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續周公官職이러니 桓公卒에 子威公立하고 威公卒에 子惠公立이라
惠公이 乃封其少子於鞏하야 以奉王하고 號東周惠公이라하니라 〈出史記 ○ 東西周之稱이 又起於此라
索隱曰 惠公立長子하니 曰西周公이요 又封少子於鞏하야 仍襲父號하니 曰東周惠公이라
按世本에 西周桓公은 名揭니 居河南하고 東周惠公은 名班이니 居洛陽이 是也라
復齋胡氏曰 其後에 揭沒而長子成公이 襲有其地하고 少子班이 專制洛陽하야 兄弟角立하니 史冊逸其世數名氏라
至赧王三十四年하야 楚謀入寇어늘 王使東周君으로 諭止之하니 蓋班之後也라
至赧王入秦하야 秦遷西周君於𢠸狐聚하야 而河南亡하고 莊襄元年에 遷東周君於陽人聚而洛陽之鞏亡하니라〉
周自武王으로 至東周君滅而周始亡于秦하니 斯實錄也라
今復得南宮氏之說이어늘 而雙湖胡氏深有取焉하니 極爲確論하니 眞所謂發先賢之所未發者也라
舊本正之而未盡
이어늘 今復正之于左
하야 以俟質于
이라〉
동주東周는 고왕考王이 그 아우를 하남河南에 봉함으로부터 비롯되니, 이가 환공桓公이다.
주공周公의 관직官職을 이었는데, 환공桓公이 죽자 아들 위공威公이 서고, 위공威公이 죽자 아들 혜공惠公이 섰다.
혜공惠公은 마침내 그 소자少子(작은아들)를 공鞏 땅에 봉하여 왕을 받들게 하고 이름을 동주東周 혜공惠公이라 하였다. - 《사기史記》에 나옴 ○ 동주東周와 서주西周의 칭호가 또 여기서 시작되었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혜공惠公이 장자長子를 세우니 서주공西周公이라 하였고, 또 소자少子를 공鞏 땅에 봉하여 아버지의 칭호를 그대로 세습하니 동주東周 혜공惠公이라 하였다.
이에 또 동주東周와 서주西周라고 칭하게 되었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세본世本에 “서주西周의 환공桓公은 이름이 게揭이니 하남河南에 거주하고, 동주東周의 혜공惠公은 이름이 반班이니 낙양洛陽에 거주하였다.” 하였다.
복재호씨復齋胡氏가 말하기를 “그 뒤에 게揭가 죽고 장자長子인 성공成公이 세습하여 하남河南을 소유하고 소자少子인 반班이 오로지 낙양洛陽을 점령하여 형제가 상대하고 있었는데, 역사책에는 그 세수世數와 명씨名氏를 잃었다.
난왕赧王 34년에 이르러 초楚나라가 주周나라를 침입할 것을 도모하자 난왕赧王은 동주군東周君으로 하여금 타일러서 중지하게 하였으니, 이 동주군東周君은 반班의 후손일 것이다.
난왕赧王이 진秦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진秦나라가 서주군西周君을 𢠸狐聚로 옮겨서 하남河南이 망하였고, 장양왕莊襄王 원년元年에 동주군東周君을 양인취陽人聚로 옮겨서 낙양洛陽의 공鞏이 망하게 되었다.” 하였다. -
“주周나라는 무왕武王으로부터 동주군東周君이 멸망함에 이르러 주周나라가 비로소 진秦나라에게 망하였으니, 이것이 진실한 기록이다.
뒤에 춘추春秋의 붓을 잡는 자(역사를 기술하는 자)가 있으면 어찌 이것을 고쳐서 바로잡지 않겠는가.”
- 살펴보건대 구본舊本에는 온공溫公의 《자치통감資治通鑑》을 따라 난왕赧王이 진秦나라로 들어간 뒤로부터 곧바로 진秦나라 소양왕昭襄王이 주周나라의 계통을 이어받아 진기秦紀로 삼았는데, 내(劉剡)가 이미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의 예例를 따라서 바로잡았고,
이제 다시 남궁씨南宮氏의 설說을 얻었는데 쌍호호씨雙湖胡氏(胡一桂)가 이것을 깊이 취함이 있었으니, 지극히 확고한 논의가 되는 바, 진실로 이른바 ‘선현先賢들이 미처 발명하지 못한 것을 발명하였다.’는 것이다.
구본舊本에는 바로잡았으나 미진하였는데, 이제 다시 아래에 바로잡아서 고명高明한 사학선생史學先生을 기다려 질정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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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주는 자고왕봉기제우하남하니 시위환공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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