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儀說楚王曰 夫爲從者
는 無以異於驅群羊而攻猛虎
니 不格
注+[釋義]猶言不敵也라이 明矣
니이다
今王이 不事秦하시면 秦이 劫韓驅梁而攻楚하리니 則楚危矣리이다
夫戰
之士
하야 以攻不服之弱國
은 無異垂千鈞
注+[頭註]十黍爲絫요 絫百爲銖요 二十四銖爲兩이니 象二十四氣요 十六兩成斤하니 象四時乘四方也요 三十斤成鈞이니 象一月也요 四鈞成石이니 象四時요 重百二十斤은 象十二月也라之重於鳥卵之上
이니 必無幸矣
리이다
大王
이 不事秦
하시면 秦
이 下甲
注+[釋義]猶言頓兵也라하야 據宜陽
하고 塞成皐
하리니 則王之國
이 分矣
리니
韓王이 許之하다 張儀歸報秦王하니 復使東說齊王曰
從人說大王者 必曰 齊蔽於三晉하고 地廣兵彊하니 雖有百秦이라도 將無奈齊何라하나니
今
에 秦, 楚嫁女娶婦
하야 爲昆弟之國
하고 韓獻宜陽
하고 梁效河外
注+[釋義]河之南邑이니 若曲沃, 平周等이라 正義에 謂同華州地也라하고 趙王
이 入朝
하야 割河間以事秦
하니 大王
이 不事秦
하시면 秦
이 驅韓, 梁, 趙
하야 攻之
하리니 雖欲事秦
이나 不可得也
리이다
大王이 收率天下하야 以擯秦하시니 秦兵이 不敢出函谷關이 十五年이라
大王之威 行於山東이어니와 今에 楚與秦爲昆弟之國하고
而韓, 梁이 稱東藩之臣하고 齊獻魚鹽之地하니 此는 斷趙之右肩也라
夫斷右肩而與之鬪하고 失其黨而孤居하면 求欲無危나 得乎잇가
爲大王計컨대 莫如與秦王面約하야 常爲兄弟之國이니이다
大王
이 不事秦
하시면 秦
이 下甲雲中, 九原
하야 驅趙而攻燕
하리니 則
水, 長城
은 非大王之有也
리이다
張儀歸報할새 未至咸陽하야 秦惠王薨하고 子武王立하니 武王이 自爲太子時로 不說(悅)張儀러니 及卽位에 群臣이 多毁短之라
諸侯聞儀與秦王有隙
하고 皆畔(叛)衡
하고 合從
하다
장의張儀가
초왕楚王을 설득하기를 “
합종合從을 하는 것은 여러
양羊을 몰아 사나운 범을 공격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으니, 대적하지 못할 것이
注+[釋義]불격不格은 대적하지 못한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분명합니다.
지금 왕王이 진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위협하고 양梁(魏)나라를 몰아 초楚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초楚나라가 위태로울 것입니다.” 하였다.
초왕楚王이 허락하자, 장의張儀가 마침내 한韓나라에 가서 한왕韓王을 설득하였다.
“
맹분孟賁과
오획烏獲같은 용사를 싸우게 하여 복종하지 않는 약한 나라를 공격하는 것은
천균千鈞(3만 근)의
注+[頭註]10서黍를 유絫라 하고 100유絫를 수銖라 하고 24수銖를 양兩이라 하니 24절기節氣를 상징한 것이요, 16양兩을 근斤이라 하니 사시四時가 사방四方을 탐을 상징한 것이요, 30근斤을 균鈞이라 하니 한 달을 상징한 것이요, 4균鈞을 석石이라 하니 사시四時를 상징한 것이요, 1석石의 무게가 120근斤인 것은 12개월을 상징한 것이다. 무게를 새알의 위에 올려놓는 것과 다름이 없으니, 반드시 불행하게 될 것입니다.
대왕大王이
진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진秦나라가 군대를 주둔하여
注+[釋義]하갑下甲은 군대를 주둔하였다는 말과 같다.의양宜陽을 점거하고
성고成皐를 막을 것이니, 그렇게 되면 왕의 나라가 분열될 것입니다.
대왕大王을 위하여 계책해 보건대 진秦나라를 섬기고 초楚나라를 공격하는 것만 못합니다.”
한왕韓王이 허락하자, 장의張儀가 돌아가 진왕秦王에게 보고하니, 〈진왕秦王은〉 다시 동쪽으로 사신 가서 제왕齊王을 설득하게 하였다.
“합종合從하는 사람으로 대왕大王을 설득하는 자들은 반드시 말하기를 ‘제齊나라는 삼진三晉에 가려져 있고 땅이 넓고 군대가 강하니, 비록 백 개의 진秦나라가 있더라도 장차 제齊나라를 어찌할 수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제
진秦나라와
초楚나라가 딸을 시집보내고 며느리를 얻어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한韓나라는
의양宜陽을 바치고
양梁나라는
하외河外를 바치고
注+[釋義]하외河外는 황하黃河 남쪽의 고을이니, 곡옥曲沃과 평주平周 등과 같은 것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동주同州와 화주華州 땅을 이른다.” 하였다.조왕趙王은
입조入朝하여
하간河間을 떼어
진秦나라를 섬기니,
대왕大王이
진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진秦이
한韓‧
양梁‧
조趙를 몰아 공격할 것이니, 비록
진秦나라를 섬기고자 해도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장의張儀가 떠나 서쪽으로 가서 조왕趙王을 설득하였다.
“대왕大王이 천하를 거두어 인솔하여 진秦나라를 물리치시니, 진秦나라 군대가 감히 함곡관函谷關을 나가지 못한 지가 15년입니다.
대왕의 위엄이 산동山東 지방에 행해지고 있습니다만, 지금 초楚나라는 진秦나라와 형제의 나라가 되었고
한韓나라와 양梁나라는 동번東藩의 신하를 칭하고 제齊나라는 어물과 소금이 나는 땅을 바쳤으니, 이는 조趙나라의 오른쪽 어깨를 끊은 것입니다.
오른쪽 어깨를 끊기고서 남과 싸우며 당黨을 잃고 외롭게 있으면서 위태로움이 없기를 바란다면 되겠습니까.
대왕을 위하여 계책해 보건대 진왕秦王과 대면하여 맹약해서 항상 형제의 나라가 되는 것만 못합니다.”
조왕趙王이 허락하자, 장의張儀가 마침내 북쪽으로 가서 연왕燕王을 설득하였다.
“대왕이 진秦나라를 섬기지 않으시면 진秦나라가 군대를 운중雲中과 구원九原에 주둔시키고 조趙나라를 몰아 연燕나라를 공격할 것이니, 이렇게 되면 역수易水와 장성長城은 대왕大王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이에 연왕燕王이 상산常山의 끝 다섯 성城을 떼어 바쳐 화친을 청하였다.
장의張儀가 진秦나라에 돌아가 보고할 적에 함양咸陽에 이르기 전에 진秦나라 혜왕惠王이 죽고 아들 무왕武王이 즉위하니, 무왕武王은 태자太子 시절부터 장의張儀를 좋아하지 않았는데, 그가 즉위하자 여러 신하들이 장의張儀를 비방하고 단점을 지적하는 자가 많았다.
제후諸侯들은 장의張儀가 진왕秦王과 틈이 있다는 말을 듣고는 모두 연횡連橫을 배반하고 다시 합종合從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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