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년 봄에 숙궁叔弓이 진陳나라에서 초자楚子와 회합會合하였다.注+일이 있기 때문에 간 것이고 회례會禮를 행行하기 위해 간 것이 아니다. [부주]林: 제하諸夏의 대부大夫가 초楚나라에 여견旅見(여럿이 함께 알현謁見함)하기 시작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노魯나라를 들어 기타其他의 나라들도 그러하였다는 것을 드러내었다.
허許나라를 이夷로 옮겼다.注+허許나라는 정鄭나라를 겁내어 천도遷都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자의自意로 옮긴 것으로 글을 만들었다.
여름 4월에 진陳나라에 화재火災가 발생發生하였다.注+천화天火(저절로 나는 불)를 ‘재災’라 한다. 진陳나라가 이미 멸망滅亡해 강등降等되어 초楚나라의 현縣이 되었는데, 〈이 재해災害를 ‘초재楚災’로 기록하지 않고〉 ‘진재陳災’로 기록한 것은, 〈성공成公 5년에〉 진晉나라의 양산梁山이 무너진 것과 〈희공僖公 14년에〉 사록산沙鹿山이 무너진 것을 진晉나라에 매어 기록하지 않은 것과 같다. 재해災害는 재해災害가 발생한 곳에 매어 기록한다. 그러므로 재해災害가 발생한 곳으로써 명칭名稱한 것이다.
가을에 중손확仲孫貜이 제齊나라에 갔다.
겨울에 낭郎에 원유苑囿를 축조築造하였다.注+[부주]林: 유囿는 원苑이다. 낭郎 땅에 원유苑囿를 축조築造한 것이다.
傳
9년 봄에 노魯나라 숙궁叔弓, 송宋나라 화해華亥, 정鄭나라 유길游吉, 위衛나라 조염趙黶이 진陳나라에서 초자楚子와 회합會合하였다.注+초자楚子가 진陳나라에 있었기 때문에 네 나라 대부大夫가 간 것이고, 맹주盟主(楚子를 이름)가 부른 것이 아니므로 회례會禮를 거행擧行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참여參與한 대부大夫들을〉 다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傳
2월 경신일庚申日에 초楚나라 공자公子기질棄疾이 허許나라를 이夷로 옮겨 주었으니, 바로 성보城父이다.注+이때 성보城父의 이름을 이夷로 고쳤기 때문에 전傳에 ‘실實(바로)’이라고 한 것이다. 성부현城父縣은 초군譙郡에 속屬하였다.
주래州來의 회수淮水 이북의 토지土地를 취하여 허許나라에 보태주고注+허許나라에 토지土地를 보태준 것이다. , 오거伍擧가 허남許男에게 토지土地를 주었다.注+[부주]林: 오거伍擧가 신국新國의 토지土地의 도적圖籍(地圖와 호적戶籍)을 받들어 허남許男에게 준 것이다.
연단然丹이 성보城父의 백성들을 진陳나라 땅으로 옮기고서 이夷의 복수濮水이서以西의 토지土地를 보태주었다.注+복수濮水이서以西에 있는 이夷의 토지土地를 성보城父 사람에게 준 것이다.
방성산方城山 밖의 사람들을 허許나라로 옮겼다.注+성공成公 15년에 허許나라를 섭葉으로 옮기고서 〈국명國名을〉 그대로 ‘허許’라고 하였다. 지금 허許나라를 이夷로 옮겼기 때문에 방성산方城山 밖의 사람들을 옮겨 그곳(許)을 채운 것이다. 전문傳文은 초영왕楚靈王이 백성들을 불안不安하게 한 것을 말한 것이다.
“우리 주周나라는 하夏나라 때부터 후직后稷의 공로功勞로 〈봉지封地를 받아〉 위국魏國‧태국駘國‧예국芮國‧기국岐國‧필국畢國이 우리의 서방西方영토領土가 되었고注+하夏나라 때 후직后稷의 공로功勞로 이 다섯 나라를 받아 서토西土의 장長이 되었다는 말이다. 태駘는 시평始平무공현武功縣현치縣治(縣廳 소재지所在地)에 있는 이성釐城이다. 기岐는 부풍扶風미양현美陽縣 서북쪽에 있다. , 무왕武王이 상商나라를 이긴 뒤에 미쳐서는 포고蒲姑‧상엄商奄이 우리의 동방東方영토領土가 되고注+낙안樂安박창현博昌縣 북쪽에 포고성蒲姑城이 있다. ,
파巴‧복濮‧초楚‧등鄧이 우리의 남방南方영토領土가 되고, 숙신肅愼‧연燕‧박亳이 우리의 북방北方영토領土가 되었으니注+숙신肅愼은 북이北夷로 현도玄菟에서 북쪽으로 3천여 리 밖에 있다. , 우리 주周나라의 봉강封疆이 어찌 가직하겠는가?注+이邇는 근近이다. [부주]林: 우리 주周나라의 봉강封疆이 밖으로 사해四海에 닿았으니 어찌 가직함이 있겠느냐는 말이다.
문왕文王‧무왕武王‧성왕成王‧강왕康王께서 모제母弟를 제후諸侯로 세워 주周나라의 울타리가 되게 한 것은 왕실王室을 보좌輔佐하여 쇠퇴를 방지防止하게 하기 위함이었는데注+후대後代에 폐대廢隊(衰落)하면 형제兄弟 나라가 당연히 구제救濟하게 하기 위해서라는 말이다. , 어찌 〈왕실王室을〉 변모弁髦처럼 여겨 이로 인因하여 버려서야 되겠는가?注+변모弁髦는 〈관례冠禮할 때〉 동자童子가 모발毛髮을 늘어뜨리고서 처음 쓰는 관冠이다. 〈관례冠禮에는〉 반드시 세 차례 관冠을 바꾸어 쓰는데, 관례冠禮를 마친 뒤에는 처음에 썼던 관冠은 버린다. 그러므로 변모弁髦처럼 여겨 버린다고 말한 것이다. 변弁도 관冠이다. [부주]朱: 변弁은 치포관緇布冠이고, 모髦는 동자童子의 늘어진 모발毛髮을 이른다. 어찌 왕실王室 돕는 일을 가모加髦한 뒤에는 치포관緇布冠을 다시 쓸 필요가 없다하여 이로 인해 버리듯이 하느냐는 말이다. 대개 시관始冠의 예禮는 먼저 치포관緇布冠을 사용해 늘어진 모발毛髮을 걷어 올려 묶고, 세 차례 관冠을 쓰는 예禮를 마친 뒤에는 치포관緇布冠을 버리고 다시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이것을 비유譬喩로 삼은 것이다.
선왕先王이 도올檮杌 등 네 사람을 사예四裔(사방의 먼 변방邊方)로 내쳐 이매螭魅(妖怪)를 막게 하셨기 때문에注+도올檮杌을 말한 것은 사흉四凶 중의 하나만을 간략하게 들어 말한 것이다. 하문下文에 사예四裔를 말하였으니 삼묘三苗도 그 중에 포함包含된 것을 알 수 있다. 윤성允姓의 간악姦惡한 족속族屬이 과주瓜州에 거주居住하게 된 것인데注+윤성允姓은 음융陰戎의 조상祖上으로 삼묘三苗와 함께 삼위三危로 추방追放된 자이다. 과주瓜州는 지금의 돈황敦煌이다., 백부伯父혜공惠公이 진秦나라에서 돌아온 뒤에 융족戎族을 유인誘引해 와서注+희공僖公 15년에 진혜공晉惠公이 진秦나라에서 돌아왔고, 22년에 진秦나라와 진晉나라가 육혼陸渾의 융戎을 이천伊川으로 옮겼다. 그들로 하여금 우리 여러 희성국姬姓國을 핍박하고 우리 주周나라의 근교近郊까지 들어오게 하였으므로 융인戎人이 이에[焉] 이곳을 점유占有하였으니注+읍외邑外를 교郊라 하고, 교외郊外를 전甸이라 한다. 융戎이 주周나라의 교전郊甸의 땅을 취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부주]林: 만약 진혜공晉惠公이 융戎을 유인誘引해 끌어들이지 않았다면 융戎이 어떻게 주周나라 땅을 취取할 수 있었겠느냐는 말이다. , 융인戎人이 중국中國을 점유占有한 것이 누구의 잘못인가?注+잘못이 진晉나라에 있다는 말이다.
후직后稷이 봉식封殖(五穀을 가꿈)하던 천하天下를 지금 융인戎人이 목지牧地로 만들고 있으니 천자天子 노릇 하기가 어렵지 않겠는가?注+후직后稷이 봉강封疆을 정리整理하여 오곡五穀을 가꾸던 땅을 지금 융적戎狄이 차지하여 오직 목축牧畜만을 일삼는다는 말이다.
백부伯父는 깊이 생각하기 바란다.
내가 백부伯父에게 있어 의복衣服에 관면冠冕이 있고 나무에 뿌리가 있고 물에 근원根源이 있고 민인民人에 모주謀主가 있는 것과 같은데注+민인民人의 모주謀主는 종족宗族의 사장師長(宗族의 모범이 되는 어른)이다. ,
백부伯父가 만약 관을 찢고 면류관冕旒冠을 망가뜨리고 나무의 뿌리를 뽑고 물의 근원을 막고 모주謀主를 멋대로 버린다면 비록 융적戎狄이라 하더라도 어찌 여일인余一人(天子의 자칭自稱)을 무시하지 안중眼中에 두겠는가?”注+백부伯父도 오히려 그러하니 비록 융적戎狄이라 한들 꾸짖을 게 없다는 말이다. 진晉나라가 음융陰戎을 이끌고 와서 주周나라의 읍邑을 쳤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숙향叔向이 선자宣子(韓起)에게 말하기를 “〈우리 선군先君〉 문공文公께서 패자霸者가 되셨을 때 언제 옛 문물文物(禮樂制度)을 고친 적이 있었습니까?注+문공文公이 비록 패도정치霸道政治를 하였으나 정삭正朔과 복색服色을 바꾸지 않았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공文公 이후로는 대대代代로 덕德이 쇠衰하여 종주宗周(周王室)를 해치고 멸시蔑視하여注+종주宗周는 천자天子이다. 교만驕慢[侈]함을 드러내 보였으니, 제후諸侯가 두마음을 품는 것이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주왕周王의 말이 바르니 당신께서는 깊이 생각하소서.”라고 하니, 선자宣子가 기뻐하였다.
이때 주왕周王의 인척姻戚에 상사喪事가 나자注+외친外親의 상사喪事이다. , 선자宣子가 조성趙成을 보내어 주周나라로 가서 조상弔喪하고, 또 염읍閻邑의 토지土地와 수의襚衣를 바치고注+수襚는 사자死者를 장송葬送하는 옷이다. , 영읍潁邑을 공격攻擊할 때 잡은 포로捕虜를 돌려주었다.
그러자 주왕周王도 빈활賓滑을 시켜 감대부甘大夫양襄을 잡아 보내어 진晉나라를 기쁘게 하니, 진인晉人은 감대부甘大夫를 예우禮遇하여 돌려보냈다.注+빈활賓滑은 주周나라 대부大夫이다.
傳
여름 4월에 진陳나라에 화재火災가 발생發生하였다.
정鄭나라 비조裨竈가 말하기를 “5년 뒤에 진陳나라가 다시 봉封해지고 봉封해진 지 52년 뒤에 드디어 망亡할 것이다.”고 하였다.
자산子産이 그 까닭을 묻자, 비조裨竈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진陳나라는 수水에 속屬하였고注+진陳나라는 전욱顓頊의 후손後孫이기 때문에 수水에 속屬한다. 화火는 수水의 배우配偶로注+화火는 수水를 두려워하기 때문에 수水의 배우配偶라고 한 것이다. 초楚나라가 다스리는 바입니다.注+상相은 치治이다. 초楚나라 선조先祖축융祝融이 고신씨高辛氏의 화정火正(불을 맡은 장관長官)이 되어 불에 관한 일을 주관主管해 다스렸다.
지금 화성火星이 출현出現하자 진陳나라에 화재火災가 발생發生하였으니注+화火는 심성心星이다. 화성火星은 주정周正 5월에 출현出現하는데 4월에 출현出現한 것으로 말한 것은 장력長曆으로 추산推算해보면 전년前年에 윤월閏月을 잘못 넣었기 때문이다. , 이는 초인楚人을 몰아내고 진陳나라를 재건再建할 조짐입니다.注+수水가 비妃(火)를 얻으면 흥성興盛하니, 진陳(水)나라가 흥성興盛하면 초楚(火)나라가 쇠퇴衰頹한다. 그러므로 초인楚人을 축출逐出하고 진陳나라를 세운다고 한 것이다.
배합配合[妃]은 오五로써 이루어지기 때문에 ‘5년’이라 하였고注+비妃는 합合이다. 오행五行이 각각 서로 배합配合하는 데는 오五를 얻어 이루어지기 때문에 5년 뒤에 진陳나라가 다시 봉封해진다고 한 것이다. 13년에 진후陳侯오吳가 진陳나라로 돌아간 전傳의 배경이다. , 세성歲星이 다섯 차례 순화鶉火에 미친 뒤에 진陳나라가 마침내 망亡하고 초楚나라가 그 땅을 소유所有할 것이니, 이는 천도天道입니다.
그러므로 ‘52년’이라고 한 것입니다.”注+금년今年에 세성歲星이 성기星紀에 있으니 5년 뒤에 대량大梁에 이르면 진陳나라가 다시 봉封해진다. 세성歲星이 대량大梁에서 4년 뒤이면 순화鶉火에 미치고, 뒤이어 4주周하면 48년이 되니 세성歲星이 다섯 차례 순화鶉火에 미치기까지 모두 52년이다. 천수天數(陽數)는 오五를 기紀로 삼기 때문에 다섯 차례 순화鶉火에 미치면 화火가 성盛하여 수水가 쇠衰한다.
傳
진晉나라 순영荀盈이 제齊나라에 가서 제녀齊女를 아내로 맞이해 돌아오다가注+자기의 아내를 삼기 위해 제녀齊女를 맞이한 것이다. 6월에 희양戲陽에서 졸卒하였다.注+위군魏郡내황현內黃縣 북쪽에 희양성戲陽城이 있다.
강絳에 빈殯하고 아직 장사葬事 지내기 전인데, 진후晉侯(平公)가 술을 마시며 음악을 연주演奏하자, 선재膳宰(廚房長) 도괴屠蒯가 달려 들어가서 평공平公을 도와 술을 따르기를 청하니注+진평공晉平公이 사람을 시켜 술잔을 잡고 술을 따르게 하였기 때문에 그의 보좌補佐가 되기를 청한 것이다. 평공平公이 허락하였다.注+평공平公이 허락한 것이다.
그는 드디어 술을 따라 악공樂工에게 마시게 하며注+공工은 악사樂師사광師曠이다. 말하기를 “그대는 임금의 귀가 되었으니 밝게 듣는 일을 맡았다.注+락樂은 귀를 밝게 하는 것이다.
지지地支[辰]가 자子나 묘卯에 있는 날을 질일疾日(忌日)이라 하여注+질疾은 미워함이다. 상주商紂가 갑자일甲子日에 죽고, 하걸夏桀이 을묘일乙卯日에 죽었기 때문에 국군國君은 이 날을 기일忌日로 여긴다. 임금도 음악을 철거撤去하고 음악을 배우는 자도 학업學業을 정지停止하니, 이는 질일疾日이기 때문이다.注+[부주]林: 학인學人은 음악音樂을 학습學習하는 자이다.
임금의 경좌卿佐를 고굉股肱이라 하니 고굉股肱이 이지러지면 이만한 아픔이 어디 있겠는가?注+심한 미움이 기일忌日보다 더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그대는 〈경좌卿佐의 죽음을〉 못 들은 체하고서 음악을 연주하였으니 이는 밝게 듣지 않은 것이다.”注+이런 의리를 못 들은 체하고서 음악을 연주한 것이다. 고 하고, 또 술을 따라 외폐外嬖폐숙嬖叔에게 마시게 하며注+외도外都의 대부大夫 중에 사랑하는 자이다. 말하기를 “그대는 임금의 눈이 되었으니 밝게 보는 일을 맡았다.注+직책職責이 외도外都에 있기 때문에 보는 일을 주主로 삼는다.
복장服裝으로 길흉吉凶의 예禮를 표현表現하고注+정旌은 드러냄이다. [부주]朱: 길사吉事와 흉사凶事에 다른 예禮를 의복衣服을 지어 표현表現하니, 이를테면 변면弁冕‧최마衰麻(喪服) 같은 유類이다. 예禮로써 길흉吉凶의 일을 행하니注+사事는 정령政令이다. , 일에는 〈길사吉事흉사凶事 등의〉 유類[物]가 있고注+물物은 유類이다. [부주]朱: 애사哀事에는 곡읍哭泣이 있고, 낙사樂事에는 가무歌舞가 있는 유類와 같은 것이다. 유類에는 그 일에 합당한 용모容貌가 있다.注+용容은 모貌이다. [부주]朱: 최마衰麻를 입은 사람은 슬픈 기색氣色이 있고, 단면端冕(玄端服과 면관冕冠)을 착용着用한 사람은 공경하는 기색이 있는 유類 같은 것이다.
그런데 지금 임금님의 용모容貌가 그 유類에 맞지 않은데도注+경좌卿佐의 상喪이 있는데도 음악音樂을 연주演奏하며 즐겁게 연회宴會하였기 때문에 그 유類에 맞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그대는 못 본체하였으니 이는 밝게 보지 않은 것이다.”고 하고, 또 술을 따라 스스로 마시며 말하기를 “구미口味로써 혈기血氣를 유통流通시키고 혈기血氣로써 의지意志를 충실充實하게 하며注+심기心氣가 화평和平하면 의지意志가 충실充實해진다는 말이다. , 의지意志로써 언어言語를 결정決定하고注+마음속에 있는 것을 의지意志라 하고 입에서 나오는 것을 언어言語라 한다. [부주]朱: 의지意志가 이미 충만充滿해졌기 때문에 그 언어言語를 결정決定할 수 있다. 언어言語로써 명령命令을 내는 것입니다.注+[부주]朱: 언어言語가 상심詳審(詳細하고 정중鄭重함)하기 때문에 호령號令을 발표發表할 수 있다.
신臣은 바로 구미口味 돋우는 일을 맡은 관리官吏이니, 두 시어侍御가 맡은 일을 잃었는데도 임금님께서 명命을 내려 처벌處罰하지 않으시는 것은 신臣의 죄罪입니다.”注+악공樂工과 폐숙嬖叔은 임금을 모시는 자이다. 실관失官은 귀로써 밝게 듣지 않고 눈으로써 밝게 보지 않은 것을 이른다. [부주]朱: 도괴屠蒯는 지금 두 어자御者가 모두 직분職分을 제대로 수행修行하지 못하였는데도 우리 임금께서 명령命令을 내려 그들에게 죄罪를 주지 않으신 것은, 필시 내가 조리調理한 음식의 맛이 합당合當하지 않아서이니, 이는 죄罪가 나에게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그러므로 스스로 자신을 벌罰한 것이다. 고 하니, 평공平公이 기뻐하여 주연酒宴을 철거撤去하였다.
傳
당초當初에 진평공晉平公은 지씨知氏(荀氏)를 폐기廢棄하고서 자기의 외폐外嬖를 대신 그 자리에 세우고자 하였는데, 이번에 도괴屠蒯의 말을 듣고는 마음을 고쳐먹고 그 일을 그만두었다.注+[부주]林: 이에 앞서 진평공晉平公은 순영荀盈이 죽은 기회期會를 이용해 지씨知氏를 폐기廢棄하고 경卿으로 세우지 않고자 하였다. 지씨知氏는 바로 순씨荀氏이다.
가을 8월에 순락荀躒을 하군下軍의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스스로 해명解明하였다.注+역躒은 순영荀盈의 아들 지문자知文子이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하군下軍의 부원수副元帥가 된 것이다. 설說은 평공平公이 스스로 해설解說한 것이다.
傳
맹희자孟僖子가 제齊나라에 가서 은빙殷聘(많은 예물禮物을 가지고 가서 빙문聘問함)하였으니 예禮에 맞았다.注+〈양공襄公 20년에〉 숙로叔老가 제齊나라에 빙문聘問한 뒤로 지금까지 20년 동안 교린交隣의 예의禮意가 오래 폐지廢止되었는데, 지금 성대盛大한 빙례聘禮를 수행修行하여 옛 우호友好를 잊지 않았기 때문에 ‘예禮에 맞았다’고 한 것이다.
傳
겨울에 낭郞에 원유苑囿를 축조築造하였다.
경經에 이를 기록한 것은 시기時期에 맞았기 때문이다.
계평자季平子가 이 원유苑囿를 속히 완성完成하려 하니, 숙손소자叔孫昭子가 말하기를 “《시경詩經》에 ‘처음 계획을 세워 〈영대靈臺를 축조築造할 때〉 서둘지 말라고 하였으나, 서민庶民들이 아비의 일에 자식이 달려오듯이 하였다.’注+시詩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영대편靈臺篇〉의 시구詩句이다. 문왕文王이 처음 영대靈臺의 영건營建을 계획할 때 빨리 완성完成하려 하지 않았으나, 백성들이 자식의 의리義理로 달려와서 서로 권면勸勉하며 즐겁게 일을 하였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고 하였으니, 완성을 서둘러 백성들을 근로勤勞시킬 게 뭐 있습니까?注+초勦는 노勞이다.
원유苑囿가 없는 것은 오히려 괜찮지만 백성이 없으면 어찌 나라가 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以事往 非行會禮 :
小國이 大國을 섬기는[事]禮로 간 것이고, 楚子의 부름을 받고 가서 會合한 것이 아니다. 〈正義〉
역주2加髦 :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늘어진 毛髮을 걷어 올려 묶고 冠을 쓰는 것을 말한 듯하다.
역주3四凶 :
文公 18년 傳에 “舜이 堯의 臣下가 되어, 네 凶族인 渾敦‧窮奇‧檮杌‧饕餮을 내쳐 四方의 먼 邊方으로 보내어 螭魅(사람을 해치는 妖怪)를 막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先儒는 모두 “渾敦은 驩兜이고, 窮奇는 共工이고, 檮杌은 鯀이고, 饕餮은 三苗이다.”고 하였다. 〈正義〉
역주4下[中] :
저본에는 ‘下’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中’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父[公] :
저본에는 ‘父’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公’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陳 水屬 :
顓頊이 水德으로 天下를 다스렸기 때문에 그 後孫인 陳나라가 水에 屬한다고 한 것이다. 〈正義〉
역주7火水妃 :
火는 離이고 水는 坎이다. 離는 中女이고 坎은 中男이기 때문에 火가 水의 妃가 된다고 한 것이다. 〈正義〉
역주8令[合] :
저본에는 ‘令’으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合’으로 바로잡았다.
역주9樂所以聰耳 :
音樂은 마음을 和平하게 한다. 소리가 귀로부터 들어가기 때문에 ‘음악은 귀를 밝게 하는 것이다.’고 한 것이다. 〈正義〉
역주10痛疾 :
杜氏는 疾日의 ‘疾’을 ‘惡’로 訓解하였으니, 痛疾도 甚惡의 뜻으로 말한 것이다.
역주11禮以行事 :
禮로써 吉凶의 일을 행하는 것이라고 한 《左氏會箋》의 說을 취해 번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