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案家語 “孔子謂子路曰 ‘夫江始於岷山, 其源可以濫觴, 及其至江津也, 不舫舟, 不避風
, 不可以涉.’”
又文選郭景純江賦曰 “惟岷山之導江, 初發源乎濫觴.”
二世元年, 諸侯叛秦, 沛人共立劉季, 以爲沛公.
年八月入秦, 秦相趙高殺二世, 立二世兄子子嬰.
冬十月, 爲漢元年. 子嬰二年春正月, 項羽尊楚懷王爲義帝, 羽自立爲西楚霸王, 更立沛公爲漢王. 王巴‧蜀‧漢中四十一縣, 都南鄭.
五年, 破項羽, 斬之. 六年二月, 卽皇帝位于氾水之陽, 遂取漢爲天下號, 若商‧周然也. 漢興, 改秦之政,
.
言從始皇焚燒之後, 至漢氏尊學, 初除
, 有河間人顔貞出其父芝所藏凡一十八章, 以相傳授.
言其至少, 故云濫觴於漢也. 其後復盛, 則如江矣. 釋名云
旣以濫觴況其少, 因取糟粕比其微, 言醇粹旣喪, 但餘此糟粕耳.
한漢나라 때 비로소 미량微量의 전적典籍이 다시 전수되기 시작했지만 전하는 것은 모두 술찌끼 같은 것들뿐이었음에랴.
疏
정의왈正義曰:살펴보건대 ≪공자가어孔子家語≫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공자孔子가 자로子路에게 이르기를 ‘장강長江은 민산岷山에서 시작되는데, 그 근원에서는 〈물의 깊이가〉 술잔이나 띄울 만하다. 그러나 강나루〈가 있는 곳〉에 이르러서는 배를 타지 않고는,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는 건널 수 없다.’라고 하였다.”
왕숙王肅이 이에 대해 “상觴은 술을 담는 그릇이니, 미미함을 말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또 ≪문선文選≫에서 곽경순郭景純의 〈강부江賦〉에 이르기를 “민산岷山이 장강 물길을 끌어내는데, 처음 발원發源하는 곳에서는 술잔이나 띄울 만하네.”라고 하였는데,
이주한李周翰의 주注에 “남濫은 흘러넘침을 이르니, 조금 흐르는 모양이다. 상觴은 술잔이다. 발원 지점의 물길이 작아서 한 잔과 같다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한漢은 파巴‧촉蜀 일대의 지명이다.
진 이세秦 二世 원년(B.C.209)에 제후들이 진秦나라에 반기를 들었는데, 패沛 지방 사람들이 함께 유계劉季(유방劉邦)를 패공沛公으로 세웠다. 3년 8월에 〈유방이〉 진秦나라로 들어가자, 진秦나라 정승 조고趙高가 이세二世를 죽이고 이세二世의 형의 아들 자영子嬰을 세웠다.
〈이해〉 겨울 10월이 한漢나라 원년元年이다. 자영子嬰이 즉위한 지 2년째 되던 해 봄 정월正月에, 항우項羽가 초 회왕楚 懷王을 의제義帝로 높이고 항우 자신은 스스로 서초패왕西楚霸王이 되었으며 또 패공沛公(유방)을 한왕漢王으로 세웠다. 〈유방은〉 파巴‧촉蜀‧한중漢中의 41개 현縣을 통치하며 남정南鄭(지금의 섬서성 한중시漢中市)에 도읍하였다.
〈한漢나라〉 5년(B.C.202)에 〈유방이〉 항우의 군사를 격파하고 항우를 참수하였다. 6년(B.C.201) 2월에 〈유방이〉 범수氾水 북쪽에서 황제皇帝에 즉위하고 마침내 ‘한漢’이라는 이름을 취하여 ‘상商나라’‧‘주周나라’ 같은 천하天下(천자국의 강역疆域)의 호칭으로 삼았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서 진秦나라의 정치를 개혁하고 대대적으로 서적을 수집하였다.
〈이 대목은〉 진 시황이 서적들을 불태운 뒤 한漢나라에 이르러 학문을 존숭하고 비로소 협서율挾書律을 혁파하자 하간河間 사람 안정顔貞이 아버지 안지顔芝가 감추어 두었던 총 18장의 ≪효경≫을 꺼내어 전수하게 되었음을 말한 것인데,
그 분량이 매우 적음을 말하려 했기 때문에 ‘한漢나라 때 비로소 미량微量의 전적典籍이 다시 전수되기 시작[남濫]했지만’이라고 한 것이다. 그 뒤에 〈전적典籍이〉 더욱 많아져서는 강물 같았다. ≪석명釋名≫에 “술찌끼를 조糟라 하고, 〈양분이 다 삭아 술 위로〉 떠오른 쌀을 박粕이라 한다.”라고 하였다.
남상濫觴으로 그(한대漢代부터 다시 전해진 전적들) 분량이 적음을 비유했기 때문에 이어서 조박糟粕을 취하여 그 내용이 대수롭지 않음을 빗대어, 순수한 정수精髓는 이미 사라지고 그저 이 술찌끼〈처럼 대수롭지 않은 것〉만 남았다고 말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