秦王
이 請趙王鼓瑟
注+[頭註]瑟은 二十五絃이니 伏羲所作이라 趙人善瑟故로 秦王請鼓之하니라한대 趙王
이 鼓之
어늘 藺相如復請秦王擊缶
注+[釋義]缶는 盛酒瓦器니 秦俗에 擊之以節樂이라 爾雅云 盎을 謂之缶라한대 註에 盆也라한대 秦王
이 不肯
이라
相如曰 五步之內
注+[釋義]禮記에 八尺爲步요 今以周尺六尺四寸爲步라 此言五步之內는 蓋言至近也라에 臣
이 矣
리이다 左右欲刃相如
어늘
秦終不能有加於趙하고 趙人亦盛爲之備하니 秦不敢動이러라
趙王이 歸國하야 以藺相如爲上卿하니 位在廉頗之右라
廉頗曰 我見相如하면 必辱之하리라 相如聞之하고 每朝에 常稱病하고 不欲爭列하야
出而望見
이면 輒引車避匿
하니 其舍人
注+[頭註]親近左右之通稱也니 後遂以爲親屬官號하니라이 皆以爲恥
라
相如曰 子視廉將軍컨대 孰與秦王고 曰 不若이니이다
相如曰 夫以秦王之威로도 而相如廷叱之하고 辱其群臣하니 相如雖駑나 獨畏廉將軍哉아
顧吾念之컨대 彊秦之所以不敢加兵於趙者는 徒以吾兩人在也라
今兩虎共鬪면 其勢不俱生이니 吾所以爲此者는 先國家之急而後私讐也로라
廉頗聞之
하고 肉袒負荊
注+[頭註]荊은 楚也니 可以爲鞭이니 蓋令其鞭己以謝罪也라하야 至門謝罪
하고 遂 爲
之交
注+[釋義]刎은 斷也라 崔浩曰 言交契深重하야 要齊生死하야 雖斷頸而無悔니 是爲刎頸之交라하니라
夫以小事大
에 古人有以皮幣犬馬珠玉而不得免者
注+[頭註]謂太王事니 見孟子하니라어든 況一璧乎
아
相如計不出此라가 不三數年에 趙卒有覆軍陷城之禍者하니 徒以璧爲之祟也라
相如智勇
이 不足重趙
하야 使秦不敢惴
注+[頭註]惴는 憂懼也니 言秦不敢使趙憂懼也라焉
하고 乃欲以頸血濺之
하니 豈孔子所謂暴虎憑河
하야 死而無悔者歟
아
○ 是時에 齊地皆屬燕호되 獨莒, 卽墨이 未下라
卽墨人曰 安平之戰
에 田單宗人
注+[頭註]田單은 臨淄市掾이니 齊之踈族이라 宗人은 官名也라 周禮에 有都宗人, 家宗人하니 掌禮與其衣服宮室車旗之禁令이라이 以鐵籠得全
注+[釋義]田單이 使其宗人으로 以鐵籠傅車轊라 註에 傅는 音附요 轊는 音衛라 傅者는 截其軸하야 與轂齊하야 以鐵鍱傅軸末하고 施於鐵中하야 以制轂하야 堅而易進也라 轊는 車軸頭也라[頭註]得全은 以鐵籠傅車轊니 及城潰에 人爭門出할새 皆以軸折被擒이로되 獨單宗人이 得免하야 奔卽墨하니라하니 是
는 多智習兵
이라하고 因共立以爲將
하야 以拒燕
하다
或이 讒之於燕昭王曰 樂毅는 智謀過人하야 伐齊呼吸之間에 剋七十餘城하고 今不下者兩城爾니
非其力不能拔이라 欲久仗兵威하야 以服齊人하야 南面而王爾라하다
昭王이 於是에 置酒大會하고 引言者하야 斬之하고 遣國相하야 立樂毅爲齊王하니 毅惶恐不受하고 拜書하야 以死自誓라
由是로 齊人이 服其義하고 諸侯畏其信하야 莫敢復有謀者러라
頃之요 昭王薨하고 惠王立하니 惠王은 自爲太子時로 嘗不快於樂毅러라
田單
이 聞之
하고 乃縱反間
注+[釋義]孫子兵法曰 反間者는 因敵間而用之也니 凡軍之所欲擊과 城之所欲攻과 人之所欲殺에 必先知其守將左右謁者(間)[門]者舍人之姓名하고 令吾之間으로 必索敵間之來間我者하야 因而利〈之〉하고 導〈而〉舍之라 故反間을 可得用也라하니라曰 樂毅與燕新王
으로 有隙
하야 畏誅而不敢歸
하고 以伐齊爲名
하니 齊人
은 唯恐他將來
면 卽墨殘矣
라하다
燕王已疑
러니 得齊反間
하고 乃使騎劫
注+[釋義]姓名也라代將
하고 而召樂毅
한대
田單
이 乃身操 版
注+[釋義]與臿通하니 鍫也라하야 與士卒分功
하고 妻妾
을 編於行伍
注+[頭註]二十五人爲行이요 伍人爲伍라之間
하고 盡散飮食
하야 饗士
하며 令甲卒皆伏
하고 使老弱女子
로 乘城
注+[釋義]登城而守也라約降
하니 燕軍益懈
라
田單이 乃收城中하야 得牛千餘하야 爲絳繒衣호되 畫以五采龍文하고 束兵刃於其角하고 而灌脂束葦於其尾하야 燒其端하고 鑿城數十穴하야 夜縱牛하고 壯士五千人이 隨其後하니
所觸에 盡死傷이요 而城中이 鼓譟從之하고 老弱이 皆擊銅器爲聲하니 聲動天地라
燕軍
이 大敗走
어늘 齊人
이 殺騎劫
하고 追亡 逐
注+[頭註]逃亡者追之하고 奔北者逐之라 北方은 幽陰之地니 軍敗曰北라하니 所過城邑
이 皆叛燕
하고 復爲齊
하야 齊七十餘城
이 皆復焉
이라
乃迎襄王於莒하야 入臨淄하니 封田單하야 爲安平君하다
○ 田單이 將攻狄할새 往見魯仲連한대 仲連曰 將軍攻狄에 不能下也리라
田單曰 臣이 以卽墨破亡餘卒로 破萬乘之燕하고 復齊之墟어늘 今攻狄而不下는 何也오하고 上車弗謝而去하다
遂攻狄하야 三月不克하니 田單이 乃懼하야 問魯仲連한대
仲連曰 將軍之在卽墨엔 坐則織蕢하고 立則杖鍤하야 爲士卒倡하니 當此之時하야 將軍은 有死之心하고 士卒은 無生之氣라
所以破燕也
어니와 今
엔 將軍
이 東有夜(掖)邑
注+[釋義]益封田單以夜邑萬戶하니 今益都萊州掖縣이 是也라之奉
하고 西有淄上之娛
하고
黃金橫帶而騁乎淄,
注+[釋義]澠은 音繩이라 淄水는 出淄州淄川縣하고 澠水는 出益都臨淄縣이라之間
하야 有生之樂
하고 無死之心
하니 所以不勝也
니라
田單曰 單之有心
을 先生志之矣
로다하고 明日
에 乃厲(勵)氣循城
하야 立於矢石
注+[頭註]越范蠡始制石砲하니 重十二斤이라 爲機以發하면 行三百步라之所
하야 援枹鼓之
하니 狄人
이 乃下
하다
진왕秦王이 조왕趙王과 하외河外의 민지澠池에서 회맹會盟할 적에 진왕秦王이 조왕趙王과 함께 술을 마셔 취하였다.
진왕秦王이
조왕趙王에게 비파를 탈 것을 청하자
注+[頭註]비파는 스물다섯 개의 줄이 있는 현악기이니, 복희씨伏羲氏가 만든 것이다. 조趙나라 사람이 비파를 잘 탔기 때문에 진왕秦王이 비파를 타기를 청한 것이다. 조왕趙王이 비파를 타니,
인상여藺相如가 다시
진왕秦王에게 질장구를 칠 것을 청했으나
注+[釋義]부缶는 술을 담는 질그릇이니, 진秦나라 풍속에 이것을 두드려 음악의 장단을 맞추었다. 《이아爾雅》에 이르기를 “앙盎을 일러 부缶라 한다.” 하였는데, 주註에 “동이이다.” 하였다. 진왕秦王은 치려 하지 않았다.
인상여藺相如가 말하기를 “5
보步 안
注+[釋義]《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옛날에는 8척을 1보라 하였고, 지금은 주척周尺으로 6척 4촌을 1보라 한다.” 하였다. 여기에서 5보의 안이라고 말한 것은 지극히 가까움을 이른다.에서 신이 목의 피를 대왕에게 뿌리겠습니다.” 하니,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인상여藺相如를 칼로 찌르고자 하였다.
인상여藺相如가 눈을 부릅뜨고 꾸짖으니,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흩어졌다.
진왕秦王이 기뻐하지 않으면서 조왕趙王을 위하여 한 번 질장구를 치고 술자리를 파하였다.
진秦나라는 끝내 조趙나라에 침략을 가하지 못하였고 조趙나라 사람들도 성대히 대비하니, 진秦나라가 감히 움직이지 못하였다.
조왕趙王이 서울로 돌아와 인상여藺相如를 상경上卿으로 삼으니, 지위가 염파廉頗의 위에 있었다.
염파廉頗가 말하기를 “내 인상여藺相如를 만나면 반드시 모욕을 주겠다.” 하니 인상여藺相如가 이 말을 듣고 매번 조회할 때마다 항상 병을 칭탁하여 반열班列을 다투고자 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나가다가
염파廉頗가 멀리 보이면 번번이 수레를 이끌고 피하여 숨으니,
사인舍人들
注+[頭註]사인舍人은 좌우左右에 가까이 있는 사람의 통칭인데, 후세에는 마침내 친속親屬의 관명官名으로 삼았다. 이 수치스럽게 여겼다.
인상여藺相如가 말하기를 “그대가 보기에 염장군廉將軍과 진왕秦王이 누가 더 무서운가?” 하니, “진왕秦王만 못합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인상여藺相如가 말하기를 “진왕秦王의 위엄에도 내가 조정에서 그를 꾸짖고 여러 신하들을 모욕하였으니, 내가 비록 노둔하나 유독 염장군廉將軍을 두려워하겠는가?
다만 내가 생각건대 강한 진秦나라가 감히 우리 조趙나라에 침략을 가하지 못하는 까닭은 다만 우리 두 사람이 있기 때문이다.
이제 두 마리 범이 함께 싸우면 그 형세가 둘 다 살지 못할 것이니,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국가의 위급함을 먼저 하고 사사로운 원수를 뒤로 하는 것이다.” 하였다.
염파廉頗가 이 말을 듣고 웃통을 벗고 가시나무를 지고
注+[頭註]형荊은 가시나무이니 채찍을 만들 수 있는 바, 자신을 채찍질하게 하여 사죄謝罪한 것이다. 인상여藺相如의 문(집)에 이르러 사죄하고 마침내
문경지교刎頸之交注+[釋義]문刎은 자름이다. 최호崔浩가 말하였다. “교분이 깊고 중해서 생사를 함께 하고자 하여 비록 목을 베이더라도 후회함이 없음을 이르니, 이것을 문경지교刎頸之交라 한다.” 를 맺었다.
“조趙나라 사직社稷의 편안하고 위태로운 기틀은 벽옥璧玉의 존망存亡에 달려 있지 않았다.
약소국으로서 강대국을 섬길 때에 옛사람은 짐승의 가죽과 폐백과 개와 말과 주옥을 가지고 섬겼어도 위태로움을 면할 수 없는 경우가 있었는데,
注+[頭註]면할 수 없다는 것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일을 이르니, 《맹자孟子》 〈양혜왕梁惠王 하下〉에 보인다. 하물며 한 벽옥에 있어서이겠는가.
비록 이것을 진秦나라에 준다 해도 괜찮은 것이다.
그런데 인상여藺相如는 이러한 계책을 내지 않았다가 수삼 년이 못되어 조趙나라는 끝내 군대가 전복되고 성이 함락되는 화가 있었으니, 이는 한갓 이 벽옥이 빌미가 된 것이다.
그렇다면 벽옥을 온전히 보전하여 조趙나라로 돌아온 것이 무슨 유익함이 있겠는가.
민지澠池의 회맹會盟에 이르러서는 그 위태로움이 더 심하였다.
인상여藺相如의 지혜와 용맹이
조趙나라를 중하게 만들어서
진秦나라가 〈
조趙나라를〉 감히 두려워하게 하지 못하고는
注+[頭註]췌惴는 근심하고 두려워함이니, 진秦나라가 감히 조趙나라로 하여금 〈진秦나라를〉 두려워하고 근심하게 하지 못함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목의 피를 뿌리고자 하였으니, 어찌
공자孔子의 이른바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 잡고 맨몸으로
황하黃河를 건너다가 죽어도 후회함이 없다.’는 자가 아니겠는가.”
이때에 제齊나라 땅이 모두 연燕나라에 속하였으나 오직 거莒와 즉묵卽墨만이 항복하지 않았다.
악의樂毅가 즉묵卽墨을 포위하니 즉묵대부卽墨大夫가 나와 싸우다가 죽었다.
즉묵卽墨사람들이 말하기를 “
안평安平의 전투에서
전단田單의
종인宗人만이
注+[頭註]전단田單은 임치臨淄 시장의 아전이니, 제齊나라의 먼 왕족王族이었다. 종인宗人은 관명官名이다. 《주례周禮》에 도종인都宗人과 가종인家宗人이 있는 바, 예禮와 의복衣服‧궁실宮室‧거기車旗의 금령禁令을 맡았다. 철롱鐵籠으로 온전하였으니,
注+[釋義]田單이 종인宗人으로 하여금 철롱鐵籠을 수레바퀴 축의 끝 부분에 붙이게 한 것이다. 주註에 “부傅는 음이 부이고 세轊는 음이 위이다. 부傅는 수레바퀴 축을 잘라 수레바퀴통과 똑같게 하고 쇳조각을 수레바퀴 축의 끝 부분에 붙인 다음 빗장을 철롱鐵籠 가운데에 걸어서 바퀴통을 제어하여 견고하고 나아가기 쉽게 한 것이다. 세轊는 차축의 끝 부분이다.” 하였다. [頭註]得全은 철롱鐵籠을 차축에 붙인 것이니, 성城이 함락되자 사람들이 다투어 성문을 나올 적에 모두 차축이 부러져 사로잡혔으나 유독 전단田單의 종인宗人만은 죽음을 면하여 즉묵卽墨으로 달아날 수 있었다. 이는 지혜가 많고 병법에 익숙하기 때문이다.” 하고는 인하여 함께 세워서 장군으로 삼아
연燕나라에 항거하였다.
악의樂毅가 거莒와 즉묵卽墨 두 고을을 포위한 지 3년이 되었는데도 함락하지 못하니,
혹자가 연燕나라 소왕昭王에게 참소(모함)하기를 “악의樂毅는 지모智謀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서 제齊나라를 정벌하여 숨쉬는 사이(잠깐 동안)에 70여 개의 성을 이기고 지금 함락시키지 못한 것은 두 성뿐이니,
그 힘이 함락시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군대의 위엄에 의지하여 제齊나라 사람들을 복종시켜 남면南面하여 왕 노릇 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소왕昭王이 이에 술자리를 베풀어 크게 사람들을 모으고, 참소한 자를 끌어내어 목을 베고는 국상國相을 보내어 악의樂毅를 세워 제왕齊王으로 삼으니, 악의樂毅가 황공하여 받지 않고 글을 올려 죽음으로써 스스로 맹세하였다.
이 때문에 제齊나라 사람들은 그 의리에 감복하고 제후諸侯들은 그의 신의를 두려워하여 감히 다시는 도모하는 자가 없었다.
얼마 후 소왕昭王이 죽고 혜왕惠王이 즉위하니, 혜왕惠王은 태자가 되었을 때부터 일찍이 악의樂毅를 좋게 여기지 않았다.
전단田單은 이 말을 듣고 마침내
반간反間을 놓아
注+[釋義]《손자병법孫子兵法》에 말하였다. “반간反間은 적의 첩자를 인하여 이용하는 것이니, 무릇 군대를 공격하고자 하고 성을 공략하고자 하고 사람을 죽이고자 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그 수장守將과 좌우左右 알자謁者와 문지기와 사인舍人의 성명姓名을 알아낸 다음 반드시 우리측 첩자로 하여금 적국의 첩자로서 우리나라에 와서 첩자 노릇 하는 자를 찾아내어 우리 쪽에 유리하게 이용하고 유도하여 놓아 보낸다. 그러므로 반간反間을 쓸 수 있는 것이다.” 말하기를 “
악의樂毅가
연燕나라의 새로 즉위한 왕과 틈이 있어서 죽음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제齊나라를 정벌하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니,
제齊나라 사람들은 행여 다른 장수가 오면
즉묵卽墨이 잔파할까 두려워한다.” 하였다.
연왕燕王이 이미
악의樂毅를 의심하고 있었는데,
제齊나라의
반간反間을 얻고는 마침내
기겁騎劫注+[釋義]기겁騎劫은 성명姓名이다. 으로 하여금 대신 장수가 되게 하고
악의樂毅를 불렀다.
이에 악의樂毅가 조趙나라로 도망가니, 연燕나라 장병들이 이로 말미암아 분해 하며 불화하였다.
전단田單이 마침내 몸소 판자와 삽을 잡고
注+[釋義]삽鍤은 삽臿과 통하니 가래이다. 사졸들과 일을 나누고,
처첩妻妾을
항오行伍의 사이에 편입시키고
注+[頭註]25명을 행行이라 하고 5명을 오伍라 한다. 음식을 모두 흩어 군사들을 먹이며, 갑옷 입은 병사들을 모두 매복시키고 노약자와 여자들로 하여금
성城에 올라가
注+[釋義]승성乘城은 성에 올라가서 지키는 것이다. 항복할 것을 약속하게 하니,
연燕나라 군사들이 더욱 해이해졌다.
전단田單이 마침내 성城 안에서 거두어 천여 마리의 소를 얻어서 붉은 비단옷을 만들어 입히되 오채五采와 용 무늬를 그리고 소의 뿔에 병기와 칼날을 묶어 매고는 기름을 부은 갈대를 소꼬리에 묶어 그 끝에 불을 붙이고, 성城에 수십 군데 구멍을 뚫은 다음 밤에 소를 풀어놓고 장사 5천 명이 그 뒤를 따르게 하였다.
소는 꼬리가 뜨거워지자 성이 나서 연燕나라 군대로 달려갔다.
연燕나라 군사들이 크게 놀라 소를 바라보니 모두 용의 문채였다.
소에게 받쳐 모두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으며, 성城 안에서는 북을 치고 함성을 지르며 소의 뒤를 따르고 노약자들이 모두 구리 그릇을 두드려 소리를 내니,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연燕나라 군사들이 대패하여 도망하자,
제齊나라 사람들은
기겁騎劫을 죽이고 도망하는 자를 추격하고
패주敗走하는 자를 쫓아가니,
注+[頭註]추망축북追亡逐北는 도망가는 자를 추격하고, 패하여 달아나는 자를 쫓는 것이다. 북방北方은 그윽한 음지陰地이기 때문에 군대가 패주하는 것을 북北라 한다. 지나가는
성읍城邑들이 모두
연燕나라를 배반하고 다시
제齊나라가 되어서
제齊나라 70여 성이 모두 수복되었다.
마침내 양왕襄王을 거莒에서 맞이하여 임치臨淄로 들어오니, 전단田單을 봉하여 안평군安平君을 삼았다.
전단田單이 적狄(북쪽 오랑캐)을 공격하려 할 적에 노중련魯仲連을 찾아가서 만나 보니, 노중련魯仲連이 말하기를 “장군이 적狄을 공격함에 함락시키지 못할 것이다.” 하였다.
전단田單이 말하기를 “신이 즉묵卽墨의 패망하고 남은 병졸로 만승萬乘의 연燕나라를 격파하고 제齊나라의 옛 땅을 수복하였는데 지금 적狄을 공격하여 함락시키지 못한다고 함은 어째서인가?” 하고, 수레에 올라 하직인사도 하지 않고 떠나갔다.
마침내 적狄을 공격하여 석 달이 되어도 이기지 못하니, 전단田單이 비로소 두려워하여 노중련魯仲連에게 그 이유를 물었다.
노중련魯仲連이 대답하기를 “장군이 즉묵卽墨에 있을 적에는 앉으면 삼태기를 짜고 서면 삽을 잡아 사졸들의 창도가 되었으니, 이때를 당하여 장군은 죽으려는 마음이 있었고 사졸士卒들은 살려는 기운이 없었다.
이 때문에
연燕나라를 격파한 것이었는데, 지금은 장군이 동쪽으로는
액읍掖邑注+[釋義]전단田單에게 액읍夜邑 만 호를 더 봉해 주니, 지금의 익도益都 내주萊州 액현掖縣이 이곳이다. 의 받듦이 있고 서쪽으로는
치수淄水 가의 즐거움이 있고
황금을 띠에 두르고
치수淄水와
승수澠水注+[釋義]승澠은 음이 승이다. 치수淄水는 치주淄州 치천현淄川縣에서 발원하고 승수澠水는 익도益都 임치현臨淄縣에서 발원한다. 사이를 달려서 사는 즐거움이 있고 죽으려는 마음이 없으니, 이 때문에 이기지 못하는 것이다.” 하였다.
전단田單이 말하기를 “내가 가지고 있는 마음을 선생이 알았다.” 하고는 다음날 마침내 기운을 가다듬어 성을 순행하여 화살과 돌이 쏟아지는
注+[頭註]월越나라 범려范蠡가 처음으로 석포石砲를 만드니, 무게가 12근斤이었다. 틀을 만들어 발사하면 300보步를 날아갔다. 곳에 서서 북채를 당겨 북을 치니,
적인狄人이 마침내 항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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