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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6)

춘추좌씨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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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추좌씨전(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經]十有二年春 齊高偃帥師納北燕伯于陽注+三年 燕伯出奔齊 高偃 高傒玄孫 齊大夫 陽卽唐 燕別邑 中山有唐縣 不言于燕 未得國都 [附注] 林曰 於是齊景公有志於復霸하다
[經]三月壬申 鄭伯嘉卒注+五同盟하다
[經]夏 宋公使華定來聘注+定 華椒孫하다
[經]公如晉하야 至河乃復注+晉人以莒故辭公하다
[經]五月 葬鄭簡公注+三月而葬 速하다
[經]楚殺其大夫成熊注+傳在葬簡公上 經從赴 [附注] 林曰 成熊 卽成虎하다
[經]秋七月이라
[經]冬十月 公子憖出奔齊注+書名 謀亂故也하다
[經]楚子伐徐注+書圍 하다
[經]晉伐鮮虞注+不書將帥 史闕文 [附注] 始伐鮮虞也 鮮虞本姬姓狄晉也 晉主諸夏之盟 春秋之狄秦 以晉故也 狄鄭亦以晉故也 則其狄晉何 晉之君卿 無中國之志也 於是楚方橫行中原 而晉獨從事於鮮虞 雖吳郢 於越入吳 晉猶圍鮮虞也 於是狄晉 以其無復中國之志也 하다
[傳]十二年春 齊高偃納北燕伯款于唐하니 因其衆也注+言因唐衆欲納之 故得先入唐
[傳]三月 鄭簡公卒하다
將爲葬除注+除葬道할새 及游氏之廟注+游氏 子大叔族하야 將毁焉하다
子大叔使其除徒執用以立하야 而無庸毁注+用 毁廟具曰 子産過女하야 而問何故不毁오어든 乃曰 不忍廟也
하니 將毁矣注+敎毁廟者之辭라하라
旣如是하니 子産乃使辟之注+[附注] 朱曰 子産亦不忍毁其廟 使迂道而避之하다
司墓之室有當道者注+簡公別營葬地 不在鄭先公舊墓 故道有臨時迂直也 司墓之室 鄭之掌公墓大夫徒屬之家하야 毁之則朝而塴注+塴 下棺 [附注] 林曰 道直 故早朝而下棺하고 弗毁則日中而塴이라
子大叔請毁之曰 無若諸侯之賓何注+不欲久留賓 子産曰 諸侯之賓能來會吾喪하니 豈憚日中이리오
無損於賓하고 而民不害하니 何故不爲리오하고 遂弗毁하야 日中而葬하다
君子謂
子産於是乎知禮로다
禮無毁人以自成也니라
[傳]夏 宋華定來聘하니 通嗣君也注+宋元公 新卽位
享之 爲賦한대 弗知하고 又不答賦注+蓼蕭 詩小雅 義取燕笑語兮 是以有譽處兮 樂與華定燕語也 又曰 旣見君子 爲龍爲光 欲以寵光賓也 又曰 宜兄宜弟 令德壽凱 言賓有令德 可以壽樂也 又曰 和鸞雍雍 萬福攸同 言欲與賓同福祿也 하다
昭子曰
必亡이로다
宴語之不懷注+懷 思也하고 寵光之不宣注+宣 揚也 하고 令德之不知하고 同福之不受하니 將何以在注+爲二十年華定出奔傳리오
[傳]齊侯衛侯鄭伯如晉하니 朝嗣君也注+晉昭公新立
公如晉注+亦欲朝嗣君하야 至河乃復하다
取郠之役注+在十年 莒人愬于晉이나 晉有平公之喪하야 未之治也
故辭公注+[附注] 林曰 辭公之朝 不肯受하다
公子憖遂如晉注+憖 魯大夫 如晉不書 還不復命而奔 故史不書於策하다
[傳]晉侯享諸侯 子産相鄭伯이러니 辭於享注+[附注] 林曰 請辭享禮하고 請免喪而後聽命注+簡公未葬 한대 晉人許之하니 禮也注+善晉不奪孝子之情
晉侯以侯宴 中行穆子相注+穆子 荀吳하다
投壺 晉侯先한대 穆子曰 有酒如淮하고 有肉如坻注+淮 水名 坻 山名로다
寡君中此 爲諸侯師리라 中之하다
齊侯擧矢曰 有酒如澠하고 有肉如陵注+澠水出齊國臨淄縣北 入時水 陵 大阜也이로다
寡人中此 與君代興注+代 更也하리라 亦中之하다
伯瑕謂穆子注+伯瑕 士文伯 曰 子失辭로다
吾固師諸侯矣 壺何爲焉이완대 其以中儁也注+言投壺中 不足爲儁異
齊君弱吾君하니 歸弗來矣注+欲與晉君代興 是弱之리라 穆子曰 吾軍帥彊禦하고 卒乘競勸注+[附注] 林曰 我三軍諸帥强盛禦止 步卒車乘 競强勸勉 今猶古也하니 注+言晉德不衰於古 齊不事晉 將無所事 리오
公孫傁趨進曰 日旰君勤하니 可以出矣라하고 以齊侯出注+傁 齊大夫 傳言晉之衰하다
[傳]楚子謂成虎若敖之餘也라하야 遂殺之注+成虎 令尹子玉之孫 與鬪氏同出於若敖 宣四年 鬪椒作亂 今楚子信譖 而託討若敖之餘하다
或譖成虎於楚子하니 成虎知之 而不能行하다 書曰楚殺其大夫成虎라하니 懷寵也注+解經所以書名
[傳]六月 葬鄭簡公注+傳終子産辭享 明旣葬則爲免喪 經書五月 誤하다
[傳]晉荀吳僞會齊師者하야 假道於鮮虞하야 遂入昔陽注+鮮虞 白狄別種 在中山新市縣 昔陽 肥國都 樂平沾縣東有昔陽城 하다
秋八月壬午 滅肥하고 以肥子緜臯歸注+肥 白狄也 緜臯 其君名 鉅鹿下曲陽縣西南有肥累城 爲下晉伐鮮虞起하다
[傳]周原伯絞虐하니 注+原伯絞 周大夫原公也 輿 衆也 曹 群也하다
冬十月壬申朔 原輿人逐絞하고 而立公子跪尋注+跪尋 絞弟 하니
絞奔郊注+郊 周地 하다
[傳]甘簡公無子하니 立其弟過注+甘簡公 周卿士하다
過將去成景之族注+成公景公皆過之先君한대 成景之族賂劉獻公注+欲使殺過 劉獻公 亦周卿士 劉定公子하야 丙申 殺甘悼公注+悼公 卽過하고 而立成公之孫鰌注+鰌 平公하다
丁酉 殺獻大子之傅庾皮之子過注+하고 殺瑕辛于市하고 及宮嬖綽王孫沒劉州鳩陰忌老陽子注+六子 周大夫 及庾過 皆甘悼公之黨 傳言周衰 原甘二族所以遂微하다
[傳]季平子立하야 而不禮於南蒯注+蒯 南遺之子 季氏費邑宰 하다
南蒯謂子仲注+子仲 公子憖 하되 吾出季氏하고 而歸其室於公注+室 季氏家財 하리니 子更其位注+更 代也 하라
我以費爲公臣注+[附注] 林曰 我以費邑爲公家臣 하리라
子仲許之하니 南蒯語叔仲穆子하고 且告之故注+穆子 叔仲帶之子叔仲小也 語以欲出季氏 以不見禮故 하다
季悼子之卒也 叔孫昭子以爲卿注+悼子季武子之子平子父也 傳言叔孫之見命 乃在平子爲卿之前 이러니 及平子伐莒克之하야 更受三命注+十年 平子伐莒 以功加三命 昭子不伐莒 亦以例加爲三命하다
叔仲子欲構二家注+欲構使相憎하야 謂平子曰 三命踰父兄하니 非禮也注+言昭子受三命 自踰其先人 平子曰 然하다
故使昭子注+使昭子自貶黜하다
昭子曰 叔孫氏有家禍하야 殺適立庶注+[附注] 林曰 殺適子仲壬 立庶子婼 故婼也及此注+禍在四年하니 若因禍以斃之 則聞命矣注+言因亂討己 不敢辭어니와 若不廢君命注+[附注] 林曰 若不廢棄魯君命卿之典이면 則固有著矣注+著 位次니라
昭子朝하야 而命吏曰 婼將與季氏訟하리니 書辭無頗注+頗 偏也하라
季孫懼하야 而歸罪於叔仲子하다
故叔仲小南蒯公子憖謀季氏하다
憖告公하고 而遂從公如晉注+憖 子仲하다
子仲還 及衛하야 聞亂하고 逃介而先注+介 副使也 [附注] 林曰 自晉歸至衛 聞季氏之亂 逃其副先歸타가 及郊하야 聞費叛하고 遂奔齊注+言及郊 解經所以書出하다
南蒯之將叛也 其鄕人或知之하고 過之而歎注+鄕人過蒯而歎하며 且言曰 注+恤恤 憂患 湫 愁隘 攸 懸危之貌로다
深思而淺謀하고 邇身而遠志하고 家臣而君圖注+家臣而圖人君之事 故言思深而謀淺 身近而志遠 하는 有人矣哉注+言今有此人 微以感之로다
南蒯枚筮之注+不指其事 汎卜吉凶하야 遇坤☷☷注+坤下坤上 坤 之比☵☷注+坤下坎上 比 坤六五爻變하니 曰黃裳元吉注+坤六五爻辭이라
以爲大吉也라하야 示子服惠伯曰 卽欲有事하니 何如 惠伯曰
吾嘗學此矣注+[附注] 林曰 言我嘗學易 而知此義矣 忠信之事則可어니와 不然이면 必敗리라
外彊內溫 忠也注+坎險故彊 坤順故溫 彊而能溫 所以爲忠 注+水和而土安 正和正信之本也
故曰黃裳元吉이라하니라
中之色也 下之飾也 善之長也 中不忠이면 不得其色注+言非黃하고 下不共이면 不得其飾注+不爲裳 [附注] 朱曰 爲下不恭 非裳之義하고 事不善이면 注+失中德 [附注] 朱曰 行事不善 非元之義 極 至也 言止於至善이라
外內倡和爲忠注+不相違也 [附注] 朱曰 君倡於內 臣和於外 故謂之忠이오 率事以信爲共注+率 猶行也 이오 供養爲善注+三德 謂正直剛克柔克也 [附注] 朱曰 以志意供給長養之 剛則抑之 柔則進之 使合於正直 故謂之善이니 非此三者 弗當注+非忠信善 不當此卦이라
且夫易 不可以占險이니 將何事也
且可飾乎注+夫易 猶此易 謂黃裳元吉之卦 問其何事 欲令從下之飾
中美能黃이오 上美爲元이오 下美則裳注+[附注] 林曰 心居中 故其美者 能爲黃色 元首居上 故其美者爲之義 足居下 故其美者 爲下裳之服 이니 參成可筮注+參美盡備 吉可如筮어니와 猶有闕也 筮雖吉이라도 未也注+有闕 謂不參成
將適費할새 飮鄕人酒注+南蒯自其家還適費러니 鄕人或歌之曰
我有圃하니 生之杞乎注+言南蒯在費欲爲亂 如杞生於園 非宜也 杞 世所謂杞也ᄂ저
從我者子乎注+子 男子之通稱 言從己可不失今之尊 去我者鄙乎注+[附注] 林曰 去我必至爲人之所鄙薄 倍其鄰者恥乎注+鄰 猶親也 [附注] 林曰 倍叛其親 必有恥辱之事ᄂ저
非吾黨之士乎注+已乎已乎 言自遂不改ᄂ저
平子欲使昭子逐叔仲小注+欲以自解說하니
小聞之하고 不敢朝하다 昭子命吏하야 謂小待政於朝曰 吾不爲怨府注+言不能爲季氏逐小 生怨禍之聚 爲明年叔弓圍費傳하노라
[傳]楚子狩于州來注+狩 冬獵也하야 次于潁尾注+潁水之尾 在下蔡西하야 使蕩侯潘子司馬督囂尹午陵尹喜帥師圍徐하야 以懼吳注+五子 楚大夫 徐 吳與國 故圍之以偪吳하고 楚子次于乾谿注+在譙國城父縣南하야 以爲之援하다
雨雪하니 王皮冠하고 秦復陶注+秦所遺羽衣也하고 翠被注+以翠羽飾被하고 豹舃注+以豹皮爲履하고 執鞭以出注+執鞭以敎令하니 僕析父從注+楚大夫하다
右尹子革夕注+子革 鄭丹 夕 莫見하니 王見之할새 去冠被하고 舍鞭注+敬大臣하고 與之語曰 昔我先王熊繹注+楚始封君與呂級注+齊大公之子丁公王孫牟注+衛康叔子康伯燮父注+晉唐叔之子禽父注+周公子伯禽竝事康王注+康王 成王子 四國皆有分이나 我獨無有注+四國 齊晉魯衛 分 珍寶之器하니라
今吾使人於周하야 求鼎以爲分하노니 王其與我乎 對曰 與君王哉ᄂ저
昔我先王熊繹辟在荊山注+在新城沶鄕縣南 篳路藍縷 以處草莽注+[附注] 朱曰 以柴爲車 而衣弊衣 居於草莽之中하고 跋涉山林하야 以事天子호되 唯是桃弧棘矢王事注+桃弧棘矢 以禦不祥 言楚在山林 少所出有니이다
王舅也注+成王母 齊大公女 晉及魯衛 王母弟也
楚是以無分하고 而彼皆有注+[附注] 朱曰 唐叔 成王母弟 周公康叔 武王母弟也 楚獨疎遠 不得分器 彼四國 至親 故皆得之 니이다
今周與四國服事君王하야 將唯命是從하니 豈其愛鼎이릿가
王曰 昔我皇祖伯父昆吾 舊許是宅注+陸終氏生六子 長曰昆吾 少曰季連 季連 楚之祖 故謂昆吾爲伯父 昆吾嘗居許地 故曰舊許是宅이어늘 今鄭人貪賴其田하야 而不我與注+[附注] 林曰 此時舊許之地屬鄭 故云鄭人貪賴其土田 不以其地還我하니 我若求之 其與我乎 對曰 與君王哉ᄂ저
周不愛鼎이어니 鄭敢愛田이릿가
王曰 昔諸侯遠我而畏晉注+[附注] 林曰 昔中國諸侯 遠其楚國 而畏晉之强이나 今我大城陳蔡不羹하야 賦皆千乘하니
有勞焉注+[附注] 林曰 子 謂子革 與宣勞效於此四邑이라
諸侯其畏我乎 對曰畏君王哉ᄂ저
是四國者 專足畏也注+四國 陳蔡二不羹 [附注] 林曰 其兵力 專足使人畏어늘 又加之以楚하니 敢不畏君王哉릿가
工尹路請曰 君王命剝圭以爲鏚柲注+鏚 斧也 柲 柄也 破圭玉以飾斧柄하시니 敢請命注+請制度之命 하노이다 王入視之하다
析父謂子革호대 吾子 楚國之望也어늘 今與王言如響하니 國其若之何注+譏其順王心如響應聲 [附注] 林曰 其如楚國之望何 子革曰 摩厲以須라가 王出이면 吾刃將斬矣注+以己喩鋒刃 欲自摩厲 以斷王之淫慝 리라
王出하야 復語注+[附注] 林曰 又與子革語 左史倚相趨過注+倚相 楚史名 하니 王曰 是良史也 子善視之注+[附注] 林曰 令善待之하라
是能讀三墳五典八索九丘注+皆古書名 [附注] 朱曰 孔安國書序云 伏羲神農黃帝之書 謂之三墳 少顓頊高辛唐虞之書 謂之五典 八卦之說 謂之八索 九州之志 謂之九丘하니라 對曰 臣嘗問焉호대 昔穆王欲其心注+周穆王 肆 極也하야 周行天下하야 將皆必有車轍馬跡焉注+[附注] 林曰 欲車馬轍跡 無所不徧하니
하야 以止王心注+謀父 周卿士 祈父 周司馬 世掌甲兵之職 招其名 祭公方諫遊行 故指司馬官而言 此詩逸이라
王是以獲沒於祗宮注+獲沒 不見簒弑 [附注] 朱曰 祗宮 离宮之名이라하고 臣問其詩한대 而不知也하니
若問遠焉이면 其焉能知之注+[附注] 林曰 言問穆王近事 且不知 若問三墳五典之遠事 倚相又安能該通其義릿가
王曰 子能乎 對曰 能이니이다
其詩曰 祈招之愔愔이여
昭德音注+愔愔 安和貌 式 用也 昭 明也 [附注] 林曰 言祈父掌甲兵 愔愔然安和不用이로다
思我王度하니 式如玉하고 式如金注+金玉 取其堅重 [附注] 林曰 思我王室之法度 用如玉之堅 用如金之重이로다
形民之力하고 而無醉飽之心注+言國之用民 當其力任 如金冶之器 隨器而制形 故言形民之力 去其醉飽過盈之心 [附注] 林曰 蓋是時 穆王遠游 過用民力 宴飮無度 故其詩如此이로다하니이다 王揖而入하야 饋不食하고 寢不寐 數日注+深感子革之言이로되 不能自克하야 以及於難注+克 勝也 [附注] 林曰 不能自勝其私欲 以及於簒弑之難하니라
仲尼曰 古也有志注+[附注] 林曰 志 書也하니 克己復禮 仁也하니 信善哉注+[附注] 朱曰 誠哉是言之善也ᄂ저
楚靈王若能如是 豈其辱於乾谿
[傳]晉伐鮮虞하니 因肥之役也注+肥役在此年


12년 봄에 나라 고언高偃이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북연백北燕伯양읍陽邑으로 들여보냈다.注+소공昭公 3년에 연백燕伯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고언高偃고혜高傒현손玄孫으로 나라 대부大夫이다. 양읍陽邑은 바로 당읍唐邑으로 나라의 별읍別邑이다. 중산中山당현唐縣이 있다. 으로 들여보냈다고 말하지 않은 것은 아직 국도國都를 얻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이때 제경공齊景公패업霸業회복回復할 뜻을 가졌다.
3월 임신일壬申日정백鄭伯(簡公) 하였다.注+나라와 다섯 차례 동맹同盟하였다.
여름에 송공宋公화정華定을 보내어 와서 빙문聘問하였다.注+화정華定화초華椒의 손자이다.
소공昭公나라에 가기 위해 출발出發하여 황하黃河 가에 이르렀을 때 〈진인晉人사절謝絶하니〉 이에 되돌아왔다.注+진인晉人나라가 나라를 친 일로 인해 소공昭公사절謝絶한 것이다.
5정간공鄭簡公장사葬事 지냈다.注+석 달 만에 장사葬事 지냈으니 너무 빨랐다.
나라가 그 대부大夫성웅成熊을 죽였다.注+에는 〈이 기사記事가〉 장간공葬簡公 위에 있다. 에 〈이 기사記事장간공葬簡公 아래에 있는 것은 간공簡公장후葬後부고赴告가 왔기 때문에〉 부고赴告를 따른 것이다. [부주]林: 성웅成熊은 곧 성호成虎이다.
가을 7월이다.
겨울 10월에 공자公子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注+이름을 기록한 것은 을 도모하였기 때문이다.
초자楚子나라를 쳤다.注+포위包圍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건계乾谿에 군대를 주둔駐屯시켰다고 통고通告하였기 때문이다.
나라가 선우鮮虞를 토벌하였다.注+장수將帥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관史官이 글을 빠뜨린 것이다. [부주]林: 처음 선우鮮虞를 토벌한 것이다. 선우鮮虞는 본래 희성姬姓이다. 나라를 융적戎狄으로 여긴 것이다. 나라는 중원中原제후諸侯회맹會盟주재主宰하는 맹주盟主이니 《춘추春秋》에 나라를 이적夷狄으로 여긴 것은 나라 때문이고 나라를 이적夷狄으로 여긴 것도 나라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라를 이적夷狄으로 여긴 것은 어째서인가? 나라의 군신君臣중국中國에 뜻(中國의 질서秩序를 바로 세우려는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라가 바야흐로 중원中原횡행橫行하는데도 〈이를 견제牽制하지 않고〉 나라는 오직 선우鮮虞 토벌에만 전력專力하고, 오인吳人(楚의 국도國都)으로 쳐들어가고 나라가 나라로 쳐들어가는데도 나라는 오히려 선우鮮虞포위包圍하였으므로 이에 나라를 융적戎狄으로 여긴 것이니, 이는 나라가 다시 중국中國에 뜻이 없었기 때문이다.
12년 봄에 나라 고언高偃북연백北燕伯으로 들여보냈으니 이는 당읍唐邑 사람들의 요구要求에 따른 것이다.注+당읍唐邑민중民衆이 그를 받아들이고자 하였기 때문에 먼저 당읍唐邑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는 말이다.
3월에 정간공鄭簡公하였다.
장차 장사를 지내기 위해 길을 낼 때注+장도葬道(葬事 때 영구靈柩가 지나가는 길)를 닦은 것이다. 〈길을 막고 있는〉 유씨游氏가묘家廟에 미쳐注+유씨游氏자태숙子太叔종족宗族이다. 가묘家廟를 헐고자 하였다.
자태숙子太叔(游吉)이 길을 내는 인부人夫들에게 기구器具을 들고 서 있기만 하고 가묘家廟를 헐지 말게 하며注+가묘家廟를 허는 용구用具이다. 말하기를 “자산子産이 너희들 앞을 지나면서 무엇 때문에 헐지 않느냐고 묻거든 너희들은 ‘차마 사당祠堂을 헐 수 없어서입니다.
그러나 이미 헐기로 승낙하였으니 장차 헐겠습니다.’注+가묘家廟을 헐 자들에게 가르친 말이다. 고 대답하라.”고 하였다.
이윽고[旣] 〈자산子産이 와서 묻자 인부人夫들이 자태숙子太叔이〉 시킨 대로 말하니, 자산子産은 곧 가묘家廟를 피해 다른 곳으로 길을 내게 하였다.注+[부주]朱: 자산子産도 차마 그 가묘家廟를 헐게 할 수 없어서 가묘家廟를 피해 우회迂回해 길을 내게 한 것이다.
사묘司墓부하部下의 집이 길을 막고 있는데注+간공簡公장지葬地를 따로 마련하고, 나라 선공先公들의 구묘舊墓가 있는 곳에 쓰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길을 임시로 내다보니 우회로迂廻路도 있고 직선로直線路도 있은 것이다. 사묘지실司墓之室나라 선공先公를 맡아 관리管理하는 대부大夫부하部下의 집이다. 그 집을 헐고 길을 내면 오전에 하관下棺할 수 있고注+하관下棺이다. [부주]林: 집을 헐면 길을 곧게 낼 수 있기 때문에 이른 아침에 하관下棺할 수 있다는 말이다. , 헐지 않으면 정오가 되어야 하관下棺할 수 있었다.
자태숙子太叔이 그 집을 헐기를 청하며 말하기를 “헐지 않으면 제후국諸侯國에서 온 빈객賓客들이 오래 기다려야 하니 이를 어쩌겠습니까?”注+자태숙子太叔빈객賓客들을 오래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라고 하자, 자산子産이 말하기를 “제후국諸侯國빈객賓客들이 우리의 을 위해 왔으니 어찌 정오까지 못 기다리겠습니까?
빈객賓客에게도 손해가 없고 백성에게도 손해가 없다면 무엇 때문에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하고서 드디어 집을 헐지 않고서 정오에 하관下棺하였다.
군자君子는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論評하였다.
자산子産이 이번에 일을 처리함에 있어 를 알았다.
는 남을 훼손毁損하여 자기의 뜻을 이루지 않는 것이다.”
여름에 나라 화정華定이 와서 빙문聘問하였으니 이는 사군嗣君즉위卽位통고通告하기 위함이었다.注+송원공宋元公이 새로 즉위卽位하였기 때문이다.
연회宴會를 열어 화정華定접대接待할 때 그를 위해 〈육소蓼蕭를 읊었으나, 그는 그 의 뜻을 이해理解하지 못하고 또 를 읊어 화답和答하지도 않았다.注+육소蓼蕭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이다. ‘연회宴會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담소談笑하니 이로 인해 군신君臣 모두 안락安樂하네.’라는 시구詩句의 뜻을 취하여, 즐겁게 화정華定과 술을 마시며 담소談笑하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고, 또 ‘이미 군자君子를 만났으니 은총恩寵광영光榮이 이 몸에 미쳤네.’라는 시구詩句의 뜻을 취하여 이 로써 빈객賓客에게 은총恩寵광영光榮을 입히고자 한다는 것을 말하고, 또 ‘형제간兄弟間화목和睦하니 아름다운 그 덕행德行장수長壽하고 안락安樂하리.’라는 시구詩句의 뜻을 취하여 빈객賓客에게 아름다운 덕행德行이 있으니 장수長壽하고 안락安樂할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또 ‘방울 소리 잘 어울리니 만복萬福이 모일 것이네.’라는 시구詩句의 뜻을 취하여 빈객賓客과 함께 복록福祿을 누리고자 한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이에 대해 소자昭子(叔孫婼)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화정華定은 반드시 도망逃亡가게 될 것이다.
에서 말한 연어燕語(宴會에서 술을 마시며 즐겁게 담소談笑하는 것)를 생각지 않고注+는 생각하는 것이다. , 은총恩寵광영光榮선양宣揚하지도 않고注+은 드날리는 것이다. , 아름다운 을 알지도 못하고, 함께 을 누리자는 뜻을 받아들이지도 않았으니 장차 어찌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있겠는가?”注+소공昭公 20년에 화정華定출분出奔의 배경이다.
제후齊侯위후衛侯정백鄭伯나라에 갔으니, 이는 사군嗣君에게 조현朝見하기 위함이었다.注+진소공晉昭公이 새로 즉위卽位하였기 때문이다.
소공昭公나라에 가기 위해 출발하여注+소공昭公나라 사군嗣君에게 조현朝見하기 위해 가고자 한 것이다. 황하黃河 가에 이르렀을 때 〈진인晉人사절謝絶하니〉 이에 되돌아왔다.
나라의 경읍郠邑전쟁戰爭이 있었을 때注+을 취한 일은 소공昭公 10년에 있었다. 거인莒人나라에 제소提訴하였으나, 나라는 평공平公이 나서 그 일을 미처 처리處理[治]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소공昭公내조來朝사절謝絶한 것이다.注+[부주]林: 소공昭公조현朝見사절謝絶하고 받으려 하지 않은 것이다.
공자公子은 드디어 나라로 갔다.注+나라 대부大夫이다. 나라에 간 것을 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돌아와서는 복명復命도 하지 않고 출분出奔하였으므로 사관史官사책史策에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진후晉侯연회宴會를 열어 제후諸侯접대接待할 때 자산子産정백鄭伯보좌輔佐하였더니, 연향宴享참석參席하기를 사양하고서注+[부주]林: 연향宴享를 사양한 것이다.을 벗은 뒤에 진군晉君명령命令을 따르겠다고 하자注+이때 아직 정간공鄭簡公을 장사 지내지 않았다. , 진인晉人이 허락하였으니 에 맞았다.注+진인晉人효자孝子의 마음을 빼앗지 않은 것을 훌륭하게 여긴 것이다.
진후晉侯제후齊侯와 함께 연회宴會에서 술을 마실 때 중행목자中行穆子연례宴禮진행進行을 도왔다.注+목자穆子순오荀吳이다.
투호投壺할 때 진후晉侯가 먼저 던지자 목자穆子가 “술이 회수淮水처럼 많고 고기가 지산坻山처럼 많도다.注+수명水名이고 산명山名이다.
우리 임금님께서 화살을 던져 에 맞히시면 제후諸侯이 되시리라.”고 하였는데 진후晉侯의 화살이 호에 적중的中하였다.
그러자 제후齊侯도 화살을 들고 말하기를 “술이 승수澠水처럼 많고 고기가 구릉丘陵처럼 많도다.注+승수澠水나라 임치현臨淄縣 북쪽에서 발원發源하여 시수時水유입流入한다. 은 큰 언덕이다.
내 화살이 호에 적중的中하면 진군晉君과 번갈아 가며 흥성興盛할 것이다.”注+(交代)이다. 고 하였는데 역시 적중的中하였다.
백하伯瑕(士文伯)가 목자穆子에게 이르기를注+백하伯瑕사문백士文伯이다. “당신은 말을 잘못하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본래부터 제후諸侯[師]이었는데 투호投壺가 무엇이기에 적중的中하는 것을 특이特異한 일로 여기십니까?注+투호投壺적중的中하는 것이 특이特異[儁異]한 일이 되기에 부족하다는 말이다.
제군齊君이 우리 임금님을 하게 보았으니 돌아간 뒤에 다시 오지 않을 것입니다.”注+진군晉君교대交代흥성興盛하고자 한다고 한 것이 바로 진군晉君하게 본 것이라는 말이다. 고 하니, 목자穆子가 말하기를 “우리 군대의 장수將帥들은 하여 외적外敵을 막을 수 있고, 사병士兵들은 경쟁적競爭的으로 서로 권면勸勉하는 것이注+[부주]林: 우리 삼군三軍장수將帥들은 강성强盛하여 외적外敵침공侵攻방어防禦저지沮止할 수 있고, 보졸步卒거병車兵[車乘]은 경쟁적競爭的으로 강력히 서로 권면勸勉한다는 말이다. 지금도 옛날과 같으니 나라가 장차 무슨 일을 할 수 있겠소.”注+나라의 이 옛날보다 하지 않았으니, 나라가 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면 장차 섬길 곳이 없다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라 대부大夫공손公孫가 빠른 걸음으로 나아가 말하기를 “날이 이미 저물어 임금께서 피로하실 것이니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고서 제후齊侯를 모시고 나갔다.注+나라 대부大夫이다. 전문傳文나라가 쇠약衰弱해진 것을 말한 것이다.
초자楚子성호成虎약오若敖여당餘黨이라 하여 드디어 그를 죽였다.注+성호成虎영윤令尹자옥子玉의 손자이다. 투씨鬪氏도 같은 약오若敖의 자손이다. 선공宣公 4년에 투초鬪椒반란叛亂을 일으킨 일이 있었는데. 지금 초자楚子참언譖言을 믿고서 약오若敖(鬪椒)의 여당餘黨토벌討伐한다는 핑계로 〈성호成虎를 죽인 것이다.〉
당초에 어떤 자가 초자楚子에게 성호成虎를 참소하니 성호成虎는 이를 알았으나 능히 떠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을 당한 것이다.〉 에 “나라가 그 대부大夫성호成虎를 죽였다.”고 기록하였으니, 이는 그가 은총恩寵을 생각해 〈떠나지 않았다가 를 당한 것을 말한 것이다.〉注+성호成虎의 이름을 기록한 까닭을 해설解說한 것이다.
6월에 정간공鄭簡公장사葬事 지냈다.注+전문傳文자산子産연향宴享을 사양한 일을 종결終結한 것이다. 이미 장사葬事를 지냈다고 밝혔으니 면상免喪한 것이다. 에 5월로 기록한 것은 오류誤謬이다.
나라 순오荀吳제군齊軍과 만나기 위해 가는 것처럼 위장僞裝하여 선우鮮虞에게 길을 빌려 드디어 석양昔陽으로 쳐들어갔다.注+선우鮮虞백적白狄별종別種으로 중산中山신시현新市縣에 있었다. 석양昔陽나라의 국도國都이다. 악평樂平첨현沾縣 동쪽에 석양성昔陽城이 있다.
가을 8월 임오일壬午日나라를 격멸擊滅하고서 비자肥子면고緜臯를 잡아 가지고 돌아왔다.注+백적白狄이다. 면고緜臯는 그 나라 임금의 이름이다. 거록鉅鹿하곡양현下曲陽縣 서남쪽에 비루성肥累城이 있다. 하문下文나라가 선우鮮虞를 친 기인起因을 말한 것이다.
나라 원백原伯포학暴虐하니 그 여신輿臣(原의 군신群臣)이 무리들을 도망가게 하였다.注+원백原伯나라 대부大夫원공原公이다. 輿이고 이다.
겨울 10월 초하루 임신일壬申日여인輿人축출逐出하고 공자公子궤심跪尋을 임금으로 세웠다.注+궤심跪尋의 아우이다.
교읍郊邑으로 달아났다.注+나라 땅이다.
감간공甘簡公이 아들이 없으니 그 아우 를 임금으로 세웠다.注+감간공甘簡公나라 경사卿士이다.
성공成公경공景公종족宗族제거除去하려 하자注+성공成公경공景公은 모두 선군先君이다. , 성공成公경공景公의 종족들이 유헌공劉獻公에게 뇌물賂物을 주고서注+그로 하여금 를 죽이게 하고자 한 것이다. 유헌공劉獻公나라 경사卿士유정공劉定公의 아들이다. 를 죽여주기를 요청하니, 유헌공劉獻公은〉 병신일丙申日감도공甘悼公을 죽이고注+도공悼公은 바로 이다. 성공成公의 손자 를 임금으로 세웠다.注+평공平公이다.
정유일丁酉日헌태자獻太子의 스승 유피庾皮의 아들 를 죽이고注+유헌공劉獻公태자太子의 스승이다. , 저자에서 하신瑕辛궁폐작宮嬖綽왕손몰王孫沒유주구劉州鳩음기陰忌노양자老陽子를 죽였다.注+여섯 사람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유과庾過와 함께 모두 감도공甘悼公이다. 전문傳文나라가 쇠약衰弱해져 종족宗族이 마침내 미약微弱해진 것을 말한 것이다.
계평자季平子계씨가季氏家계승자繼承者가 된 뒤에 남괴南蒯예우禮遇하지 않았다.注+남괴南蒯남유南遺의 아들로 계씨季氏사읍私邑비읍費邑읍재邑宰이다.
남괴南蒯자중子仲(公子 )에게 이르기를注+자중子仲공자公子이다. “내가 계씨季氏축출逐出하고서 그 가산家産[室]을 공실公室귀속歸屬시킬 것이니,注+계씨季氏가산家産이다. 그대는 계씨季氏를 대신해 의 자리에 오르십시오.注+(대신)이다.
나는 비읍費邑으로써 공실公室신하臣下가 되겠습니다.”注+[부주]林: 나는 비읍費邑으로써 공가公家신하臣下가 되겠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자중子仲이 허락하니, 남괴南蒯숙중목자叔仲穆子에게 이 일을 말하고, 또 그 까닭을 하였다.注+목자穆子숙중대叔仲帶의 아들 숙중소叔仲小이다. 계씨季氏축출逐出하고자 하는 것은 예우禮遇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이다.
계도자季悼子가 죽었을 때 숙손소자叔孫昭子(叔孫婼)가 재명再命을 받아 이 되었는데注+도자悼子계무자季武子의 아들이고 계평자季平子의 아버지이다. 전문傳文숙손叔孫(爵命)을 받은 것이 평자平子이 되기 전에 있었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 계평자季平子나라를 토벌討伐승리勝利함에 미쳐 다시 삼명三命을 받았다.注+소공昭公 10년에 계평자季平子나라를 토벌討伐공로功勞삼명三命으로 승급陞級하였고, 소자昭子나라 토벌討伐참여參與하지 않았으나 역시 관례慣例에 따라 삼명三命으로 승급陞級하였다.
숙중자叔仲子(叔仲穆子)는 두 집안(平子와 소자昭子)을 이간離間시키기 위해注+이간離間[構]하여 서로 미워하게 하고자 한 것이다. 계평자季平子에게 말하기를 “숙손소자叔孫昭子삼명三命부형父兄명수命數보다 지나치니 에 맞지 않습니다.”注+소자昭子삼명三命을 받는 것은 그 선인先人명수命數보다 지나치다는 말이다. 고 하니, 계평자季平子가 “그렇다.”고 하였다.
그러므로 평자平子소자昭子에게 스스로 삼명三命을 사양하게 하였다.注+소자昭子로 하여금 스스로 그 직위職位를 낮추게 한 것이다.
그러자 소자昭子가 말하기를 “우리 숙손씨叔孫氏의 집안에 화란禍亂이 발생하여 적자適子를 죽이고 서자庶子후계자後繼者로 세웠기 때문에注+[부주]林: 적자適子중임仲壬을 죽이고 서자庶子후계자後繼者로 세운 것을 이른다. 내가 이 지위에 이른 것이니注+화란禍亂소공昭公 4년에 있었다. , 그대가 만약 우리 집안의 화란禍亂을 이유로 나를 토벌討伐한다면 나는 을 따르겠습니다만注+화란禍亂을 이유로 나를 토벌한다면 감히 사양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만약 임금님의 폐기廢棄하지 않는다면注+[부주]林: ‘만약 노군魯君으로 임명任命은전恩典폐기廢棄하지 않는다면’이라는 말이다. 삼명三命은 본래 나의 직위職位입니다.”注+위차位次(官位의 등급等級)이다. 고 하고서
소자昭子조정朝廷으로 가서 관리官吏에게 하기를 “내가 장차 계씨季氏송사訟事를 하려 하니 소장訴狀공정公正하게 작성作成하고 한 쪽에만 유리有利하게 작성作成하지 말라.”注+(치우침)이다. 고 하였다.
이에 계손季孫은 두려워하여 숙중자叔仲子에게 돌렸다.
그러므로 숙중소叔仲小남괴南蒯공자公子이 함께 계씨季氏제거除去하기로 모의謀議하였다.
공자公子은 이 계획計劃소공昭公하고서 드디어 소공昭公을 따라 나라로 갔다.注+자중子仲이다.
남괴南蒯성공成功[克]하지 못할 것을 우려[懼]하여 비읍費邑의 무리를 거느리고 계씨季氏배반背叛하고서 나라에 붙었다.
자중子仲이 돌아올 때 나라에 도착하여 변란變亂발생發生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부사副使를 버려두고 도망해 먼저 돌아오다가注+부사副使이다. [부주]林: 나라에서 돌아올 때 나라에 이르러 계씨季氏을 듣고 그 부사副使를 버려두고 도망하여 먼저 돌아온 것이다. 교외郊外에 미쳐 비인費人배반背叛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드디어 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注+급교及郊라고 말하여 출분出奔했다고 기록한 배경을 해설解說하였다.
남괴南蒯배반背叛하려 할 때 그 마을 사람 중에 어떤 자가 남괴南蒯음모陰謀를 알고서 그 앞을 지날 때 탄식하며 말하기를注+마을 사람이 남괴南蒯 앞을 지나면서 탄식한 것이다. “매우 우려憂慮된다.注+휼휼恤恤우환憂患이고, 수애愁隘이고, 는 높은 곳에 위험하게 매달려 있는 모양이다.
생각은 깊으나 지모智謀는 옅고 몸은 비근卑近하면서 뜻은 원대遠大하고 가신家臣이면서 임금의 일을 도모圖謀하는注+가신家臣으로서 임금의 일을 도모圖謀하기 때문에 생각은 깊으나 지모智謀가 옅고 몸은 비근卑近하면서 뜻은 원대遠大하다고 말한 것이다. 사람이 있구나.”注+지금 이런 사람이 있다고 말하여 은미隱微하게 그를 감동感動시킨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남괴南蒯는 묻고 싶은 일을 지적해 말하지 않고 을 쳐서注+점치고 싶은 일을 지적해 말하지 않고 덮어놓고 길흉吉凶을 점친 것이다. 곤괘坤卦注+하괘下卦이고 상괘上卦인 것이 곤괘坤卦이다. 비괘比卦로 변한 를 얻었는데注+하괘下卦이고 상괘上卦인 것이 비괘比卦이니, 곤괘坤卦육오효六五爻한 것이다. , 그 효사爻辭에 ‘황상黃裳(노란 치마)이니 크게 하다.’注+곤괘坤卦육오六五효사爻辭이다. 고 하였다.
남괴南蒯는 이 점괘占卦가 크게 한 것으로 여겨 이 점괘占卦자복혜백子服惠伯에게 보이며 “나는 즉시 일을 벌이고 싶은데 어떻겠는가?”라고 묻자, 자복혜백子服惠伯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일찍이 〈〉을 배운 적이 있는데注+[부주]林: 내가 일찍이 〈〉을 배운 적이 있기 때문에 이 뜻을 안다는 말이다. , 충신忠信한 일이라면 해도 성공成功할 수 있지만 그런 일이 아니라면 반드시 실패失敗할 것입니다.
외표外表하고 내면內面온순溫順한 것이 ‘’이고注+하기 때문에 하고 하기 때문에 온순溫順하다. 하면서도 온순溫順한 것이 이 되는 원인原因이다. , 화순和順한 마음으로 친 일[貞]을 행[率]하는 것이 ‘’입니다.注+물은 화합和合하고 흙은 안착安着하니 이것이 바로 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황상원길黃裳元吉’이라 한 것입니다.
중앙中央의 색깔이고 하체下體복식服飾이고 의 으뜸이니, 중심中心충성忠誠스럽지 않으면 황색黃色이 될 수 없고注+황색黃色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하위下位에 있으면서 공경恭敬하지 않으면 [裳]이 될 수 없고注+이 될 수 없다는 말이다. [부주]朱: 아랫사람이 되어 공손하지 않으면 의 뜻이 아니라는 말이다. , 하는 일이 하지 않으면 준칙準則[極]이 될 수 없습니다.注+중덕中德(中正한 )을 잃는 것이다. [부주]朱: 행하는 일이 선하지 않으면 의 뜻이 아니다. (지극)이니 지어지선止於至善(至極한 (止)함)을 말한다.
안(임금)에서 선창先唱하면 밖(臣下)에서 화답和答하는 것이 이고注+서로 어기지 않는 것이다. [부주]朱: 임금이 안에서 선창先唱하면 신하臣下가 밖에서 화답和答하기 때문에 이를 이라 이른다. 성신誠信으로 일을 행하는 것이 (恭)이고注+과 같다. 세 가지 (黃‧)을 양성養成하는 것이 이니注+삼덕三德정직正直강극剛克유극柔克을 이른다. [부주]朱: 지의志意로써 공급供給해 길러서 하면 억제抑制하고 하면 증진增進시켜 정직正直부합符合하게 한다. 그러므로 ‘’이라 이른 것이다. ,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으면 이 해당該當하지 않습니다.注+이 아니면 이 에 해당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리고 또 〈〉은 험악險惡한 일을 점치지 않는 것인데 그대는 장차 무슨 일을 하려는 것입니까?
하위下位에 있으면서 공경恭敬하려는 것입니까?注+부역夫易차역此易과 같으니 황상원길黃裳元吉를 이른다. 그에게 무슨 일을 하려 하느냐고 물어 그로 하여금 하체의 복식(在下者의 공경恭敬)을 따르게 하고자 한 것이다.
마음이 아름다운 것이 이고 상체上體가 아름다운 것(在上者의 미덕美德을 뜻함)이 이고 하체下體가 아름다운 것(在下者의 미덕美德을 뜻함)이 이니注+[부주]林: 마음은 몸의 중앙中央에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것이 황색黃色이 될 수 있고, 원수元首상위上位에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것이 체원體元의 뜻이 될 수 있고, 발은 하위下位에 있기 때문에 그 아름다운 것이 하상下裳의 옷이 될 수 있다. , 이 세 가지가 갖추어지면 효사爻辭처럼 할 수 있지만注+세 가지 미덕美德이 다 갖추어져야 효사爻辭처럼 할 수 있다는 말이다. , 만약[猶] 이 중에 하나라도 부족不足하다면 점괘占卦가 아무리 하여도 성공成功하지 못합니다.”注+유궐有闕은 세 가지가 갖추어지지 않은 것을 이른다.
남괴南蒯비읍費邑으로 가려 할 때 마을 사람들에게 술을 대접하였는데注+남괴南蒯가 자기 집에서 비읍費邑으로 돌아가려 한 것이다. 마을 사람 중에 어떤 자가 다음과 같이 노래하였다.
“나의 채소밭에 구기자枸杞子나무 나서 자라네.注+남괴南蒯비읍費邑에 있으면서 을 일으키고자 하는 것이 마치 구기자나무가 채소밭에 난 것처럼 마땅하지 않다는 말이다. 세인世人이 말하는 구기枸杞이다.
나를 따르는 자는 사내 대접을 받고注+는 남자의 통칭通稱이니, 나를 따르면 현재의 존귀尊貴를 잃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이다. , 나를 따르지 않는 자는 비천鄙賤한 대접을 받고注+[부주]林: 나를 따르지 않으면 반드시 사람들에게 비루鄙陋하고 천박淺薄하게 여김을 당할 것이라는 말이다. , 친인親人(季氏를 가리킴)을 배반背叛하는 자는 치욕恥辱을 당하리라.注+과 같다. [부주]林: 한 사람을 배반하면 반드시 치욕恥辱을 당하는 일이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그만두자 그만두자구나.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니.”注+이호이호已乎已乎는 자기의 잘못을 숨기고 고치지 않는 것을 말한 것이다.
계평자季平子소자昭子(叔孫婼)에게 숙중소叔仲小(叔仲穆子)를 추방追放시키게 하려 하였다.注+계평자季平子는 자기와 소자昭子 사이를 이간離間숙중소叔仲小추방追放함으로써 전에 소자昭子에게 스스로 삼명三命을 사양하게 했던 것이 본의本意가 아니었음을〉 스스로 해명解明하고자 한 것이다.
숙중소叔仲小가 이 소식을 듣고 감히 조정朝廷에 나아가지 못하니, 소자昭子관리官吏에게 하여 숙중소叔仲小에게 가서 조정朝廷에 나와 집정執政을 기다리도록 이르게 하며 말하기를 “나는 사람들의 원한怨恨이 내 몸에 쌓이는 짓은 하지 않겠다.”注+계씨季氏를 위해 숙중소叔仲小축출逐出하여, 원한怨恨화재禍災가 〈내 몸에〉 모이는 일이 생기게 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명년明年숙궁叔弓비읍費邑포위包圍의 배경이다. 고 하였다.
초자楚子주래州來로 사냥을 나가注+는 겨울 사냥이다.영미潁尾주둔駐屯하여注+영수潁水의 끝은 하채下蔡 서쪽에 있다. 탕후蕩侯반자潘子사마독司馬督효윤오囂尹午능윤희陵尹喜에게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나라를 포위包圍하여 나라를 위협威脅하게 하고注+다섯 사람은 나라 대부大夫이다. 나라는 나라의 우방友邦이기 때문에 나라를 포위하여 나라를 위협威脅[偪]한 것이다. , 초자楚子건계乾谿주둔駐屯하여注+초국譙國성부현城父縣 남쪽에 있다. 저들을 후원後援하였다.
이때 눈이 내리니 초왕楚王피관皮冠을 쓰고 나라가 보내준 복도復陶(羽衣)를 입고注+나라가 보내준 우의羽衣이다. 비취翡翠의 깃으로 만든 덮개를 쓰고注+비취翡翠의 깃으로 장식한 (어깨와 등을 덮는 물건)이다. 표범 가죽으로 만든 신발을 신고서注+표범 가죽으로 만든 신발이다. 채찍을 들고 나가니注+채찍을 잡고서 군대에 명령命令(指揮)한 것이다. 복부僕夫석보析父시종侍從하였다.注+석보析父나라 대부이다.
우윤右尹자혁子革(鄭丹)이 저녁에 알현謁見을 청하니注+자혁子革정단鄭丹이다. 은 저녁에 알현謁見한 것이다. 초왕楚王이 그를 접견接見할 때 피관皮冠과 덮개를 벗고 채찍을 놓고서注+대신大臣공경恭敬한 것이다. 그와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선왕先王웅역熊繹께서注+웅역熊繹나라에 처음으로 해진 임금이다. 여급呂級注+여급呂級나라 태공太公의 아들 정공丁公이다. 왕손모王孫牟注+왕손王孫나라 강숙康叔의 아들 강백康伯이다. 섭보燮父注+섭보燮父나라 당숙唐叔의 아들이다. 금보禽父注+금보禽父주공周公의 아들 백금伯禽이다. 함께 강왕康王을 섬길 때注+강왕康王성왕成王의 아들이다. 네 나라에는 모두 반사품頒賜品이 있으나 유독 우리나라에만 없었다.注+네 나라는 이고, 진귀珍貴보기寶器이다.
지금 나는 나라에 사람을 보내어 요구要求하여 반사품頒賜品으로 삼고자 하니 주왕周王이 우리에게 을 주겠느냐?”고 하니, 자혁子革이 대답하기를 “군왕君王(楚王을 가리킴)께 줄 것입니다.
옛날 우리 선왕先王웅역熊繹께서 궁벽窮僻형산荊山에 사실 때注+형산荊山신성新城시향현沶鄕縣 남쪽에 있다. 허름한 수레와 남루襤褸한 옷으로 초목草木이 우거진 땅을 개척開拓해 사람이 살 수 있는 땅으로 만드시고注+[부주]朱: 가시나무로 수레를 만들어 타고 해진 옷을 입고서 초목草木이 우거진 산야山野에 거처한 것이다. , 산을 넘고 숲을 지나 천자天子를 섬기셨으나 단지 도궁桃弓극시棘矢만을 왕사王事(周나라 왕실王室을 뜻함)에 진공進貢[共禦]하였을 뿐입니다.注+복숭아나무로 만든 활과 가시나무로 만든 화살은 상서롭지 못한 〈요괴妖怪를〉 물리치는 데 사용한다. 나라는 산림山林 가운데 있어서 생산물生産物이 적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나라는 국구國舅의 나라이고注+성왕成王의 어머니가 나라 태공太公의 딸이다. 나라와 나라 나라는 모제母弟의 나라였습니다.
그러므로 유독 우리 나라에만 반사품頒賜品이 없고 저들 나라에는 모두 있었던 것입니다.注+[부주]朱: 당숙唐叔성왕成王동모제同母弟이고, 주공周公강숙康叔무왕武王동모제同母弟이다. 나라만 홀로 소원疎遠하였기 때문에 보기寶器반사頒賜하지 않았고 저 네 나라는 지친至親이기 때문에 모두 반사품頒賜品을 얻었다는 말이다.
지금은 나라와 네 나라가 군왕君王(楚王을 가리킴)을 봉사奉事(服事)하면서 명령命令하는 대로 따르려 하고 있으니 어찌 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또 말하기를 “옛날에 우리 황조皇祖백부伯父곤오昆吾께서 옛 허국許國의 땅에 거주居住하셨는데注+육종씨陸終氏가 아들 여섯을 낳았는데 맏이가 곤오昆吾이고 막내가 계련季連이었다. 계련季連나라의 시조始祖가 되었기 때문에 곤오昆吾를 일러 백부伯父라 한 것이다. 곤오昆吾가 일찍이 나라 땅에 살았기 때문에 ‘구허시택舊許是宅’이라 한 것이다. , 지금 나라가 그 땅을 탐해 이용利用하고 있으면서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으니注+[부주]林: 이때 옛 나라 땅이 나라에 귀속歸屬되었다. 그러므로 ‘정인鄭人이 그 토지土地의 이익을 탐하여 그 땅을 우리에게 돌려주지 않는다.’고 한 것이다. , 내가 만약 요구한다면 저들이 돌려주겠느냐?”고 하니, 자혁子革이 대답하기를 “군왕君王께 돌려줄 것입니다.
나라도 을 아끼지 못하는데 나라가 감히 땅을 아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또 “옛날에는 제후諸侯가 우리나라를 멀리하고 나라를 두려워하였으나注+[부주]林: 과거에는 중국의 제후諸侯들이 우리 나라를 멀리하고 나라의 함을 두려워하였다는 말이다. , 지금은 우리가 불갱不羹고대高大을 쌓아 그곳에 모두 병력兵力[賦]천승千乘씩을 주둔駐屯시켰다.
이 일에는 그대의 공로功勞도 있다.注+[부주]林: 자혁子革을 이른다. 힘을 다해[宣] 이 네 공로功勞를 세우는 데 참여하였다는 말이다.
제후諸侯가 우리나라를 두려워하겠느냐?”고 묻자, 자혁子革이 대답하기를 “군왕君王을 두려워할 것입니다.
이 네 곳에 주둔시킨 군대만으로도 제후諸侯를 두렵게 하기에 충분한데注+사국四國와 두 불갱不羹이다. [부주]林: 그곳의 병력兵力만으로도 사람들을 두렵게 하기에 충분하다는 말이다. 나라에 있는 군대를 보탤 수 있으니 제후諸侯가 감히 군왕君王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때 공윤工尹가 청하기를 “군왕君王께서 옥규玉圭를 깨뜨려 (도끼)의 자루를 장식粧飾하라고 하셨으니注+은 도끼이고 는 자루이다. 규옥圭玉을 깨뜨려 도끼 자루를 장식粧飾함이다. , 감히 어떤 형태로 만들어야 할지 그 제도制度에 대해 하명下命하시기를 청합니다.”注+제도制度한 것이다. 고 하니, 초왕楚王은 자루 만드는 일을 살피기 위해 안으로 들어갔다.
석보析父자혁子革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나라에 명망名望이 있는 사람인데, 지금 대화對話하는 것이 마치 메아리처럼 부화附和하니 국가國家가 장차[其] 어찌 되겠소.”注+그가 의 마음을 순종順從하는 것이 마치 메아리가 소리에 응대應對하는 것과 같다고 비난한 것이다. [부주]林: 장차 나라의 기대期待를 어찌할 생각이냐는 말이다. 라고 하니, 자혁子革이 말하기를 “칼을 갈아 기다리다가 이 나오면 내 칼로 사악邪惡한 마음을 잘라내겠소.”注+자기를 칼날에 비유하고서, 스스로 칼을 갈아 음특淫慝한 마음을 잘라내겠다고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들어갔던 초왕楚王이 나와서 다시 대화對話할 때注+[부주]林: 다시 자혁子革과 이야기한 것이다. 좌사左史의상倚相이 빠른 걸음으로 지나가자注+의상倚相나라 사관史官의 이름이다. , 초왕楚王이 말하기를 “저 사람은 훌륭한 사관史官이니 그대는 잘 보아주라.注+[부주]林: 자혁子革에게 의상倚相을 잘 대우待遇하게 한 것이다.
이 사람은 삼분三墳오전五典팔색八索구구九丘를 읽었다.”注+모두 고대古代서명書名이다. [부주]朱: 공안국孔安國의 〈상서서尙書序〉에 “복희伏羲신농神農황제黃帝의 글을 ‘삼분三墳’이라 하고, 소호少昊전욱顓頊고신高辛의 글을 ‘오전五典’이라 하고, 팔괘八卦을 ‘팔색八索’이라 하고, 구주九州의 기록을 ‘구구九丘’라 한다.”고 하였다. 고 하니, 자혁子革이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그에게 묻기를 ‘옛날에 주목왕周穆王은 그 사심私心절제節制하지 않고 멋대로 행동하여注+목왕穆王주목왕周穆王이다. 이다. , 천하天下를 두루 돌아다니며 모든 곳에 반드시 자기의 수레바퀴 자국과 말발굽 자국이 남게 하려 하였다.注+[부주]林: 수레바퀴 자국과 말발굽 자국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이 돌아다니고자 하였다는 말이다.
그러자 채공祭公모보謀父기초시祈招詩를 지어 목왕穆王사심私心을 막았다.注+모보謀父나라 경사卿士이다. 기보祈父(官命)는 나라 사마司馬이다. 〈채공祭公은〉 대대로 갑병甲兵을 맡았다. 는 그의 이름이다. 채공祭公이 바야흐로 목왕穆王유행遊行하려 하였기 때문에 사마司馬관직官職을 가리켜 말한 것이다. 이 일시逸詩이다.
그러므로 목왕穆王지궁祗宮에서 수명壽命으로 죽을 수 있었다.’注+획몰獲沒찬시簒弑를 당하지 않은 것이다. [부주]朱: 지궁祗宮이궁離宮의 이름이다. 고 하고서, 이 그에게 기초시祈招詩에 대해 물으니 그는 그 를 알지 못하였습니다.
그런데 만약 그에게 이보다 더 먼 옛날의 일을 묻는다면 그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注+[부주]林: 근대近代목왕穆王의 일을 물어도 알지 못하였는데, 먼 고대古代의 일인 삼분三墳오전五典을 묻는다면 의상倚相이 어찌 그 뜻을 알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라고 하였다.
초왕楚王이 “그대는 그 를 아느냐?”고 묻자, 자혁子革이 대답하기를 “압니다.
에 ‘기초祈招성음聲音이 편안하고 온화함이여!
덕음德音을 드러내었네.注+음음愔愔은 편안하고 온화溫和한 모양이다. (以)이고 이다. [부주]林: 기보祈父가 군대를 맡았으나 안정과 평화平和에 힘써 군대를 사용하지 않은 것을 말한 것이다.
풍도風度를 생각하니 과 같고 과 같네.注+금옥金玉은 그 견고堅固하고 무거운 것을 취한 것이다. [부주]林: 우리 왕실王室법도法度를 생각하니 과 같이 견고하게 사용하고 과 같이 무겁게 사용한다는 말이다.
백성의 힘을 헤아려 부리고 방종放縱하는 마음 없으셨네.’注+국가國家가 백성을 사용할 때 그 힘에 따라 일을 맡기는 것이 대장장이가 기구器具에 따라 형상形狀을 만드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백성의 힘을 헤아려 부리고 무도하게 먹고 마시는 마음을 제거하였다고 말한 것이다. [부주]林: 이때 목왕穆王원방遠方유람遊覽하여 백성의 힘을 과도過度하게 사용하고, 잔치를 열어 술을 마시는 일에 한도限度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 에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라고 하였습니다.”고 하니, 초왕楚王자혁子革에게 하고 들어가서는 며칠 동안 음식을 올려도 먹지 않고 잠자리에 들어도 잠을 이루지 못하였으나注+자혁子革의 말에 깊이 감동感動하였기 때문이다. , 끝내 사심私心억제抑制[克]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화란禍亂에 미친 것이다.注+은 이김이다. [부주]林: 초영왕楚靈王은 스스로 그 사욕私欲을 이기지 못하여 찬시簒弑화난禍難에 미쳤다는 말이다.
중니仲尼가 말하기를 “옛 기록에注+[부주]林: (기록)이다. ‘사욕을 이기고 로 돌아가는 것이 이다.’고 하였으니, 진실로 좋은 말이다.注+[부주]朱: ‘진실이로다. 이 말이 좋음이여!’라는 말이다.
초영왕楚靈王이 이렇게 하였다면 어찌 건계乾谿에서 치욕恥辱을 당하였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라가 선우鮮虞토벌討伐하였으니, 이는 나라를 치고 돌아오는 기회를 이용한 것이다.注+나라를 친 전쟁戰爭은 금년에 있었다.


역주
역주1 下[不] : 底本에는 ‘下’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不’로 바로잡았다.
역주2 以乾谿師告 : 傳文에 “楚子가 蕩侯‧潘子‧司馬督‧囂尹午‧陵尹喜를 보내어 徐나라를 包圍하여 吳나라에 겁을 주게 하고, 楚子는 乾谿에 駐屯하여 그들을 應援하였다.”고 하였으니, 傳文대로라면 실지로 徐나라를 包圍한 것인데, 經에 包圍하였다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군대가 包圍하였다고 魯나라에 通告하지 않고 군대를 乾谿에 駐屯시켰다고 通告하였기 때문이다. 〈正義〉
역주3 林曰 : 이 林注는 《公羊傳》과 《穀梁傳》의 說을 끌어다가 附會한 것이다. 《公羊傳》 疏에 의하면 中原諸侯를 칭할 때는 國名 밑에 爵位를 붙여 칭하는데 지금 ‘晉’이라는 單字로 칭한 것은 晉나라를 夷狄으로 여긴 것이라고 하였다. 僖公 33년 經의 ‘晉人及姜戎敗秦師于殽’에 대해 《穀梁傳》에 “戰하였다고 말하지 않고 敗하였다고 말한 것은 秦나라를 夷狄으로 여긴 것이다.”하였다. ‘鄭나라를 夷狄으로 여겼다[狄鄭]’는 말은 《春秋》를 解說한 여러 註釋書에 보이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사건에 連繫해 말한 곳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런 說들은 모두 附會한 說로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역주4 狄[伐] : 저본에는 ‘狄’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伐’로 바로잡았다.
역주5 人[入] : 저본에는 ‘人’으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入’으로 바로잡았다.
역주6 蓼蕭 : 4章 24句로 이루어진 詩로 周나라에 入朝한 諸侯가 宴會 중에 周王의 恩澤을 讚頌한 詩이다. 1章에 말한 譽處의 譽는 樂이고 處는 安이니 곧 安樂을 이른다. 天子와 諸侯가 즐겁게 談笑하니 이로 인해 天子와 諸侯 모두가 安樂하다는 뜻이다. 2章에 말한 君子는 周王을 이르고, 爲龍爲光의 龍은 寵의 假借字로 恩寵을 뜻하고 光은 光榮을 뜻하니, 이미 天子를 만나 뵈었으니 恩寵과 光榮이 내 몸에 미쳤다는 말이다. 3章에 말한 宜兄宜弟는 兄弟間에 和睦한 것이다. 周王이 兄弟間에 和睦한 아름다운 德行이 있으니 長壽하고 安樂[凱]할 것이라는 말이다. 4장에 말한 和鸞雍雍은 재갈에 달린 방울[和] 소리와 軾에 달린 방울[鸞] 소리가 잘 어울린다는 말이다.
역주7 諸[齊] : 저본에는 ‘諸’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齊’로 바로잡았다.
역주8 齊將何事 : ‘事’를 杜注에는 ‘섬김’의 뜻으로 풀었으나, 譯者는 이를 따르지 않고 〈楊注〉‧《左氏會箋》 등의 說을 취해 ‘일’의 뜻으로 번역하였다.
역주9 其輿臣使曹逃 : 原邑의 群臣이 서로 商議하여 그 무리들을 도망가게 하고서 이를 絞의 罪로 삼아 逐出한 것이다. 曹도 輿臣이고 아래의 輿人도 輿臣이다. 《左氏會箋》
역주10 過劉獻公大子之傅 : 杜注는 두 가지 誤謬를 범하였다. 獻은 諡인데 獻太子를 劉獻公의 太子라고 한 것이 첫 번째 誤謬이고, 傳文에 분명히 過를 庾皮의 아들이라고 하였는데 過를 太子의 스승이라고 한 것이 두 번째 誤謬이다. 〈楊注〉
역주11 再命 : 大夫의 品階이다. 周나라 官爵의 제도에는 아홉 等級이 있는데, 上公(盟主)은 九命, 侯와 伯은 七命, 子와 男은 五命이고, 王朝의 三公은 八命, 卿은 六命, 大夫는 四命이며, 小國의 卿은 三命, 大夫는 再命, 士는 一命이다. 《周禮》 〈春官典命〉
역주12 南蒯懼不克 以費叛如齊 : 당초에 公子憖은 南蒯와 晉나라의 도움을 받아 季氏를 除去하기로 謀議하였다. 그러므로 憖이 昭公을 따라 晉나라로 간 것인데, 晉나라가 昭公의 入國을 허락하지 않으니, 南蒯는 成功하지 못할 것을 憂慮하여 費邑의 무리를 이끌고서 季氏를 背叛하여 齊나라에 붙은 것이다. 〈楊注〉
역주13 恤恤乎 湫乎 攸乎 : 〈楊注〉에 ‘이 세 句는 同一한 뜻으로 깊이 근심하는 것이다.’고 하였다. 杜注에 말한 愁隘는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正義〉에 ‘湫는 바로 湫隘(땅이 下濕하고 좁음)이다. 그러므로 湫를 愁隘의 뜻이라 한 것이다.’고 하였을 뿐, 愁隘가 무슨 뜻인지는 말하지 않았다. 《左氏會箋》에 ‘兪樾은 「湫는 바로 愁의 假借字이다.」고 하였고, 《春秋繁露》 〈陽尊陰卑篇〉에 「湫는 悲憂하는 모양이다.」고 하였는데, 杜氏는 隘字를 追加로 補充[足]하여 도리어 原義를 喪失하였다.’고 하였다.
역주14 和以率貞 信也 : 이것은 比卦를 가지고 말한 것이다. 坤은 水이고 坎은 土이니 水土가 만나면 서로 和合한다. 貞은 問卜이고 率은 行이니 和順으로 問卜한 일을 行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信이 된다고 한 〈楊注〉의 설을 취해 번역하였다.
역주15 不得其極 : 極은 지금의 標準 또는 準則이란 말과 같다. 〈楊注〉
역주16 三德 : 〈楊注〉에 “忠‧信‧極을 이른다. 杜注에 《尙書》 〈洪範〉의 三德인 ‘正直‧剛克‧柔克’으로 해석한 것은 더욱 關連이 없다.”고 하였다. 正直剛克柔克은 《尙書正義》에 의하면 平安한 세상은 正直으로 다스리고 剛하여 順從하지 않은 세상은 剛으로 다스리고 和順한 세상은 柔順으로 다스리는 것이다. 그리고 朱注의 ‘以志意供給長養之’는 精神(志意)을 쏟아(供給) 培養한다는 말이다.
역주17 體元 : 天地의 元氣를 根本으로 삼는다는 말로 君王이 自然의 이치를 본받아 天下를 統治하는 것을 이른다.
역주18 囿[圃] : 저본에는 ‘囿’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圃’로 바로잡았다.
역주19 狗[枸] : 저본에는 ‘狗’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枸’로 바로잡았다.
역주20 已乎已乎 : 絶望하여 抛棄하는 말이다. 南蒯가 鄕人들의 말을 듣지 않고 끝내 背叛하려 하기 때문에 ‘그는 이미 우리 마을 사람이 아니니 더 이상 말하지 말자.’고 탄식한 것이다.
역주21 共禦 : 共은 供과 같고 禦는 御와 같으니, 供御는 進貢이란 말과 같다. 〈楊注〉
역주22 : 예
역주23 吳[昊] : 저본에는 ‘吳’로 되어 있으나 《左傳句解》에 의거하여 ‘昊’로 바로잡았다.
역주24 : 肆는 放縱이다. 〈楊注〉
역주25 祭公謀父作祈招之詩 : 杜注에 따르면 祭公謀父의 이름이 招이고 周나라의 卿士로서 祈父(司馬)의 職을 겸하였기 때문에 그 詩를 祈招(祈父(司馬) 招의 詩)라 한 것이고, 穆王의 遊覽을 諫하려 하였기 때문에 司馬의 官職名인 ‘祈’를 지적해 ‘祈招’라고 했다는 말이 된다. 〈正義〉에 의하면 賈逵는 ‘祈는 求이고 昭(招)는 明이니 明德을 求하는 것이다.’고 하였고, 馬融은 ‘祈를 王圻千里의 圻로 보아 王者의 遊戲는 圻內를 벗어나지 않는 것이고, 昭(招)는 明이니 千里 안에 德을 밝히기에 충분하다는 것을 말한 것이다.’고 하였다. 譯者는 ‘祈招는 樂章의 이름인 듯하다.’고 한 《左氏會箋》 說을 취하고 싶다.
역주26 : 語首助詞로 뜻이 없다. 아래의 두 式字도 같다. 〈楊注〉
역주27 推[隨] : 저본에는 ‘推’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隨’로 바로잡았다.

춘추좌씨전(6)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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