 막대로 친 것이다. 말하기를
“우리 같은
소인小人들도 모두 집이 있어
조습燥濕과
한서寒暑를 피하는데,
注+합闔은 문을 닫는 것이다. 지금 임금님이
대臺 하나를
축조築造하시는데 빨리
완성完成하지 않는다면 어찌 일을 했다고 할 수 있겠는가?”
注+역役은 일이다. 라고 하니, 노래 부르던 자들이 즉시 노래를 멈추었다.
注+[부주]朱: 노래하는 자들이 본래 자한子罕을 칭찬한 것인데, 지금 자한子罕이 몸소 스스로 매질을 하였기 때문에 노래하지 않은 것이다.
어떤 이가
자한子罕에게 그 까닭을 묻자,
注+[부주]林: 혹자或者가, 자한子罕이 본래 역사役事를 늦추고자 하였는데, 지금 도리어 역사役事를 독려督勵한 것은 무슨 까닭이냐고 물은 것이다. 자한子罕이 대답하기를 “
송宋나라는 작은 나라인데
저주咀呪와
칭송稱頌이 있으면
화란禍亂의
근원根源이 되기 때문이다.”
注+전문傳文은 자한子罕이 분방分謗(誹謗을 분담分擔함)한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부주]朱: 자한子罕을 칭찬稱讚하는 자는 송축頌祝하고, 황국보皇國父를 비방誹謗하는 자는 저주詛呪한 것이다. 고 하였다.
傳
제齊나라
안환자晏桓子가 죽자
注+안환자晏桓子는 안영晏嬰의 아버지이다. [부주]林: 안환자晏桓子는 안약晏弱이다. 안영晏嬰이 거친 삼베로 지은
참최복斬縗服을 입고 삼[麻]을 꼬아 만든
수질首絰을 쓰고
요대腰帶를 띠고
注+참斬은 아랫단을 꿰매지 않은 것이고, 최縗는 상복喪服의 앞가슴에 대는 삼베 조각이다. 추麤는 삼승포三升布이다. 상장喪杖을 짚고, 짚신을 신고,
注+저苴는 씨가 있는 삼[麻]이니 거친 것을 취한 것이다. 장杖은 죽장竹杖이고, 관구菅屨는 짚신이다. [부주]林: 저마苴麻로 수질首絰과 요대腰帶를 만든 것이다. 죽을 먹고
의려倚廬에
거처居處하며 거적을 깔고 짚으로 만든 베개를 베자,
注+이 예禮가 〈사상례士喪禮〉와 대략은 같고, 풀 베개를 베는 것만이 다를 뿐이다. 그러나 흙덩이를 베는 것[枕凷]도 〈상복喪服〉의 정문正文은 아니다. [부주]林: 동쪽 담에 붙여 여막廬幕을 세우기 때문에 ‘의려倚廬’라 한다. 점苫은 풀을 엮어 만든 거적이니, 풀을 엮어 만든 거적 위에 눕고 풀을 뭉쳐 베개로 삼는 것이다.
그
가로家老(家臣의
장長)가 “이는
대부大夫의
예禮가 아니다.”
注+당시當時에 행行하는 예禮는 사士와 대부大夫의 최복縗服이 각각 같지 않았다. 안자晏子는 대부大夫로서 사士의 예禮를 행하니, 그 가신家臣이 이해理解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넌지시 비꼰 것이다. 고 하니,
안영晏嬰이 말하기를 “오직
경卿이어야
대부大夫라 할 수 있다.”
注+안자晏子는 자신이 행하는 예禮가 옳다고 여겨 당시의 실례失禮를 배척排斥하기를 싫어하였다. 그러므로 겸손한 말로 간략하게 가로家老에게 답한 것이다. [부주]林: 제후諸侯의 제도制度는 천자天子에 비해 한 등等을 낮추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직 경卿인 뒤에야 대부大夫의 예禮를 쓸 수 있는 것이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