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經]二十有四年春王二月丙戌
에 仲孫貜卒
注+無傳 孟僖子也하다
[經]丁酉
에 杞伯郁釐卒
注+無傳 未同盟而赴以名 丁酉九月五日 有日無月하다
傳
[傳]二十四年春王正月辛丑
에 召簡公南宮嚚以甘桓公見王子朝
注+簡公 召莊公之子召伯盈也 嚚 南宮極之子 桓公 甘平公之子하니 劉子謂萇弘曰 甘氏又往矣
로다 對曰 何害
잇가
同德度義
注+度 謀也 言惟同心同德 則能謀義 子朝不能 於我無害니이다
大誓曰 紂有億兆
이나 亦有離德
注+言紂衆億兆 兼有四夷 不能同德 終敗亡하고 余有亂臣十人
이나 同心同德
注+武王言我有治臣十人 雖少 同心也 今大誓無此語이라하니 此周所以興也
니이다
君其務德
하고 無患無人
注+[附注] 林曰 君 謂劉文公하소서
戊午
에 王子朝入于鄔
注+緱氏西南有鄔聚 言子朝稍强하다
傳
[傳]晉士彌牟逆叔孫于箕
注+將禮而歸之하니 叔孫使梁其踁待于門內
注+踁 叔孫家臣曰 余左顧而欬
어든 乃殺之
注+疑士伯來殺己 故謀殺之하고 右顧而笑
어든 乃止
하라
叔孫見士伯
한대 士伯曰 寡君以爲盟主之故
로 是以久子
注+久執子以謝邾하니라
不腆敝邑之禮를 將致諸從者하야 使彌牟逆吾子니라 叔孫受禮而歸하다
二月
에 婼至自晉
이라하니 尊晉也
注+貶婼族 所以尊晉 婼行人 故不言罪己라
傳
[傳]三月庚戌
에 晉侯使士景伯涖問周故
注+涖 臨也 就問子朝敬王 知誰曲直하다
士伯立于乾祭
하야 而問於介衆
注+乾祭 王城北門 介 大也하고 晉人乃辭王子朝
하고 不納其使
注+衆言子朝曲故 [附注] 林曰 不納子朝之使하다
傳
梓愼曰 將水
注+陰勝陽 故曰將水하리라 昭子曰 旱也
리라
日過分而陽猶不克
하니 克必甚
하리니 能無旱乎
注+ 陽將猥出 故爲旱 아
也
注+陽氣莫然不動 乃將積聚 [附注] 林曰 陽不勝陰 莫然不動 必將積聚而爲災리라
傳
[傳]六月壬申
에 王子朝之師攻瑕及杏
하니 皆潰
注+瑕杏 敬王邑하다
傳
[傳]鄭伯如晉에 子大叔相이러니 見范獻子한대 獻子曰 若王室何오 對曰 老夫其國家不能恤이온 敢及王室가
抑人亦有言曰 嫠不恤其緯
注+嫠 寡婦也 織者常苦緯少 寡婦所宜憂하고 而憂宗周之隕
하니 爲將及焉
注+恐禍及己이라하니라
詩曰
注+詩 小雅 罍 大器 缾 小器 常稟於罍者 而所受罄盡 則罍爲無餘 故恥之라하니 王室之不寧
은 晉之恥也
라 獻子懼
하야 而與宣子圖之
注+宣子 韓起하야 乃徵會於諸侯
하야 期以明年
注+爲明年會黃父傳 하다
傳
[傳]冬十月癸酉
에 王子朝用成周之寶珪于河
注+禱河求福러니
陰不佞以溫人南侵
注+不佞 敬王大夫 晉以溫兵助敬王南侵子朝이라가 拘得玉者
하야 取其玉
하다
王定而獻之
注+不佞獻玉 [附注] 林曰 敬王定位 不佞以珪來獻하니 與之東訾
注+喜得玉 故與之邑 鞏縣西南訾城是也하다
傳
[傳]楚子爲舟師
하야 以略吳疆
注+略 行也 行吳界 將侵之하니 沈尹戌曰 此行也
에 楚必亡邑
하리라
不撫民而勞之
하고 吳不動而速之
注+速 召也하니 吳踵楚
注+躡楚踵跡면 而疆埸無備
니 邑能無亡乎
아
傳
越大夫胥犴勞王於豫章之汭
注+汭 水曲하고 越公子倉歸王乘舟
注+歸 遺也하고 倉及壽夢帥師從王
注+壽夢 越大夫이라가 王及圉陽而還
注+圉陽 楚地하다
吳人踵楚
로되 而邊人不備
하니 遂滅巢及鍾離而還
注+鍾離不書 告敗略하다
傳
沈尹戌曰 亡郢之始於此在矣 王壹動而亡二姓之帥
注+二姓之帥 守巢鍾離大夫하니 幾如是而不及郢
注+[附注] 林曰 幾動如此而亡邑不及於郢가
至今爲梗
注+詩 大雅 厲 惡 階 道 梗 病也이라하니 其王之謂乎
注+爲定四年吳入郢傳ᄂ저
24년 봄
주왕周王 2월
병술일丙戌日에
중손확仲孫貜이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중손확仲孫貜은 맹희자孟僖子이다.
숙손야叔孫婼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
注+사면赦免되어 돌아온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지至’로 기록한 것이다.
여름 5월 초하루 을미일乙未日에 일식日食이 발생하였다.
정유일丁酉日에
기백杞伯욱리郁釐가
졸卒하였다.
注+전傳이 없다. 동맹同盟하지 않았으나 이름을 기록해 부고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정유일丁酉日은 9월 5일이다. 일日만 기록하고 월月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에
오吳나라가
소읍巢邑을
멸滅하였다.
注+소巢는 초楚나라 읍邑이다. ‘멸滅’이라고 기록한 것은 대군大軍을 사용해 격멸擊滅하였기 때문이다.
傳
24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신축일辛丑日에
소간공召簡公과
남궁은南宮嚚이
감환공甘桓公을 데리고 가서
왕자王子조朝를 뵙게 하니
注+간공簡公은 소장공召莊公의 아들 소백영召伯盈이다. 은嚚은 남궁극南宮極의 아들이고, 환공桓公은 감평공甘平公의 아들이다. ,
유자劉子가
장홍萇弘에게 일러 말하기를 “
감씨甘氏도 그의 편이 되어 갔구나.”고 하자,
장홍萇弘이 대답하기를 “해로울 게 뭐 있습니까?
덕德이 같아야 의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
注+도度은 도모圖謀이니, 오직 마음이 같고 덕德이 같아야만 의로운 일을 도모圖謀할 수 있는데 자조子朝는 의로운 일을 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해害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
태서太誓〉에 ‘
주紂에게는
억조億兆의
이인夷人(人民)이 있으나
덕德이 같지 않고
注+주紂에게 억조億兆의 무리가 있고 사방의 만이국蠻夷國까지 모두 소유所有하였으나 덕德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패망敗亡하였다는 말이다. , 나에게는
난신亂臣 10
인人이 있으나 마음이 같고
덕德이 같다.
注+무왕武王이 ‘나에게는 치신治臣 10인人이 있으니, 수數는 비록 적지만 마음이 같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의 〈태서太誓〉에는 이 말이 없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주周나라가
흥성興盛하게 된 원인입니다.
임금님께서는
덕德을 닦는 데 힘쓰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마소서.
注+[부주]林: 군君은 유문공劉文公을 이른다. ”라고 하였다.
무오일戊午日에
왕자王子조朝가
오鄔로 들어갔다.
注+구지緱氏 서남쪽에 오취鄔聚가 있다. 자조子朝가 점점 강强해진 것을 말한 것이다.
傳
진晉나라
사미모士彌牟가
기箕로 가서
숙손叔孫을 맞이하려 하니
注+예우禮遇해 돌려보내려 한 것이다.,
숙손叔孫이
양기경梁其踁으로 하여금 문 안에서 기다리게 하며
注+경踁은 숙손叔孫의 가신家臣이다. 말하기를 “내가 왼쪽을 돌아보며 기침을 하거든 그를 죽이고
注+숙손叔孫은 사백士伯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온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살해殺害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 오른쪽을 돌아보며 웃거든 그만두어라.”고 하였다.
숙손叔孫이
사백士伯을
접견接見하자,
사백士伯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께서
맹주盟主가 되셨기 때문에 그대를 오랫동안 이곳에
억류抑留한 것입니다.
注+오랫동안 그대를 억류抑留하여 주邾나라에 사죄謝罪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변변치 못한 우리나라의 예물禮物을 그대의 종자從者에게 전傳[致]하고자 하시어 나를 보내어 그대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고 하니, 숙손叔孫은 그 예물禮物을 접수接受하여 돌아왔다.
경經에 ‘2월에
야婼이
진晉나라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한 것은
진晉나라를
존중尊重한 것이다.
注+‘숙손叔孫’이란 야婼의 족族을 삭제削除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진晉나라를 높이기 위한 이유이다. 야婼은 행인行人(使臣)이기 때문에 자기(魯國)의 죄罪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傳
3월
경술일庚戌日에
진후晉侯가
사경백士景伯을 보내어
주周나라
왕실王室에 발생한
변고變故에 대해 묻게 하였다.
注+이涖는 임臨이다. 자조子朝와 경왕敬王의 일에 대해 물어 누가 옳고 그른지를 알고자 한 것이다.
사백士伯이
건제乾祭에 서서
대중大衆에게 묻고는
注+건제乾祭는 왕성王城의 북문北門이다. 개介는 대大이다. 진인晉人은 곧
왕자王子조朝를
사절謝絶하고 그
사자使者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注+대중大衆이 자조子朝가 그르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자조子朝의 사신使臣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傳
여름 5월 초하루 을미일乙未日에 일식日食이 발생하였다.
재신梓愼이 말하기를 “장차
수재水災가 발생할 것이다.
注+음기陰氣가 양기陽氣를 이겼기 때문에 장차 수재水災가 발생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고 하니,
소자昭子가 말하기를 “가뭄이 들 것이다.
태양太陽이
춘분점春分點을 지났는데도
양기陽氣가 오히려
음기陰氣를 이기지 못해 〈
일식日食이
발생發生한 것이다.〉
음기陰氣를 이기게 되면 반드시
일광日光이 매우
맹렬猛烈할 것이니 가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
注+춘분春分이 지나 양기陽氣가 성盛할 때인데도 음기陰氣를 이기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장차 양기陽氣가 성盛[猥]하게 나올 것이므로 가뭄이 들 것이라고 한 것이다.
양기陽氣가 늦도록[莫]
음기陰氣를 이기지 못하니 장차
양기陽氣가 모여 쌓일 것이다.”
注+양기陽氣가 막연莫然히(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마침내 적취積聚하게 될 것이다. [부주]林: 양陽이 음陰을 이기지 못해 막연莫然(靜寂貌)히 움직이지 않으니 반드시 적취積聚하여 한재旱災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고 하였다.
傳
6월
임신일壬申日에
왕자王子조朝의 군대가
하읍瑕邑와
행읍杏邑을
공격攻擊하니, 두
읍邑의 군대가 모두
패전敗戰해 흩어졌다.
注+하瑕와 행杏은 경왕敬王의 읍邑이다.
傳
정백鄭伯(定公)이 진晉나라에 갔을 때 자태숙子太叔(游吉)이 상相이 되었더니, 범헌자范獻子(范鞅)를 알현謁見하자, 헌자獻子가 “왕실王室의 일을 어쩌면 좋겠소.”라고 묻자, 자태숙子太叔이 대답하기를 “이 늙은이[老夫]는 내 국가國家의 일도 걱정할 수 없는데 감히 왕실王室의 일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
과부寡婦[嫠]가 씨줄이 모자라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
注+이嫠는 과부寡婦이다. 베를 짜는 자는 항상 씨줄이 모자라는 것을 괴로워하니, 과부寡婦가 응당 근심할 바이다. 종주宗周(周王室)가
쇠락衰落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화禍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이다.
注+화禍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왕실王室이 실로 어지러우니
注+준준蠢蠢은 동요動搖하는 모양이다. 우리
소국小國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국大國의 근심이니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시詩에 ‘작은 그릇이 비는 것은 큰 그릇의 수치이다.
注+시詩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요아편蓼莪篇〉의 시구詩句이다. 뇌罍는 대기大器이고 병缾은 소기小器이다. 작은 그릇은 항상 큰 그릇에 담긴 것을 받는다. 받은 것이 다하였다면 큰 그릇에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치羞恥가 되는 것이다. ’고 하였으니,
왕실王室이
안녕安寧하지 못한 것은
진晉나라의
수치羞恥입니다.”고 하니,
헌자獻子는 두려워서
선자宣子(韓起)와 상의하여
注+선자宣子는 한기韓起이다. 제후諸侯를 불러
회합會合하기로 하고서 그
시기時期를
명년明年으로 정하였다.
注+명년明年에 황보黃父에서 회합會合한 전傳의 배경이다.
傳
가을 8월에
우제雩祭를 지냈으니 가물었기 때문이다.
注+끝내 숙손叔孫의 말처럼 되었다.
傳
겨울 10월
계유일癸酉日에
왕자王子조朝가
성주成周의
보규寶珪를
황하黃河에 던져 넣었다.
注+황하黃河에 기도祈禱해 복福을 구求하기 위해서이다.
갑술일甲戌日에
진인津人(나루의 뱃사공)이
하수河水 가에서 이
보규寶珪를 얻었다.
注+규珪가 스스로 물속에서 나온 것이다.
음불녕陰不佞이
온읍溫邑 사람을 거느리고서
자조子朝를
침공侵攻하기 위해 남쪽으로 가다가
注+불녕不佞은 경왕敬王의 대부大夫이다. 진晉나라가 온溫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경왕敬王을 도와 남쪽으로 가서 자조子朝를 침공侵攻한 것이다. 옥玉(寶珪)을 얻은 자를 잡아 그
옥玉을 빼앗았다.
그 옥玉을 팔려 하니 그 옥玉이 돌로 변하였다.
경왕敬王의
왕위王位가
안정安定된 뒤에 그
옥玉을 바치니
注+음불녕陰不佞이 옥玉을 바친 것이다. [부주]林: 경왕敬王의 왕위王位가 안정安定됨에 미쳐 불녕不佞이 보규寶珪를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이다. ,
경왕敬王은
불녕不佞에게
동자東訾를 주었다.
注+옥玉을 얻은 것이 기뻤기 때문에 그에게 읍邑을 준 것이다. 공현鞏縣 서남쪽에 있는 자성訾城이 바로 그곳이다.
傳
초자楚子가
주사舟師(水軍)를
편성編成하여
오吳나라
국경國境[疆]을
침공侵攻하니
注+약略은 행行이니, 오吳나라 경계境界를 순행巡行하다가 침공侵攻하려 한 것이다.,
심윤沈尹술戌이 말하기를 “이번 걸음에
초楚나라는 반드시
읍邑을 잃을 것이다.
백성을
위무慰撫하지 않고 괴롭히며
오吳나라가 군대를 움직이지도 않는데 그들을
전쟁戰爭에 불러들이니
注+속速은 소召(부름)이다. ,
오군吳軍이
초군楚軍의 뒤를 밟아 따라온다면
注+초군楚軍의 뒤를 밟는 것이다. 초楚나라의
변경邊境[疆埸]에는
방비防備가 없으니
읍邑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傳
월越나라
대부大夫서안胥犴이
예장豫章의 물굽이서
초평왕楚平王을
위로慰勞하고
注+예汭는 물굽이이다.,
월越나라
공자公子창倉이
평왕平王에게
승선乘船을 주고서
注+귀歸는 유遺(줌)이다. 공자公子창倉과
수몽壽夢이 군대를 거느리고서
초평왕楚平王을 따르다가
注+수몽壽夢은 월越나라 대부大夫이다. 평왕平王이
어양圉陽에 이른 뒤에 돌아갔다.
注+어양圉陽은 초楚나라 땅이다.
오인吳人이
초군楚軍의 뒤를 밟는데도
변인邊人(邊方守備軍)이
방비防備하지 않으니,
오군吳軍이 드디어
소巢와
종리鍾離를
격멸擊滅하고 돌아갔다.
注+종리鍾離를 경經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패전敗戰을 통고通告한 문서文書에 생략省略하였기 때문이다.
傳
심윤沈尹술戌이 말하기를 “
영도郢都를 잃는 실마리[始]가 이번
전쟁戰爭에 있을 것이다.(이번
전쟁戰爭이
영도郢都를 잃는 불행의 실마리가 된다는 말)
평왕平王이 한 번
출동出動하여 두
성姓의
장수將帥를 잃었으니
注+두 성姓의 장수將帥는 소巢와 종리鍾離를 지키던 대부大夫이다., 몇 차례 이와 같이 하면
적군敵軍이
영도郢都에 미치지 않겠는가?
注+[부주]林: 몇 차례 이와 같이 출동出動하면 읍邑을 잃는 일이 영도郢都에 미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지금까지 고통스럽네.
注+시詩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상유편桑柔篇〉의 시구詩句이다. 여厲는 악惡이고 계階는 도道(길)이고 경梗은 병病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시詩는 아마도
초평왕楚平王의 경우를 이른 듯하다.
注+정공定公 4년에 오군吳軍이 영도郢都로 쳐들어간 전傳의 배경이다. ”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