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是歲에 韓亡하니 凡二大國이요 小國凡十二國이라 〉
冬十月에 項王이 密使九江王布等으로 擊義帝하야 殺(弑)之江中하다
君臣은 天地之大義也니 臣之事君은 猶子之事父하야 亘古今而不可易이라
是以
로 하시니 豈非天地大變
이라 人理之所不容故
로 不忍與之竝立乎世
리오
籍이 世爲楚將하야 北面事之하니 義帝는 懷王之孫이라
項梁立以爲君하야 大義已定이어늘 籍이 何得以弑之乎아
況籍起自偏裨하야 矯殺卿子冠軍하고 宰割天下하야 率徇己私어늘 義帝不能誅籍하고 而籍反弑帝하니 其惡을 可勝道哉아
朱子綱目에 揭而書之曰 西楚霸王項籍이 弑義帝於江中이라하니 稱國稱爵稱名은 所以著籍强暴大逆之罪니
至是에 始無所容於天地之間이니 然後에 義兵可擧하야 人皆得而誅之矣라
陳餘迎趙王於代
하야 復爲趙王
注+[通鑑要解]陳餘擊張耳破走하고 迎趙王하니 王立餘爲代王이어늘 餘留傅趙王하고 而使夏說守代하니라하다
○ 漢王이 立韓襄王孫信하야 爲韓王하니 常將韓兵하야 從漢王이러라
○ 初
에 陽武人陳平
이 家貧好讀書
러니 里中社
注+[釋義]其里名庫上이라 蔡邕의 陳留東昏庫上里社碑云 惟斯庫里는 古陽武之〈戶〉牖鄕이니 陳平이 由此宰社하야 遂相漢高라하니라[頭註]社는 后土也니 使民祀之하야 春以祈穀하고 秋以報功이라 周制에 大夫與民族居百家以上이면 則共立一社러니 秦漢以來로는 雖非大夫라도 民二十五家면 則得立社하니라에 平
이 爲
하야 分肉食甚均
이어늘
陳孺子之爲宰여 平曰 嗟乎라 使平得宰天下라도 亦如是肉矣리라하다
及諸侯叛秦에 平이 事魏王咎於臨濟하야 爲太僕이러니 說魏王호되 不聽하고 人或讒之어늘 平이 亡去하다
後에 事項羽하야 拜爲都尉러니 後에 復杖劍歸漢하야 因魏無知하야 求見漢王한대
王이 與語而悅之하야 問曰 子之居楚에 何官고 曰 爲都尉니이다한대
是日
에 卽拜平爲都尉
하야 使爲參乘
注+[頭註]參은 一作驂이라 乘車之法은 尊者居左하고 御者居中하고 又一人處其右하야 以備傾側이라하고 典護軍
注+[頭註]典은 掌也요 護는 監領也라하다
諸將
이 盡讙
注+[釋義]讙은 譁也니 讙囂而議也라曰 大王
이 一日
에 得楚之亡卒
하야 未知其高下而卽與同載
하시고 反使監護
온여
○ 漢王
이 南渡平陰津
하야 至洛陽新城
한대 三老董公
이 遮說王
注+[釋義]三老는 見武帝紀라 橫道自言曰遮說라曰 臣聞順德者
는 昌
하고 逆德者
는 亡
이라하니
夫仁不以勇
注+[通鑑要解]以는 用也니 己有仁이면 天下歸之하야 可不用勇而天下自服이요 己有義면 天下奉之하야 可不用力而天下自定也라이요 義不以力
이니 大王
이 宜率三軍之衆
하사 爲之素服
하고 以告諸侯而伐之
하소서
天下共立義帝
러니 今項羽放殺之
注+[釋義]放은 逐也요 殺는 讀曰弑니 下之殺同이라하니
寡人
이 親爲發喪
하야 兵皆縞素
하고 悉發關中兵
하고 收
士
하야 南浮江漢以下
하야 願從諸侯王
注+[通鑑要解]諸侯王은 謂諸侯及王也라하야 擊楚之殺義帝者
라하다
自昔帝王之興에 憂天命之圮絶하야 而求與之保合하고 憫人心之陷溺하야 而思與之拯援하고 無所自容其力하야 不得已焉이어든 而見之兵革之間하니 亦豈其心之所欲哉아
이요 이요 요 이요 謂祭無益
하고 謂暴無傷
하며 謂己有天命
하고 이라
誅亂之兵不出이면 則仁義之統紀不明이요 仁義之統紀不明이면 則上下內外紊舛失敍하야 固將淪入禽獸夷狄而不自覺者리니 雖欲私一己而安歲月이나 詎可得乎아
使高帝不聞新城仁義之說하야 不爲洛陽縞素之擧하고 特以智力으로 與項氏相角하야 使幸而勝之면 則是吾與天下人民으로 亦獨以智力相尙耳니 智不足以相勝이면 則凡智於我者 孰不反面以相賊이며 力不足以相制면 則凡力於我者 孰不交臂以相戕이리오
自仁義之言一明
으로 使天下曉然知帝王統紀
가 如日月之不可掩
하고 自縞素之師一擧
로 使天下灼知上下定分
이 如天地之不可易
하야 三綱九疇
注+[附註]洪範九疇也니 曰五行, 曰敬用五事, 曰農用八政, 曰協用五紀, 曰建用皇極, 曰乂用三德, 曰明用稽疑, 曰念用庶徵, 曰享用五福, 威用六極이라가 幾斷而復續
하고 天命人心
이 欲紊而復正
이라
漢雖不純王道나 而猶培植扶持하야 至四百年之久하야 旣絶而復振하고 或欲竊取而猶不取者는 其由此也夫인저
天下苦秦하야 諸侯幷起하니 名其師者曰 誅無道秦이 可矣어니와 今秦已滅하고 諸侯各有分地어늘 而漢又起兵하니 雖曰項羽爲政不平이나 顧亦伸己私忿耳요 非義兵也러니
及董公獻言하야 漢王大臨然後에 項羽弑君之罪가 無所容於天地之間하야 而天下歸於漢王을 可坐而策矣라
故로 隨何가 陳此義而下九江하고 酈生이 陳此義而下全齊라
於是에 楚人이 背無所倚하고 右斷其臂하니 雖欲不亡이나 不可得矣니라
漢王이 以故로 得率諸侯兵凡五十六萬人하야 伐楚하다
彭越
이 將兵歸漢
이어늘 漢
이 遂入彭城
注+[頭註]羽都니 時羽北擊齊하니라하야 收其貨寶美人
하고 日置酒高會
注+[頭註]皆召尊爵故로 曰高會라 一說에 大會也라하니라러니
項王
이 聞之
하고 自以精兵三萬人
으로 至彭城
하야 大破漢軍 於
水
注+[釋義]在彭城靈壁縣하니 東入泗라 括地志에 睢水首受浚儀縣蕩渠水하고 東經臨慮縣하야 入泗過沛라 睢는 音雖라하니
漢軍이 爲楚所擠하야 卒十餘萬人이 皆入睢水하야 睢水爲之不流러라
圍漢王三
이러니 會
에 大風
이 從西北起
하야折木發屋
하고 揚沙石
하야 窈冥晝晦
하니 楚軍
이 大亂壞散
이어늘 漢王
이 乃得與數十騎遁去
하다
審
其從太公, 呂后
하야間行求漢王
이라가 反遇楚軍
하니 項王
이 常置軍中
하야 爲質
이러라
盤水可奉이나 而志難持요 六馬可調나 而氣難御니 使漢王이 於是時에 兢兢業業하여 如初入關中, 見羽鴻門이런들 則亦何至於敗哉아
今에 志不持而氣爲帥하야 狃於小勝하야 而逸欲生焉이라
且是行也
에 直欲破羽之國都歟
인댄 則宜亟還滎陽
하야 이 可也
요 若欲致羽而與戰歟
인댄 則宜分部諸將
하야 據險邀擊
이 可也
어늘
今乃淹留引日하야 肆志寵樂이로되 而群臣亦寂無諫者하니 豈良平諸公이 不在行歟아
自後世而觀高祖하면 攻守之心이 若出於一하야 未嘗有間이라
然이나 以史攷之하면 至咸陽則欲懷安하고 至彭城則已驕縱하고 天下旣平이면 則易敵愎諫하야 徑踰句注하야 幾陷不測이러니 自是以還으로 始畏兵厭功하야 不輕動妄作以禍天下하야 後世賴之라
吾嘗爲之說曰 高祖之能取天下는 本於彭城之敗요 而其能守天下也는 則自夫白登之圍라하노라
○ 漢王
이 問 吾欲
하노니 誰可與共功者
오 張良曰
九江王布
는 楚梟將
注+[釋義]布는 英布也라 梟는 言勇倢(捷)이라이어늘 與項王有隙
하고 彭越
은 與齊
하니 此兩人
을 可急使
요 而漢王之將
엔 獨韓信
이 可屬大事
하야 當一面
이니 卽欲捐之
인댄 捐之此三人
이면 則楚可破也
리이다
謁者隨何進曰 不審陛下所謂
로이다 漢王曰 孰能爲我
九江
하야 令之發兵倍楚
오
留項王數月
注+[頭註]言擧兵反楚면 則楚必留擊矣라이면 我之取天下 可以萬全
이리라
隨何曰 臣請使之호리이다 漢王이 使與二十人俱하다
○ 五月
에 漢王
이 至滎陽
하니 諸敗軍
이 皆會
하고 蕭何亦發關中老弱未傅者
注+[釋義]王氏曰 民年二十三이 爲正이니 一歲爲衛士하고 一歲爲材官騎士하야 習射御騎馳戰陣하고 年五十六이 爲衰老니 乃得免爲庶民하야 就田里라 今老弱未嘗傅者를 悉詣軍이니 謂未二十三爲弱하고 過五十六爲老라 傅는也니 未著名籍給公家徭役者를 悉發之하야 以至漢屯이니 所以補其空缺이라하야 悉詣滎陽
하니 漢軍
이 復大振
이러라
楚與漢戰滎陽南京, 索間
注+[釋義]京, 索은 二地名也니 京은 卽京城이요 索水는 在河南之滎陽이라할새 漢王
이 擊楚騎於滎陽東
하야 大破之
하니 楚以故
로 不能過滎陽而西
러라
漢
이 軍滎陽
하고 築甬道
注+[釋義]王氏曰 恐敵鈔掠輜重이라 故로 築垣墻如街巷하니 是爲甬道라 甬音踊이라하야 之河
하야 以取敖倉粟
注+[釋義]敖는 地名이니 在滎陽西北山上이라 括地志에 敖山은 在鄭州滎陽西十五里하니 秦置大(太)倉於此라 故名敖倉이라하다
○ 周勃等
이 言於漢王曰 陳平
이 雖美如冠玉
이나 其中
은 未必有也
注+[釋義]未必有也 飾冠以玉하면 光好外이나 中非所有라[頭註]陳平雖美如冠玉은 漢書에 作平雖美丈夫如冠玉耳라라
臣聞
호니 平居家時
에 盜其嫂
注+[通鑑要解]盜는 猶私也니 私奪嫂志而改適也라 嫂는 兄之妻也라하고 事魏不容
하야 亡歸楚
로되 不中
하고 又亡歸漢
이러니
今日
에 大王
이 令護軍
이어시늘 受諸將金
注+[通鑑要解]漢王이 召讓平한대 平曰 魏王不用臣故로 去하고 羽王不能信人故로 去러니 聞漢王能用人故로 來歸니이다 然이나 裸身而來하여 不受金이면 則無以資身이니이다 金具在하니 請封輸官하고 得乞骸骨하노이다하니 願王察之
하소서
漢王
이 한대 無知曰 臣所言者
는 能也
요 陛下所問者
는 行也
라
今有尾生, 孝己之行
注+[釋義]莊子曰 尾生이 與女子期於梁下러니 女子不來한대 水至不去하고 抱梁柱而死하니라 註에 一本作微生이라 或云 卽微生高也니 有信行이라 孝己는 殷高宗子니 有孝行하야 事親에 一夜五起러니 母早死어늘 高宗이 惑後妻之言하야 放之而死하니라이라도 而無益勝負之數
하니 陛下何暇用之乎
잇가
楚漢相距에 臣進奇謀之士하니 顧其計誠足以利國家事耳니
○ 八月
에 漢王
이 如滎陽
하야 命蕭何守關中
한대 計關中戶口
하야轉漕調兵
注+[頭註]調는 謂計發之也라하야 以給軍
하야 未嘗乏絶
이러라
高帝征伐하여 多在外어늘 何守關中하여 營緝根本하니 漢高所以得天下者는 以關中根本固故也니라
○ 漢王
이 使酈食其
로 緩
注+[頭註]徐言이니 引比喩也라往說魏王豹
하고 且召之
호되 豹不聽
이라
於是에 漢王이 以韓信, 灌嬰, 曹參으로 俱擊魏할새 漢王이 問食其호되 魏大將은 誰也오 對曰 柏直이니이다
王曰 是
는 口尙乳臭
注+[頭註]言其少不經事하고 弱不任事하야 若未離乳保之懷者라니 安能當韓信
이리오
曰 是는 秦將馮無擇의 子也니 雖賢이나 不能當灌嬰이리라
○ 遂進兵
한대 魏王
이 盛兵蒲坂
注+[釋義]在魏爲垣〈曲〉이요 入秦爲蒲坂이요 漢爲河東邑이라하야 以塞臨晉
이어늘
信
이 乃益爲
하야 陳船欲渡臨晉
하고 而伏兵從夏陽
하야 以木
渡軍
注+[釋義]罌은 謂之木柙이니 縛罌缶以渡라 罌缶는 謂甁之大腹小口者라하야 襲安邑
한대
魏王豹驚
하야 引兵迎信
이어늘 九月
에 信
이 擊虜豹
하야 滎陽
하고 悉定魏地
하다
○ 韓信이 旣定魏하고 使人請兵三萬하야 願以北擧燕趙하고 東擊齊하고 南絶楚粮道하고 西與漢王會於滎陽이라하야늘 漢王이 許之하고 乃遣張耳하야 與俱하다
병신(B.C.205) - 서초西楚 2년年, 한漢나라 2년이다.
○ 이 해에 한韓나라가 망하니, 대국大國이 모두 2개국이고 소국小國이 모두 12개국이다. -
겨울 10월에 항왕項王이 은밀히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 등으로 하여금 의제義帝를 공격하게 하여 강 가운데에서 시해하였다.
- 《사기史記 경포전黥布傳》과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에 나옴 -
[新增]내가 살펴보건대 윤씨尹氏(尹起莘)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군주와 신하는 천지의 큰 의리義理이니, 신하가 군주를 섬김은 자식이 부모를 섬기는 것과 같아서 고금에 걸쳐 바꿀 수 없는 것이다.
이 때문에 진항陳恒의 일을 공자孔子께서 이미 벼슬을 그만두었는데도 목욕재계하고서 토벌할 것을 청하신 것이니, 〈신하가 군주를 시해함은〉 어찌 천지간의 큰 변고여서 사람의 도리에 용납될 수 없는 것이므로 차마 그와 함께 세상에 서서 살 수 없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항적項籍이 대대로 초楚나라의 장수가 되어 북면北面하여 섬겼으니, 의제義帝는 회왕懷王의 손자이다.
항량項梁이 그를 세워 군주로 삼아서 대의大義가 이미 정해졌는데, 항적項籍이 어떻게 그를 시해한단 말인가.
더구나 항적項籍이 편비偏裨(副將)로부터 일어나 의제義帝의 명령을 사칭하여 경자관군卿子冠軍을 살해하였고 천하를 자기 마음대로 분할하여 자신의 사사로운 뜻을 따랐는데, 의제義帝가 항적項籍을 죽이지 못하고 항적項籍이 도리어 의제義帝를 시해하였으니, 그 악惡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게시하여 쓰기를 ‘서초패왕西楚霸王 항적項籍이 의제義帝를 강 가운데서 시해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나라를 칭하고 작위를 칭하고 이름을 칭함은 항적項籍의 강폭强暴하여 대역무도大逆無道한 죄를 드러낸 것이니,
그의 죄가 여기에 이르러 비로소 천지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는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의병義兵을 일으켜 사람들이 모두 그를 죽일 수 있는 것이다.
은밀히 강 가운데에서 공격한다고 하여 과연 천하 사람들을 속일 수 있었겠는가.”
진여陳餘가 습격하여 상산常山을 격파하니, 상산왕常山王 장이張耳가 패하여 한漢나라로 달아났다.
진여陳餘가
조왕趙王(趙歇)을
대국代國에서 맞이하여 다시
조왕趙王으로 삼았다.
注+[通鑑要解]진여陳餘가 장이張耳를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조왕趙王 헐歇을 맞이하니, 조왕趙王은 진여陳餘를 세워 대왕代王으로 삼았는데, 진여陳餘는 남아서 조왕趙王의 사부師傅가 되고 하열夏說로 하여금 대代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 한왕漢王이 한韓나라 양왕襄王의 손자孫子인 신信을 세워 한왕韓王으로 삼으니, 항상 한韓나라 군대를 거느리고 한왕漢王을 따랐다.
처음에
양무陽武 사람
진평陳平이 집이 가난하였으나 독서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마을 안의
사제社祭에
注+[釋義]그 마을 이름은 고상리庫上里이다. 채옹蔡邕의 진류陳留 동혼고상리東昏庫上里 사비社碑에 이르기를 “이 고상리庫上里는 옛날 양무陽武의 호유향戶牖鄕이니, 진평陳平이 이로 말미암아 사제社祭에 재宰가 되어서 마침내 한漢나라 고조高祖를 도왔다.” 하였다. [頭註]社는 후토后土이니, 백성들로 하여금 제사하게 하여, 봄에는 곡식이 잘 되기를 기원하고 가을에는 곡식을 거두어들인 것에 감사하였다. 주周나라 제도에 대부大夫가 백성들과 함께 거하여 100가호家戶 이상이 되면 함께 한 사社를 세웠는데, 진秦‧한시대漢時代 이후로는 비록 대부大夫가 아니더라도 백성들이 25가호家戶가 되면 사社를 세울 수 있었다. 진평陳平이
재宰가 되어서 고기와 음식을 나누어 주기를 매우 균등하게 하였다.
진유자陳孺子가 재宰 노릇 함이여.” 하니, 진평陳平이 말하기를 “아, 만일 내가 천하에 재상이 되더라도 또한 이 고기와 같이 균평하게 하겠다.” 하였다.
제후들이 진秦나라를 배반하자 진평陳平이 위왕魏王 구咎를 임제臨濟에서 섬겨 태복太僕이 되어 위왕魏王을 설득하였으나 듣지 않았으며, 어떤 사람이 그를 참소하자 진평陳平이 도망하여 떠났다.
뒤에 항우項羽를 섬겨 도위都尉에 임명되었는데, 뒤에 다시 검을 짚고 한漢나라로 귀의하여 위무지魏無知를 통해서 한왕漢王을 만나 볼 것을 요구하였다.
한왕漢王은 진평陳平과 함께 말해 보고는 기뻐하여 묻기를 “그대가 초楚나라에 있을 때에 무슨 벼슬을 하였는가?” 하니, “도위都尉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한왕漢王은 이날 즉시
진평陳平을
도위都尉로 임명하여
참승參乘을
注+[頭註]참參은 일본一本에는 참驂으로 되어 있다. 수레를 타는 법은 높은 자가 왼쪽에 있고, 말 모는 자가 중앙에 있고, 또 한 사람이 오른쪽에 있어서 수레가 한쪽으로 기우는 것에 대비한다. 하게 하고 군사들을 맡아
감호監護하게 하였다.
注+[頭註]전典은 관장함이고, 호護는 감독하고 거느리는 것이다.
이에 여러 장수들이 모두 떠들며
注+[釋義]환讙은 시끄러움이니, 진환盡讙은 시끄럽게 떠들면서 비난하는 것이다. 말하기를 “대왕이 어느 날
초楚나라에서 도망해 온 병졸을 얻어 그 신분의
고하高下도 알지 못하고서 곧바로 그와 수레를 함께 타시며, 도리어 그로 하여금
장자長者들을
감호監護하게 하시는구나.” 하였다.
한왕漢王이 이 말을 듣고 더욱더 진평陳平을 총애하였다.
-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나옴 -
한왕漢王이 남쪽으로
평음平陰 나루를 건너
낙양洛陽의
신성新城에 이르니,
삼로三老인
동공董公이 길을 가로막고 왕을 설득하기를
注+[釋義]삼로三老는 《한서漢書》 〈무제기武帝紀〉에 보인다. 길을 가로막고 스스로 말하는 것을 차설遮說라 한다. “신이 들으니 순한
덕德을 간직한 자는 창성하고 거스르는
덕德을 가진 자는 망한다고 하였습니다.
군대를 명분 없이 내면 일이 진실로 이루어지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적이 된 이유를 밝혀야 적이 비로소 복종한다.’고 한 것입니다.
항우項羽가 무도한 짓을 해서 그 군주를 추방하여 시해하였으니, 천하의 역적입니다.
인仁은 용맹으로 하지 않고
注+[通鑑要解]이以는 씀이니, 자기에게 인仁이 있으면 천하가 돌아와 용맹을 쓰지 않아도 천하가 스스로 복종하고, 자기에게 의로움이 있으면 천하가 받들어 주어서 힘을 쓰지 않아도 천하가 스스로 안정되는 것이다. 의義는 힘으로 하지 않으니, 대왕은 마땅히
삼군三軍의 무리를 거느리고
의제義帝를 위하여
소복素服을 입고 제후들에게 고하여 정벌하소서.” 하였다.
이에 한왕漢王이 의제義帝를 위하여 상喪을 발표하고 제후들에게 고하기를
“천하가 함께
의제義帝를 세웠는데 이제
항우項羽가 추방하여 시해하였으니,
注+[釋義]방放은 쫓아냄이요, 살殺는 시弑로 읽으니 아래의 살殺도 같다.
과인寡人이 친히
의제義帝를 위해
상喪을 발표하여 군사들에게 모두 흰옷을 입히고
관중關中의 병력을 총동원하고
삼하三河의 군사를 거두어 남쪽으로
강한江漢에 배를 띄워 내려가서
注+[通鑑要解]제후왕諸侯王은 여러 후侯와 왕王을 이른다. 여러
후侯와
왕王을 따라
초楚나라의
의제義帝를 시해한 자를 공격하려 한다.” 하였다.
“예로부터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 천명天命이 끊어짐을 우려하여 그와 더불어 보합保合(변동 없이 계속됨)하기를 구하고, 인심人心이 〈악惡에〉 빠짐을 민망히 여겨 그와 더불어 구원할 것을 생각하고, 스스로 그 힘을 용납하는 바가 없어 부득이하면 전쟁의 사이에 나타냈으니, 또한 어찌 그 마음에 하고자 하는 바였겠는가.
도道를 배반하고 덕德을 무너뜨리고 업신여기고 태만하여 스스로 어진 체하면 삼묘三苗를 정벌하지 않을 수 없고, 오행五行을 업신여기고 삼정三正을 폐기하면 유호有扈를 정벌하지 않을 수가 없고, 비로소 천기天紀를 어지럽히면 이에 희화羲和를 정벌하는 군대가 있었고, 상제上帝를 속이면 이에 명조鳴條의 공격이 있었고, 제사함은 유익함이 없다고 말하고 포악함이 나쁘지 않다고 말하며 자기가 천명天命을 소유했다고 말하고 경敬을 굳이 행할 것이 없다고 말하면 이에 목야牧野의 전쟁이 있었다.
빈邠 땅을 떠나도 오랑캐의 성냄이 끊이지 않으면 채미采薇의 수역戍役(전투하는 군대)을 보내지 않을 수 없고,
불공不恭한 침략자에 대한 노여움이 막 일어나면 침략하러 가는 군대를 막지 않을 수가 없고,
오랑캐가 침입하여 내지內地에 정돈해 사는 화禍가 매우 성하면 유월六月의 정벌을 빨리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난을 토벌하는 군대를 출동시키지 않으면 인의仁義의 통기統紀가 밝혀지지 못하고, 인의仁義의 통기統紀가 밝혀지지 못하면 상하上下와 내외內外가 문란하여 순서를 잃어서 진실로 장차 금수禽獸와 이적夷狄의 경지에 빠져들어 가면서도 스스로 깨닫지 못할 것이니, 비록 자기 한 몸을 사사로이 하여 세월을 편안히 보내고자 하나 어찌 될 수 있겠는가.
만일 고제高帝가 신성新城의 인의仁義의 말을 듣지 못하여 낙양洛陽에서 소복素服을 입히는 조처를 하지 않고, 다만 지혜와 힘을 가지고 항씨項氏와 서로 경쟁하여 다행히 이겼더라면 이는 내(高帝)가 천하의 인민人民과 더불어 또한 다만 지혜와 힘을 가지고 서로 숭상하는 것일 뿐이니, 지혜가 서로 이길 수 없으면 무릇 나보다 지혜로운 자가 어느 누가 얼굴을 돌려 서로 대적하지 않겠으며, 힘이 서로 제압할 수 없으면 무릇 나보다 힘이 센 자가 어느 누가 팔뚝을 교차하여 서로 해치지 않겠는가.
이렇게 되면 화란禍亂이 오는 것이 어찌 다함이 있겠는가.
인의仁義의 말이 한 번 밝혀짐으로부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제왕帝王의
통기統紀가 해와 달처럼 가릴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하고,
소복素服을 입은 군대를 한 번 일으킴으로부터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상하上下의 정해진 분수가 하늘과 땅처럼 바꿀 수 없음을 분명히 알게 해서,
삼강三綱과
구주九疇가
注+[附註]구주九疇는 《서경書經》 〈홍범洪範〉의 구주九疇이니, 첫 번째는 오행五行이고, 두 번째는 공경하되 오사五事로써 함이요, 세 번째는 농사農事에 팔정八政을 씀이요, 네 번째는 합함을 오기五紀로써 함이요, 다섯 번째는 세움을 황극皇極으로써 함이요, 여섯 번째는 다스림을 삼덕三德으로써 함이요, 일곱 번째는 밝힘을 계의稽疑로써 함이요, 여덟 번째는 상고하기를 서징庶徵으로써 함이요, 아홉 번째는 향享함을 오복五福으로써 하고 위엄을 보이기를 육극六極으로써 하는 것이다. 거의 끊어질 뻔하다가 다시 이어지고
천명天命과
인심人心이 문란해지려 하다가 다시 바로잡혔다.
한漢나라가 비록 순수한 왕도王道는 아니었으나 오히려 북돋워 심고 부지하여 4백 년의 오램에 이르러서 이미 끊어졌다가 다시 떨쳐지고, 혹 도둑질하여 취하고자 하였으나 오히려 취하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천하 사람들이 진秦나라를 괴롭게 여겨서 제후諸侯들이 함께 일어났으니 그 군대를 이름하여 무도한 진秦나라를 토벌한다고 한 것은 괜찮지만, 지금 진秦나라가 이미 멸망하고 제후들이 각기 영지領地가 있는데 한漢나라가 또다시 군대를 일으켰으니 비록 항우項羽가 정사를 공평하지 않게 했기 때문이라고 말하나, 돌아보건대 자신의 사사로운 분노를 풀려고 했을 뿐이요, 의로운 군대가 아니었다.
그런데 동공董公이 말을 아뢰어 한왕漢王이 크게 발상發喪한 뒤에야 군주를 시해한 항우項羽의 죄가 천지의 사이에 용납될 곳이 없어서 천하가 한왕漢王에게 돌아올 것임을 앉아서도 미루어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므로 수하隨何가 이러한 의리를 말하여 구강왕九江王을 항복시켰고, 역생酈生이 이러한 의리를 말하여 제齊나라의 전 국토를 항복시킨 것이다.
이에 초楚나라 사람이 등 뒤에는 의지할 곳이 없고 그 오른팔이 잘렸으니, 비록 멸망하지 않기를 바라나 될 수가 없었다.”
항왕項王이 비록 한漢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했다는 말을 들었으나 마침내 제齊나라를 격파한 뒤에 한漢나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한왕漢王이 이 때문에 무릇 제후의 병력 56만 명을 거느리고 초楚나라를 정벌하게 되었다.
팽월彭越이 병력을 인솔하고
한漢나라에 귀의하자,
한漢나라가 마침내
팽성彭城에
注+[頭註]팽성彭城은 항우項羽가 도읍한 곳이니, 이때 항우項羽가 북쪽으로 제齊나라를 공격하러 갔었다. 들어가서 그 보화와 미인을 거두고 날마다 술자리를 베풀고 크게 모여 잔치하였다.
注+[頭註]높은 작위爵位가 있는 사람을 모두 불렀기 때문에 고회高會라 한 것이다. 일설一說에는 손님을 크게 모으는 것이라고 하였다.
항왕項王이 이 말을 듣고 정예병 3만 명을 거느리고
팽성彭城에 이르러
한군漢軍을
수수睢水에서
注+[釋義]수수睢水는 팽성彭城 영벽현靈壁縣에 있으니, 동쪽으로 사수泗水로 들어간다. 《괄지지括地志》에 “수수睢水는 처음에 준의현浚儀縣 낭탕거蒗蕩渠의 물을 받아 동쪽으로 임려현臨慮縣을 경유해서 사수泗水로 들어가 패현沛縣을 지나간다.” 하였다. 수睢는 음이 수이다. 대파하였다.
한漢나라 군사들은 초楚나라 군사들에게 밀려서 병졸 10여만 명이 모두 수수睢水로 들어가니, 수수睢水가 이 때문에 흐르지 못하였다.
한왕漢王을 세 겹으로 포위하였는데, 마침 큰 바람이 서북쪽으로부터 일어나 나무가 부러지고 지붕이 날아가며 돌과 모래가 날려 캄캄해져서 낮인데도 어두우니, 초楚나라 군사들이 크게 혼란하여 무너져 흩어졌으므로 한왕漢王이 마침내 수십 명의 기병과 도망갈 수 있었다.
심이기審食其가 태공太公과 여후呂后를 따라 샛길로 가서 한왕漢王을 찾다가 도리어 초나라 군사를 만나니, 항왕項王이 항상 이들을 군중에 두어 인질로 삼았다.
- 이는 《한서漢書》의 구句를 인용한 것이고, 이상은 모두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나옴 -
“쟁반의 물은 받들 수 있으나 뜻은 지키기가 어렵고 여섯 필의 말은 제어할 수 있으나 기운은 제어하기 어려우니, 만일 한왕漢王이 이때에 조심하고 두려워하여 처음 〈진秦나라를 격파하고〉 관중關中에 들어갔을 때와 홍문연鴻門宴에서 항우項羽를 만났을 때와 같이 했더라면 또한 어찌 패망함에 이르렀겠는가.
지금 뜻을 잡아 지키지 않고 기운을 장수로 삼아서 〈마음이 동요당하여〉 작은 승리에 도취되어 안일과 욕심이 생겨났다.
또 이번에 군대를 출동할 때에 곧바로 항우項羽의 국도國都를 격파하려고 했다면 마땅히 빨리 형양滎陽으로 돌아와서 주병主兵을 거느리고 객병客兵을 기다리는 것이 옳았을 것이요, 만약 항우項羽를 불러들여 싸우려고 했다면 마땅히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해서 험한 요새를 점거하고 요격邀擊하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
그런데 이제 도리어 지체하고 날짜를 끌면서 영화와 향락에 뜻을 두었으나 여러 신하들이 조용하여 간하는 자가 없었으니, 장량張良과 진평陳平 등 제공諸公들이 어찌 항렬行列에 있지 않았던가.
“후세後世의 입장에서 고조高祖를 살펴보면 공격하고 수비하는 마음이 하나에서 나와서 일찍이 간격이 있지 않은 듯하다.
그러나 역사책을 가지고 고찰해 보면 함양咸陽에 이르러서는 편안한 마음을 품고자 하였고, 팽성彭城에 이르러서는 이미 교만하고 방종하였으며,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적을 하찮게 여기고 간언을 듣지 않아서 곧바로 구주句注를 넘어가 거의 측량할 수 없는 화에 빠질 뻔하였는데, 이로부터 이후로 비로소 전쟁을 두려워하고 공功을 싫어해서 경거망동하여 천하에 화禍를 끼치지 아니하여 후세가 이에 힘입었다.
내가 일찍이 말하기를 ‘고제高帝가 천하를 취한 것은 팽성彭城의 패전敗戰에서 근본하였고 천하를 지킨 것은 백등白登의 포위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였다.”
한왕漢王이 묻기를 “내 함곡관函谷關 이동以東 지방을 남에게 떼어 주어서 버린 것과 같이 하고자 하노니, 누가 더불어 공을 함께 할 만한 자인가?” 하자, 장량張良이 말하였다.
“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는
초楚나라의 용맹한 장수인데
注+[釋義]구강왕九江王 포布는 영포英布이다. 효梟는 용감하고 민첩함을 이른다. 항왕項王과 틈이 있고,
팽월彭越은
제齊나라와 함께
양梁나라 땅에서 배반하였으니, 이 두 사람을 급히 부릴 수 있으며,
한왕漢王의 장수 중에는 오직
한신韓信만이 큰 일을 맡겨 한 방면을 담당하게 할 만하니, 만일 한 지방을 떼어 주고자 하신다면 이 세 사람에게 떼어 주신다면
초楚나라를 격파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한왕漢王이 좌우의 신하에게 이르기를 “더불어 천하의 일을 계획할 만한 자가 없다.” 하였다.
알자謁者인 수하隨何가 아뢰기를 “폐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을 자세히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니, 한왕漢王이 말하기를 “누가 나를 위하여 구강九江에 사신가서 구강왕九江王으로 하여금 군대를 내어 초楚나라를 배반하게 할 수 있겠는가?
항왕項王을 몇 달 동안만 묶어 두면
注+[頭註]군대를 일으켜 초楚나라를 배반하면 초楚나라가 반드시 머물러 공격할 것임을 말한 것이다. 내가 천하를 취하는 것이 만전을 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였다.
수하隨何가 아뢰기를 “신이 사신으로 가겠습니다.” 하니, 한왕漢王이 수하隨何로 하여금 20명과 함께 가게 하였다.
5월에
한왕漢王이
형양滎陽에 이르니, 모든 패한 군사들이 다 모였고
소하蕭何 또한
관중關中의 노약자로서
병적兵籍에 올리지 않은 자들을 징발하여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백성의 나이가 23세면 정정正丁이라 하니, 1년 동안 위사衛士가 되고 1년 동안 재관材官 기사騎士가 되어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히고 전진戰陣을 달리며, 나이 56세가 되면 쇠로衰老라 하니, 비로소 부역을 면제받아 서민庶民이 되어 전리田里로 나아간다. 이제 노약자로서 병적兵籍에 올리지 않은 자를 다 군에 나오게 한 것이니, 23세가 못된 자를 약弱이라 하고 56세가 넘은 자를 노老라고 함을 이른다. 부傅는 붙임이니 병적兵籍에 올려 공가公家의 요역徭役을 맡기지 않은 자를 다 동원해서 한漢나라 진영에 이르게 한 것이니, 공결空缺(결원)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다. 모두
형양滎陽에 이르게 하니,
한漢나라 군대가 다시 크게 떨쳤다.
초楚나라가
한漢나라와
형양滎陽의 남쪽
경성京城과
색수索水 사이에서
注+[釋義]경京과 삭索은 모두 지명이니, 경京은 곧 경성京城이고 색수索水는 하남河南의 형양滎陽에 있다. 싸웠는데,
한왕漢王이
초楚나라
기병騎兵을
형양滎陽 동쪽에서 공격하여 대파하니,
초楚나라가 이 때문에
형양滎陽을 지나 서쪽으로 오지 못하였다.
한漢나라가
형양滎陽에 군대를 주둔하고
용도甬道를 쌓아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적들이 치중輜重을 약탈할까 염려하였기 때문에 담장을 쌓아 골목길과 같이 만든 것이니, 이것을 용도甬道라 한다. 용甬은 음이 용이다.” 황하黃河에 연결하여
오창敖倉의 곡식을
注+[釋義]오敖는 지명이니 형양滎陽 서북쪽 산 위에 있다. 《괄지지括地志》에 “오산敖山은 정주鄭州 형양滎陽 서쪽 15리 지점에 있으니, 진秦나라가 이곳에 태군太君을 두었기 때문에 오창敖倉이라 이름한 것이다.” 하였다. 가져갔다.
주발周勃 등이
한왕漢王에게 말하기를 “
진평陳平이 비록 아름답기가
관옥冠玉 같으나 그 속은 반드시 있는 것이 없습니다.
注+[釋義]冠을 옥으로 꾸미면 광채의 아름다움이 겉으로 드러나지만 속에 반드시 아름다움이 있는 것은 아니다. [頭註]陳平雖美如冠玉은 《한서漢書》 〈진평전陳平傳〉에 “平雖美丈夫 如冠王耳[陳平이 비록 아름다운 장부이나 관옥冠玉과 같을 뿐이다.]”로 되어 있다.
신이 들으니
진평陳平이 집에 있을 때에 그
형수兄嫂를 개가시켰고,
注+[通鑑要解]도盜는 사私와 같으니, 형수의 수절하려는 뜻을 사사로이 빼앗아 개가改嫁시킨 것이다. 수嫂는 형의 아내이다. 위魏나라를 섬기다가 용납되지 못하자
초楚나라로 도망갔으나 맞지 않자 또 도망하여
한漢나라로 돌아왔다 합니다.
오늘날 대왕이 그로 하여금 군사들을
감호監護하게 하셨는데 여러 장수들의
금金을 받아먹었으니,
注+[通鑑要解]왕이 진평陳平을 불러서 꾸짖으니, 진평陳平이 대답하기를 “위왕魏王은 신臣을 써 주지 않았기 때문에 신이 떠났고, 항왕項王은 사람을 믿지 못하기 때문에 떠났는데, 한왕漢王은 사람을 잘 쓴다고 하였기 때문에 한漢나라에 귀의한 것입니다. 그런데 맨몸으로 떠나왔으므로 금金을 받지 않으면 살 수가 없었습니다. 금金이 모두 있으니, 청컨대 봉함하여 관청으로 실어 보내고 벼슬을 그만둘 것을 청합니다.” 하였다. 원컨대 왕은 이것을 살피소서.” 하였다.
한왕漢王이 위무지魏無知를 불러 꾸짖으니, 위무지魏無知는 말하기를 “신이 말한 것은 재능이고 폐하께서 따지는 것은 행실입니다.
지금
미생尾生과
효기孝己와 같은 훌륭한 행실이
注+[釋義]《장자莊子》에 “미생尾生이 여자女子와 다리 아래에서 만나기로 약속하였는데 여자女子가 오지 않자 홍수가 져서 물이 불어나는데도 떠나지 않고 다리 기둥을 안고 죽었다.” 하였는데, 주註에 “일본一本에는 미생微生으로 되어 있다.” 하였다. 혹자는 이르기를 “곧 미생고微生高이니, 신실한 행실이 있었다.” 하였다. 효기孝己는 은殷나라 고종高宗의 아들이니, 효행孝行이 있어 어버이를 섬김에 하룻밤에도 다섯 번 일어났는데, 어머니가 일찍 죽자 고종高宗이 후처後妻의 말에 미혹되어 추방해서 죽게 하였다. 있더라도
승부勝負의
수數에는 유익함이 없으니, 폐하께서 어느 겨를에 행실이 훌륭한 선비를 쓸 수 있겠습니까?
초楚나라와 한漢나라가 서로 대치함에 신이 기이한 계책을 내는 인재를 올렸으니, 다만 그 계책이 진실로 국가의 일에 이로운가를 따질 뿐입니다.
형수를 개가시키고 금을 받아먹은 것을 어찌 의심할 것이 있겠습니까?”
-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나옴 -
8월에
한왕漢王이
형양滎陽에 가면서
소하蕭何에게 명하여
관중關中을 지키게 하였는데,
소하蕭何는
관중關中의
호구戶口를 헤아려 수레와 뱃길로 식량을 수송[轉漕]하고 군대를 조달해서
注+[頭註]조調는 계산하여 징발함을 이른다. 군에 공급하여 일찍이 떨어진 적이 없었다.
“소하蕭何가 한漢나라를 도와 한 왕조王朝의 규모를 정하였으니, 또한 크고 원대하도다.
고제高帝가 정벌하기 위해 외지에 있을 때가 많았는데 소하蕭何가 관중關中을 지키면서 근본을 잘 다스렸으니, 한漢나라 고제高帝가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관중關中의 근본이 견고하였기 때문이다.”
한왕漢王이
역이기酈食其로 하여금 잘 비유하여
注+[頭註]완협緩頰은 천천히 말하는 것이니, 부드러운 낯빛으로 비유하여 말함을 이른다. 위왕魏王 표豹에게 가서 설득하게 하고 또 불렀으나
위왕魏王 표豹가 듣지 않았다.
이에 한왕漢王이 한신韓信과 관영灌嬰, 조참曹參으로 함께 위魏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한왕漢王이 역이기酈食其에게 묻기를 “위魏나라 대장은 누구인가?” 하니, 대답하기를 “백직柏直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사람은 입에서 아직도 젖내가 나니,
注+[頭註]유취乳臭는 어려서 일을 경험하지 못하고 약하여 일을 맡을 수가 없어서, 유모乳母와 보모保姆의 품을 아직 떠나지 못한 자와 같음을 말한 것이다. 어찌
한신韓信을 당해내겠는가.
기병장은 누구인가?” 하니, “풍경馮敬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사람은 진秦나라 장수 풍무택馮無擇의 아들이니, 비록 잘하나 관영灌嬰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다.
보병의 장군은 누구인가?” 하니, “항타項它입니다.” 하였다.
왕이 “이 사람은 조참曹參을 당해내지 못할 것이니, 나는 걱정할 것이 없다.” 하였다.
마침내 진군하니,
위왕魏王이 병력을
포판蒲坂에
注+[釋義]포판蒲坂은 위魏나라에서는 원곡垣曲이라 하고, 진秦나라에서는 포판蒲坂이라 하고, 한漢나라에서는 하동읍河東邑이라 하였다. 많이 진열하여
임진臨晉 나루를 막았다.
한신韓信이 마침내 더욱
의병疑兵을 만들어 배를 앞에 늘어놓아
임진臨晉 나루를 건너려고 하는 것처럼 위장하고, 군사를 숨겨
하양夏陽을 따라 나무통으로 군대를 도하시켜
注+[釋義]앵罌은 나무궤짝(나무통)을 이르니, 앵부罌缶를 묶고서 물을 건너는 것이다. 앵부罌缶는 배는 크고 주둥이는 작은 항아리를 이른다. 안읍安邑을 습격하였다.
위왕魏王 표豹가 놀라 군대를 이끌고 한신韓信을 맞아 싸웠는데, 9월에 한신韓信이 위왕魏王 표豹를 공격하여 사로잡아 역마驛馬로 압송하여 형양滎陽에 보내고 위魏나라 땅을 모두 평정하였다.
- 《한서漢書 고제기高帝紀》와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옴 -
한신韓信이 위魏나라를 평정하고는 사람을 시켜 3만 명의 병력을 청해서 북쪽으로 연燕나라와 조趙나라를 함락하고 동쪽으로 제齊나라를 공격하고 남쪽으로 초楚나라의 군량 수송로를 끊고 서쪽으로 한왕漢王과 형양滎陽에서 만나기를 원한다고 하니, 한왕漢王이 이를 허락하고 마침내 장이張耳를 보내어 함께 가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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