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宋華亥向寧華定
이 自宋南里出奔楚
注+言自南里 別從國去하다
[經]六月
에 叔鞅如京師
하야 葬景王
注+叔鞅 叔弓子 三月而葬 亂故速하다
[經]王室亂
注+承叔鞅言而書之 未知誰是 故但曰亂 하다
[經]劉子單子以王猛居于皇
注+河南鞏縣西南有黃亭 辟子朝難 出居皇 王猛書名 未卽位하다
[經]秋
에 劉子單子以王猛入于王城
注+王城郟鄏 今河南縣 晉助猛 故得還王都하다
[經]冬十月
에 王子猛卒
注+未卽位 故不言崩 하다
[經]十有二月癸酉朔
에 日有食之
注+無傳 此月有庚戌 又以長歷推校前後 當爲癸卯朔 書癸酉誤하다
傳
[傳]二十二年春王二月甲子
에 齊北郭啓帥師伐莒
注+啓 齊大夫 北郭佐之後하다
莒子將戰
하니 苑羊牧之諫
注+牧之 莒大夫曰 齊帥賤
注+[附注] 林曰 言北郭啓非卿帥師 하야 其求不多
리니 不如下之
니이다
大國不可怒也
니이다 弗聽
하고 敗齊師于壽餘
注+莒地하다
司馬竈如莒涖盟
注+竈 齊大夫하고 莒子如齊涖盟
하야 盟于稷門之外
注+稷門 齊城門也하다
傳
[傳]楚薳越使告于宋曰 寡君聞君有不令之臣爲君憂
注+[附注] 林曰 宋君有不用命令之臣 如華向等 爲宋君之憂患하니 無寧以爲宗羞
注+無寧 寧也 言華氏爲宋宗廟之羞恥아 寡君請受而戮之
라한대
對曰 孤不佞
하야 不能媚於父兄
注+華向 公族也 故稱父兄하야 以爲君憂
하니 拜命之辱
하노라
抑君臣日戰
注+[附注] 林曰 宋之君臣每日爭戰 에 君曰 余必臣是助
라도 亦唯命
이어니와 人有言曰 喩亂門之無過
라하니 君若惠保敝邑
인댄 하야 以獎亂人
하라
孤之望也
니 唯君圖之
注+[附注] 林曰 無爲高亢 不叶中正之事하라 楚人患之
注+患宋以義距之하다
諸侯之戍謀
注+[附注] 林曰 諸侯之大夫戍宋者聚謀曰 若華氏知困而致死
하고 楚恥無功而疾戰
이면 非吾利也
니 不如出之
하야 以爲楚功
注+[附注] 林曰 不如解圍 聽華向出奔이라
救宋而除其害면 又何求리오 乃固請出之하니 宋人從之하다
己巳
에 宋華亥向寧華定華貙華登皇奄傷省臧士平出奔楚
注+華貙已下五子不書 非卿하다
宋公使公孫忌爲大司馬
注+代華費遂하고 邊卬爲大司徒
注+卬 平公曾孫 代華定하고 樂祁爲司
注+祁 子罕孫樂祁犂하고 仲幾爲左師
注+幾 仲江孫 代向寧하고 樂大心爲右師
注+代華亥하고 樂輓爲大司寇
注+輓 子罕孫하야 以靖國人
注+終梓愼之言 三年而後弭 하다
傳
[傳]王子朝賓起有寵於景王
注+子朝 景王之長庶子 賓起 子朝之傅이러니
王與賓孟
하야 欲立之
注+孟 卽起也 王語賓孟 欲立子朝爲大子하다
劉獻公之庶子伯蚡事單穆公
注+獻公 劉摯 伯蚡 劉狄 穆公 單旗이러니 惡賓孟之爲人也
하야 願殺之
하고 又惡王子朝之言
하야 以爲亂
이라하야 願去之
注+子朝有欲位之言 故劉蚡惡之하다
賓孟適郊
하야 見雄雞自斷其尾
하고 問之
하니 侍者曰 自憚其犧也
注+畏其爲犧牲奉宗廟 故自殘毁니라
遽歸告王
하고 且曰 雞其憚爲人用乎
ᄂ저 人異於是
注+雞犧雖見寵飾 然卒當見殺 若人見寵飾 則當貴盛 故言異於雞하니이다
犧者實用人
注+[附注] 林曰 爲犧者 實爲人所用이니 人犧實難
이어니와 己犧何害
注+言設使寵人如寵犧 則不宜假人以招禍難 使犧在己 則無患害 己喩子朝 欲使王早寵異之리잇가 王弗應
注+十五年大子壽卒 王立子猛 後復欲立子朝而未定 賓孟感雞 盛稱子朝 王心許之 故不應하다
夏四月
에 王田北山
에 使公卿皆從
하야 將殺單子劉子
注+北山 洛北芒也 王知單劉不欲立子朝 欲因田獵先殺之러니 王有心疾
하야 乙丑
에 崩于
錡氏
注+四月十九日 河南鞏縣西有樂[榮]錡澗하다
五月庚辰
에 見王
注+見王猛하고 遂攻賓起
하야 殺之
注+黨子朝故하고 盟群王子于單氏
注+王子猛次正 故單劉立之 懼諸王子或黨子朝 故盟之하다
傳
[傳]晉之取鼓也
注+在十五年에 旣獻而反鼓子焉
注+獻於廟이러니 又叛於鮮虞
注+叛晉屬鮮虞하다
傳
六月
에 荀吳略東陽
注+略 行也 東陽 晉之山東邑 魏郡廣平以北할새 使師僞糴者負甲以息於昔陽之門外
注+昔陽 故肥子所都라가 遂襲鼓滅之
하고 以鼓子鳶鞮歸
하다
傳
王子朝因舊官百工之喪職秩者與靈景之族以作亂
注+百工 百官也 靈王 景王之子孫하야 帥郊要餞之甲
注+三邑 周地하야 以逐劉子
注+逐伯蚡하니 壬戌
에 劉子奔揚
注+揚 周邑하다
單子逆悼王于莊宮以歸
注+悼王 子猛也러니 王子還夜取王以如莊宮
注+王子還 子朝黨也 不欲使單子得王猛 故取之하다
王子還與召莊公謀
注+莊公 召伯奐 子朝黨也曰 不殺單旗
면 不捷
注+旗 單子也이니 與之重盟
이면 必來
注+[附注] 林曰 若與單子重爲盟誓 單子必信而來歸 리라
樊頃子曰 非言也
니 必不克
注+頃子 樊齊 單劉黨 [附注] 林曰 王子還之謀 非有德之言 하리라
遂奉王以追單子
注+王子還奉王하야 及領
하야 大盟而復
注+領 周地 欲重盟 令單子劉子復歸하야 殺摯荒以說
注+委罪於荒 [附注] 林曰 王子還委罪於摯荒而殺之 以自解說 하다
乙丑
에 奔于平畤
注+平畤 周地 知王子還欲背盟 故亡走러니 群王子追之
어늘 單子殺還姑發弱鬷延定稠
注+八子 靈景之族 因戰而殺之하니 子朝奔京
注+其黨死故하다
辛未
에 鞏簡公敗績于京
하다 乙亥
에 甘平公亦敗焉
注+甘鞏二公 周卿士 皆爲子朝所敗하다
傳
叔鞅至自京師
注+葬景王還하야 言王室之亂也
注+經所以書하니 閔馬父曰 子朝必不克
하리라
其所與者
는 天所廢也
注+閔馬父 閔子馬 魯大夫 天所廢 謂群喪職秩者라
傳
單子欲告急於晉
하야 秋七月戊寅
에 以王如平畤
라가 遂如圃車
하야 次于皇
注+出次以示急 戊寅 七月三日 經書六月 誤하다
劉子如劉
하니 單子使王子處守于王城
注+王子處 子猛黨 守王城 距子朝하고 盟百工于平宮
注+平宮 平王廟하다
辛卯
에 鄩肸伐皇
注+鄩肸 子朝黨이어늘 大敗
하니 獲鄩肸
하야 壬辰
에 焚諸王城之市
注+焚鄩肸 하다
八月辛酉
에 司徒醜以王師敗績于前城
注+醜 悼王司徒 前城 子朝所得邑하니 百工叛
注+司徒醜 敗故하다 己巳
에 伐單氏之宮
이어늘 敗焉
注+百工伐單氏 爲單氏所敗하고 庚午
에 反伐之
注+單氏反伐百工하야 辛未
에 伐東圉
注+百工所在 洛陽東南有圉鄕 하다
冬十月丁巳
에 晉籍談荀躒帥九州之戎
注+九州戎 陸渾戎 十七年滅 屬晉 州 鄕屬也 五州爲鄕 及焦瑕溫原之師
注+焦瑕溫原 晉四邑 하야 以納王于王城
注+丁巳 在十月 經書秋 誤 하다
庚申
에 單子劉蚡以王師敗績于郊
注+爲子朝之黨所敗하다
十一月乙酉
에 王子猛卒
注+乙酉 在十一月 經書十月 誤 雖未卽位 周人諡曰悼王이라하니
己丑
에 敬王卽位
注+敬王 王子猛母弟王子匄하야 館于子旅氏
注+子旅 周大夫하다
傳
[傳]十二月庚戌
에 晉籍談荀躒賈辛司馬督
注+司馬烏帥師軍于陰
注+籍談所軍 于侯氏
注+荀躒所軍 于谿泉
注+賈辛所軍 鞏縣西南有明谿泉 次于社
注+司馬督所次하고 王師軍于汜于解次于任人
注+王師分在三邑 洛陽西南有大解小解하다
閏月
에 晉箕遺樂徵右行詭 濟師取前城
注+三子 晉大夫 濟師 渡伊洛하야 軍其東南
하고 王師軍于京楚
하다
22년 봄에 제후齊侯가 거莒나라를 토벌하였다.
송宋나라
화해華亥‧
상녕向寧‧
화정華定이
송宋나라
남리南里에서
초楚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注+‘자남리自南里’라고 말하여 송宋나라 국도國都에서 떠난 것과 구별하였다.
창간昌間에서
성대盛大하게
열병식閱兵式을 거행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여름 4월 을축일乙丑日에 천왕天王이 붕崩하였다.
6월에
숙앙叔鞅이
경사京師에 가서
경왕景王의
장례葬禮에
회장會葬하였다.
注+숙앙叔鞅은 숙궁叔弓의 아들이다. 석 달 만에 장사葬事 지낸 것이다. 난리亂離 때문에 빨리 지낸 것이다.
왕실王室에
변란變亂이 일어났다.
注+숙앙叔鞅의 말을 듣고 기록한 것이다. 누구의 말이 옳은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단지 ‘난亂’이라고만 기록한 것이다.
유자劉子와
단자單子가
왕자王子맹猛을 모시고
황皇에
거주居住하였다.
注+하남河南공현鞏縣 서남쪽에 황정黃亭이 있다. 왕자王子조朝의 난難을 피해 나가서 황皇에 거주居住한 것이다. 왕자王子맹猛의 이름을 기록한 것은 아직 즉위전卽位前이기 때문이다.
가을에
유자劉子와
단자單子가
왕자王子맹猛을 모시고
왕성王城으로 들어갔다.
注+왕성王城은 겹욕郟鄏으로 지금의 하남현河南縣이다. 진晉나라가 맹猛을 도왔기 때문에 왕도王都로 돌아오게 된 것이다.
겨울 10에
왕자王子맹猛이
졸卒하였다.
注+즉위卽位하기 전에 죽었기 때문에 ‘붕崩’이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12월 초하루
계유일癸酉日에
일식日食이 있었다.
注+전傳이 없다. 이 달에 경술일庚戌日이 있고, 또 장력長歷으로 전후前後를 추산推算해 따져보면 계묘삭癸卯朔이 되는 것이 마땅하니, 계유癸酉로 기록한 것은 오류誤謬이다.
傳
22년 봄
주왕周王 2월
갑자일甲子日에
제齊나라
북곽계北郭啓가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거莒나라를
토벌討伐하였다.
注+계啓는 제齊나라 대부大夫북곽좌北郭佐의 후예後裔이다.
거자莒子가
응전應戰하려 하니
원양목지苑羊牧之가
간諫하기를
注+목지牧之는 거莒나라 대부大夫이다. “
제齊나라
장수將帥는
신분身分이
비천卑賤하여
注+[부주]林: 경卿이 아닌 북곽계北郭啓가 군대를 거느렸기 때문에 ‘천賤’하다고 말한 것이다. 그
요구要求가 많지 않을 것이니
항복降服[下]하는 것만 못합니다.
대국大國을
노怒하게 해서는 안 됩니다.”고 하였으나,
거자莒子는 듣지 않고서
제군齊軍을
수여壽餘에서
패배敗北시켰다.
注+수여壽餘는 거莒나라 땅이다.
제후齊侯가 〈
대노大怒하여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와서〉
거莒나라를
토벌討伐하니
注+대국大國을 노怒하게 하였으므로 패배敗北한 것이다. ,
거자莒子는
화친和親을
청請하였다.
사마司馬조竈가
거莒나라로 들어가서
결맹結盟에 참여하고
注+조竈는 제齊나라 대부大夫이다. 거자莒子가
제齊나라로 가서
결맹結盟에 참여하고서
직문稷門 밖에서
맹약盟約하였다.
注+직문稷門은 제齊나라 성문城門이다.
거莒나라 사람들은 이로 인해 그 임금을 크게 미워하였다.
注+명년明年에 거자莒子가 노魯나라로 도망해 온 전傳의 배경이다.
傳
초楚나라
위월薳越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송宋나라에
고告하기를 “우리 임금님께서는 임금님(宋君을 이름)께
불선不善한 신하가 있어 임금님의 근심이 되고 있다는 말을 들으시고
注+[부주]林: 송군宋君에게 명령命令을 따르지 않는 화씨華氏‧상씨向氏 같은 신하들이 있어서 송군宋君의 우환憂患거리가 되고 있다는 말이다. ‘어찌
종묘宗廟의
수치羞恥가 아니겠는가?
注+무녕無寧은 영寧(어찌)이다. 화씨華氏가 송宋나라 종묘宗廟의 수치羞恥가 된다는 말이다. ’라고 하시면서 우리 임금께서 그
불선不善한 자들을
접수接受하여
처벌處罰하기를 청하십니다.”고 하자,
송원공宋元公이 대답하기를 “내가 변변치 못해
부형父兄들과 사이좋게 지내지 못하여
注+화씨華氏와 상씨向氏가 공족公族이기 때문에 ‘부형父兄’이라고 칭稱한 것이다. , 임금님(楚君)께 걱정을 끼쳤는데도 〈임금님께서
관심關心을 보이시어〉 이렇게
명命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군신君臣이 날마다 서로 싸우는 것인데
注+[부주]林: 송宋나라의 군신君臣이 매일 쟁전爭戰한다는 말이다. , 임금님(楚君)께서 ‘나는 반드시 신하를 돕겠다.’고 하시더라도 나는
명命을 따르겠습니다만 사람들의 말에 ‘
난亂을 일으킨 자의 문 앞을 지나지 말라.’고 하였으니, 임금님께서 만약 우리나라를
보호保護하려 하신다면
불충不忠[不衷]한 자들을
비호庇護[亢]하여
난인亂人들을
장려獎勵하지 마십시오.
이것이 나의 바람이니 임금님께서는 깊이 생각하십시오.
注+[부주]林: 고상高尙하고 강직剛直[亢]하여 중정中正에 맞지 않는 일을 하지 말라는 말이다. ”라고 하니,
초인楚人이 걱정하였다.
注+송군宋君이 의리義理로써 거절距絶하기 때문에 걱정한 것이다.
송宋나라를
수위戍衛하고 있는
제후국諸侯國의
장수將帥들이
注+[부주]林: 제후諸侯의 대부大夫로 송宋나라를 수위戍衛하는 자들이 모여 상의[謀]한 것이다. 상의하기를 “만약
화씨華氏가
곤난困難해질 것을 알고서 죽을힘을 다해 싸우고,
초군楚軍이
공功이 없이 돌아가는 것을
수치羞恥로 여겨
속전速戰한다면 우리에게
불리不利하니,
화씨華氏를 내보내어
초楚나라가
공功을 세우도록 하는 것만 못하다.
注+[부주]林: 포위包圍를 풀어 화씨華氏와 상씨向氏가 출분出奔하도록 허락하는 것만 못하다는 말이다.
화씨華氏는 다시 아무 짓도 할 수 없을 것이다.
注+화씨華氏가 다시 송宋나라에 환해患害를 끼치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다.
송宋나라를 구원救援하고 그 해악害惡을 제거除去할 수 있다면 다시 무엇을 바라겠는가?”라고 하고서, 화씨華氏를 내보내기를 굳이 요청하니, 송인宋人이 그 요청을 따랐다.
기사일己巳日에
송宋나라
화해華亥‧
상녕向寧‧
화정華定‧
화추華貙‧
화등華登‧
황엄상皇奄傷‧
성장省臧‧
사평士平이
초楚나라로
출분出奔하였다.
注+화추華貙 이하 다섯 사람을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경卿이 아니기 때문이다.
송원공宋元公은
공손公孫기忌를
대사마大司馬로
注+화비수華費遂의 뒤를 이은 것이다. ,
변앙邊卬을
대사도大司徒로
注+앙卬은 평공平公의 증손曾孫이다. 화정華定의 뒤를 이은 것이다. ,
악기樂祁를
사성司城으로
注+기祁는 자한子罕의 손자 악기리樂祁犂이다. ,
중기仲幾를
좌사左師로
注+기幾는 중강仲江의 손자이다. 상녕向寧의 뒤를 이은 것이다. ,
악대심樂大心을
우사右師로
注+화해華亥의 뒤를 이은 것이다. ,
악만樂輓을
대사구大司寇로 삼아
注+만輓은 자한子罕의 손자이다. 국인國人을
안정安靖시켰다.
注+20년 전傳에 “3년이 지난 뒤에 안정安定될 것이다.”고 한 재신梓愼의 말대로 되었다.
傳
왕자王子조朝와
빈기賓起가
경왕景王의
총애寵愛를 받았다.
注+자조子朝는 경왕景王의 장서자長庶子이고, 빈기賓起는 자조子朝의 사부師傅이다.
경왕景王과
빈맹賓孟이
자조子朝를 좋아하여 그를
태자太子로 세우고자 하였다.
注+맹孟은 바로 기起이다. 경왕景王이 빈맹賓孟에게 자조子朝를 세워 태자太子로 삼고자 한다고 말한 것이다.
유헌공劉獻公의
서자庶子백분伯蚡이
단목공單穆公을 섬기고 있었는데
注+헌공獻公은 유지劉摯이고, 백분伯蚡은 유적劉狄이고, 목공穆公은 단기單旗이다. ,
빈맹賓孟의 사람됨을 미워하여 죽이고자 하였고, 또
왕자王子조朝의 말을 미워하여
반란叛亂을 일으키려 한다고 여겨
제거除去하고자 하였다.
注+자조子朝가 왕위王位에 오르고자 한다는 말을 하였기 때문에 유분劉蚡이 그를 미워한 것이다.
빈맹賓孟이
교외郊外로 가서 수탉이 스스로 그 꼬리를 부리로 쪼아 없앤 것을 보고서 그 까닭을 물으니, 그
시종侍從이 “
희생犧牲이 되는 것을 싫어하여 스스로 꼬리를 쪼아 없앤 것입니다.
注+닭은 제가 희생犧牲이 되어 종묘宗廟에 바쳐질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스스로 훼손毁損한 것이다. ”고 하였다.
빈맹賓孟은 급히 돌아와서
경왕景王께 이 일을
고告하고, 또 “닭은 아마도 사람의
희생犧牲으로 쓰이는 것을 싫어하는 것 같습니다만 사람은 이와 다릅니다.
注+희생犧牲으로 기르는 닭은 비록 사람의 사랑과 꾸며줌을 받지만 끝내는 죽임을 당한다. 사람의 경우는 〈임금의〉 사랑과 꾸며줌을 받으면 당연히 귀성貴盛해지기 때문에 닭과 다르다고 말한 것이다.
희생犧牲은 실로 사람의 쓰임이 되는 것이니
注+[부주]林: 희생이 되는 것이 실로 사람의 쓰임이 되는 것이라는 말이다. , 다른 사람을
희생犧牲(太子를 비유함)으로 삼는다면 실로
화난禍難을 부를 우려가 있지만 내가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자(子朝)를
희생犧牲으로 삼는다면 무슨 해가 있겠습니까?
注+설사 총인寵人이 총희寵犧와 같다 하더라도 총인寵人에게 권한權限을 빌려주어 화난禍難을 불러서는 안 된다. 그러나 자조子朝[己]를 총희寵犧(太子)로 삼는다면 환해患害가 없다는 말이다. 기己는 자조子朝를 비유한 것이니, 경왕景王으로 하여금 조속早速히 자조子朝를 특별히 총애寵愛하여 〈태자太子로 세우게〉 하고자 한 것이다. ”라고 하니,
경왕景王은 대답하지 않았다.
注+소공昭公 15년에 태자太子수壽가 졸卒하자, 경왕景王은 왕자王子맹猛을 태자太子로 세웠다. 뒤에 다시 자조子朝를 태자太子로 세우고자 하였으나 아직 결정決定을 내리지 못하고 있었는데, 빈맹賓孟이 희계犧雞에서 느낌을 받고서 자조子朝를 성대하게 칭찬하니 경왕景王은 마음속으로 허락하였다. 그러므로 대답하지 않은 것이다.
여름 4월에
경왕景王이
북산北山에서 사냥할 때
공경公卿들을 다 따르게 하고서
단자單子와
유자劉子를 죽이려 하였는데
注+북산北山은 낙양洛陽의 북망산北芒山이다. 경왕景王은 단목공單穆公과 유헌공劉獻公이 자조子朝를 태자太子로 세우는 일에 순종順從하지 않을 것을 알았기 때문에 사냥하는 기회를 이용해 그들을 먼저 죽이고자 한 것이다. ,
경왕景王이
심질心疾이
발생發生하여
을축일乙丑日에
영기씨榮錡氏의 집에서
붕崩하였다.
注+을축일乙丑日은 4월 19일이다. 하남河南공현鞏縣 서쪽에 영기간榮錡澗이 있다.
무신일戊辰日에
유자劉子지摯가
졸卒하였다.
注+무신일戊辰日은 22일이다.
뒤를 이을
적자適子가 없으니
단자單子가 그
서자庶子유분劉蚡을
후사後嗣로 세웠다.
注+유분劉蚡이 단자單子를 섬겼기 때문이다.
〈
유분劉蚡이〉 5월
경진일庚辰日에
왕맹王猛(悼王)을
알현謁見하고서
注+왕맹王猛을 알현謁見한 것이다. 빈기賓起를 공격해 죽이고
注+자조子朝를 도왔기 때문이다. ,
왕자王子들과
단씨單氏의 집에서
결맹結盟하였다.
注+왕자王子맹猛이 차정次正(正室夫人의 차자次子)이다. 그러므로 단목공單穆公과 유헌공劉獻公이 그를 임금으로 세운 것이다. 여러 왕자王子들이 혹 자조子朝를 도울 것이 두려웠기 때문에 왕자王子들과 맹약盟約한 것이다.
傳
진晉나라가
고국鼓國을
취取하였을 때
注+소공昭公 15년에 있었다.종묘宗廟에
부로俘虜를 바친 뒤에
고자鼓子를 돌려보냈더니
注+종묘宗廟에 바친 것이다. ,
고국鼓國이 또
진晉나라를
배반背叛하고
선우鮮虞에 붙었다.
注+진晉나라를 배반하고 선우鮮虞에 붙은 것이다.
傳
6월에
순오荀吳가
동양東陽을
순행巡行할 때
注+약略은 순행巡行함이다. 동양東陽은 진晉나라 산동山東읍邑으로 위군魏郡광평廣平 이북을 이른다. 군대를 양곡을
구매購買하는 자로 위장시켜 속에 갑옷을 입고서
석양문昔陽門 밖에서 쉬게 하였다가
注+석양昔陽은 옛날에 비자肥子가 도읍都邑했던 곳이다. 드디어
고국鼓國을
습격襲擊해
멸망滅亡시키고서
고자鼓子연제鳶鞮를 잡아 데리고 돌아왔다.
섭타涉佗를 보내어
고국鼓國을 지키게 하였다.
注+고국鼓國의 땅을 지키게 한 것이다. 섭타涉佗는 진晉나라 대부大夫이다.
傳
왕자王子조朝가 옛
관료官僚와
백관百官 중에
관직官職을 잃은 자와
영왕靈王‧
경왕景王의
족인族人을 거느리고
반란叛亂을 일으켜
注+백공百工은 백관百官이다. 영왕靈王은 경왕景王의 자손子孫이다. ,
교郊‧
요要‧
전읍餞邑의 군대를 거느리고서
注+세 읍邑은 주周나라 땅이다. 유자劉子를
추격追擊하니
注+백분伯蚡을 추격追擊한 것이다. ,
임술일壬戌日에
유자劉子가
양揚으로 달아났다.
注+양揚은 주周나라 읍邑이다.
단자單子가
장궁莊宮으로 가서
도왕悼王을 맞이해 자기 집으로 모시고 왔는데
注+도왕悼王은 자맹子猛이다. ,
왕자王子환還이 밤에
왕王을 빼앗아
장궁莊宮으로 데리고 갔다.
注+왕자王子환還은 자조子朝의 당黨이다. 단자單子가 왕맹王猛을 데리고 있지 못하게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왕맹王猛을 빼앗아간 것이다.
계해일癸亥日에
단자單子가
도성都城 밖으로
탈출脫出하였다.
注+왕王을 잃었기 때문에 출분出奔한 것이다.
왕자王子환還이
소장공召莊公과 상의하기를
注+장공莊公은 소백召伯환奐으로 자조子朝의 당黨이다. “
단기單旗를 죽이지 않고는
승리勝利할 수 없으니
注+기旗는 단자單子이다. , 그에게 거듭
결맹結盟하자고 청하면 반드시 올 것입니다.
注+[부주]林: 만약 단자單子에게 거듭 맹서盟誓하자고 하면 단자單子는 반드시 믿고서 돌아올 것이라는 말이다.
맹약盟約을
배반背叛하고서
승리勝利한 자가 많습니다.”고 하니,
소장공召莊公이 그의 말을 따랐다.
注+왕자王子환還의 계모計謀를 따른 것이다.
번경자樊頃子가 말하기를 “사리에 맞는 말이 아니니 반드시 승리하지 못할 것이다.
注+경자頃子는 번제樊齊로 단자單子와 유자劉子의 당黨이다. [부주]林: 왕자王子환還의 계모計謀는 유덕자有德者의 말이 아니니 〈반드시 승리勝利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고 하였다.
왕자王子환還이
왕王을 모시고
단자單子를 뒤쫓아 가서
注+왕자王子환還이 왕王을 모시고 간 것이다. 영領에 이르러 〈
단자單子를 만나〉
결맹結盟하고 돌아와서
注+영領은 주周나라 땅이다. 거듭 결맹結盟하자고 요청하여 단자單子와 유자劉子가 다시 돌아오게 하려 한 것이다. 지황摯荒을 죽여 〈밤에
왕王을 빼앗아간 것이
지황摯荒의 짓이고 자기의 짓이 아님을〉
해명解明[說]하였다.
注+지황摯荒에게 죄罪를 떠넘긴 것이다. [부주]林: 왕자王子환還이 죄罪를 지황摯荒에게 떠넘겨 그를 죽여, 자신의 무죄無罪함을 해명解明한 것이다.
유자劉子는
유읍劉邑으로 가고
注+자기의 채읍采邑으로 돌아간 것이다. ,
단자單子는 도망하였다.
을축일乙丑日에
평치平畤로 도망하였는데
注+평치平畤는 주周나라 땅이다. 왕자王子환還이 맹약盟約을 배반背叛하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도망간 것이다. ,
왕자王子들이 그를
추격追擊하자
단자單子가
환還‧
고姑‧
발發‧
약弱‧
종鬷‧
연延‧
정定‧
주稠를 죽이니
注+여덟 사람은 영왕靈王과 경왕景王의 족인族人이다. 교전交戰하는 기회를 이용해 그들을 죽인 것이다. ,
자조子朝가
경읍京邑으로 달아났다.
注+자기의 무리가 죽었기 때문이다.
병인일丙寅日에
단자單子가
경읍京邑을 공격하니
注+단자單子가 경읍京邑을 친 것이다. 경인京人들이
산山으로 도망갔다.
유자劉子가
왕성王城으로 들어왔다.
注+자조子朝가 경읍京邑으로 도망갔기 때문에 〈유자劉子가 왕성王城으로〉 들어온 것이다.
신미일辛未日에
공간공鞏簡公이
경京에서
대패大敗하고,
을해일乙亥日에
감평공甘平公 역시
패배敗北하였다.
注+감평공甘平公과 공간공鞏簡公은 주周나라 경사卿士이다. 둘 다 자조子朝에게 패배敗北한 것이다.
傳
숙앙叔鞅이
경사京師에서 돌아와서
注+경왕景王의 장사葬事에 회장會葬하고서 돌아온 것이다.왕실王室에
변란變亂이 일어난 것을 말하니
注+경經에 기록한 이유이다. ,
민마보閔馬父가 말하기를 “
자조子朝는 반드시
승리勝利하지 못할 것이다.
그가 가까이하는 자들은 하늘이 버린 자들이다.
注+민마보閔馬父는 민자마閔子馬니 노魯나라 대부大夫이다. 천소폐天所廢는 관직官職을 잃은 무리들을 이른다. ”고 하였다.
傳
단자單子는
위급危急한
정황情況을
진晉나라에 알리기 위해 가을 7월
무인일戊寅日에
왕王을 모시고
평치平畤로 갔다가 드디어
포거圃車로 가서
황皇에 머물렀다.
注+출차出次(都城 밖으로 나아가 머무름)하여 위급危急함을 보인 것이다. 무인일戊寅日은 7월 3일이다. 경經에 ‘6월’로 기록한 것은 오류誤謬이다.
유자劉子가
유읍劉邑으로 가니
단자單子는
왕자王子처處를 보내어
왕성王城을 지키고
注+왕자王子처處는 자맹子猛의 당黨이다. 왕성王城을 지켜 자조子朝를 막게 한 것이다. 백공百工과
평궁平宮에서
결맹結盟하게 하였다.
注+평궁平宮은 평왕平王의 묘廟이다.
신묘일辛卯日에
심힐鄩肸이
황皇을
공격攻擊하니
注+심힐鄩肸은 자조子朝의 당黨이다. 왕사王師가
대패大敗시키고서
심힐鄩肸을 잡아서
임진일壬辰日에
왕성王城 저자에서 불태워 죽였다.
注+심힐鄩肸을 불태워 죽인 것이다.
8월
신유일辛酉日에
사도司徒추醜가
왕사王師를 거느리고
전성前城을
공격攻擊하다가
대패大敗하니
注+추醜는 도왕悼王의 사도司徒이다. 전성前城은 자조子朝가 점령占領한 읍邑이다. 백공百工이
배반背叛하여
注+사도司徒추醜가 패배敗北하였기 때문이다. ,
기사일己巳日에
단씨單氏의
궁전宮殿을
공격攻擊하거늘 그들을
패배敗北시키고서
注+백공百工이 단씨單氏를 공격攻擊하다가 도리어 단씨單氏에게 패배敗北당한 것이다. 경오일庚午日에
반격反擊하여
注+단씨單氏가 백공百工을 반격反擊한 것이다. 신미일辛未日에
동어東圉를
공격攻擊하였다.
注+동어東圉는 백공百工이 주재駐在한 곳이다. 낙양洛陽 동남쪽에 어향圉鄕이 있다.
겨울 10월
정사일丁巳日에
진晉나라
적담籍談‧
순락荀躒이
구주九州의
융戎注+구주융九州戎은 육혼융陸渾戎이다. 소공昭公 17년에 멸망滅亡하고 진晉나라에 귀속歸屬하였다. 주州는 향鄕에 속屬한 구역區域이다. 5주州가 1향鄕이다. 및
초焦‧
하瑕‧
온溫‧
원原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注+초焦‧하瑕‧온溫‧원原은 진晉나라의 네 읍邑이다. 왕王을
왕성王城으로 들여보냈다.
注+정사일丁巳日은 10월에 들었으니, 경經에 ‘가을’로 기록한 것은 오류誤謬이다.
경신일庚申日에
단자單子와
유분劉蚡이 거느린
왕사王師가
교郊에서
대패大敗하였다.
注+자조子朝의 당黨에게 패배敗北당한 것이다.
전성前城 사람들이
사社에서
육혼陸渾을
패배敗北시켰다.
注+전성前城 사람은 자조子朝의 무리이다. 사社는 주周나라 땅이다.
11월
을유일乙酉日에
왕자王子맹猛이
졸卒하였다.
注+을유일乙酉日은 11월에 들었으니, 경經에 ‘10월’로 기록한 것은 오류誤謬이다. 왕맹王猛이 즉위卽位하기 전에 졸卒하였으되, 주인周人은 ‘도왕悼王’이란 시호諡號를 올렸다.
〈
경經에 ‘
붕崩’이라
칭稱하지 않고 ‘
졸卒’이라
칭稱한 것은〉
천자天子의
예禮로
장사葬事 지내지 않았기 때문이다.
注+경經에 ‘왕王이 붕崩하였다.’로 칭稱하지 않은 이유를 해석한 것이다.
기축일己丑日에
경왕敬王이
즉위卽位하여
注+경왕敬王은 왕자王子맹猛의 모제母弟왕자王子개匄이다. 자려씨子旅氏의 집에 머물렀다.
注+자려子旅는 주周나라 대부大夫이다.
傳
12월
경술일庚戌日에
진晉나라
적담籍談‧
순락荀躒‧
가신賈辛‧
사마司馬독督은
注+사마司馬독督은 사마司馬오烏이다. 군대를 거느리고서
음陰과
注+음陰은 적담籍談이 주둔駐屯한 곳이다. 후씨侯氏와
注+후씨侯氏는 순락荀躒이 주둔駐屯한 곳이다. 계천谿泉과
注+계천谿泉은 가신賈辛이 주둔駐屯한 곳이다. 공현鞏縣 서남쪽에 명계천明谿泉이 있다. 사社에
주둔駐屯하고
注+사社는 사마司馬독督이 주둔駐屯한 곳이다. ,
왕사王師는
사汜과
해解와
임인任人에 주둔하였다.
注+왕사王師도 분산分散해 세 읍邑에 주둔駐屯한 것이다. 낙양洛陽 서남쪽에 대해大解와 소해小解가 있다.
윤閏12월에
진晉나라
기유箕遺‧
악징樂徵‧
우행궤右行詭는 군대를 거느리고
도하渡河하여
전성前城을
공격攻擊해
함락陷落하고서
注+세 사람은 진晉나라 대부大夫이다. 제사濟師는 이수伊水와 낙수洛水를 건넌 것이다. 그 동남에
주둔駐屯하고,
왕사王師는
경초京楚에 주둔하였다.
신축일辛丑日에
경읍京邑을
공격攻擊하여 그 서남쪽
성城을 허물었다.
注+경초京楚는 자조子朝가 주재駐在한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