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春秋左氏傳(6)

춘추좌씨전(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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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經]二十有四年春王二月丙戌 仲孫貜卒注+無傳 孟僖子也하다
[經]婼至自晉注+喜得赦歸 故書至하다
[經]夏五月乙未朔 日有食之하다
[經]秋八月 大雩하다
[經]丁酉 杞伯郁釐卒注+無傳 未同盟而赴以名 丁酉九月五日 有日無月하다
[經]冬 吳滅巢注+楚邑也 書滅 用大師하다
[經]葬杞平公注+無傳하다
[傳]二十四年春王正月辛丑 召簡公南宮嚚以甘桓公見王子朝注+簡公 召莊公之子召伯盈也 嚚 南宮極之子 桓公 甘平公之子하니 劉子謂萇弘曰 甘氏又往矣로다 對曰 何害잇가
同德度義注+度 謀也 言惟同心同德 則能謀義 子朝不能 於我無害니이다
大誓曰 紂有億兆이나 亦有離德注+言紂衆億兆 兼有四夷 不能同德 終敗亡하고 余有亂臣十人이나 同心同德注+武王言我有治臣十人 雖少 同心也 今大誓無此語이라하니 此周所以興也니이다
君其務德하고 無患無人注+[附注] 林曰 君 謂劉文公하소서
戊午 王子朝入于鄔注+緱氏西南有鄔聚 言子朝稍强하다
[傳]晉士彌牟逆叔孫于箕注+將禮而歸之하니 叔孫使梁其踁待于門內注+踁 叔孫家臣曰 余左顧而欬어든 乃殺之注+疑士伯來殺己 故謀殺之하고 右顧而笑어든 乃止하라
叔孫見士伯한대 士伯曰 寡君以爲盟主之故 是以久子注+久執子以謝邾하니라
不腆敝邑之禮 將致諸從者하야 使彌牟逆吾子니라 叔孫受禮而歸하다
二月 婼至自晉이라하니 尊晉也注+貶婼族 所以尊晉 婼行人 故不言罪己
[傳]三月庚戌 晉侯使士景伯涖問周故注+涖 臨也 就問子朝敬王 知誰曲直하다
士伯立于乾祭하야 而問於介衆注+乾祭 王城北門 介 大也하고 晉人乃辭王子朝하고 不納其使注+衆言子朝曲故 [附注] 林曰 不納子朝之使하다
[傳]夏五月乙未朔 日有食之하니
梓愼曰 將水注+陰勝陽 故曰將水하리라 昭子曰 旱也리라
日過分而陽猶不克하니 克必甚하리니 能無旱乎注+ 陽將猥出 故爲旱
注+陽氣莫然不動 乃將積聚 [附注] 林曰 陽不勝陰 莫然不動 必將積聚而爲災리라
[傳]六月壬申 王子朝之師攻瑕及杏하니 皆潰注+瑕杏 敬王邑하다
[傳]鄭伯如晉 子大叔相이러니 見范獻子한대 獻子曰 若王室何 對曰 老夫其國家不能恤이온 敢及王室
抑人亦有言曰 嫠不恤其緯注+嫠 寡婦也 織者常苦緯少 寡婦所宜憂하고 而憂宗周之隕하니 爲將及焉注+恐禍及己이라하니라
今王室實蠢蠢焉注+蠢蠢 動擾貌하니 吾小國懼矣
然大國之憂也 吾儕何知焉
吾子其早圖之하라
詩曰 注+詩 小雅 罍 大器 缾 小器 常稟於罍者 而所受罄盡 則罍爲無餘 故恥之라하니 王室之不寧 晉之恥也 獻子懼하야 而與宣子圖之注+宣子 韓起하야 乃徵會於諸侯하야 期以明年注+爲明年會黃父傳 하다
[傳]秋八月 大雩하니 旱也注+終如叔孫
[傳]冬十月癸酉 王子朝用成周之寶珪于河注+禱河求福러니
甲戌 津人得諸河上注+珪自出水하다
陰不佞以溫人南侵注+不佞 敬王大夫 晉以溫兵助敬王南侵子朝이라가 拘得玉者하야 取其玉하다
將賣之하니 則爲石하다
王定而獻之注+不佞獻玉 [附注] 林曰 敬王定位 不佞以珪來獻하니 與之東訾注+喜得玉 故與之邑 鞏縣西南訾城是也하다
[傳]楚子爲舟師하야 以略吳疆注+略 行也 行吳界 將侵之하니 沈尹戌曰 此行也 楚必亡邑하리라
不撫民而勞之하고 吳不動而速之注+速 召也하니 吳踵楚注+躡楚踵跡 而疆埸無備 邑能無亡乎
越大夫胥犴勞王於豫章之汭注+汭 水曲하고 越公子倉歸王乘舟注+歸 遺也하고 倉及壽夢帥師從王注+壽夢 越大夫이라가 王及圉陽而還注+圉陽 楚地하다
吳人踵楚로되 而邊人不備하니 遂滅巢及鍾離而還注+鍾離不書 告敗略하다
沈尹戌曰 亡郢之始於此在矣 王壹動而亡二姓之帥注+二姓之帥 守巢鍾離大夫하니 幾如是而不及郢注+[附注] 林曰 幾動如此而亡邑不及於郢
詩曰 誰生厲階
至今爲梗注+詩 大雅 厲 惡 階 道 梗 病也이라하니 其王之謂乎注+爲定四年吳入郢傳ᄂ저


24년 봄 주왕周王 2월 병술일丙戌日중손확仲孫貜하였다.注+이 없다. 중손확仲孫貜맹희자孟僖子이다.
숙손야叔孫婼나라에서 돌아왔다.注+사면赦免되어 돌아온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므로 ‘’로 기록한 것이다.
여름 5월 초하루 을미일乙未日일식日食이 발생하였다.
가을 8월에 우제雩祭(祈雨祭)를 지냈다.
정유일丁酉日기백杞伯욱리郁釐하였다.注+이 없다. 동맹同盟하지 않았으나 이름을 기록해 부고하였기 때문에 그 이름을 기록한 것이다. 정유일丁酉日은 9월 5일이다. 만 기록하고 은 기록하지 않은 것이다.
겨울에 나라가 소읍巢邑하였다.注+나라 이다. ‘’이라고 기록한 것은 대군大軍을 사용해 격멸擊滅하였기 때문이다.
기평공杞平公을 장사 지냈다.注+이 없다.
24년 봄 주왕周王정월正月신축일辛丑日소간공召簡公남궁은南宮嚚감환공甘桓公을 데리고 가서 왕자王子를 뵙게 하니注+간공簡公소장공召莊公의 아들 소백영召伯盈이다. 남궁극南宮極의 아들이고, 환공桓公감평공甘平公의 아들이다. , 유자劉子장홍萇弘에게 일러 말하기를 “감씨甘氏도 그의 편이 되어 갔구나.”고 하자, 장홍萇弘이 대답하기를 “해로울 게 뭐 있습니까?
이 같아야 의로운 일을 도모할 수 있습니다.注+도모圖謀이니, 오직 마음이 같고 이 같아야만 의로운 일을 도모圖謀할 수 있는데 자조子朝는 의로운 일을 할 수 없으니 우리에게 가 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태서太誓〉에 ‘에게는 억조億兆이인夷人(人民)이 있으나 이 같지 않고注+에게 억조億兆의 무리가 있고 사방의 만이국蠻夷國까지 모두 소유所有하였으나 이 같지 않았기 때문에 끝내 패망敗亡하였다는 말이다. , 나에게는 난신亂臣 10이 있으나 마음이 같고 이 같다.注+무왕武王이 ‘나에게는 치신治臣 10이 있으니, 는 비록 적지만 마음이 같다.’고 말한 것이다. 지금의 〈태서太誓〉에는 이 말이 없다. ’고 하였으니, 이것이 나라가 흥성興盛하게 된 원인입니다.
임금님께서는 을 닦는 데 힘쓰고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지 마소서.注+[부주]林: 유문공劉文公을 이른다. ”라고 하였다.
무오일戊午日왕자王子로 들어갔다.注+구지緱氏 서남쪽에 오취鄔聚가 있다. 자조子朝가 점점 해진 것을 말한 것이다.
나라 사미모士彌牟로 가서 숙손叔孫을 맞이하려 하니注+예우禮遇해 돌려보내려 한 것이다., 숙손叔孫양기경梁其踁으로 하여금 문 안에서 기다리게 하며注+숙손叔孫가신家臣이다. 말하기를 “내가 왼쪽을 돌아보며 기침을 하거든 그를 죽이고注+숙손叔孫사백士伯이 자기를 죽이기 위해 온 것으로 의심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살해殺害하려고 계획한 것이다. , 오른쪽을 돌아보며 웃거든 그만두어라.”고 하였다.
숙손叔孫사백士伯접견接見하자, 사백士伯이 말하기를 “우리 임금님께서 맹주盟主가 되셨기 때문에 그대를 오랫동안 이곳에 억류抑留한 것입니다.注+오랫동안 그대를 억류抑留하여 나라에 사죄謝罪하게 하였다는 말이다.
변변치 못한 우리나라의 예물禮物을 그대의 종자從者에게 [致]하고자 하시어 나를 보내어 그대를 맞이하게 하셨습니다.”고 하니, 숙손叔孫은 그 예물禮物접수接受하여 돌아왔다.
에 ‘2월에 나라에서 돌아왔다.’고 기록한 것은 나라를 존중尊重한 것이다.注+숙손叔孫’이란 삭제削除하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나라를 높이기 위한 이유이다. 행인行人(使臣)이기 때문에 자기(魯國)의 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다.
3월 경술일庚戌日진후晉侯사경백士景伯을 보내어 나라 왕실王室에 발생한 변고變故에 대해 묻게 하였다.注+이다. 자조子朝경왕敬王의 일에 대해 물어 누가 옳고 그른지를 알고자 한 것이다.
사백士伯건제乾祭에 서서 대중大衆에게 묻고는注+건제乾祭왕성王城북문北門이다. 이다. 진인晉人은 곧 왕자王子사절謝絶하고 그 사자使者를 받아들이지 않았다.注+대중大衆자조子朝가 그르다고 말하였기 때문이다. [부주]林: 자조子朝사신使臣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다.
여름 5월 초하루 을미일乙未日일식日食이 발생하였다.
재신梓愼이 말하기를 “장차 수재水災가 발생할 것이다.注+음기陰氣양기陽氣를 이겼기 때문에 장차 수재水災가 발생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고 하니, 소자昭子가 말하기를 “가뭄이 들 것이다.
태양太陽춘분점春分點을 지났는데도 양기陽氣가 오히려 음기陰氣를 이기지 못해 〈일식日食발생發生한 것이다.〉 음기陰氣를 이기게 되면 반드시 일광日光이 매우 맹렬猛烈할 것이니 가물지 않을 수 있겠는가?注+춘분春分이 지나 양기陽氣할 때인데도 음기陰氣를 이기지 못해서이다. 그러나 장차 양기陽氣[猥]하게 나올 것이므로 가뭄이 들 것이라고 한 것이다.
양기陽氣가 늦도록[莫]음기陰氣를 이기지 못하니 장차 양기陽氣가 모여 쌓일 것이다.”注+양기陽氣막연莫然히(고요히) 움직이지 않아 마침내 적취積聚하게 될 것이다. [부주]林: 을 이기지 못해 막연莫然(靜寂貌)히 움직이지 않으니 반드시 적취積聚하여 한재旱災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고 하였다.
6월 임신일壬申日왕자王子의 군대가 하읍瑕邑행읍杏邑공격攻擊하니, 두 의 군대가 모두 패전敗戰해 흩어졌다.注+경왕敬王이다.
정백鄭伯(定公)이 나라에 갔을 때 자태숙子太叔(游吉)이 이 되었더니, 범헌자范獻子(范鞅)를 알현謁見하자, 헌자獻子가 “왕실王室의 일을 어쩌면 좋겠소.”라고 묻자, 자태숙子太叔이 대답하기를 “이 늙은이[老夫]는 내 국가國家의 일도 걱정할 수 없는데 감히 왕실王室의 일을 걱정하겠습니까?
그러나 사람들의 말에 ‘과부寡婦[嫠]가 씨줄이 모자라는 것은 걱정하지 않고注+과부寡婦이다. 베를 짜는 자는 항상 씨줄이 모자라는 것을 괴로워하니, 과부寡婦가 응당 근심할 바이다. 종주宗周(周王室)가 쇠락衰落하는 것을 걱정하는 것은 가 장차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해서이다.注+가 자기에게 미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고 하였습니다.
지금 왕실王室이 실로 어지러우니注+준준蠢蠢동요動搖하는 모양이다. 우리 소국小國은 두렵습니다.
그러나 이는 대국大國의 근심이니 우리가 어찌 알 수 있겠습니까?
그대는 일찍이 방법을 꾀하시기 바랍니다.
에 ‘작은 그릇이 비는 것은 큰 그릇의 수치이다.注+는 《시경詩經》 〈소아小雅요아편蓼莪篇〉의 시구詩句이다. 대기大器이고 소기小器이다. 작은 그릇은 항상 큰 그릇에 담긴 것을 받는다. 받은 것이 다하였다면 큰 그릇에 남은 것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수치羞恥가 되는 것이다. ’고 하였으니, 왕실王室안녕安寧하지 못한 것은 나라의 수치羞恥입니다.”고 하니, 헌자獻子는 두려워서 선자宣子(韓起)와 상의하여注+선자宣子한기韓起이다. 제후諸侯를 불러 회합會合하기로 하고서 그 시기時期명년明年으로 정하였다.注+명년明年황보黃父에서 회합會合의 배경이다.
가을 8월에 우제雩祭를 지냈으니 가물었기 때문이다.注+끝내 숙손叔孫의 말처럼 되었다.
겨울 10월 계유일癸酉日왕자王子성주成周보규寶珪황하黃河에 던져 넣었다.注+황하黃河기도祈禱하기 위해서이다.
갑술일甲戌日진인津人(나루의 뱃사공)이 하수河水 가에서 이 보규寶珪를 얻었다.注+가 스스로 물속에서 나온 것이다.
음불녕陰不佞온읍溫邑 사람을 거느리고서 자조子朝침공侵攻하기 위해 남쪽으로 가다가注+불녕不佞경왕敬王대부大夫이다. 나라가 의 군대를 거느리고 가서 경왕敬王을 도와 남쪽으로 가서 자조子朝침공侵攻한 것이다. (寶珪)을 얻은 자를 잡아 그 을 빼앗았다.
을 팔려 하니 그 이 돌로 변하였다.
경왕敬王왕위王位안정安定된 뒤에 그 을 바치니注+음불녕陰不佞을 바친 것이다. [부주]林: 경왕敬王왕위王位안정安定됨에 미쳐 불녕不佞보규寶珪를 가지고 와서 바친 것이다. , 경왕敬王불녕不佞에게 동자東訾를 주었다.注+을 얻은 것이 기뻤기 때문에 그에게 을 준 것이다. 공현鞏縣 서남쪽에 있는 자성訾城이 바로 그곳이다.
초자楚子주사舟師(水軍)를 편성編成하여 나라 국경國境[疆]을 침공侵攻하니注+이니, 나라 경계境界순행巡行하다가 침공侵攻하려 한 것이다., 심윤沈尹이 말하기를 “이번 걸음에 나라는 반드시 을 잃을 것이다.
백성을 위무慰撫하지 않고 괴롭히며 나라가 군대를 움직이지도 않는데 그들을 전쟁戰爭에 불러들이니注+(부름)이다. , 오군吳軍초군楚軍의 뒤를 밟아 따라온다면注+초군楚軍의 뒤를 밟는 것이다. 나라의 변경邊境[疆埸]에는 방비防備가 없으니 을 잃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나라 대부大夫서안胥犴예장豫章의 물굽이서 초평왕楚平王위로慰勞하고注+는 물굽이이다., 나라 공자公子평왕平王에게 승선乘船을 주고서注+(줌)이다. 공자公子수몽壽夢이 군대를 거느리고서 초평왕楚平王을 따르다가注+수몽壽夢나라 대부大夫이다. 평왕平王어양圉陽에 이른 뒤에 돌아갔다.注+어양圉陽나라 땅이다.
오인吳人초군楚軍의 뒤를 밟는데도 변인邊人(邊方守備軍)이 방비防備하지 않으니, 오군吳軍이 드디어 종리鍾離격멸擊滅하고 돌아갔다.注+종리鍾離에 기록하지 않은 것은 패전敗戰통고通告문서文書생략省略하였기 때문이다.
심윤沈尹이 말하기를 “영도郢都를 잃는 실마리[始]가 이번 전쟁戰爭에 있을 것이다.(이번 전쟁戰爭영도郢都를 잃는 불행의 실마리가 된다는 말) 평왕平王이 한 번 출동出動하여 두 장수將帥를 잃었으니注+장수將帥종리鍾離를 지키던 대부大夫이다., 몇 차례 이와 같이 하면 적군敵軍영도郢都에 미치지 않겠는가?注+[부주]林: 몇 차례 이와 같이 출동出動하면 을 잃는 일이 영도郢都에 미치지 않겠느냐는 말이다.
에 ‘누가 의 길을 만들었는가?
지금까지 고통스럽네.注+는 《시경詩經》 〈대아大雅상유편桑柔篇〉의 시구詩句이다. 이고 (길)이고 이다.’라고 하였으니, 이 는 아마도 초평왕楚平王의 경우를 이른 듯하다.注+정공定公 4년에 오군吳軍영도郢都로 쳐들어간 의 배경이다. ”고 하였다.


역주
역주1 夷人 : 夷는 語中助辭로 뜻이 없다. 〈楊注〉
역주2 陽[過]‧過[陰] : 저본에는 ‘陽’과 ‘過’로 되어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過’와 ‘陰’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陽不克莫(모) 將積聚 : 莫는 暮와 通用이니, 時期가 지난 것을 이른다. 莫를 莫然不動으로 해석한 杜注는 옳지 않다. 太陽이 春分點을 지났는데도 陽이 오히려 陰을 이기지 못하여 陽이 陰을 이기지 못하는 것이 이미 늦었으니 반드시 장차 陽氣가 積聚하여 旱災가 될 것이라는 말이다. 《左氏會箋》
역주4 缾之罄矣 惟罍之恥 : 缾과 罍는 모두 古代에 술을 담던 그릇이다. 缾은 작은 그릇이고 罍는 큰 그릇으로 담고 있는 술이 많다. 병에 술이 빈 것은 동이에 담긴 술을 병에 注入하지 않은 것을 표현한 것이다. 그러므로 ‘羞恥’라고 한 것이다. 缾으로 王室을 비유하고 罍로 晉나라를 비유한 것이다. 晉나라가 비록 諸侯였으나 실로 强大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비유한 것이다.〉 〈楊注〉
역주5 氏[之] : 저본에는 ‘氏’로 되어 있으나 《十三經注疏》本에 의거하여 ‘之’로 바로잡았다.
역주6 〈及〉 : 저본에는 ‘及’이 빠져 있으나 《四庫全書左傳杜林合注》本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춘추좌씨전(6) 책은 2019.05.28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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