齊威王,
이 會田於郊
注+[頭註]田은 取禽也니 去禽獸害稼者라 故로 以田言之라할새 惠王曰 齊亦有寶乎
아 威王曰 無有
로라
惠王曰 寡人國은 雖小나 尙有徑寸之珠照車前後各十二乘者十枚하니 豈以齊大國而無寶乎리오
吾臣
에 有檀子
注+[釋義]檀은 姓也니 史失其名이라 索隱曰 古者에 大夫皆稱子라者
하니 使守南城
注+[釋義]縣名이니 屬泰山이라이면 則楚人
이 不敢爲寇
하고 皆來朝
하며 吾臣
에 有盼子
注+[原註]盼은 與盻同이라[釋義]田盼也라者
하니 使守高唐
注+[釋義]本博州縣이니 今改州하야 屬東昌路라이면 則趙人
이 不敢東漁於河
하고 吾吏
에 有黔夫
注+[釋義]姓名이라者
하니 使守徐州
注+[釋義]慈湖王氏曰 徐州는 卽薛縣也라 徐는 音舒니 非九州之徐라 春秋에 作舒州하고 說文에 作䣄라면 則燕人
注+[頭註]燕은 姬姓이니 伯爵이라 武王封召公奭於燕이러니 傳三十三世하야 爲秦所滅하니라 召公은 文王庶子라은 祭北門
하고 趙人
은 祭西門
注+[原註]賈逵曰 燕, 趙之人이 畏齊侵伐이라 故로 祭以求福이라하고 徙而從者七十餘家
요 吾臣
에 有種首
注+[釋義]慈湖王氏曰 種首는 名也니 史失其姓이라者
하니 使備盜賊
이면 則道不拾遺
하나니
此四臣者는 將照千里하리니 豈特十二乘哉리오 惠王이 有慙色이러라
戰國諸侯之所寶는 惟以珠玉爲論하니 而知所寶者는 惟齊威王, 楚王孫而已라
威王
은 不以徑寸之珠爲寶
하고 楚王孫
은 하니 是知所寶在此而不在彼也
니라
제齊나라
위왕威王과
위魏나라
혜왕惠王이 교외에서 모여 사냥할 적에
注+[頭註]전田은 짐승을 잡는 것이니, 곡식을 해치는 새와 짐승을 잡기 때문에 전田이라고 말한 것이다. 혜왕惠王이 묻기를 “
제齊나라에도 보물이 있습니까?”라고 하자,
위왕威王이 말하기를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혜왕惠王이 말하기를 “과인의 나라는 비록 작으나 오히려 지름이 한 치 되는 진주가 수레의 앞뒤로 각각 12승乘을 비출 수 있는 것이 10개가 있으니, 어찌 제齊나라와 같이 큰 나라가 보물이 없겠습니까?” 하였다.
이에 위왕威王이 대답하기를 “과인이 보배로 여기는 것은 왕과는 다릅니다.
내 신하 중에
단자檀子注+[釋義]단檀은 성이니, 사서史書에 그 이름은 전하지 않는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옛날에 대부大夫는 모두 자子라고 칭했다.” 하였다. 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남성南城注+[釋義]남성南城은 현縣의 이름이니, 태산泰山에 속한다. 을 지키게 하면
초楚나라 사람들이 감히 노략질하지 못하고
사상泗上의 열두
제후諸侯가 모두 와서 조회하며, 내 신하 중에
반자盼子注+[原註]반盼은 혜盻와 같다. [釋義]盼子는 전반田盼이다. 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고당高唐注+[釋義]고당高唐은 본래 박주현博州縣이니 지금 주州를 고쳐서 동창로東昌路에 속하였다. 을 지키게 하면
조趙나라 사람이 감히 동쪽으로
황하黃河에서 고기를 잡지 못하며, 내 관리 중에
검부黔夫注+[釋義]검부黔夫는 성명姓名이다. 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서주徐州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서주徐州는 바로 설현薛縣이다. 서徐는 음이 서이니, 구주九州의 하나인 서주徐州가 아니다. 《춘추春秋》에는 서주舒州로 되어 있고, 《설문해자說文解字》에는 䣄로 되어 있다.” 를 지키게 하면
연燕나라 사람
注+[頭註]연燕나라는 희성姬姓이니 백작伯爵이다. 무왕武王이 소공召公 석奭을 연燕에 봉하였는데, 33대를 전하여 진秦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소공召公은 문왕文王의 중자衆子이다. 은
북문北門에 제사하고
조趙나라 사람은
서문西門에 제사하고
注+[原註]가규賈逵가 말하였다. “연燕나라와 조趙나라 사람들이 제齊나라가 침공할까 두려워하였다. 그러므로 문門에 제사 지내어 복을 구한 것이다.” 옮겨서 따라온 자가 70여 집이며, 내 신하 중에
종수種首注+[釋義]자호왕씨慈湖王氏가 말하였다. “종수種首는 이름이니 사서史書에 그 성姓은 전하지 않는다.” 라는 자가 있으니 그에게 도적을 막게 하면 길에 흘린 물건도 줍지 않습니다.
이 네 신하는 장차 천리千里를 비출 것이니 어찌 다만 12승乘뿐이겠습니까?” 하니, 혜왕惠王이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있었다.
“전국시대戰國時代 제후들이 보배로 여긴 것은 오직 주옥珠玉만을 가지고 논하였으니, 보배로 여길 바를 안 자는 오직 제齊나라 위왕威王과 초楚나라 왕손어王孫圉뿐이었다.
위왕威王은 지름이 한 치 되는 진주를 보배로 여기지 않았고 초楚나라 왕손어王孫圉는 백형白珩을 보배로 여기지 않았으니, 이는 보배로 여길 바가 이 인물에 있고 저 주옥에 있지 않음을 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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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인] 1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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