疏
○正義曰:云“始自天子 終於庶人”者, 謂五章以天子爲始, 庶人爲終也.
云“尊卑雖殊 孝道同致”者, 謂天子庶人尊卑雖別, 至於行孝, 其道不殊.
天子須愛親敬親, 諸侯須不驕不溢, 卿大夫於言行無擇, 士須資親事君,
庶人謹身節用, 各因心而行之斯至, 豈藉創物之智‧扛鼎之力. 若率强之, 無不及也.
云“而患不能及者 未之有也”者, 此謂人無貴賤尊卑, 行孝之道同致, 若各率其己分, 則皆能養親, 言患不及於孝者未有也.
說孝道包含之義廣大,
. 經言“孝無終始”, 謂難備終始,
但不致毁傷, 立身行道, 安其親‧忠於君, 一事可稱, 則行成名立, 不必終始皆備也.
此言行孝甚易, 無不及之理, 故非孝道不終, 始致必
之患也.
云“言無此理 故曰未有”者, 此釋‘未之有’之意也. 謝萬以爲 “無終始, 恒患不及, 未之有者, 少賤之辭也.”
劉瓛云 “
, 若言我賤而患行孝不及己者, 未之有也. 此但得憂不及之理, 而失於歎少賤之義也.”
曰 “諸家皆以爲患及身, 今注以爲自患不及, 將有說乎.” 答曰 “案說文云 ‘患, 憂也.’ 廣雅曰 ‘患, 惡也.’
又若案注說, 釋‘不及’之義凡有四焉, 大意皆謂有患貴賤行孝無及之憂, 非以患爲禍也. 經傳之稱患者多矣.
左傳曰‘
’, 皆是憂惡之辭也. 惟蒼頡篇謂患爲禍, 孔‧鄭‧韋‧王之學引之, 以釋此經.
禮祭義曾子說孝曰 ‘衆之本敎曰孝, 其行曰養. 養可能也, 敬爲難. 敬可能也, 安爲難.
安可能也, 卒爲難. 父母旣沒, 愼行其身, 不遺父母惡名, 可謂能終矣.’
夫以曾參行孝, 親承聖人之意, 至於能終孝道, 尙以爲難, 則寡能無識, 固非所企也.
今爲行孝不終, 禍患必及. 此人偏執, 詎謂經通.” 鄭曰 “書云 ‘
.’
又曰 ‘
.’ 斯則必有災禍, 何得稱無也.” 答曰 “來問指淫凶悖慝之倫, 經言戒不終善美之輩.
又此章云 ‘以養父母, 此庶人之孝也.’ 儻有能養而不能終, 只可未爲具美, 無宜卽同淫慝也.
古今凡庸, 詎識孝道. 但使能養, 安知始終. 若今皆及於災, 便是比屋可貽禍矣. 而當朝通識者以爲鄭注非誤.
故謝萬云 ‘言爲人無終始者, 謂孝行有終始也. 患不及者, 謂用心憂不足也.
能行如此之善, 曾子所以稱難, 故鄭注云 「善未有也」.’ 諦詳此義, 將謂不然.
何者. 孔聖垂文, 包於上下, 盡力隨分, 寧限高卑. 則因心而行, 無不及也. 如依謝萬之說, 此則常情所昧矣.
, 乃爲虛說者與.” 制
曰 “嗟乎, 孝之爲大, 若天之不可逃也, 地之不可遠也.
朕窮五孝之說, 人無貴賤, 行無終始, 未有不由此道而能立其身者.
然則聖人之德, 豈云遠乎. 我欲之而斯至, 何患不及於己者哉,”
疏
○정의왈正義曰:[시자천자 종어서인始自天子 終於庶人] 다섯 개의 장章에서 천자를 처음으로 삼고 서인을 마지막으로 삼은 것을 일컫는다.
[존비수수 효도동치尊卑雖殊 孝道同致] 천자부터 서인까지 존비는 비록 다르나 효孝를 행하는 데 있어서는 그 도리가 다르지 않다는 말이다.
천자는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버이를 공경해야 하며, 제후는 교만하지 않고 사치하지 않아야 하며, 경‧대부는 말과 행동 중에 법도에 어긋난 것이 없게 해야 하고,
사士는 어버이에 대한 효孝에서 공경을 취하여 임금을 섬겨야 하며, 서인은 몸가짐을 조심하고 재용財用을 절약해야 하는데, 이런 일들은 각기 마음을 따라 행하면 도달하게 된다. 어찌 사물을 창조하는 지혜나 정鼎을 들어 올리는 힘을 빌릴 일이겠는가. 〈도리를〉 따라 노력한다면 〈효孝에〉 도달하지 못할 사람이 없다.
[이환불능급자 미지유야而患不能及者 未之有也] 이는 사람의 귀천과 존비를 막론하고, 효를 행하는 도리는 동일하므로 만약 각기 자기의 분한分限(각 신분으로 할 수 있는 한계 안의 것)을 따른다면 모두 어버이를 봉양할 수 있다는 말로, 효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는 말이다.
말하자면 효도는 포함하는 뜻이 광대하여 천지에 꽉 차고 사해四海에 뻗친다는 것이다. 경문經文에서 ‘효무종시孝無終始(효의 도리는 시작과 끝의 차이가 없으니)’라고 말한 것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구비하기는 어려우므로,
다만 신체를 훼손하지 않는 일, 입신立身하여 도道를 행하는 일, 어버이를 편안히 해드리는 일, 임금에게 충성하는 일 중에 한 가지라도 칭찬할 만하면 효행이 완성되어 명성이 세워지므로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갖추어야만 하는 것은 아니라는 말이다.
이는 효를 행하기는 매우 쉬워서 도달하지 못할 리가 없다고 말한 것이지, 본디[고故] 효도를 끝맺지 못하면 비로소 반드시 닥치는 재앙을 부르게 된다는 말이 아니다.
[언무차리 고왈미유言無此理 故曰未有] 이는 경문의 ‘미지유未之有’의 뜻을 풀이한 것이다. 사만謝萬은 “처음과 끝을 막론하고 미치지 못할까봐 늘 걱정하는 사람은 있지 않다는 것은 미천한 사람〈이 탄식하는〉 말이다.”라고 하였다.
유환劉瓛은 이에 대해 “예禮가 아래로 서인에게까지 적용되지는 않지만, ‘나는 미천하니, 효를 행하는 일이 나에게 미치지 않을까봐 걱정이다.’라고 말하는 자는 있지 않다. 이는 단지 ‘미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이치로 본 것만 맞고, 미천함을 탄식한 뜻으로 〈본 것은〉 잘못이다.”라고 하였다.
정씨鄭氏가 “〈경문의 ‘환불급患不及’에 대해〉 여러 학자들이 모두 ‘재앙이 자기 몸에 미치는 것’이라고 한 데 비해 지금 주注는 ‘도달하지 못할까봐 스스로 걱정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설명해주시겠습니까?”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살펴보건대, ≪설문해자說文解字≫에 ‘환患은 우憂(걱정함)이다.’라고 하고 ≪광아廣雅≫에 ‘환患은 악惡(나쁜 일)이다.’라고 하였다.
또 주석의 설들을 살펴보자면 ‘불급不及’의 뜻을 풀이한 것이 모두 4가지인데, 대의는 모두 ‘존귀한 사람과 미천한 사람이 효를 행하는 데에 도달하지 못할까봐 걱정하는 근심이 있다.’라고 한 것이지, 환患을 재앙이라고 한 것이 아니다. 경전經傳에 ‘환患’자를 쓴 경우가 많다.
≪논어≫에 ‘남이 자기를 알아주지 않음을 걱정하지[환患] 말고’라고 한 것, 또 ‘지위地位가 없음을 걱정하지[환患] 말고’라고 한 것, 또 ‘백성과 토지가 적음을 걱정하지 않고 정치가 균평하지 않음을 걱정하며[환患]’라고 한 것,
≪춘추좌씨전≫에 ‘선자宣子가 그것을 걱정하였다.[환患]’라고 한 것이 모두 걱정한다는 말이다. 오직 ≪창힐편蒼頡篇≫만은 ‘환患’을 재앙의 뜻으로 썼는데, 공안국孔安國‧정현鄭玄‧위소韋昭‧왕숙王肅의 학파에서 이를 인용하여 이 경문을 해석하였다.
이 때문에 황간皇侃이 ‘시작은 없고 끝만 있는 것은, 잘못을 깨달아 고친 선행善行을 말한다. 〈이런 경우에〉 재앙이 어찌 꼭 미치겠는가. 〈환患이 재앙의 뜻이라면 경문의〉 「시작이 없다」는 말은 뜻 없이 한 말이 되어 버린다.’라고 하였다.
≪예기禮記≫ 〈제의祭義〉에서 증자가 효孝에 대해 말하기를 “사람들에게 가장 기본적인 교육은 효孝이고, 이를 행하는 방법은 봉양이다. 봉양을 잘 하더라도 공경하기는 어려우며, 공경을 잘 하더라도 편안히 해드리기는 어려우며,
편안히 해드리기를 잘 하더라도 효도를 마치기는 어렵다. 부모가 별세한 뒤에 언행을 조심하여 부모에게 악명을 끼치지 않는다면 효도를 잘 마쳤다고 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효를 잘 행하여 성인聖人(공자孔子)의 뜻을 직접 받든 증삼曾參조차 효도를 잘 마치는 것은 어렵게 여겼으니, 그렇다면 재능이 변변찮고 학식이 없는 사람들은 실로 노력한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지금 〈경문經文의 이 대목이〉 ‘효를 행하되 잘 마치지 못하면 재앙이 반드시 미친다.’라는 뜻이라면 이는 사람이 한쪽만 고집하는 것이니 어찌 보편성을 지닌 경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정씨가 〈또〉 “≪상서≫에 ‘하늘의 이치는 선한 자에게는 복을 내리고 악한 자에게는 재앙을 내리므로’라고 하고,
또 ‘정도正道를 따르면 길吉하고 악역惡逆을 따르면 흉凶한 것이 그림자나 메아리처럼 필연적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효도孝道를 다하지 못한 자에게는〉 반드시 재앙이 있을 것이니, 어찌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기에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그대의 질문은 음흉하고 패악하고 사특한 무리를 지적한 것인데 반해 경문經文의 말은 선善하고 아름다운 일을 잘 마무리하지 못하는 무리를 신칙한 것이다.
≪논어≫에 ‘오늘날 효孝라는 것은 다만 봉양이나 잘하는 것을 일컬으니’라고 하였고, 증자曾子는 ‘나는 그저 봉양이나 하는 사람이니 어찌 효자라고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으며,
또 ≪효경≫의 이 장章에서 ‘그로써 부모를 봉양하나니, 이는 서인庶人의 효孝이다.’라고 하였다. 혹여 봉양을 잘 했으나 효孝를 잘 끝맺지 못한 사람이 있다면, 오직 미덕을 완비하지 못했다고 할 수 있을 뿐이니 음흉하고 사특한 것과 곧장 동일시하는 것은 타당치 않다.
고금의 평범한 사람들이 어찌 효孝의 도리를 알겠는가. 단지 봉양을 잘하게 할 뿐이니, 어찌 그 시종을 장담할 수 있겠는가. 만약 지금 이런 사람들이 모두 재앙을 당한다면 집집마다 재앙을 당하게 될 것이다. 식견이 깊고 넓은 당대當代(한漢나라) 사람들은 정현의 주注가 잘못되지 않았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사만謝萬은 ‘사람됨에 시작과 끝이 있지 않다는 말은 효행孝行에 시작과 끝이 있다는 말이 된다. 「환불급患不及」은 부족할까봐 걱정하는 마음을 쓴다는 말이다.
이 같은 선善을 잘 행하는 것을 증자曾子는 어렵다고 하였다. 이 때문에 정현의 주注에 「선善이 있지 않다」라고 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을 상세히 음미해 보면 옳지 않다고 하게 될 것이다.
어째서인가? 성인聖人인 공자孔子가 남긴 글은 상하上下를 포괄하니, 힘을 다하여 분수를 따른다면 어찌 〈신분의〉 고하高下에 제한되겠는가. 마음을 따라 행하면 도달하지 못할 것이 없다. 만약 사만謝萬의 설에 따른다면 이는 사람의 상정常情에 어두운 것이 된다.
자하子夏가 ‘처음도 있고 끝도 있는 사람은 오직 성인聖人뿐이다.’라고 하였다. 만약 교화를 베풀면서 천재일우의 기회를 기약하며 오직 성인聖人을 기다린다면,
‘〈교화가〉 백성들에게 입혀지고 사해四海(사방의 미개 민족들)에 본보기가 된다.’는 것은 빈 말이 될 것이다.” ≪효경제지孝經制旨≫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아, 효孝의 큼은 하늘을 피할 수 없고 땅을 멀리할 수 없는 것과 같다.
짐朕이 다섯 등급의 효孝의 내용을 궁구해 보니, 사람의 귀천을 막론하고, 행동의 시종을 막론하고, 이 도道를 말미암지 않고서 입신立身할 수 있는 자는 있지 않다.
그렇다면 성인聖人의 덕을 어찌 멀다고 하겠는가. 내가 원願하면 이르나니, 어찌 자기에게 미치지 않을까봐 걱정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