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에 二世東行郡縣하고 夏至咸陽하야 謂趙高曰 人生世間이 譬猶騁六驥過決隙也라
吾欲悉耳目之所好하고 窮心志之所樂하야 以終吾年壽하노니 可乎아 趙高曰
陛下嚴法而刻刑
하사 盡除先帝之故臣
하시고 置陛下之所親信
하시면 則高枕肆志寵樂矣
리이다
二世然之하야 乃更爲法律하야 務益刻深하니 大臣諸公子有罪면 輒僇死러라
○ 復作阿房宮
할새 盡徵材士
注+[釋義]有材多力之士也라五萬人
하야 屯衛咸陽
하다
是時
에 發閭左
하야 戍漁陽
注+[釋義]王氏曰 閭左는 言居閭里之左也라 秦時에 復除者居閭左러니 今力役煩하야 在閭左者를 盡發之也라 一說에 所在에 以富强爲右하고 貧弱爲左하니 秦役戍多하야 富者役盡일새 兼取貧者發之라 戍者는 屯兵而守也라 漁陽은 幽州漁陽郡이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檀州密雲縣南十八里漁水之北하니 今薊州是라할새 九百人
이 屯大澤鄕
注+[釋義]在沛郡蘄縣이라하고 勝, 廣
注+[釋義]勝은 姓陳이요 字涉이며 廣은 姓吳요 字叔이라이 皆爲屯長
注+[通鑑要解]屯은 猶營也니 每營에 置將卒하니라이러니 會
에 天大雨
하야 道不通
이라
已失期
하고 乃召令徒屬曰 公等
이 皆失期
하니 當斬
이라
且壯士不死則已어니와 死則擧大名耳니 王侯將相이 寧有種乎아한대 衆이 皆從之하다
乃詐稱公子扶蘇, 項燕
注+[釋義]公子扶蘇는 始皇長子也니 (今)[令]聞無罪러니 而二世殺之하야 百姓未知其死하고 項燕은 楚之良將也니 或以爲死라하고 或以爲亡이라 今故詐自稱二人하야 以爲天下倡이라하고 爲壇而盟
하야 稱大楚
하고
勝이 自立爲將軍하고 廣이 爲都尉하야 入據陳하다 〈出陳涉傳〉
秦爲無道하야 暴虐百姓일새 將軍이 出萬死之計하야 爲天下除殘이어늘 今始至陳而王之면 示天下私라 願將軍은 毋王하고 急引兵而西하야 遣人立六國後하야 自爲樹黨하야 爲秦益敵하소서
敵多則力分
이요 與衆
注+[釋義]黨與衆多也라則兵强
이니 誅暴秦
하고 據咸陽
하야 以令諸侯
면 則帝業
이 成矣
리이다
涉이 不聽하고 自立爲王하니 諸郡縣이 苦秦法하여 爭殺長吏하고 以應涉이러라 〈出陳餘傳〉
○ 謁者
라가 從東方來
하야 以反者聞
이어늘 二世怒
하야 下之吏
러니
後使者至에 上問之한대 對曰 群盜는 鼠竊狗偸니 不足憂也니이다 上이 悅하다
○ 陳王
이 以陳人武臣
으로 爲將軍
하고 以張耳, 陳餘
로 爲左右校尉
하야 予卒二千人
하야 徇趙
注+[頭註]略地曰徇이니 謂行而取之也라하고 使周文
注+[釋義]史記에 作周章이라으로 西擊秦
하다
○ 九月
에 沛人劉邦
注+[釋義]王氏曰 漢高本紀에 作沛豐邑人하니 沛는 今徐州縣이라 漢改泗水爲沛하니 郡治相城이라은 起兵於沛
하고 下相人項梁
은 起兵於吳
하고 狄人田儋
은 起兵於齊
하다
○ 劉邦
은 字季
니 爲人
이 隆準龍顔
注+[釋義]王氏曰 準은 鼻也니 音은 準的之準이라 顔은 額顙也니 謂之龍顔은其非凡이라이요 左股
에 有七十二黑子
注+[附註]赤帝七十二日之數也라 木火土金水 各一方이니 一歲三百六十日을 四方分之하면 各得九十日이요 土居中하야 竝索四季各十八日하면 俱成七十二日이라 故高祖七十二黑子者는 應火德七十二日之徵也니 黑子는 卽子也라하고 愛人喜施
注+[釋義]班固漢紀云 寬仁愛人이라하야 意豁如也
하고 常有大度
하야 不事家人生産作業
이러라
史記本紀
에 曰 常(嘗)
咸陽
할새 秦皇帝
하고 喟然太息曰 嗟乎
라
大丈夫
注+[附註]周制에 八寸爲尺이요 十尺爲丈이니 人長八尺이라 故曰丈夫라 詩疏에 夫有傅相之德而可倚仗을 謂之丈夫라하고 易師卦丈人註에 尊嚴之稱이라하니라當如此矣
라하더라
○
人呂公
注+[釋義]濟陰單父縣이니 音善甫니 今縣屬濟寧路單州라 索隱曰 呂公은 史失其名이라 又相經云 魏人也니 名文이요 字淑平이라이 好相人
이러니 見季狀貌
하고 因重敬之
하야 曰 臣
이 相人多矣
로되 無如季相
하니 願季
는 自愛
하라
臣有息女
注+[頭註]息은 生也니 己所生女也라하니 願爲
하노라하고 卒與劉季
하니 乃呂后也
러라
○ 秦始皇帝常(嘗)曰 東南
에 有天子氣
注+[附註]晉天文志에 天子氣는 內赤外黃하니 所發之處에 當有王者라 若天子欲游往處엔 其地亦先發此氣하니 或如城門하야 隱隱在氛霧中하고 或如龍馬雜色하야 鬱鬱衝天者하니 皆帝王氣라라하야 於是
에 因東游以厭(壓)之
어늘
季卽自疑亡匿
하야 隱於芒,
山澤間
注+[釋義]碭은 音唐이요 又音宕이라 芒縣은 屬臨淮郡하고 碭縣은 屬梁國하니 二縣之界에 有山澤之固라 故隱其間이라 按今歸德府秦碭郡也라이러니 呂后與人俱求
에 常得之
라
季怪問之한대 呂后曰 季所居上에 常有雲氣라 故로 從往이면 常得季라하니 沛中子弟聞之하고 多欲附者러라
初
에 爲泗上亭長
注+[釋義]亭者는 停留니 行旅宿食處니 猶今之館驛也라 秦法에 十里一亭이요 亭置長하야 督盜賊하니 泗水亭은 在沛縣東百步라하야 爲縣送徒驪山
注+[釋義]時에 始皇葬驪山하니 郡縣이 皆送徒하야 土役作하니라注+[頭註]徒는 卽徒刑이라이러니 徒多道亡
이라
自
比至
에 皆亡之
하고 乃解縱所送徒曰 公等
은 皆去
하라
○ 劉季被酒
注+[釋義]謂爲酒所加被也라하야 夜徑澤中
注+[釋義]徑은 小道也니 從小道而行하야 過於澤中이라 一說에 徑은 斜過也라할새 有大蛇當徑
이어늘 季拔劍斬蛇
하다
後人
이 來至蛇所
하니 有老嫗夜哭曰 吾子
는 白帝子
注+[頭註]秦以居西戎하야 主少昊之神하고 作西疇하야 祠白帝하니라也
라
化爲蛇
하야 當道
러니 今赤帝子
注+[通鑑要解]赤帝는 謂漢也니 漢承堯緖하야 爲火德也라斬之
라하고 嫗因忽不見
이어늘
後人이 告劉季한대 季乃心獨喜自負하고 諸從者日益畏之러라
掾主吏
注+[頭註]參爲獄掾하고 何爲主吏하니 謂分部列局之吏也라 史는 掌書者也요 吏는 治人者也니 治人之心이 主於一故로 吏字從一從史하니라蕭何, 曹參曰 君爲秦吏
하야 今欲背之
하고 率沛子弟
하면 恐不聽
이니
願君은 召諸亡在外者면 可得數百人하리니 因劫衆이면 衆不敢不聽이리이다
乃令
로 召劉季
하니 時
에 劉季之衆
이 已數十百人矣
라
沛令
이 後悔
어늘 父老乃率子弟
하야 共殺沛令
하고 開門迎劉季
하야 立以爲沛公
注+[頭註]春秋時에 楚僭稱王하야 其大夫多封縣公하니 今立高祖爲沛公은 用楚制也라하고
蕭, 曹等이 爲收沛子弟하야 得三千人하야 以應諸侯하다 〈已上 竝出史記高祖本紀〉
籍이 少時에 學書不成去하고 學劍又不成이어늘 項梁이 怒之한대 籍曰 書는 足以記名姓而已요 劍은 一人敵이라 不足學이니
會稽守殷通이 聞陳涉起하고 欲發兵以應涉하야 使項梁將이어늘
梁
이 乃使籍
으로 拔劍斬守頭
하고 佩其印綬
注+[附註]古者에 授官賜印〈綬〉하야 常佩於身이요 解官이면 解印綬러니 至唐에 始〈置〉職印하야 任其職者傳而用之하야 藏之以匣하고 當官者寘之於臥內하니라하니 門下大驚擾亂
이러니
籍所擊殺
이 數十百人
注+[頭註]不定數也니 自百以下或至八十九十也라이라 一府中
이 皆慴伏
하야 莫敢起
러라
梁
이 乃擧吳中兵
하고 使人收下縣
注+[頭註]會稽管下諸縣이라하야 得精兵八千人
하다
梁爲會稽守하고 籍爲裨將하야 徇下縣하니 籍이 是時에 年二十四러라 〈史項羽本紀〉
自立爲齊王
注+[附註]儋은 古齊王族也라 從弟榮及橫이 皆豪健得人하다 儋死에 子市立이러니 項羽徙田市하야 爲膠東王하고 而立齊將田都하야 爲齊王한대 榮怒하야 擊都走之하고 留市하야 不令之膠東하다 市畏羽하야 亡之膠東한대 榮又怒하야 追殺之하고하고 率兵東
하야 略定齊地
하다
봄에 이세二世가 동쪽으로 군현郡縣을 순행하고 여름에 함양咸陽에 이르러 조고趙高에게 이르기를 “사람이 세상에 사는 것은 비유하면 여섯 필의 기마驥馬를 달려 작은 틈을 지나가는 것과 같이 빠르다.
나는 귀와 눈의 좋아하는 바를 다하고 마음과 뜻의 즐거워하는 바를 다하여 나의 연수年壽(수명)를 마치고자 하니, 이것이 가可하겠는가?” 하니, 조고趙高가 말하였다.
“폐하께서 법을 엄하게 하고 형벌을 까다롭게 하여 선제先帝의 옛 신하들을 모두 제거하시고, 폐하께서 친애하고 믿는 사람으로 바꾸어 두신다면 베개를 높게 하고 마음을 펴고 영광과 즐거움을 누릴 것입니다.”
이세二世가 그의 말을 옳게 여기고 마침내 법률을 변경하여 되도록 더욱 까다롭고 심하게 하니, 대신大臣과 공자公子들이 죄가 있으면 번번이 죽음을 당하였다.
다시
아방궁阿房宮을 지을 적에
재사才士注+[釋義]재주가 있고 힘이 많은 용사이다. 5만 명을 징발해서
함양咸陽에 주둔하여 호위하게 하였다.
가을에 양성陽城 사람 진승陳勝과 양하陽夏 사람 오광吳廣이 기蘄 땅에서 기병起兵(군대를 일으킴)하였다.
이때
여좌閭左까지 징발하여
어양漁陽에 수자리 살게 할 적에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여좌閭左는 여리閭里의 왼쪽에 거하는 자들을 말한다. 진秦나라 때에 〈가난하여〉 부역을 면제받은 자들은 여좌閭左에 거하였는데, 이제 역역力役이 번거로워 여좌閭左에 있는 자들까지 모두 징발한 것이다. 일설一說에 거주하는 곳이 부유하고 강한 자를 우右라 하고 가난하고 약한 자를 좌左라 하니, 진秦나라가 부역과 수자리 살러 가는 자가 많아서 부유한 자들의 역역力役이 다하였기 때문에 가난한 자들까지 겸하여 징발한 것이라 한다. 수戍는 군대를 주둔시켜 지키는 것이다. 어양漁陽은 유주幽州의 어양군漁陽郡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성城이 단주檀州 밀운현密雲縣 남쪽 18리 되는 어수漁水의 북쪽에 있다.’ 하였으니, 지금의 계주薊州가 이곳이다.” 900명이
대택향大澤鄕注+[釋義]대택향大澤鄕은 패군沛郡 기현蘄縣에 있다. 에 주둔하고
진승陳勝과
오광吳廣이
注+[釋義]승勝은 성姓이 진陳이고 자字가 섭涉이며, 광廣은 성姓이 오吳이고 자字가 숙叔이다. 모두
둔장屯長注+[通鑑要解]둔屯은 영營과 같으니, 매 영營마다 장졸將卒을 두었다. 이 되었는데, 마침 날씨가 큰비가 내려 길이 통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이미 기한을 놓쳤음을 헤아리고는 마침내 도속徒屬을 불러 명령하기를 “공公 등이 모두 기한을 놓쳤으니, 마땅히 참형斬刑에 처해질 것이다.
또 장사壯士가 죽지 않으면 모르지만 죽는다면 큰 이름을 날려야 하니, 왕후王侯와 장상將相이 어찌 종자種子가 있겠는가?” 하니, 무리들이 모두 따랐다.
마침내 자기들이
공자公子 부소扶蘇와
항연項燕이라고 사칭하고는
注+[釋義]공자公子 부소扶蘇는 시황始皇의 장자長子이니, 지금 부소扶蘇가 훌륭한 명성이 있고 죄가 없는데 이세二世가 그를 죽여서 백성들이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였고, 항연項燕은 초楚나라의 훌륭한 장수이니 혹은 죽었다고 하고 혹은 도망하였다고 하였다. 지금 이 때문에 이들 두 사람을 사칭하여 천하天下의 창도倡導로 삼은 것이다. 단壇을 만들어 맹세하고
국호國號를
대초大楚라 칭하였다.
그리하여 진승陳勝이 스스로 서서 장군將軍이 되고 오광吳廣이 도위都尉가 되어 진陳 땅에 들어가 점거하였다. - 《사기史記 진섭세가陳涉世家》에 나옴 -
진陳 땅의 부로父老들이 진섭陳涉(陳勝)을 초왕楚王으로 세울 것을 청하자,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말하였다.
“진秦나라가 무도한 짓을 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하였으므로 장군(陳勝)이 만 번 죽을 계책을 내어 천하를 위해 잔인한 자들을 제거하려 하는데, 이제 처음으로 진陳 땅에 이르러 왕 노릇 하면 천하에 사심私心을 보이는 것이니, 원컨대 장군은 왕이 되지 말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서 사람을 보내어 육국六國의 후손을 세워 스스로 당黨을 심어 진秦나라에 적이 더 많아지게 하십시오.
적이 많아지면 〈
진秦나라의〉 힘이 분산되고
당여黨與(同類)가 많아지면
注+[釋義]여중與衆은 당여黨與가 많은 것이다. 우리 군대가 강해질 것이니, 포악한
진秦나라를 주벌하고
함양咸陽을 점거하여
제후諸侯들을 명령한다면
황제皇帝의
기업基業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진섭陳涉이 듣지 않고 스스로 서서 왕이 되니, 여러 군현郡縣들이 진秦나라 법을 괴롭게 여겨서 다투어 장리長吏(지방 장관)를 죽이고 진섭陳涉에게 호응하였다. - 《사기史記 진여전陳餘傳》에 나옴 -
알자謁者가 사자使者로 나갔다가 동방東方으로부터 와서 모반한 자가 있다고 아뢰자, 이세二世가 노하여 그 사자使者를 옥리獄吏에게 회부시켰다.
뒤에 사자使者가 이르자 상上(二世)이 물었는데, 대답하기를 “여러 도적들은 쥐가 도둑질하고 개가 도둑질하는 정도이니, 근심할 것이 못됩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진왕陳王(陳勝)이
진陳 땅 사람
무신武臣을
장군將軍으로 삼고
장이張耳와
진여陳餘를
좌우左右 교위校尉로 삼아
병졸兵卒 2천 명을 주어서
조趙 지방을 순행하게 하고,
注+[頭註]땅을 경략經略함을 순徇이라 하니, 순행하여 취함을 이른다. 주문周文을
注+[釋義]주문周文은 《사기史記》에는 주장周章으로 되어 있다. 시켜 서쪽으로
진秦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무신武臣 등이 지방을 순행하며 병력을 거두어 수만 명을 얻었다.
이에 무신武臣을 이름하여 무신군武信君이라 하고 조趙 지방의 30여 성을 함락시켰다.
8월에 무신군武信君이 스스로 서서 조왕趙王이 되었다.
- 《사기史記 장이진여전張耳陳餘傳》에 나옴 -
9월에
패군沛郡 사람
유방劉邦은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 패군沛郡 풍읍豐邑 사람으로 되어 있으니, 패沛는 지금의 서주현徐州縣이다. 한漢나라가 사수군泗水郡을 고쳐 패군沛郡이라고 하였으니 군郡의 치소治所는 상성相城이다.” 패군沛郡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하상下相 사람
항량項梁은
오현吳縣에서 군사를 일으키고,
적狄 땅 사람
전담田儋은
제齊 지방에서 군사를 일으켰다.
유방劉邦은
자字가
계季이니, 사람됨이 높은 코에 용의 얼굴(이마)이고,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준準은 코이니, 음은 준적準的의 준準이다. 안顔은 이마이니, 이를 일러 용안龍顔이라 한 것은 비범함을 나타낸 것이다.” 왼쪽 넓적다리에 72개의
흑자黑子(검은 사마귀)가
注+[附註]72개의 흑자黑子는 적제赤帝 72일의 수數이다. 목木‧화火‧토土‧금金‧수水가 각각 한 방위方位이니, 1년 360일을 사방四方으로 나누면 각각 90일을 얻고, 토土가 중앙에 거하여 사시四時의 마지막 달 각 18일을 아울러 얻으면 모두 72일을 이룬다. 그러므로 고조高祖에게 있는 72개의 흑자黑子는 화덕火德 72일에 응하는 징조이니, 흑자黑子는 곧 검은 사마귀이다. 있었으며 사람을 사랑하고 베풀기를 좋아하여
注+[釋義]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는 ‘관인애인寬仁愛人(관대하고 인자하여 사람을 사랑하였다.)’으로 되어 있다. 뜻이 활달하였으며 항상 큰 도량이 있어서 집안 사람의
산업産業(생업)을 일삼지 않았다.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이르기를 “일찍이 함양咸陽에서 부역할 적에 진秦나라 황제皇帝를 마음껏 구경하고 탄식하여 크게 한숨 쉬며 ‘아!
대장부는
注+[附註]주周나라 제도制度에 8촌寸을 척尺이라 하고 10척尺을 장丈이라 하였으니, 남자의 신장身長이 8척尺이므로 장부丈夫라고 하였다. 《시경소詩經疏》에는 “임금을 도와 나라를 다스릴 만한 덕德이 있어서 의지하고 믿을 만한 자를 일러 장부丈夫라 한다.” 하였고, 《주역周易》 사괘師卦의 장인丈人 주註에는 “존엄尊嚴함의 칭호이다.” 하였다.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한다.’ 했다.” 하였다.
선보單父 사람
여공呂公이
注+[釋義]선보單父는 제음濟陰 단부현單父縣으로 음이 선보이니, 지금 현縣이 제령로濟寧路 단주單州에 속하였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여공呂公은 사책史策에 그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다.” 하였고, 또 《상경相經》에 이르기를 “위魏나라 사람이니, 이름이 문文이고 자字가 숙평淑平이다.” 하였다. 사람의
상相을 보기를 좋아하였는데,
유계劉季의
장모狀貌(모습)를 보고 인하여 소중히 여기고 공경하여 말하기를 “
신臣이 많은 사람을 관상 보았으나
계季의
상相과 같은 이는 없었으니,
계季는
자중자애自重自愛하십시오.
신臣이
여식女息이
注+[頭註]식息은 낳는다는 의미이니, 식녀息女는 자기 소생所生의 딸이다. 있으니
기추箕帚(청소)하는
첩妾으로 삼아주기를 원합니다.” 하고 마침내
유계劉季에게 주니, 그녀가 바로
여후呂后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가 일찍이 말하기를 “
동남東南 지방에
천자天子의 기운이
注+[附註]《진서晉書》 〈천문지天文志〉에 “천자天子의 기운은 안은 붉고 밖은 누르니, 천자의 기운이 발하는 곳에는 마땅히 왕자王者가 있게 된다. 만약 천자天子가 가고자 하면 그곳에도 또한 이 기운이 먼저 나타나니, 혹은 성문城門이 은은하게 안개 속에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혹은 용마龍馬나 뒤섞인 색깔과 같아서 성대하여 하늘을 찌를 듯하기도 하니, 이는 모두 제왕帝王의 기운이다.” 하였다. 있다.” 하여, 이에 동쪽 지방을 유람해서 그 기운을 누르려 하였다.
유계劉季가 즉시 스스로 의심하고 도망해 숨어서
망현芒縣과
탕현碭縣의
산山과 늪 사이에 숨어 있었는데,
注+[釋義]탕碭은 음이 당이고, 또 다른 음은 탕이다. 망현芒縣은 임회군臨淮郡에 속하고 탕현碭縣은 양국梁國에 속하니, 두 현縣의 경계에 산과 늪이 험고하기 때문에 그 사이에 숨은 것이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귀덕부歸德府 진탕군秦碭郡이다. 여후呂后가 사람과 함께 찾으면 항상 찾아내곤 하였다.
계季가 괴이하게 여겨 물으니, 여후呂后가 말하기를 “계季가 머무는 곳 위에는 항상 구름 기운이 있기 때문에 따라가면 항상 계季를 찾아냅니다.” 하니, 패현沛縣 가운데의 자제들이 이 말을 듣고 따르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처음에
사상정장泗上亭長이 되어
注+[釋義]정亭은 멈추어 머무는 것으로 나그네가 숙식하는 곳이니, 지금의 관역館驛(驛舍)과 같다. 진秦나라의 법法에 10리里마다 1정亭이 있고 정亭에는 장長을 두어 도적을 감독하였으니, 사수정泗水亭은 〈패군沛郡의〉 패현沛縣 동쪽 100보 되는 곳에 있었다. 현縣을 위해
도형徒刑을 받은 무리를
여산驪山으로 호송하였는데,
注+[釋義] 이때에 시황始皇을 여산驪山에 장례하니, 군현郡縣에서 모두 도형徒刑(노역에 종사하는 형벌)을 받은 자를 보내어 토역土役을 하였다. 注+[頭註]도徒는 바로 도형徒刑이다. 무리들이 도중에 도망하는 자가 많았다.
도착할 때에 이르면 이들이 모두 도망할 것을 스스로 헤아리고는 마침내 호송하던 무리들을 풀어 놓아주며 말하기를 “공公들은 모두 떠나가라.
나 또한 여기서부터 가겠다.” 하니, 무리 가운데 장사壯士로서 따르기를 원하는 자가 10여 명이었다.
유계劉季가 술에 취하여
注+[釋義]피주被酒는 술에 사역 당함을 이른다. 밤에 작은 길을 따라 늪 가운데를 지나는데,
注+[釋義]경徑은 작은 길이니, 작은 길을 따라서 늪 가운데를 지나간 것이다. 일설一說에 경徑은 비스듬히 지나가는 것이라 한다. 큰 뱀이 길을 막고 있으므로
유계劉季가 검을 뽑아 뱀을 베었다.
뒷사람이 오다가 뱀이 있는 곳에 이르니, 늙은 할미가 밤에 통곡하며 말하기를 “내 아들은
백제白帝의 아들이다.
注+[頭註]진秦나라는 서융西戎에 거하여 소호少昊의 신神을 받들고 서주西疇를 만들어 백제白帝를 제사하였다.
변하여 뱀이 되어 길을 막고 있었는데, 이제
적제赤帝의 아들
注+[通鑑要解]적제赤帝는 한漢나라를 이르니, 한漢나라는 요堯임금의 전통을 이어 화덕火德이다.이 베었다.” 하고는 할미가 인하여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뒷사람이 이 사실을 유계劉季에게 알리니, 유계劉季는 마침내 마음에 홀로 기뻐하여 자부하였고 여러 따르는 자들이 날로 더욱 경외敬畏하였다.
진섭陳涉이 군사를 일으키자, 패령沛令(沛縣의 현령)이 패현沛縣을 가지고 호응하고자 하였다.
연주리掾主吏注+[頭註]조참曹參은 옥연獄掾이 되고 소하蕭何는 주리主吏가 되었으니, 부部를 나누고 국局을 나열하는 관리를 이른다. 사史는 문서를 관장하는 자이고 이吏는 사람을 다스리는 자이니, 사람을 다스리는 자의 마음은 하나를 주장하기 때문에 ‘이吏’자가 ‘일一’을 따르고 ‘사史’를 따른 것이다. 소하蕭何와
조참曹參이 말하기를 “
군君께서
진秦나라 관리가 되어 이제
진秦나라를 배반하고
패현沛縣의 자제를 거느리고자 하면 이들이 듣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군君께서 도망하여 밖에 있는 여러 사람들을 부르면 수백 명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니, 〈이들을〉 인하여 여러 사람들을 위협하면 사람들이 감히 듣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였다.
이에 번쾌樊噲로 하여금 유계劉季를 부르게 하니, 이때 유계劉季의 무리가 이미 수십 백 명이었다.
패령沛令이 후회하자
부로父老들이 마침내
자제子弟들을 거느리고 함께
패령沛令을 죽이고 문을 열어
유계劉季를 맞이하여 그를 세워서
패공沛公으로 삼았다.
注+[頭註]춘추시대春秋時代에 초楚나라가 왕王의 칭호를 참칭僭稱하여, 대부大夫들을 현縣의 공公에 많이 봉하였으니, 지금 고조高祖를 세워 패공沛公이라 함은 초楚나라의 제도를 따른 것이다.
기치旗幟를 모두 적색赤色으로 하였으니, 이는 뱀을 죽인 자가 적제赤帝의 아들이라고 말했기 때문이었다.
소하蕭何와 조참曹參 등이 유방劉邦을 위하여 패현沛縣의 자제子弟를 거두어 3천 명을 얻어서 제후에게 호응하였다. - 이상은 모두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옴 -
항량項梁이란 자는 초楚나라 장수 항연項燕의 아들이다.
일찍이 사람을 죽이고 형의 아들 항적項籍(項羽)과 함께 오중吳中에서 원수를 피하였다.
항적項籍은 젊었을 때에 글을 배웠으나 이루지 못하고 그만두고, 검술을 배웠으나 또 이루지 못하자 항량項梁이 노하였는데, 항적項籍이 말하기를 “글은 이름과 성을 기록하면 족할 뿐이요, 검술은 한 사람을 대적하는 것이니 배울 것이 못됩니다.
만 사람을 대적하는 병법兵法을 배우겠습니다.” 하였다.
이에 항량項梁이 마침내 항적項籍에게 병법을 가르쳤다.
항적項籍은 신장이 8척이 넘고 힘이 구정九鼎을 들었으며 재기才氣가 보통 사람보다 뛰어났다.
회계수會稽守 은통殷通은 진섭陳涉이 군사를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는 군대를 내어 진섭陳涉에게 호응하고자 하여 항량項梁을 장수로 삼았다.
항량項梁이 마침내
항적項籍으로 하여금 검을 뽑아
태수太守의 머리를 베게 하고 그
인수印綬를 차니,
注+[附註]옛날에 관직을 제수하면 인수印綬를 하사하여 항상 몸에 찼으며, 관직을 해임하면 인수印綬를 풀었는데, 당唐나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직인職印을 두어 그 직임을 맡은 자가 전해가면서 사용하여 갑 속에 보관하였으며 관직을 맡은 자가 이것을 와내臥內에 두었다. 문하門下가 크게 놀라 어지러웠다.
항적項籍이 쳐죽인 자가 수십 백 명이나 되니,
注+[頭註]수십백인數十百人은 정해지지 않은 수이니, 100부터 이하로 혹 80과 90에 이르는 것이다. 온
부중府中이 모두 두려워하고 복종하여 감히 일어나지 못하였다.
항량項梁이 마침내
오중吳中의 병력을 모두 동원하고 사람을 시켜
하현下縣(管下의
현縣)
注+[頭註]하현下縣은 회계會稽 관하管下에 있는 여러 현이다. 을 거두어 정예병 8천 명을 얻었다.
항량項梁은 회계수會稽守가 되고 적籍은 비장裨將이 되어 하현下縣을 순행하니, 적籍이 이때 24세였다. - 《사기史記 항우본기項羽本紀》에 나옴 -
스스로 서서
제왕齊王이 되고
注+[附註]전담田儋은 옛날 제齊나라의 왕족王族이었다. 종제從弟인 영榮과 횡橫이 모두 호건豪健하여 민심을 얻었다. 전담田儋이 죽자 아들 전시田市가 섰는데, 항우項羽가 전시田市를 옮겨 교동왕膠東王으로 삼고 제齊나라 장수 전도田都를 세워 제왕齊王으로 삼자, 전영田榮이 노하여 전도田都를 공격해서 패주시키고 전시田市를 만류하여 교동膠東으로 가지 못하게 하였다. 전시田市가 항우項羽를 두려워하여 교동膠東으로 도망가자 전영田榮이 다시 노하여 쫓아가 그를 죽이고 스스로 서서 제왕齊王이 되었다. 군대를 인솔하여 동쪽으로 가서
제齊 지방을 공략하여 평정하였다.
○ 주시周市가 위魏나라 공자公子 구咎를 세워 위왕魏王으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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