丁酉
注+[通鑑要解]是歲에 韓信定趙魏하니 西楚, 衡山, 燕, 齊, 韓 凡七國也라〈西楚三年
이요 漢三年
이라
冬十月
에 韓信, 張耳 以兵數萬
으로 東擊趙
하니 趙王及成安君陳餘聞之
하고 聚兵 井
口
注+[釋義]陘은 山名이니 在常山이라하야 號二十萬
이라하다
廣武君李左車 說成安君曰 韓信, 張耳 乘勝遠鬪하니 其鋒을 不可當이라
臣聞千里餽粮
이면 士有飢色
하고 樵蘇
注+[釋義]樵는 取薪也요 蘇는 取草也라後爨
이면 師不
라하니
今井陘之道 車不得方軌하고 騎不得成列하야 行數百里하니 其勢糧食이 必在其後라
願足下假臣奇兵三萬人
하야 從間路
하야 絶其輜重
注+[原註]行者之資糧曰輜重이라하고
足下
는深溝高壘
하야 勿與戰
하시면 不十日
하야 而兩將之頭
를 可致於麾下
注+[釋義]麾는 大將之旗也니 所以指麾라 正義曰 通作戲라요
否則必爲二子所擒矣리이다 成安君이 常自稱義兵하야 不用詐謀奇計하다
韓信
이 使人間視
注+[釋義]謂間諜窺視而得知라하야 知其不用廣武君策
하고 大喜
하야
乃敢引兵遂下
할새 未至井陘口三十里
하야 止舍
注+[釋義]止舍句絶이니 舍는 猶息也라하고
夜半
에 傳發
注+[釋義]傳令軍中하야 使發이라하야 選輕騎輕騎
注+[頭註]人馬不帶甲이라二千人
하야 人持一
하고 從間道
하야 望趙軍
注+[釋義]從間道望은 謂令從間道向前하야 望見陳餘軍營卽(往)[住]이라하고 誡曰
趙見我走면 必空壁逐我하리니 若이 疾入趙壁하야 拔趙幟하고 立漢赤幟하라
令裨將傳餐
注+[釋義]裨는 音皮니 將之(編)[偏]副라 史記에 餐作飱이니 註에 音餐이라 小飯曰飱이니 謂立駐傳飱而食하고 待破趙後에 方乃大食也라曰 今日
에 破趙會食
호리라 諸將
이 皆莫信
하고 佯應曰 諾
다하다
乃使萬人으로 先行出背水陣하니 趙軍이 望見大笑러라
에 信
이 建大將旗鼔
하고 鼔行出井陘口
하니 趙開壁擊之
라
大戰良久
에 信與張耳 佯棄鼓旗
하고 走水上軍
注+[釋義]走는 疾趨也라 綿蔓水는 一名阜將이요 一名回星이니 自幷州流入井陘界라 按韓信背水陣의 陷之死地 卽此水라한대 趙果空壁
하야 爭漢旗鼓
하고 逐信, 耳
라
信耳已入水上軍
하야 軍皆殊死戰殊死戰
注+[原註]殊는 絶也니 謂決意必死라하야 不可敗
요 信
의 所出奇兵二千
이 遂馳入趙壁
하야 皆拔趙旗
하고 立漢赤幟
하다
見而大驚
하야 兵亂遁走
어늘 漢兵
이 夾擊
하야 大破趙軍
하고 斬成安君
水上
注+[釋義]泜水는 出恒山하니 在趙州贊皇縣界라 泜音邸라 按地理志에 音脂爲是라하고 禽(擒)趙王歇
하다
○ 諸將이 問信曰 兵法에 右倍山陵하고 前左水澤이어늘 今者에 將軍이 令臣等으로 反背水陣以勝은 何也잇고 信曰
此在兵法
注+[通鑑要解]孫子曰 前有高山하고 後有大水면 進不得하고 退有碍者라이어늘 顧諸君不察耳
라
兵法에 不曰陷之死地而後生하고 置之亡地而後存乎아
且信이 非得素拊循士大夫也라 此所謂驅市人而戰이니
信이 募生得廣武君者면 予千金하리라하더니 有縛致麾下者어늘
信이 解其縛하고東鄕(向)坐師事之하고 問曰 僕이 欲北攻燕하고 東伐齊하노니 若何而有功고
廣武君曰 亡國之大夫는 不可以圖存이요 敗軍之將은 不可以語勇이니이다
信曰 百里奚居虞而虞亡하고 之秦而秦霸하니 非愚於虞而智於秦也라
用與不用과 聽與不聽爾니 向使成安君이 聽子計런들 僕亦禽矣리라 廣武君曰
智者千慮에 必有一失이요 愚者千慮에 必有一得이라
然이나 欲擧倦敝之兵하야 頓之燕堅城之下하시니 欲戰不得이요 攻之不拔이라
今爲將軍計
컨대 莫如按甲休兵
하야 鎭撫趙民
하고 遣辯士
하야 奉
하면 燕必聽從
하리니
燕已從이어든 而東臨齊하시면 雖有智者라도 亦不知爲齊計矣리이다
韓信
이 從其策
하야 發
使燕
注+[原註]燕王은 臧荼라하니 燕
이 從風而靡
注+[通鑑要解]靡는 順也, 偃也라 東風則草靡而西하고 西風則草靡而東하니 在風所向하야 草爲之靡라러라
漢王
이 方踞牀(床)
注+[釋義]謂伸其脚而坐于床이라洗足〈史記, 漢書
에 竝無足字
라〉
이라가 召布入見
한대 布大怒悔來
하야 欲自殺
이러니
及出就舍
에 帳御飮食從官
이 皆如漢王居
注+[釋義]御飮食者는 御用飮食也라 正義曰 漢王이 以布先分爲王이라하야 恐其自尊大라 故로 峻禮하야 令布折服하고 已而요 美其帷帳하고 厚其飮食하고 多其從官하야 以悅其心하니 權道也라라 布又大喜過望
이러라
漢王이 與酈食其로 謀撓楚權할새 食其曰 陛下能復立六國之後하사 德義已行하시면 楚必斂衽而朝하리이다 漢王曰 善하다
趣(促)刻印
하야 先生
이 因行佩之
注+[頭註]授與六國하야 使佩之也라하라하다
食其未行에 張良이 從外來謁이어늘 漢王이 方食이라가 曰 客有爲我計撓楚權者라하고 具以酈生語로 告良한대
請借前箸
注+[釋義]求借所食之箸하야 用以指畫也라 或解云 借前世湯武箸(著)明之〈事〉하야 以籌度今時之不若也라하소서
其不可者八이니 天下游士 離親戚, 棄墳墓, 去故舊하야 從陛下游者는 徒欲日夜望咫尺之地어늘
今復立六國之後면 天下游士各歸事其主하리니 陛下誰與取天下乎잇가
漢王
이 輟食吐哺
注+[釋義]哺는 謂食在口中者라하고 罵曰 竪儒幾敗迺公事
注+[釋義]幾는 殆니 近也라 迺는 綱目에 作而하니 迺公은 漢王自謂也라로다하고 令趣銷印
하다
張耳陳餘 說陳涉以復立六國하야 自爲樹黨하고 酈生亦說漢王이로되 而得失異者는
陳涉은 未能專天下之地也니 所謂取非其有以與人하야 行虛惠而獲實福也요
立六國은 於漢王에 所謂割己之有以資敵하야 設虛名而受實禍也라
故로 曰權不可預設이요 變不可先圖요 與時遷移하야 應物變化가 設策之機也라하니라
○ 漢王이 謂陳平曰 天下紛紛하니 何時定乎아 陳平曰
項王
의 骨鯁
注+[頭註]隨事敢刺鯁하야 不從容也라 一說에 直言難受가 如骨之咈咽也라之臣
은 亞父, 鍾 離
注+[釋義]亞는 次也니 羽尊之次於父니 猶齊威(桓)公稱管仲曰仲父라 鍾離는 複姓이요 昩은 名也라 字從日從末하니 莫葛反이라, 龍
, 周殷之屬
으로 不過數人耳
니
大王
이 誠能出捐數萬斤金
하야 行反間
注+[頭註]以計離間敵人曰反間이라하야 間其君臣
하야 以疑其心
이면 項王
의 爲人
이 意(疑)忌信讒
하야 必內相誅
하리니 漢
이 因擧兵而攻之
면 破楚必矣
리이다
漢王曰 善타하고 乃出黃金四萬斤하야 與平하야 資所爲하고 不問其出入하다
宣言 鍾離昩等이 爲項王將하야 功多矣나 然終不得裂地而王일새
○ 夏
에 楚圍漢王於滎陽
注+[釋義]縣名이라 屬河南하니 古虢國也니 今鄭州是라急
이어늘 漢王
이 請和
하야 割滎陽以西者爲漢
이러니 亞父勸羽
하야 急攻滎陽
하니 漢王
이 患之
러라
○ 項王
이 使
至漢
이어늘 陳平
이 使爲
具
하야 擧進
注+[釋義]王氏曰 凡用牲繫養曰牢니 詩傳에 牛曰大牢요 羊曰小牢라 擧進은 謂擧鼎俎來也라이라가
見楚使
하고 卽佯驚曰 吾以爲亞父使
러니 乃項王使
라하고 復持去
하야 以惡草具進
注+[釋義]草는 粗也라하다
亞父聞項王疑之하고 乃怒曰 天下事大定矣로니 君王은 自爲之하소서
願請骸骨
注+[頭註]人臣이 委身以事君하야 身非我有라 故於其乞退에 謂之請骸骨이라하노이다하고 歸
라가 未至彭城
하야 疽發背而死
하니라
紀信
이 乃乘王車
하고 曰 食盡
하야 漢王
이 降楚
라한대 楚皆呼萬歲
하고 之城東觀
이라
○ 漢王
이 出滎陽
하야 至成皐
注+[釋義]縣名이라 屬河南하니 戰國鄭虎牢關也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洛州汜水縣西南二里라하야 入關收兵
하야 欲復東
이러니 轅生
이 說漢王
호되 深壁勿戰
하야 令滎陽, 成皐間
으로 且得休息
하라한대
漢王
이 從其計
하야 出軍
,
間
하야 與黥布
로 行收兵
하다
羽聞漢王在宛하고 果引兵來어늘 漢王이 堅壁不與戰하다
○ 彭越이 爲漢將하야 游兵擊楚어늘 羽乃使終公守成皐하고 而自東擊彭越이러니
漢王이 破終公하고 復軍成皐라 羽已破走彭越하고 乃引兵西하야 拔滎陽城하고 遂圍成皐하니
漢王
이 逃
注+[釋義]逃는 輕身而忽出也라 又史記本紀에 作漢王跳하니 註에 跳音逃니 走也라하야 獨與滕公共車
하야 出
하다
○ 北渡河
하야 宿小修武
注+[釋義]地志에 小修武在河內修武縣이라 括地志에 今懷州獲嘉 古修武也라傳舍
하고 晨
에 自稱漢使
라하고 馳入趙壁
하니 張耳, 韓信
이 未起
라 卽其臥內
하야 奪其印符
하고 以麾
로 召諸將易置之
러니
漢王이 旣奪兩人軍하고 卽令張耳循行하야 備守趙地하고 拜韓信爲相國하야 收趙兵未發者하야 擊齊하다
楚遂拔成皐하고 欲西러니 漢이 使兵距之鞏하야 令其不得西하다
○ 漢王
이 欲捐成皐以東
하야 屯鞏, 洛
注+[釋義]鞏은 縣名이라 屬河南하니 周考王이 封威公子惠公之少子於鞏하고 號爲東周惠公이 卽此라 洛은 在今河南府洛陽縣東北하니 故城在焉이라하야 以拒楚
러니 酈生曰
王者는 以民爲天하고 民은 以食爲天하나니 夫敖倉은 天下轉輸久矣라 藏粟이 甚多어늘
楚人이 拔滎陽하야 不堅守敖倉하고 乃引而東하니 此는 天所以資漢也라
願足下
는 急進兵
하야 收取滎陽
하야 據敖倉之粟
하고 塞成皐之險
하고 杜太
之路
하고 距蜚狐之口
注+[釋義]蜚는 古文飛字라 地〈道〉記云 上黨郡恒山北行四百五十里하면 得恒山岌하니 號蜚狐口라 今蔚州蜚狐縣이 北入嬀州懷戎縣하니 卽古蜚狐口라하고 守白馬之津
注+[釋義]白馬津은 卽黎陽津也라 白馬城은 衛故之曹邑也니 今濬州 卽漢黎陽縣이라 州東一里五步에 有黎陽津하니 亦名白馬津이라하야 以示諸侯形制
注+[頭註]猶言形勝이니 得形勢之勝便이라 地形險固故로 能勝人이니 以地形而制敵也라之勢
하시면 則天下知所歸矣
리이다
諸田宗彊하야 負海, 岱하고 阻河, 濟하니 雖遣數萬師라도 未可以歲月破也라
臣이 請得奉明詔說齊王하야 使爲漢而稱東藩호리이다
王이 疾先下하면 齊國을 可得而保어니와 不然이면 危亡을 可立而待리이다
先是
에 齊聞韓信且東兵
하고 使華無傷, 田解
로 將重兵
하고 屯歷下
하야 以距漢
이러니 及納酈生之言
하야 遣使
하야 與漢平
注+[頭註]平은 成也, 和也니 言成其和也라하고 乃罷歷下守戰備
하다
○ 韓信이 引兵東할새 未度(渡)平原하야 聞酈食其已說下齊하고 欲止러니 辯士蒯
徹
注+[原註]徹은 避武帝名하야 史改徹作通이라이 說信曰 將軍
이 受詔擊齊
어늘 而漢
이 獨發
下齊
하니 寧有詔止將軍乎
아
且酈生
은 一士
로 伏軾
하야 掉三寸之舌
注+[釋義]食其本傳에 伏作馮하고 讀作憑하니 據也라 伏亦憑也라 軾은 註見周威烈王二十三年必式이라 索隱曰 舌은 在口하야 長三寸이니 象斗玉衡이라하야 下齊七十餘城
이어늘 將軍
은 以數萬衆
으로 歲餘
에 乃下趙五十餘城
하니
爲將數歲에 反不如一豎儒之功乎아하니 信이 然之러라
정유(B.C.204)
注+[通鑑要解]이 해에 한신韓信이 조趙‧위魏를 평정하였으니, 조趙‧위魏에 서초西楚‧형산衡山‧연燕‧제齊‧한韓을 합하여 모두 7개국이다. -
서초西楚 3년,
한漢 3년이라.
겨울 10월에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수만의 병력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조趙나라를 공격하니,
조왕趙王과
성안군成安君 진여陳餘가 이 말을 듣고
정형井陘 어구에
注+[釋義]형陘은 산명山名이니, 상산常山에 있다. 군대를 집결시키고 20만 대군이라고 하였다.
광무군廣武君 이좌거李左車가 성안군成安君을 설득하기를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승세를 타고 원정遠征하니, 그 예봉을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신이 들으니 천 리에서 군량을 수송하여 군사들을 먹이면 군사들이 굶주린 기색이 있고, 나무하고 풀을 벤 뒤에
注+[釋義]초樵는 땔나무를 채취하는 것이고, 소蘇는 풀을 채취하는 것이다. 밥을 지어 먹으면 군사들이 배가 든든하지 못하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정형井陘의 길이 좁아서 수레가 나란히 지나갈 수 없고 기병騎兵이 대열을 이룰 수 없으면서 수백 리를 가니, 형편상 양식이 반드시 그 후미에 있을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께서 신에게
기병騎兵 3만 명을 빌려주시어 샛길을 따라 그
치중대輜重隊를
注+[原註]길 가는 자의 물자와 양식을 실은 것을 치중輜重이라고 한다. 끊게 하고,
족하足下는
해자垓子를 깊게 파고
보루堡壘를 높이 쌓아 저들과 더불어 싸우지 않으시면 10일이 못되어 두 장수의 머리를 휘하에 바칠 수 있을 것이요,
注+[釋義]휘麾는 대장大將의 깃발이니, 지휘指麾하는 것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희戲와 통용된다.” 하였다.
그렇지 않으면 반드시 두 사람에게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입니다.” 하니, 성안군成安君이 항상 스스로 의로운 군대라 칭하여 속임수와 기이한 계책을 쓰지 않았다.
한신韓信이 사람을 시켜 몰래 엿보게 하여,
注+[釋義]간시間視는 간첩이 몰래 엿보고 아는 것을 이른다.광무군廣武君의 계책을 쓰지 않음을 알고는 크게 기뻐하였다.
이에 감히 병력을 인솔하고 마침내 내려갈 적에
정형井陘 어구에서 30리가 못되는 곳에 이르러 멈춰 휴식하고,
注+[釋義]지사止舍에서 구句를 떼니, 사舍는 식息과 같다.
한밤중에 전령을 내려
注+[釋義]군중軍中에 전령을 내려 출발하게 한 것이다. 군대를 동원하여 정예
기병騎兵注+[頭註]경기輕騎는 사람과 말이 갑옷을 입지 않은 것이다. 2천 명을 뽑아 사람마다 붉은 깃발을 하나씩 잡게 하고 샛길을 따라 가서
조趙나라 군영을 바라보고
注+[釋義]종간도망從間道望은 샛길을 따라 앞으로 향하여 진여陳餘의 군영軍營를 바라보고 즉시 중지함을 이른다. 경계하기를
“조趙나라 군사들은 우리가 달아나는 것을 보면 반드시 성벽을 비우고 우리를 추격할 것이니, 너희들은 빨리 조趙나라 성벽으로 들어가서 조趙나라의 깃발을 뽑아버리고 우리 한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꽂아라.” 하였다.
그리고
비장裨將들로 하여금 주먹밥을 전달하게 하고
注+[釋義]비裨는 음이 피(비)이니, 장수의 편부偏副(副將)이다. 《사기史記》에는 찬餐이 손飱으로 되어 있으니, 주註에 음이 손이라고 하였다. 간단하게 밥을 먹는 것을 손飱이라고 하니, 서서 주먹밥을 전달하여 먹고 조趙나라를 격파하기를 기다린 뒤에 비로소 크게 먹음을 이른다. 말하기를 “오늘
조군趙軍을 격파하고 회식하겠다.”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믿지 않고 건성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하였다.
마침내 1만 명으로 하여금 먼저 행군하여 나가 배수진을 치게 하니, 조趙나라 군사들이 이것을 바라보고 크게 비웃었다.
새벽에 한신韓信이 대장군大將軍의 깃발과 북을 세우고 북을 치며 행군하여 정형井陘 어구를 나가니, 조趙나라가 성벽을 열고 공격하였다.
한동안 크게 싸우다가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거짓으로 북과 깃발을 버리고 물가에 주둔해 있는 군대로 도망하니,
注+[釋義]주走는 빨리 달리는 것이다. 〈물가는 면만수綿蔓水이니〉 면만수綿蔓水는 일명一名 부장阜將이고 일명一名 회성回星이니, 병주幷州로부터 정형井陘의 경계로 흘러 들어간다. 살펴보건대 한신韓信이 배수진背水陣을 쳐서 사지死地에 빠지게 한 것이 바로 이 물이다. 조趙나라가 과연 성벽을 비우고서
한漢나라의 북과 깃발을 다투어 취하고
한신韓信과
장이張耳를 추격하였다.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이미 물가에 있는 군대로 들어가서 군사들이 모두 결사적으로 싸워
注+[原註]수殊는 절대로이니, 수사전殊死戰은 반드시 죽기를 각오함을 이른다. 패배시킬 수가 없었으며,
한신韓信이 내보낸
기병奇兵 2천 명이 마침내 달려가서
조趙나라 성벽으로 들어가
조趙나라 깃발을 모두 뽑아버리고
한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웠다.
조趙나라 군사들이 이미 한신韓信 등을 잡지 못하고 성벽으로 돌아가니, 성벽에는 모두 한漢나라 깃발이 꽂혀 있었다.
이것을 보고 크게 놀라 군사들이 혼란하여 도망가자,
한漢나라 군대가 협공하여
조군趙軍을 대파하고
성안군成安君을
지수泜水 가에서
注+[釋義]지수泜水는 항산恒山에서 나오니, 조주趙州 찬황현贊皇縣 경계에 있다. 지泜는 음이 저이다. 살펴보건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음이 지라고 한 것이 옳다. 목 베고
조왕趙王 헐歇을 사로잡았다.
여러 장수들이 한신韓信에게 묻기를 “병법兵法에 오른쪽과 뒤에는 산과 구릉을 두고 앞과 왼쪽에는 수택水澤을 두라 하였는데, 지금 장군이 신들로 하여금 도리어 배수진背水陣을 치게 하여 승리함은 어찌된 것입니까?” 하니, 한신韓信이 말하였다.
“이는 병법에 나와 있는데,
注+[通鑑要解]《손자병법孫子兵法》에 “앞에 높은 산이 있고 뒤에 큰 물이 있으면 나아갈 수가 없고 물러갈 때에 장애가 된다.” 하였다. 다만 제군들이 살피지 못하였을 뿐이다.
병법에 ‘사지死地에 빠진 뒤에 살고 망할 땅에 놓인 뒤에 보존된다.’고 말하지 않았는가.
또 내(信)가 평소에 어루만져 복종하게 한 군사와 대부大夫(軍官)를 얻은 것이 아니니, 이는 이른바 ‘장꾼을 몰아서 싸운다.’는 것이다.
이들에게 살 땅을 주면 모두 달아날 것이니, 어떻게 쓰겠는가?”
한신韓信이 현상懸賞하기를 광무군廣武君을 산 채로 잡는 자가 있으면 천금千金을 주겠다고 하였는데, 포박하여 휘하로 데려온 자가 있었다.
한신韓信은 그의 포박을 풀고 동향東向하여 앉혀 스승으로 섬기며 묻기를 “내가 북쪽으로 연燕나라를 공격하고 동쪽으로 제齊나라를 정벌하고자 하노니, 어떻게 하면 공이 있겠는가?” 하니,
광무군廣武君은 대답하기를 “망한 나라의 대부大夫는 보존함을 도모할 수 없고 패한 군대의 장수는 용맹을 말할 수 없습니다.” 하고 사양하였다.
한신韓信이 말하기를 “백리해百里奚가 우虞나라에 있을 때에는 우虞나라가 망하였고 진秦나라에 가서는 진秦나라가 패자霸者가 되었으니, 우虞나라에서는 어리석고 진秦나라에서는 지혜로웠던 것이 아니다.
써 주느냐 써 주지 않느냐와 들어주느냐 들어주지 않느냐일 뿐이니, 지난번에 만일 성안군成安君이 그대의 계책을 따랐더라면 나 또한 사로잡혔을 것이다.” 하니, 광무군廣武君이 말하였다.
“지혜로운 자가 천 번을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 실수할 때가 있고, 어리석은 자가 천 번 생각하면 반드시 한 번 맞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광부狂夫의 말도 성인聖人은 채택하는 것입니다.
장군이 위왕魏王 표豹를 사로잡고 성안군成安君을 목 베어 위엄이 천하에 진동하였습니다.
그러나 지치고 피폐한 병졸을 동원하여 연燕나라의 견고한 성 아래에 주둔하고자 하시니, 싸우고자 하여도 될 수 없고 공격하여도 함락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제 장군을 위하여 계책을 세워보건대 군대를 주둔하고 병사들을 쉬게 하여 조趙나라 백성들을 진무하고, 말 잘하는 변사辯士를 보내어 지척咫尺(짧은)의 글을 받들어 올리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하면 연燕나라가 반드시 들어 따를 것입니다.
연燕나라가 이미 따르거든 그때 동쪽으로 제齊나라에 임하시면 비록 지혜로운 자가 있더라도 또한 제齊나라를 위한 계책을 알지 못할 것입니다.”
한신韓信이 그의 계책을 따라
사자使者를 내어
연燕나라
注+[原註]연왕燕王은 이름이 장도臧荼이다. 에 보내니,
연燕나라가 풀이 바람 부는대로 쓰러지듯이 따랐다.
注+[通鑑要解]미靡는 따르는 것이고 눕는 것으로, 동쪽에서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져 서쪽으로 눕고, 서쪽에서 바람이 불면 풀이 쓰러져 동쪽으로 누워, 바람이 부는대로 풀이 쓰러지는 것이다.
-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옴 -
수하隨何가 구강九江에 이르니, 구강왕九江王 경포黥布가 명령을 받들고 한漢나라에 이르렀다.
한왕漢王이 막
상床에 걸터앉아
注+[釋義]거상踞牀은 다리를 펴고 평상에 앉음을 이른다. 발을 씻다가 - 《
사기史記》와 《
한서漢書》에는 모두
족자足字가 없다. -
경포黥布를 불러 들어와 보게 하니,
경포黥布가 크게 노하여 온 것을 후회해서 자살하고자 하였다.
그런데 나와서 자기 관사로 나아가자, 휘장과 사용하는 물품과 음식 및 딸린 관원이 모두
한왕漢王의 거처와 같으므로
注+[釋義]어음식御飮食은 어용御用(왕이 사용하는 물품)과 음식이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한왕漢王은 경포黥布가 먼저 분봉分封을 받아 왕이 되었다 해서, 그가 스스로 높은 체하고 큰 체할까 염려하였다. 그러므로 예禮를 엄하게 하여 경포黥布로 하여금 기세를 꺾고 굴복하게 하였으며, 이윽고 유장帷帳을 아름답게 하고 음식을 후하게 하고 딸린 관원을 많게 하여 그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이니, 권도權道이다.” 하였다. 경포黥布는 또 기대했던 것보다 더함을 크게 기뻐하였다.
한漢나라가 구강왕九江王에게 군사를 더 주어 함께 성고成皐에 주둔하였다.
초楚나라가 자주 한漢나라의 용도甬道를 침탈하니, 한漢나라 군대가 식량이 떨어졌다.
한왕漢王이 역이기酈食其와 함께 초楚나라 권력을 흔들 것을 도모하였는데, 역이기酈食其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다시 육국六國의 후손을 세워 덕德과 의義가 이미 행해지면 초楚나라가 반드시 옷깃을 여미고 조회할 것입니다.” 하니, 한왕漢王이 말하기를 “좋다.
빨리 인장을 새겨 선생이 인하여 가서
육국六國에게 주어 차게 하라.”
注+[頭註]패지佩之는 육국六國에게 인장印章을 주어서 차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역이기酈食其가 길을 떠나기 전에 장량張良이 밖에서 와서 뵙자, 한왕漢王이 막 밥을 먹고 있다가 말하기를 “객 중에 나를 위하여 초楚나라 권세를 흔들 것을 계획한 자가 있다.” 하고 역생酈生의 말을 장량張良에게 자세히 고하였다.
“이 계책대로 하면 폐하의 일이 틀어질 것입니다.
청컨대 앞의 젓가락을 빌려주소서.
注+[釋義]청차전저請借前箸는 밥을 먹고 있는 젓가락을 빌려 이것을 사용해서 지화指畫할 것을 요구한 것이다. 혹자는 해석하기를 “전대前代의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의 밝게 드러난 일을 빌려서 지금은 그렇지 않음을 헤아린 것이다.” 한다.
그 불가不可한 것이 여덟 가지이니,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들이 친척과 헤어지고 조상의 산소를 버리고 고구故舊들을 버리고서 폐하를 위하여 따라다니는 것은 한갓 밤낮으로 지척의 땅을 바라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제 다시 육국六國의 후손을 세우면 천하의 유세하는 선비들이 각각 돌아가 자기 군주를 섬길 것이니, 폐하께서는 누구와 더불어 천하를 취하시겠습니까?
진실로 객의 계책을 따른다면 폐하의 일은 틀어지고 말 것입니다.”
한왕漢王이 식사를 중지하고 먹던 밥을 뱉고
注+[釋義]포哺는 밥이 입속에 있음을 이른다. 꾸짖어 말하기를 “
수유竪儒(못난 선비)가 하마터면 너의
공公(漢王)의 일을 그르칠 뻔하였다.”
注+[釋義]기幾는 거의이니 가까움이다. 내迺는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이而로 되어 있으니, 내공迺公은 한왕漢王 자신을 이른다. 하고는 빨리 인장을 녹여 없애도록 하였다.
“장이張耳와 진여陳餘가 진섭陳涉을 설득하여 다시 육국六國을 세워서 스스로 당黨을 만들게 하였고 역생酈生 또한 한왕漢王을 설득하였으나 득실得失이 다른 것은,
진섭陳涉은 천하의 땅을 아직 독점하지 못하였으니 이른바 ‘자기의 소유가 아닌 것을 취하여 남에게 주어서 헛된 은혜를 행하여 실제 복福을 얻는다.’는 것이요,
육국六國을 세움은 한왕漢王에게 있어서 이른바 ‘자신의 소유를 떼어 적에게 주어서 헛된 이름을 베풀어 실제 화禍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권도權道는 미리 만들 수가 없고 변變은 미리 도모할 수가 없고, 때에 따라 바뀌고 변해서 사물에 대응하여 변화하는 것이 계책을 내는 기틀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한왕漢王이 진평陳平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분분하니 어느 때에나 안정되겠는가?” 하니, 진평陳平이 말하였다.
“
항왕項王의 강직한
注+[頭註]골경骨鯁은 일을 따라 감히 풍자하고 바른말을 하여 조용하지 않은 것이다. 일설一說에 “직언을 받아들이기 어려움이 뼈가 목에 걸린 것과 같은 것이다.” 하였다. 신하는
아보亞父(范增)와
종리말鍾離昩注+[釋義]아亞는 다음이니 아보亞父는 항우項羽가 그를 아버지에 버금가게 높인 것이니,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관중管仲을 일컬어 중부仲父라고 칭한 것과 같다. 종리鍾離는 복성複姓이고 말昩은 이름이다. 글자가 일자日字를 따르고 말자末字를 따랐으니, 莫葛反(말)이다.‧
용저龍且‧
주은周殷 등의 몇 사람에 불과합니다.
대왕이 진실로 수만 근의 금을 내시어
반간反間을
注+[頭註]계책으로 적을 이간시킴을 반간反間이라 한다. 행하여 저들
군신간君臣間을 이간질해서 그 마음을 의심하게 하면
항왕項王의 사람됨이 의심하고 시기하고 참소하는 말을 믿어서 반드시 안으로 서로 죽일 것이니,
한漢나라가 인하여 군대를 일으켜 공격하면
초楚나라를 틀림없이 격파할 것입니다.”
한왕漢王이 “좋다.” 하고 마침내 황금 4만 근을 내어 진평陳平에게 주어서 하는 일에 이용하게 하고 그 출납을 묻지 않았다.
진평陳平이 금을 가지고 초楚나라에 반간反間을 많이 놓아
‘종리말鍾離昩 등이 항왕項王의 장수가 되어 공이 많은데도 끝내 땅을 분봉分封받아 왕이 되지 못하였으므로
한漢나라와 더불어 하나가 되어서 항씨項氏를 멸하고 그 땅을 나누어 왕 노릇 하고자 한다.’는 말을 퍼뜨리니,
항우項羽가 과연 종리말鍾離昩 등을 믿지 않았다.
-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나옴 -
여름에
초楚나라가
한왕漢王을
형양滎陽에서
注+[釋義]형양滎陽은 현縣의 이름이다. 하남군河南郡에 속하였으니, 옛날 괵국虢國으로 지금 정주鄭州가 이곳이다. 포위하여 위급하자,
한왕漢王이 화친할 것을 청하여 〈
형양滎陽 이동以東은
초楚나라에게 떼어 주고〉
형양滎陽 이서以西를 떼어
한漢나라 영토가 되게 하였는데,
아보亞父가
항우項羽에게 권하여 급히
형양滎陽을 공격하게 하니,
한왕漢王이 이를 걱정하였다.
항왕項王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한漢나라에 이르자,
진평陳平이
사자使者를 위하여
태뢰太牢를 갖추어 차려서 올리게 하다가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무릇 희생을 묶어놓고 기르는 곳을 뇌牢(우리)라고 하니, 《시전詩傳》에 소를 태뢰太牢라 하고 양을 소뢰小牢라 하였다. 거진擧進은 정조鼎俎(음식)를 차려 들고 올림을 이른다.
초楚나라의
사자使者를 보고는 거짓으로 놀란 체하며 말하기를 “나는
아보亞父의
사자使者라고 여겼더니, 바로
항왕項王의
사자使者이다.” 하고는 다시 밥상을 가지고 가서 나쁜 음식 차림으로 바꾸어 올렸다.
注+[釋義]초草는 거친 것이다.
초楚나라 사자使者가 돌아가서 이것을 항왕項王에게 자세히 보고하니, 항왕項王이 과연 아보亞父를 크게 의심하였다.
아보亞父가 급히 형양성滎陽城을 공격하여 함락하고자 하였으나 항왕項王이 듣지 않았다.
아보亞父는 항왕項王이 자신을 의심한다는 말을 듣고 마침내 노하여 말하기를 “천하의 일이 크게 결정되었으니, 군왕君王께서는 스스로 하소서.
해골을 청하여
注+[頭註]신하가 몸을 바쳐 군주를 섬겨서 자기 몸이 자신의 소유가 아니다. 그러므로 물러나기를 청할 때에 ‘해골을 청한다.[請骸骨]’고 이른 것이다. 돌아가고자 합니다.” 하고는 돌아가다가
팽성彭城에 도착하기 전에 등에 등창이 나서 죽었다.
- 《사기史記 진승상세가陳丞相世家》에 나옴 -
장군 기신紀信이 한왕漢王에게 말하기를 “사태가 급박합니다.
신이 청컨대 초楚나라를 속이겠으니, 왕께서는 이 틈을 타서 나가소서.” 하였다.
이에 진평陳平이 밤에 〈갑옷을 입은〉 여자 2천여 명을 동문東門으로 내보내니, 초楚나라가 인하여 공격하였다.
기신紀信이 마침내 황옥黃屋을 하고 왼쪽에 독기纛旗를 매단 한왕漢王의 수레를 타고 말하기를 “양식이 다하여 한왕漢王이 초楚나라에 항복한다.” 하니, 초楚나라 군사들이 모두 만세를 부르며 성 동쪽으로 가서 구경하였다.
이 때문에 한왕漢王이 수십 명의 기병騎兵과 함께 서문西門을 나가 도망할 수 있었다.
한왕漢王이
형양滎陽을 나와
성고成皐에
注+[釋義]성고成皐는 현縣의 이름이다. 하남군河南郡에 속하였으니 전국시대戰國時代에 정鄭나라의 호뢰관虎牢關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성城이 낙주洛州 사수현汜水縣 서남쪽 2리 지점에 있다.” 하였다. 이르러서
관문關門에 들어가 군사들을 거두어 다시 동쪽으로 가고자 하였는데,
원생轅生이
한왕漢王을 설득하기를 “성벽을 깊게 지키고 싸우지 말아서
형양滎陽과
성고成皐 사이로 하여금 우선 휴식하게 하라.”고 하였다.
한왕漢王이 그 계책을 따라 군대를 완宛 땅과 섭葉 땅 사이에 출동시켜 경포黥布와 함께 지방을 순행하며 병력을 수습하였다.
항우項羽가 한왕漢王이 완宛 땅에 있다는 말을 듣고 과연 병력을 이끌고 싸우러 왔으나 한왕漢王은 성벽을 굳게 지키고 더불어 싸우지 않았다.
팽월彭越이 한漢나라 장수가 되어서 유병遊兵(유격병)으로 초楚나라를 공격하니, 항우項羽가 마침내 종공終公으로 하여금 성고成皐를 지키게 하고 자신은 동쪽으로 팽월彭越을 공격하였다.
한왕漢王이 종공終公을 격파하고 다시 성고成皐에 주둔하였는데, 항우項羽가 이미 팽월彭越을 패주시킨 다음 군대를 이끌고 서쪽으로 와서 형양성滎陽城을 함락하고 마침내 성고成皐를 포위하였다.
한왕漢王이 도망하여
注+[釋義]도逃는 몸을 가볍게 하여 갑자기 나가는 것이다. 또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에 ‘한왕도漢王跳’로 되어 있는데, 주註에 “도跳는 음이 도이니, 달아남이다.” 하였다. 홀로
등공滕公(夏侯嬰)과 함께 수레를 타고
성고成皐의
옥문玉門을 나왔다.
북쪽으로
황하黃河를 건너
소수무小修武의
注+[釋義]소수무小修武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소수무小修武는 하내河內의 수무현修武縣에 있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지금 회주懷州 획가獲嘉가 옛날 수무修武이다.” 하였다. 전사傳舍(역사)에서 유숙하고는 새벽에
한漢나라 사신이라 자칭하고
조趙나라 성벽으로 달려 들어가니,
장이張耳와
한신韓信이 아직 잠자리에서 일어나지 않았는데, 그들이 누워 있는 방 안으로 나아가서 그
인부印符(印章과
병부兵符)를 빼앗고 깃발로 여러 장수들을 불러 바꾸어 배치하였다.
한신韓信과 장이張耳가 일어나 비로소 한왕漢王이 온 것을 알고 크게 놀랐다.
한왕漢王은 두 사람의 군대를 빼앗은 다음 즉시 장이張耳로 하여금 순행하여 조趙나라 땅을 수비하게 하고, 한신韓信을 상국相國으로 임명하여 조趙나라 군사 중에 아직 징발하지 않은 자를 거두어서 제齊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다.
- 《사기史記 회음후열전淮陰侯列傳》에 나옴 -
여러 장수들이 차츰 성고成皐를 탈출하여 한왕漢王을 따랐다.
초楚나라가 마침내 성고成皐를 함락하고 서쪽으로 공격해 오려 하였는데, 한漢나라가 군사들로 하여금 공鞏 땅에서 막아 서쪽으로 오지 못하게 하였다.
한왕漢王이
성고成皐 이동以東을 떼어 주고
공현鞏縣과
낙읍洛邑에
注+[釋義]공鞏은 현縣의 이름이다. 하남군河南郡에 속하였으니, 주周나라 고왕考王이 위공威公의 아들인 혜공惠公의 소자少子를 공鞏에 봉하고 동주東周 혜공惠公이라고 이름한 것이 바로 이것이다. 낙洛은 지금 하남부河南府 낙양현洛陽縣 동북쪽에 있으니, 옛 성城이 남아 있다. 주둔하여
초楚나라를 막고자 하니,
역생酈生이 말하였다.
“하늘의 하늘을 아는 자는 왕자王者의 일을 이룰 수 있습니다.
왕자王者는 백성을 하늘로 삼고 백성은 식량을 하늘로 삼으니, 오창敖倉은 천하에서 곡식을 수송해 저축한 지가 오래되었으므로 보관된 곡식이 매우 많습니다.
그런데 초楚나라 사람들이 형양滎陽을 함락하였으면서 오창敖倉을 굳게 지키지 않고 마침내 병력을 이끌고 동쪽으로 갔으니, 이는 하늘이 한漢나라에게 이용하게 한 것입니다.
원컨대
족하足下는 급히
진군進軍하여
형양滎陽을 거두어 취한 다음
오창敖倉의 곡식을 점거하고
성고成皐의 험한 요새를 막으며,
태행太行의 길을 차단하고
비호蜚狐의 어구를
注+[釋義]비蜚는 비飛의 고자古字이다. 비호구蜚狐口는 《지도기地道記》에 이르기를 “상당군上黨郡 항산恒山에서 북쪽으로 450리를 가면 항산恒山의 산마루가 나오니 비호구蜚狐口라고 부른다.” 하였다. 지금 울주蔚州 비호현蜚狐縣이 북쪽으로 규주嬀州 회융현懷戎縣으로 들어가 있으니, 바로 옛날 비호구蜚狐口이다. 막고
백마白馬의 나루를
注+[釋義]백마진白馬津은 곧 여양진黎陽津이다. 백마성白馬城은 위衛나라의 옛 조읍曹邑이니, 지금 준주濬州가 바로 한漢나라의 여양현黎陽縣이다. 주州에서 동쪽으로 1리 5보 떨어진 곳에 여양진黎陽津이 있으니, 또한 백마진白馬津이라 이름한다. 지켜서 제후들에게 지형으로 제압할 수 있는 형세를
注+[頭註]형제形制는 형승形勝이라는 말과 같으니, 형세의 좋음을 얻는 것이다. 지형이 험고하기 때문에 남(적)을 이길 수 있으니, 지형을 따라 적을 제압하는 것이다. 보이시면 천하가 돌아갈 바를 알 것입니다.”
왕이 그의 말을 따라 마침내 다시 오창敖倉을 도모하여 취하였다.
“방금 연燕나라와 조趙나라가 이미 평정되었고 유독 제齊나라만 아직 항복하지 않았습니다.
여러 전씨田氏들은 종족이 강하여 바다와 대산岱山을 의지하고 황하黃河와 제수濟水로 막고 있으니, 비록 수만 명의 군대를 보내더라도 일 년이나 몇 달 이내에 격파할 수 없을 것입니다.
신이 청컨대 밝으신 임금의 조명詔命을 받들어 제왕齊王을 설득하여 한漢나라를 위해 동쪽 번병藩屛을 칭하게 하겠습니다.”
상上이 “좋다.” 하고 마침내 역생酈生으로 하여금 다음과 같이 제왕齊王을 설득하게 하였다.
“천하의 일이 한漢나라로 돌아올 것임을 앉아서도 미루어 알 수 있습니다.
왕이 빨리 먼저 항복하면 제齊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그렇지 않으면 위태로움과 멸망을 당장 기다릴 수 있을 것입니다.”
이보다 먼저
제齊나라는
한신韓信이 장차 동쪽으로 군대를 이끌고 오려 한다는 말을 듣고,
화무상華無傷과
전해田解로 하여금 많은 병력을 거느리고
역하歷下에 주둔하여
한漢나라를 막게 했었는데,
역생酈生의 말을 받아들이게 되자
사자使者를 보내어
한漢나라와 화평하고
注+[頭註]평平은 이룸이요 화친함이니, 화친을 이룸을 말한 것이다. 마침내
역하歷下의 지키고 전투하는 대비를 파하였다.
한신韓信이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갈 때 평원平原 나루를 건너기 전에 역이기酈食其가 이미 제齊나라를 설득하여 항복받았다는 말을 듣고 중지하려 하였다.
이때
변사辯士인
괴철蒯徹이
注+[原註]철徹은 무제武帝의 이름을 피하여 사서史書에 철徹을 고쳐 통通으로 썼다. 한신韓信을 설득하기를 “장군이
조명詔命을 받고
제齊나라를 공격하는데,
한漢나라가 단독으로 중간에
사자使者를 보내어
제齊나라를 항복시켰으니, 어찌
조명詔命으로 장군을 중지시킨 일이 있었습니까?
또
역생酈生은 한낱 선비로 수레의
식軾에 기대어 세 치 혀를 놀려서
注+[釋義]역이기酈食其 본전本傳에는 복伏이 풍馮으로 되어 있고 빙憑으로 읽으니 기대는 것이다. 복伏 또한 기댐이다. 식軾은 주註가 주周나라 위열왕威烈王 23년조의 “반드시 식式하였다.[必式]”라고 한 데에 보인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혀는 입속에 있어 길이가 세 치이니, 북두성北斗星의 옥형玉衡과 비슷하다.” 하였다. 제齊나라의 70여 성을 항복시켰는데, 장군은 수만 명의 병력으로 1년이 넘어서야 비로소
조趙나라의 50여 성을 함락하였으니,
장수가 된 지 여러 해에 도리어 한 수유竪儒의 공만도 못하단 말입니까?” 하니, 한신韓信이 그 말을 옳게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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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서초3년, 한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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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 서초3년, 한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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