治天下有道하니 親賢遠姦을 明而已矣요 治天下有法하니 信賞必罰을 斷而已矣요 治天下有本하니 禮樂敎化를 順而已矣니
明則君子進而小人退하고 斷則有功勸而有罪懲하고 順則萬事理, 人心悅하야 而天下和라
故로唐虞三代之治는 純用禮樂하야 敎化大行하야 不言而信하고 不怒而威하야 無爲而治하니 如斯而已러니
及其衰也
하야는 夏以
喜
하고 商以
己
하고 周以褒姒
하니 是
는 佚欲之亡人
하야 而百令不從矣
라
故로夫子自衛反魯하사 作春秋以正王化러시니 至於戰國하야는 王室陵夷하야 分崩離析이라
故로孟子去魏適齊하사 陳王道以正人心하시니 是皆聖賢爲萬世生民而發也라
自玆以還으로 迹熄澤竭하야 人私其身하고 士私其學하야 異論蜂起하야 聖學榛蕪라
秦, 漢而下로 安危不一하야 難以悉擧일새 姑取其最關於綱紀者而論之하노라
漢高之興은 去古未遠하고 豁達大度하야 從諫如流하니 可與有爲之君也라
張良이 托以辟穀하고何, 參, 平, 勃이 以詐以力하니 天下雖安이나 而古禮不復하고 古樂不作이 從玆始矣니 可勝惜哉아
故
로 民雖富庶
나 而修己立誠之道 幾乎息矣
요 窮兵黷武
하고 虐民事神
하야 而海內虛耗
러니 至
하야 天理藹然
하니 其悔心之萌乎
인저
漢昭
는 하니 似可有爲
로되 惜霍光不學無術
하야 不能以道事君
하고光武
는 有志於治
나 而輔相亦非其人
이라
孔明
은 有王佐之才
로되 而當姦雄僭竊之際
하고 董子
는 雖有大意
注+[通鑑要解]董子는 蜀漢董和也라昭烈이 以和爲邑宰러니 以禮樂敎民이라 一說에 卽仲舒也라 大志는 謂王道也라나 而亦不得其位
하며鄧騭(즐), 楊震之徒
는 不識保身之機
하야
外戚之禍와 內竪(豎)之變으로 中移於王莽하고 卒壞於董卓하고曹操承之하야 以移漢祚하니 又何言哉아
百戰而有天下하야 偃武修文하고 勵精求治하야 身致太平하고 刑措不用하니 亦希世之賢君也라
然以君德論之
하면 則
하고 納巢刺王妃而封子明
하니 其謬已甚
이라
是故
로武氏經事先帝
하고 하고明皇
이 賜洗兒錢於貴妃
하야 卒爲天下後世非笑
하니 豈不皆由太宗垂統之所致歟
아
房, 杜, 王, 魏, 無忌, 遂良, 狄仁傑, 張九齡, 姚崇, 宋璟, 李泌, 裴度之賢으로도 猶不能救其君於蕩敗禮義之際하야 而或以見疎하며張柬之, 桓彦範, 崔玄暐, 袁恕己, 敬暉等은 討武氏之亂하고 反正廢主하야 有大功於唐이로되 而凌辱以死하며韓愈, 陸贄는 勤勤懇懇於章奏之間이로되 而亦以獲罪하니 它(他)尙何說哉아
蓋唐之亂也 始於武, 韋하야 危於貴妃하고 壞於藩鎭하고 亡於宦官이라
而李勣, 李義府, 許敬宗, 鄭愔, 崔湜, 武三思, 李林甫, 楊國忠, 李輔國, 盧杞, 元載之流가 與后妃宦竪로 內外交締하야 始終爲難하니 非一朝一夕之故라
隋楊廣은 弑其父而自立하야 卽以敗亡하니 又何足與論治天下之道乎아
蓋以趙高, 楊素之姦
으로 而致扶蘇,
之死
하니 是天所以速秦, 隋之滅也
라
且秦政之暴가 過於隋堅하고楊廣之惡이 浮於胡亥하니 覆宗絶祀가 不亦宜乎아
宋, 齊, 梁, 陳으로 至於五季히 禍亂相尋하야 戰爭不息하니 名爲君臣이나 實爲仇敵이라
惟柴世宗은 粗有三代之風이나 而使之不壽하니 豈天將啓宋世之治也歟아
且自晉武之後로惠懷無親하야 骨肉相殘하고 群胡乘釁하야 濁亂中原하니 生民塗炭이 未有甚於此時者也라
王, 謝, 陶, 阮
의 富貴風流
와 節行標致
가 沛乎有餘
하야 之民
이 亦賴以安
이라
然이나 朝廷之得失과 姦雄之簒弑는 則亦邈乎其不能正也라
逮拓跋氏興하야 佐以崔浩, 高允之徒하야 旣治且安하고 至於孝文하야 風移俗易하야 庶幾爲禮義之邦矣라
宇文高祖와完顔世宗이 其亦賢乎인저 江左君臣이 寧不知愧리오
夫三年之喪
은 自天子
로 達於庶人
이어늘文, 景以後
로 能行之者 惟晉武帝, 魏孝文, 周高祖數君而已
니 此夫子所謂不如諸夏之
也
라
然自晉至隋히 南北之君이 率多不得其死하야 盡以國亡族滅하니 其故는 何也오
至於宋祖하야는 未嘗爲學이러니 晩好讀書라 歎曰 堯舜之世에 四凶之罪가 止於投竄하니 何近代法網之密邪아하고
於是立法에 鞭扑이 不行於殿陛하고 罵辱이 不及於公卿이라
故臣下得以有爲하야 而忠君愛國之心이 油然而興矣라
故
로彬至城下
에 焚香約誓
하야 一不妄殺
하고 之日
에 行李蕭然
하며 遣吳越歸國而使知不留之意
라
處將相之間엔 則喩以相安之情하고 待諸降主以賓禮하며 易諸節鎭以儒臣하고 使擧德行孝悌之士하야 以隆禮義廉恥之風하니 嗚呼라
且曰 洞開重門하야 正如我心하야 少有邪曲이면 人皆見之라하니 蕩蕩平平之道 不外是矣라
太宗은 卽位之初에 首開崇文館하고 與諸王宰相으로 繙閱書籍하며 次選文章有德之士하야 敎道(導)王子하고
又能作興文學하야 以風四方하니 而人才於是乎出矣라
至於仁宗하야는 力行恭儉하고 正身率人하야 終始如一이라
升(昇)遐之日에 雖深山窮谷이라도 亦莫不奔走悲號하야 如喪考妣하니 非有得於人心而能如是乎아
英宗은 氣質尤美하야 謙恭以任賢臣하야 而天下無事하고 曁于哲宗之初하야는 寔爲垂簾之政이라
宣仁有言曰 苟有利於社稷이면 吾無愛於髮膚라하야 任賢不貳하고 去讒不疑라
故自建隆으로 至於元祐히 號稱治平之世하고 而人才之盛도 亦莫過於宋矣라
初有趙普, 范質, 李沆, 張齊賢,
敏中, 寇準, 蔡襄, 晏殊, 王旦, 王曾, 杜衍, 趙抃, 諸呂之輩
하고 復有韓, 范, 富, 歐陽, 蘇, 張, 文, 呂, 司馬之徒
하니 俱爲大賢
이라
文章德業이 前世無比어늘 相繼以興하야 爲之輔相하니
當此之時하야 君君臣臣父父子子夫夫婦婦하야 百姓謳歌하야 謂之太平天子요
君臣之間에 求濟斯道하야 未嘗不以堯舜相期하니 東周以來로 未之有也라
世方仰其有爲
하야 庶幾復見
러니 惜安石之學
이 旣執而蔽
하고 引用凶邪
하야 反治爲亂
하야
使天下之人
으로 囂然喪其樂生之心
하고 卒之群姦繼進
하야 하니 用人
을 可不謹哉
아
當此之時
하야 上有好治之君
하고 下有慕治之民
이어늘 而
이 曾無一人登相臣之位者
하니 是宋不得與於斯文也
라
眞儒輩出
이 悉皆王佐之才
어늘哲宗以後
와寧宗以前
에 하야 竄逐禁錮
가 殆無虛日
이라
姦邪疊興하야 爲國大蠹하야 始於呂惠卿하고 終於賈似道하야 互爲汲引하야 相繼升于廟堂하니 用舍如此면 安得不亡乎아
蓋宋之人君
은 仁厚有餘而剛斷不足
하고 宋之人臣
은 德業有加而道則未盡
이요 明乎
之道
하야 以接夫孟氏之傳者
는 又謹其進退之義
라
故로 終宋之世토록 亦只如此而已하니 使學者로 不能無遺恨於斯世也라
且眞宗이 不知寇準之貶하고神宗이 不識惠卿之姦하니 又豈不爲明君之累邪아
至於哲宗하야는 昏庸尤甚하야 信任姦慝하고 屛逐忠賢이라
却問 大防이 何以至虔州오한대 左右不對하니 亦可羞也라
岳飛破虜하야 幾還兩宮이어늘秦檜矯詔하야 班師而殺之로되高宗이 若不聞也하니 通天之罪를 尙忍言哉아
張浚, 趙鼎, 眞德秀, 魏了翁之賢은 立朝未久하야 非惟不能以正群邪之罪요 而反有貶責竄逐之寃이라
秦檜, 韓
冑, 史彌遠, 賈似道
는 以元凶
으로 居首相
하야 登進同類
하야 布滿朝廷
하야 祗爲身謀
하야 卒以誤國
이어늘 而人主方以爲忠
하니 豈復望其有三代之治乎
아
文天祥은 拜相於國事旣去之餘하야 而能以身任三百年綱常之重하야 從容就義於顚沛流離之際하야 爲國之光하니 是亦豈非祖宗尊賢敬士之報歟아
蓋其興也에 以大臣之賢이요 其亡也에 以大臣之姦이라
故로 雖有大臣之誤나 而亦有大臣之報하니 爲人君者 可不辨其邪正而端其本原哉아
夫正身以正朝廷하고 正朝廷以正百官이니 百官正이면 則萬民莫敢不正이요 萬民正이면 則四夷賓服하야 而天下安矣리라
舜은 生於諸馮하시니 東夷之人也요文王은 生於岐周하시니 西夷之人也라
匈奴, 突厥, 五胡, 北魏, 契丹, 女眞이 世有位號하니 若使吾無間而可入이면 則幽王이 不死於犬戎이요明皇이 不敗於祿山이며呼延晏, 劉曜不能以陷晉都하야 而懷, 愍이 不辱於强虜矣요幹离不粘罕이 不能以犯宋京하야 而徽, 欽이 不死於漠北矣리라
蓋天下有道면 則四夷來王하야 萬邦咸休하고 天下無道면 則干戈之禍 不特在於四夷요 而且在蕭墻之內矣라
故로 得其道則治하고 失其道則亂하나니堯舜之道는 孝悌而已矣라
修己以安百姓
은唐虞之治也
요 勞身而焦思
는夏禹之治也
요 은成湯之治也
요 는文, 武, 成, 康之治也
요 除秦苛法
하야 與民自新
하고 偃武修文
하고 勵精求治
하야 擧德行, 興孝悌
하고 隆禮義, 尙廉恥
는 此漢祖, 唐宗, 宋祖之所以興也
라
至於末世하야는 崇尙虛無하고 信誘邪說하야 垂及敗亡호되 猶不能悟라
齊元은 爲周師所圍로되 尙講老子하고梁武는 爲侯景所迫이로되 惟談苦空이라
事佛之謹과 舍施之多가 無以逾於梁武요 奉道之勤과 設醮之厚가 又何以加於道君이리오
然(則)[而]餓死臺城호되 而佛不之救하고 受辱漠北호되 而道亦不聞이라
秦皇, 漢武
는 窮極以求神仙
이로되 了無證驗
하고 이로되 卒以誅夷
하며 契丹入寇
에王欽若
이 出守天雄軍
이러니 束手無策
하야 閉門
而已
하니 用此數者
하야 曾何補於治道哉
아
은 巡撫河南
할새 奏毁吳楚淫祠千七百所
하야 所存
이 惟夏禹, 太伯, 季子, 伍員四祠而已
요胡穎
은 經略廣東
할새 毁佛像而殺妖蛇
하고 杖僧人以脫愚俗
하며 所過淫祀(祠)則必焚之
하니 此萬代之所瞻仰也
라
自漢以來로 不能紹述三王之道하고 而佛老之敎가 反自明帝始라
永平之間
에 遣使之天竺
하야 得佛經四十二章
하야 緘之
하고 以佛像
으로 繪之淸凉臺, 顯節陵
하며靈帝始立
에 祠于宮中以奉之
하고
又有飛仙變化之術과 丹藥符籙之技와 禱祠醮祭之法과 沈淪鬼獄之論하니 皆以老氏爲宗하고 而名曰道라
晉, 魏以來로 其法漸盛하야 僧尼道士가 日以益衆이라
元魏孝文은 號爲賢主로되 亦幸其寺하야 修齋聽講이라
至如石勒之於佛圖澄과苻堅之於沙門道安과姚興之於鳩摩羅什과拓跋太武之於寇謙之와唐武宗之於趙歸眞과宋道君之於林靈素에 往往事以師禮로되 不聞有福利之報하고 而皆得奇異之禍하야 覆轍相尋호되 迷而不悟하야 流弊千有餘載하니漢明이 烏得以逃其責哉아
先儒有言호되佛老之害가 甚於楊墨이라하니 況復有鬼怪人妖와 邪說暴行이 雜然竝興하야 以惑世誣民者乎아
孟子曰 楊墨之道不息이면孔子之道不著라하고韓愈之說曰 人其人, 火其書, 廬其居하고 明先王之道以道(導)之라하니 嗚呼라
其要固在於明先王之道耳니 此盛彼衰는 自然之理也라
辨人才, 審治體, 美敎化, 厚人倫은 此明道之實也라
武帝好儒術하야董仲舒進修己治人之策이로되 而帝之所與論者는公孫弘, 東方朔, 司馬相如之徒라
卒事封禪하야 以蕩其志하고神宗이 慕王道하야程伯子上稽古正學定志之論이로되 而上之所與謀者는王安石, 呂惠卿, 章惇, 蔡卞之流라
創置新法하야 以擾其民하니 用舍之間은 安危所繫라
袁紹不起
면 則
요劉裕不興
이면 則藩鎭强臣之禍不息
이요朱溫不來
면 則宦官宮妾之亂不止
리라
蓋人君之喜用姦邪者는 冀得以從己之欲而已요 人臣之欺罔其君者는 亦欲以固其寵祿而已라
然君以逸欲滅國하고 臣以寵祿殺身하야 前車旣覆호되 後車不戒하야 及至君亡國滅이면 其臣이 又安得以獨存哉아
是故
로 秦未亡
에 而李斯, 趙高 先夷三族
하고 漢未滅
에 而宦官張讓等二千餘人
이 已就誅夷
하고王莽
이 盜竊神器
로되 而傳首詣宛
하고梁冀七侯,
, 六貴人, 二大將軍, 卿將尹校五十七人
이로되 無少長
히 皆棄市
하고 收其財貨
하니 合三十餘萬萬
이어늘 以充王府之用
이라
明皇幸蜀에李林甫斲棺鞭尸하고楊國忠斷頭注槊하며 唐祚未終에 而先斬韓全誨等一百六十二人하고 復殺第五可範以下數百하야 寃號之聲이 徹于內外하며崔胤之徒도 亦隨授首라
徽, 欽未亡에 而蔡京, 童貫, 王黼, 梁師成이 已先就戮하고 南宋未滅에 而賈似道先死于鄭虎臣之手하며秦檜削奪官爵하고韓侂冑梟首淮濱하니 由此觀之컨대 昔之壅蔽聰明하야 以圖利己者는 皆所以自滅而已니 可不戒哉아
故로 爲君難이요 爲臣不易니 治亂興亡之所由也를 可不愼哉아
漢儒有言曰 正其誼하고 不謀其利하며 明其道하고 不計其功이라하니 蓋人品不同하고 而事業亦異하니 是不可以成敗論英雄也라
諸葛亮은 輔漢於蜀하고狄仁傑은 反周爲唐하니 其心一也요郭汾陽은 克復二京而終身富貴하고岳武穆은 志存雪恥而身死權姦하니 其道同也라
요 丞相出師
는 漢賊明大義也
며 는 萬古開群蒙也
라
故
로 自初命晉大夫爲諸侯以來
로 千三百六十二年之間
에 誅亂賊於旣死
하고 正名分於當時
하며 定褒貶於往前
하고 示勸懲於來世
하니 라
是故로建安與靑田이 俱爲百世師요 循序及修省이 工夫齊妙用이라
馮道는 歷事於五季하야 惟恐失之하고嚴光은 加足於帝腹하니 忘其貴也라
君親이 雖曰不同이나 忠孝本無二致하니 是非得失이 乃在乎人이라
夫治也者는 親賢遠奸하고 信賞必罰하며 明禮義, 謹學術하야 以身先之하야 使民知趨向之方하야 上下相師而人才出矣라
如此면 則師道尊而善人多하고 朝廷正而天下治하야 百姓大和하고 萬物咸若이라
蓋爲治는 必以人才爲本이요 求人才之道는 又以敎化爲先이며 欲行敎化인대 非興禮樂이면 不可也니 不興禮樂이면 則敎化不行이요 敎化不行이면 則民無所措手足이요 無所措手足이면 則三綱不正하고 九疇不敍하야 而欲致天下之治者遠矣라
故로 治天下者는 必本之身이니 身端心誠이면 則賢才輔而天下治矣라
書云 愼厥身修하야 思永이라하고 詩云 上帝臨汝하시니 無貳爾心이어다
“천하를 다스림에 도道가 있으니 현자賢者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함을 분명하게 할 뿐이요, 천하를 다스림에 법法이 있으니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결단할 뿐이요, 천하를 다스림에 근본이 있으니 예악禮樂과 교화敎化를 순하게 할 뿐이다.
현자賢者를 가까이하고 간사한 자를 멀리함을 분명히 하면 군자가 등용되고 소인이 물러나며, 상과 벌을 공정하고 엄중하게 결단하면 공이 있는 자가 권면되고 죄가 있는 자가 징계되며, 예악禮樂과 교화敎化를 순하게 하면 만사萬事가 다스려지고 인심人心이 기뻐하여 천하가 화목해진다.
세 가지의 요점은 군주 자신에게 있으니, 몸이 바르고 마음이 성실하면 명령하지 않아도 행해진다.
그러므로 唐‧虞와 삼대三代의 정치는 순전히 예악禮樂을 써서 교화敎化가 크게 행해져 말하지 않아도 믿고 성내지 않아도 두려워해서 함이 없이 저절로 다스려졌으니, 이와 같이 할 뿐이다.
그런데 나라가 쇠퇴함에 미쳐서 夏나라는 妺喜로, 商나라는 妲己로, 周나라는 褒姒로 인해 망하였으니, 이는 안일함과 욕망이 사람을 망쳐서 모든 명령을 따르지 않게 된 것이다.
周나라 왕실王室이 동쪽(洛陽)으로 천도遷都한 뒤에는 왕자王者의 정사가 행해지지 못하여 제후諸侯들이 참람한 자가 많았다.
그러므로 夫子(孔子)께서 衛나라에서 魯나라로 돌아오셔서 《춘추春秋》를 지어 왕화王化를 바로잡으셨는데,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이르러서는 왕실이 침체하여 국토가 분열되고 군신간君臣間이 이산되었다.
그러므로 孟子께서 魏나라를 떠나 齊나라에 가시어 왕도王道를 말씀해서 인심人心을 바로잡으셨으니, 이는 모두 성현聖賢이 만세萬世의 생민生民을 위하여 하신 것이다.
이로부터 이후로 왕자王者의 자취가 종식終熄되고 은택이 다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몸을 사사로이 하고 선비들은 자신의 학문을 사사로이 해서 이론異論이 봉기蜂起하여 성학聖學이 황폐해졌다.
진秦‧한漢 이후로는 국가의 편안함과 위태로움이 한결같지 않아 다 들기가 어렵기에 우선 기강紀綱에 가장 관계되는 것을 취하여 논하려 한다.
漢나라 高祖가 일어남은 옛날과의 거리가 멀지 않고 성품이 활달하고 도량이 커서 간언諫言을 따르기를 물 흐르듯이 하였으니, 더불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는 군주였다.
그러나 선비를 경시하여 함부로 꾸짖고 대신들을 능욕하였다.
그리하여 張良은 벽곡辟穀을 하여 신선이 된다고 칭탁하고 떠나갔으며 蕭何‧曹參‧陳平‧周勃은 속임수와 힘을 사용하였으니, 천하가 비록 편안하였으나 옛 예禮가 회복되지 못하고 옛 음악이 일어나지 못함이 이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애석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文帝는 침잠沈潛하였으나 강극剛克하지 못하였고, 武帝는 고명高明하였으나 유극柔克하지 못하였다.
〈文帝가〉 서향西向하여 세 번 사양하고 남향南向하여 두 번 사양하였으니, 어찌 즉위하는 초기에 백성들에게 거짓을 보인단 말인가.
부모의 상기喪期를 단축하는 제도를 또 어찌 쓴단 말인가.
그러므로 백성들이 비록 풍족하였으나 군주가 몸을 닦아 성실함을 세우는 도道가 거의 무너지게 되었다. 〈武帝는〉 병난兵難을 궁극히 하여 무력을 함부로 사용하며 백성들을 모질게 대하고 신神을 섬겨서 해내海內가 텅 비었는데 윤대輪臺의 조서詔書에 이르러 천리天理가 성하게 일어났으니, 이는 후회하는 마음이 싹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또한 망한 秦나라의 연속일 뿐이다.
昭帝는 14세에 上官桀의 속임수를 알았으니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을 것 같았으나 애석하게도 霍光이 배우지 않아 무식해서 도道로써 군주를 섬기지 못하였고, 後漢의 光武帝는 정치에 뜻을 두었으나 보필하는 자들이 또한 훌륭한 사람이 아니었다.
諸葛孔明(諸葛亮)은
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가 있었으나
간웅姦雄(曹操)이 참람하여 도둑질하는 즈음을 당하였고, 董子는 비록
왕도王道를 행하려는 큰 뜻이 있었으나
注+[通鑑要解]동자董子는 촉한蜀漢의 동화董和이다. 소열황제昭烈皇帝(劉備)가 동화董和를 읍재邑宰로 삼았는데, 예악禮樂으로 백성을 가르쳤다. 일설一說에는 동중서董仲舒라 한다. 큰 뜻은 왕도王道를 행하는 것이다. 또한 그 지위를 얻지 못하였으며, 鄧騭과 楊震의 무리는 몸을 보존하는 기미를 알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외척外戚(王莽)의 화禍와 내수內竪(宦官)의 변고로 중간에 〈천자天子의 자리가〉 王莽에게 옮겨 가고 마침내 董卓에게 파괴되었으며, 曹操가 이를 이어 漢나라의 국운國運을 바꾸었으니, 또다시 무엇을 말하겠는가.
백번 싸워 천하를 소유하고는 무武를 억제하고 문文을 닦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해서 몸소 태평을 이룩하고 형벌을 폐지하여 사용하지 않았으니, 또한 세상에 드문 현군賢君이다.
그러나 군주의 덕德을 가지고 논한다면 사사로이 모시는 궁인宮人을 사용하여 자기 아버지(高祖)를 위협하였고, 소랄왕비巢刺王妃를 받아들여 아들 明을 봉하였으니, 그 잘못이 너무 심하다.
만약 魏徵의 신영辰嬴의 비유가 없었더라면 明의 어미가 또다시 文德皇后를 이어 후비后妃가 되었을 것이다.
규문閨門이 이와 같으니 그의 자손들이 또 어찌 집안을 바로잡는 법도가 있었겠는가.
이 때문에 武氏(則天武后)는 선제先帝인 太宗을 섬긴 적이 있었고 太眞(楊貴妃)은 이미 壽王의 배필이었으며, 中宗은 친히 韋皇后를 위하여 주판을 놓아 주었고 明皇(玄宗)은 安祿山의 세아전洗兒錢을 楊貴妃에게 하사하여 마침내 천하天下와 후세後世의 비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어찌 모두 太宗이 나쁜 전통을 드리운 소치가 아니겠는가.
房玄齡, 杜如晦, 王珪, 魏徵, 長孫無忌, 褚遂良, 狄仁傑, 張九齡, 姚崇, 宋璟, 李泌, 裴度의 어짊으로도 오히려 예의禮義가 무너지는 즈음에 그 군주를 구하지 못하여 혹은 군주에게 소원시 당하였으며, 張柬之, 桓彦範, 崔玄暐, 袁恕己, 敬暉 등은 武氏의 난亂을 토벌하고 반정反正하여 새 군주를 세우고 옛 군주를 폐위하여 唐나라에 큰 공이 있었으나 능욕을 당하여 죽었으며, 韓愈와 陸贄는 글을 올려 아뢰는 사이에 부지런하고 간곡하였으나 또한 죄를 얻었으니, 다른 것이야 오히려 어찌 말할 나위가 있겠는가.
唐나라의 난亂은 武氏와 韋后에게서 시작되고 貴妃에게서 위태로워졌으며, 번진藩鎭에게 파괴당하고 환관宦官에게 망하였다.
李勣, 李義府, 許敬宗, 鄭愔, 崔湜, 武三思, 李林甫, 楊國忠, 李輔國, 盧杞, 元載의 무리가 후비后妃와 환관宦官들과 안팎으로 결탁하여 시종 난難을 일으켰으니, 하루아침 하루저녁에 일어난 변고가 아니다.
포악한 秦나라는 呂氏로 嬴氏를 바꾸었으니 이는 嬴氏가 莊襄王의 손에 멸망한 것이요, 약한 晉나라는 牛氏로 司馬氏를 바꾸었으니 이는 司馬氏가 懷帝와 愍帝의 때에 멸망한 것이다.
隋나라 楊廣은 그 아버지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즉시 패망하였으니, 또 어찌 천하를 다스리는 방도를 함께 논할 수 있겠는가.
趙高와 楊素의 간악함으로 扶蘇와 楊勇을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하늘이 秦나라와 隋나라의 멸망을 재촉한 것이다.
또 秦政(始皇帝)의 포악함이 隋나라 楊堅보다 더하고 楊廣의 죄악이 胡亥보다 더하였으니, 종족宗族을 전복시키고 후사後嗣를 끊은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宋‧齊‧梁‧陳으로부터 오계五季(五代)에 이르기까지 화란禍亂이 서로 이어져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으니, 명색은 군신간이나 실제로는 원수와 적이었다.
세상이 나빠져서 이에 이르러 파괴되고 혼란함이 지극하였다.
오직 周나라 柴世宗은 다소 삼대三代의 유풍遺風이 있었으나 하늘이 장수를 누리지 못하게 하였으니, 아마도 하늘이 장차 宋나라의 다스림을 열려고 한 것이 아니겠는가.
또 晉나라 武帝 이후로 惠帝와 懷帝가 친애함이 없어서 골육간에 서로 해치고 여러 오랑캐들이 틈을 타고서 중원中原을 혼란하게 하니, 생민生民들이 도탄塗炭에 빠짐이 이때보다 더 심한 적이 있지 않았다.
王氏‧謝氏‧陶氏‧阮氏의 부귀와 풍류風流, 뛰어난 절행節行과 표치標致(높은 운치)가 크게 여유가 있으니, 강좌江左의 백성들이 또한 이에 힘입어 편안하였다.
그러나 조정의 득실得失과 간웅姦雄의 찬시簒弑는 또한 아득히 바로잡지 못하였다.
〈北朝는〉 拓跋氏가 일어남에 崔浩와 高允의 무리가 보좌해서 이미 다스려지고 또 편안하였으며, 孝文帝에 이르러 풍속이 크게 바뀌어 거의 예의禮義의 나라가 되었다.
北周의 宇文高祖와 金나라의 完顔世宗은 또한 어질었으니, 江左(南朝)의 군신君臣이 어찌 부끄러움을 모른단 말인가.
삼년三年의 부모상父母喪은 천자天子로부터 서인庶人에 통용되는데 漢나라 文帝와 景帝 이후로 이것을 행한 자는 오직 晉나라 武帝와 北魏의 孝文帝, 北周의 高祖 등 몇 명의 군주일 뿐이니, 이는 孔子의 이른바 ‘〈이적夷狄에게도 군주君主가 있으니〉 제하諸夏(중국中國의 여러 제후국諸侯國)에 없는 것과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나 晉나라로부터 隋나라에 이르기까지 남북조南北朝의 군주가 대부분 제대로 죽지 못하여 모두 나라가 망하고 종족이 멸망하였으니, 그 까닭은 어째서인가?
불인不仁함으로써 천하를 얻어 윗사람이 이것을 행함에 아랫사람들이 본받았기 때문이다.
자신은 천자天子가 되었으나 죽은 뒤에는 후손들이 남은 무리가 없이 다 죽었으니, 아! 애통하다.
宋나라 太祖에 이르러서는 일찍이 학문을 하지 않았는데, 말년에 독서하기를 좋아하며 한탄하기를 ‘堯舜의 세대에 사흉四凶의 죄가 귀양가는 데 그쳤는데, 어찌하여 근대에는 법망法網이 이처럼 치밀하단 말인가?’ 하고는
이에 법을 제정할 적에 채찍과 매질이 전폐殿陛에서 행해지지 않고 꾸짖음과 욕이 공경公卿에게 미치지 않게 하였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훌륭한 일을 할 수 있어서 군주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이 크게 일어났다.
曹彬에게 명하여 江南을 정벌할 때에는 절대로 생민生民들을 모질게 대하거나 노략질하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그러므로 曹彬은 성 아래에 이르자 분향焚香하고 맹세하여 한 사람도 함부로 죽이지 않고 개선하는 날에 행장이 초라하였으며, 항복한 吳越王을 본국으로 돌려보내어 억류하지 않겠다는 뜻을 알게 하였다.
장상將相들을 대처함에 있어서는 서로 편안한 마음으로 깨우치고 항복한 여러 군주들을 빈객賓客의 예禮로 대우하였으며, 여러 절진節鎭(鎭의 절도사節度使)들을 유신儒臣으로 바꾸고 덕행德行이 있고 효제孝悌하는 선비들을 천거하여 예의禮義와 염치廉恥의 기풍을 높이게 하였으니, 아!
군주가 이와 같다면 또한 구경九經의 뜻을 거의 알았다고 할 것이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궁궐문을 크게 열어 바로 내 마음과 같게 해서 조금이라도 간사하거나 굽음이 있으면 사람들이 모두 보게 하라.’ 하였으니, 넓고 공평한 도道가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太宗은 즉위하던 초기에 崇文館을 개설하고 여러 왕과 재상들과 함께 서적을 열람하였으며, 다음으로 문장文章과 덕행德行이 있는 선비를 뽑아 왕자王子들을 가르치고 교도敎導하게 하였고,
또 경계하기를 ‘반드시 충효忠孝를 우선하라.’ 하였으며,
또 문학文學을 진작振作하여 사방을 풍동風動하니 인재가 이에 크게 배출되었다.
仁宗에 이르러서는 공손함과 검소함을 힘써 행하고 몸을 바루어 사람들에게 솔선을 보여서 시종여일始終如一하였다.
그리하여 승하升遐한 날에 비록 깊은 산과 궁벽한 골짜기에 사는 백성들도 모두 분주히 달려와 슬피 울부짖어 부모父母의 상喪을 당한 듯이 슬퍼하였으니, 인심人心을 얻지 않고 이와 같을 수 있겠는가?
英宗은 기질氣質이 더욱 아름다워 겸손하고 공손하여 현신賢臣에게 국정을 맡겨서 천하天下가 무사하였으며, 哲宗 초년에 이르러서는 실로 수렴청정垂簾聽政하는 시기였다.
宣仁皇后가 말씀하기를 ‘만일 사직社稷에 이로움이 있다면 내 털과 살도 아끼지 않겠다.’ 하여, 현자賢者에게 맡김에 두 마음을 품지 않고 참소하는 자를 제거함에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建隆(太祖의 연호) 연간으로부터 元祐(哲宗의 연호) 연간에 이르기까지 나라가 잘 다스려지고 태평한 세상이라고 일컬어졌으며, 인재人才의 성함도 또한 송宋나라보다 더한 적이 없다.
초기에는 趙普‧范質‧李沆‧張齊賢‧向敏中‧寇準‧蔡襄‧晏殊‧王旦‧王曾‧杜衍‧趙抃과 여러 呂氏의 무리가 있었고, 또 韓琦‧范仲淹‧富弼‧歐陽脩‧蘇軾‧張栻‧文彦博‧呂公著‧司馬光의 무리가 있었는데, 이들은 모두 대현大賢이었다.
문장文章과 덕업德業이 전대前代에서는 비견할 만한 자가 없었는데, 이 분들이 서로 이어 일어나서 보상輔相이 되니,
이때를 당하여 군주는 군주답고 신하는 신하다우며 아버지는 아버지답고 자식은 자식다우며 남편은 남편답고 아내는 아내다워서 백성들이 구가謳歌하여 태평천자太平天子라 일렀고,
또 宣仁皇后를 일컬어 여중女中堯舜이라 하였으니, 아! 아름답다.
神宗은 뜻을 다하여 훌륭한 정치를 이룩할 것을 도모하여, 위로 唐虞(堯舜)를 사모하고 王安石에게 마음을 쏟았다.
군신간君臣間에 이 도道를 이루려 하여 일찍이 堯‧舜으로 기약하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東周 이래로 일찍이 없었던 일이다.
세상에서는 막 훌륭한 정치를 기대하여 행여 다시 도유우불都兪吁咈의 정치를 볼까 하였는데, 애석하게도 王安石의 학문이 이미 고집스러워 가리워졌고, 흉악한 자와 간사한 자들을 등용하여 다스려짐을 뒤집어서 혼란함으로 만들어 놓았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소란스러워 사는 것을 좋아하는 마음을 잃게 하였으며, 마침내 여러 간신姦臣들이 뒤이어 등용되어서 정강靖康의 화禍를 빚어냈으니, 인물을 등용함을 삼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때를 당하여 위에는 훌륭한 정치를 좋아하는 군주가 있었고 아래에는 훌륭한 정치를 사모하는 백성이 있었으나, 濂洛의 여러 현철賢哲들이 일찍이 한 사람도 상신相臣의 지위에 오른 자가 없었으니, 이것이 宋나라가 사문斯文에 참여하지 못한 이유이다.
아마도 하늘이 이 세상으로 하여금 堯‧舜의 경지에 오르기를 바라지 않았는가 보다.
어찌하여 도道가 이처럼 행해지지 않았단 말인가.
배출된 진유眞儒들이 모두 왕자王者를 보좌할 만한 재주였는데, 哲宗 이후와 寧宗 이전에는 이들을 붕당朋黨이라고 지목하고 위학僞學이라고 배척하여, 귀양보내고 금고禁錮함이 없는 날이 거의 없었다.
간사한 자들이 거듭 나와서 국가의 큰 좀이 되어 呂惠卿에서 시작되고 賈似道에서 끝마쳐, 서로 끌어들여 계속해서 묘당廟堂에 올랐으니, 인물을 쓰고 버림이 이와 같다면 어찌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宋나라의 임금은 인후仁厚함은 유여하였으나 강단剛斷이 부족하였고, 宋나라의 신하는 덕업德業은 유여하였으나 도道가 미진하였으며, 이제二帝 삼왕三王의 도道에 밝아서 孟氏(孟軻)의 전함을 이은 자들은 또 진퇴進退하는 의리義理를 삼갔다.
그러므로 宋나라를 마치도록 또한 다만 이와 같았을 뿐이니, 배우는 자들로 하여금 宋나라 시대에 유한遺恨이 없지 못하게 하였다.
또 眞宗은 구준寇準이 좌천됨을 알지 못하였고 神宗은 呂惠卿의 간악함을 알지 못하였으니, 또 어찌 현명한 군주의 누累가 되지 않겠는가.
哲宗에 이르러서는 어둡고 용렬함이 더욱 심하여 간사한 자들을 신임하고 충현忠賢들을 쫓아내었다.
그리고는 도리어 ‘呂大防이 어찌하여 虔州에 귀양을 갔는가?’ 하고 묻자, 좌우左右의 신하들이 대답하지 못하였으니, 또한 수치스러울 만하다.
岳飛가 오랑캐인 金나라를 격파하여 거의 두 궁宮(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을 돌아오게 하였는데, 간신인 秦檜가 조칙詔勅을 위조해서 회군回軍하게 하여 죽였으나 高宗은 마치 못 들은 것처럼 하였으니, 하늘에 통하는 죄를 오히려 차마 말할 수 있겠는가.
張浚, 趙鼎, 眞德秀, 魏了翁의 현자賢者들은 조정에서 벼슬한 지가 얼마되지 않아, 간신姦臣들의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폄하되고 견책당하여 쫓겨나고 유배가는 억울함이 있었다.
秦檜, 韓侂冑, 史彌遠, 賈似道는 원흉元兇으로서 수상首相의 지위에 있으면서 동류同類들을 등용하여 온 조정에 가득 채우고는 다만 자기 한 몸의 계책만 세워 끝내 나라를 망쳤는데도 군주는 이들을 충신忠臣이라고 여겼으니, 어찌 다시 삼대三代의 훌륭한 정치를 기대할 수 있었겠는가.
文天祥은 국사國事가 이미 틀려버린 뒤에 정승에 임명되어 자기 한 몸으로 3백년 강상綱常의 무거운 책임을 맡아서 전패顚沛하고 유리流離하는 즈음에 조용히 의리義理를 따라 죽어서 국가의 광채가 되었으니, 이 또한 어찌 조종조祖宗朝에 현자를 높이고 선비를 공경한 보답이 아니겠는가.
宋나라가 일어난 것은 대신大臣의 어짊 때문이었고, 宋나라가 망한 것은 대신大臣의 간악함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비록 대신大臣이 나라를 그르침이 있었으나 또한 대신大臣의 보답이 있었던 것이니, 인군人君이 된 자가 사邪와 정正을 분별하여 그 근본을 바르게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몸을 바루어 조정朝廷을 바로잡고 조정朝廷을 바루어 백관百官을 바로잡으니, 백관百官이 바루어지면 만민萬民이 감히 바르지 않을 수 없고 만민萬民이 바루어지면 사방 오랑캐들이 공물을 바치고 복종하여 천하天下가 평안해지는 것이다.
東夷, 西戎, 南蠻, 北狄은 예로부터 있었다.
舜임금은 諸馮에서 출생하시니 東夷의 사람이었고, 文王은 岐周에서 출생하시니 西夷의 사람이었다.
匈奴, 突厥, 五胡, 北魏, 契丹, 女眞이 대대로 지위와 칭호가 있었으니, 만약 우리 中華에 들어올 만한 틈이 없었다면 周나라 幽王이 犬戎에게 죽지 않았을 것이고, 唐나라 明皇(玄宗)이 安祿山에게 패하지 않았을 것이며, 呼延晏과 劉曜가 晉나라 도성을 함락시키지 못하여 懷帝와 愍帝가 강한 오랑캐에게 욕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고, 金나라의 幹离不粘罕이 宋나라의 汴京을 침범하지 못하여 徽宗과 欽宗이 사막의 북쪽에서 죽지 않았을 것이다.
천하에 도道가 있으면 사방의 오랑캐들이 와서 복종하여 만방萬邦이 모두 아름답고, 천하에 도道가 없으면 병란兵亂의 화禍가 다만 사이四夷에게 있을 뿐만 아니라 소장蕭墻(집안의 병풍)의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도道를 얻으면 다스려지고 그 도道를 잃으면 혼란한 것이니, 堯舜의 도道는 효제孝悌일 뿐이다.
자기 몸을 닦아 백성을 편안히 함은 唐虞의 다스림이요, 몸을 수고롭게 하여 노심초사한 것은 夏禹의 다스림이요, 육사六事로써 자책함은 成湯의 다스림이요, 〈무일無逸〉을 짓고 〈빈풍豳風 七月〉을 진열함은 文王‧武王‧成王‧康王의 다스림이며, 秦나라의 까다로운 법을 제거하여 백성들과 함께 스스로 새로워지고, 무武를 억제하고 문文을 닦으며 정신을 가다듬어 훌륭한 정치를 이룩하고자 하여 덕행德行이 있는 사람을 등용하고 효제孝悌를 일으키며 예의禮義를 높이고 염치廉恥를 숭상함은 漢나라 高祖와 唐나라 太宗과 宋나라 太祖가 흥성한 이유이다.
말세末世에 이르러서는 老莊의 허무함을 숭상하고 간사한 말을 믿어 패망함에 이르렀으나 오히려 깨닫지 못하였다.
齊元(北齊의 후주後主인 고위高緯)은 周나라 군대에게 포위당했으면서도 오히려 《노자老子》를 강講하였고, 梁나라 武帝는 侯景에게 압박받으면서도 오직 불학佛學의 고행苦行과 공空을 말하였다.
삼가 부처를 섬김과 보시의 많음이 梁나라 武帝보다 더한 사람이 없었고, 도道를 부지런히 받듦과 초제醮祭를 후하게 베풂이 또 어찌 도군道君(송나라 휘종徽宗)보다 더하였겠는가.
그런데도 梁나라 武帝는 臺城에서 굶어 죽었으나 부처가 구원해 주지 않았고, 도군道君은 사막의 북쪽에서 욕을 당하였으나 도道를 또한 듣지 못하였다.
秦나라 始皇과 漢나라 武帝는 신선神仙을 끝까지 구하였으나 끝내 징험이 없었고, 楚王 영英은 사문沙門의 법法을 공경하고 믿었으나 끝내 죽임을 당하였으며, 契丹이 쳐들어오자 宋나라의 王欽若은 나가 천웅군天雄軍을 지키면서 속수무책束手無策으로 문을 닫고 재齋를 올리며 불경佛經만 외울 뿐이었으니, 이 몇 가지를 사용하여 일찍이 정치하는 도道에 무슨 보탬이 있었는가.
狄仁傑은 河南 지방을 순무巡撫할 적에 임금께 아뢰어 吳‧楚 지방의 음사淫祠 1,700곳을 부수고 남겨 둔 곳은 오직 夏禹와 太伯‧季子(季札)‧伍員의 네 사당뿐이었으며, 胡穎은 廣東을 경략經略할 적에 불상佛像을 부수고 요망한 뱀을 죽이고 중을 곤장을 쳐서 어리석은 풍속에서 벗어나게 하였으며 지나는 곳마다 음사淫祠가 있으면 반드시 불태웠으니, 이는 만대萬代에 우러러보는 바이다.
漢나라 이래로 삼왕三王의 도道를 계승하지 못하고 佛老의 가르침이 도리어 明帝로부터 시작되었다.
永平年間에 天竺國에 사신을 보내어 불경佛經 42장章을 얻어 와서 이것을 난대석실蘭臺石室에 봉함하여 보관하였고, 불상佛像을 淸凉臺와 현릉顯陵‧절릉節陵에 그렸으며, 靈帝는 처음 즉위하자 궁중에서 제사하여 받들었다.
그리고 또 하늘을 날아다녀 신선으로 변화하는 방법과 단약丹藥‧부록符籙의 방술과 신사神祠에 기도하는 초제醮祭의 법과 아귀餓鬼 지옥地獄에 빠진다는 의논이 있었으니, 이는 모두 老氏를 종주로 삼고 도교道敎라 이름한다.
晉‧魏 이래로 이 법이 점점 성하여 승니僧尼와 도사道士가 날로 더욱 많아졌다.
元魏(北魏)의 孝文帝는 어진 군주라고 이름났으나 또한 사찰에 가서 재齋를 올리고 강講을 들었다.
後趙의 石勒이 佛圖澄에 있어서와 先秦의 苻堅이 사문沙門道安에 있어서와 後秦의 姚興이 鳩摩羅什에 있어서와 後魏의 拓跋太武(拓跋燾)가 寇謙之에 있어서와 唐나라 武宗이 趙歸眞에 있어서와 宋나라 道君(徽宗)이 林靈素에 있어서는 왕왕 스승의 예禮로 섬겼으나 복리福利의 보답이 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고, 모두 기이한 화禍를 만나서 실패한 자취가 서로 이어졌으나 미혹하여 깨닫지 못해서 천여 년 동안 폐단을 남겼으니, 漢나라 明帝가 어떻게 그 책임을 피할 수 있겠는가.
선유先儒가 말씀하기를 ‘佛老의 폐해가 楊朱와 墨翟보다 심하다.’ 하였는데, 더구나 다시 귀신의 괴이함과 사람의 요망함, 부정한 학설과 포악한 행실이 뒤섞여 함께 일어나서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임에 있어서이겠는가.
孟子가 말씀하기를 ‘楊朱와 墨翟의 도道가 종식되지 않으면 孔子의 도道가 드러나지 못한다.’ 하였고, 韓愈의 말에 이르기를 ‘그 사람(승려와 도사)을 평민平民으로 만들고 그들의 책을 불태우고 그들의 거처(寺刹과 도관道觀)를 일반 사람들의 집으로 만들고 선왕先王의 도道를 밝혀 인도하여야 한다.’ 하였으니, 아!
그 요점은 진실로 선왕先王의 도道를 밝힘에 있을 뿐이니, 이것이 성하면 저것이 쇠함은 자연의 이치이다.
인재人才를 분별하고 정치하는 체통體統을 살피고 교화敎化를 아름답게 하고 인륜人倫을 두터이 함은 이는 도道를 밝히는 실제이다.
漢나라 武帝는 유술儒術을 좋아하여 董仲舒가 수기치인修己治人의 계책을 올렸으나 武帝가 더불어 논의한 상대는 公孫弘‧東方朔‧司馬相如의 무리들이었다.
그리하여 끝내 봉선封禪을 일삼아 그 뜻을 방탕하게 하였으며, 宋나라 神宗은 왕도王道를 사모하여 程伯子(程明道)가 옛날을 상고하고 학문을 바로잡고 뜻을 정하는 의논을 올렸으나 황제가 더불어 모의한 자는 王安石, 呂惠卿, 章惇, 蔡卞의 무리였다.
그리하여 이들이 신법新法을 창건하여 백성들을 소란하게 하였으니, 인물을 등용하고 버리는 사이에 국가國家의 안위安危가 달려 있는 것이다.
後漢 말엽에 袁紹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오족五族의 충현忠賢의 금고禁錮가 없어지지 않았을 것이요, 東晉 때에 劉裕가 일어나지 않았으면 번진藩鎭의 강성한 신하들의 화가 그치지 않았을 것이요, 唐나라 말기에 朱溫이 오지 않았으면 환관宦官과 궁첩宮妾의 난亂이 그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큰 종기가 이미 터지자 큰 운명運命이 뒤따라 끊겼다.
인군人君이 간사한 자를 등용하기를 좋아하는 것은 자신의 욕망을 따르기를 바라서일 뿐이요, 신하가 군주를 속이는 것은 또한 자신의 총록寵祿을 견고히 하고자 해서일 뿐이다.
그러나 군주는 안일과 욕심으로 나라를 멸망하게 하고 신하는 총록寵祿으로 자기 몸을 죽여서, 앞수레가 이미 전복되었는데도 뒷수레가 경계하지 아니하여, 군주가 죽고 나라가 멸망함에 이르면 그 신하가 또 어떻게 홀로 보존될 수 있겠는가.
이러한 까닭에 秦나라가 망하기 전에 李斯와 趙高가 먼저 삼족三族이 멸망하는 화를 당하였고, 後漢이 멸망하기 전에 환관宦官인 張讓 등 2천여 명이 이미 죽임을 당하였고, 王莽이 신기神器(황제의 지위)를 도둑질하였으나 참형斬刑을 당하여 수급首級이 완宛 땅에 이르렀고, 後漢 때에 梁冀는 후侯가 7명, 후后가 3명, 귀인貴人이 6명, 대장군大將軍이 2명, 경卿‧장將‧윤尹‧교校가 57명에 이르렀으나 어린아이와 어른을 구별하지 않고 모두 기시棄市를 당하였고, 그 재화를 몰수하자 모두 30여 만만萬萬이었는데 이것을 왕부王府(國庫)의 재용財用에 충당하였다.
唐나라 明皇(玄宗)이 蜀 지방으로 파천播遷할 적에 李林甫는 관棺이 쪼개어져 시신이 채찍질 당하였고 楊國忠은 머리가 잘려 창끝에 매달렸으며, 唐나라의 국운國運이 끝나기 전에 환관宦官인 韓全誨 등 162명을 먼저 참형斬刑하였고 다시 제오가범第五可範 이하 수백 명을 죽여서 원망하고 울부짖는 소리가 내외內外에 통하였으며, 이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