冬十月
注+[通鑑要解]時尙以十月爲歲首故로 行朝賀之禮라에 長樂宮
이 成
하다
諸侯群臣
이 皆朝賀
할새以下至
히 莫不震恐肅敬
하고 禮畢
에 復置法酒
注+[釋義]猶言禮酌이니 法者는 進止有禮也라 古人飮酒에 不過三爵하고 君臣百拜하야 終日宴에 不爲亂也라하니 諸侍坐殿上
이 皆伏抑首
하야 以尊卑次
로 起上壽
注+[頭註]壽者는 人之所欲이라 故卑下奉觴進酒에 皆稱上壽하니라하고 無敢讙譁失禮者
라
於是
에 帝曰 吾乃今日
에 知爲皇帝之貴也
라하고 乃拜叔孫通
하야 爲太常
注+[原註]漢傳云 拜通爲奉常하니 出史叔孫通傳이라[釋義] 百官志에 太常卿은 掌禮儀祭祀하야 每祭祀에 先奏其禮儀하고 及行事에 常贊天子라하다
○ 初
에 秦有天下
에 悉內(納)六國禮儀
하야 采其尊君抑臣者存之
러니 及通制禮
하야 大抵皆襲秦故
注+[釋義]襲은 因也니 因襲秦時故事라러라
用之於身
이면 則動靜有法
하야 而百行備焉
이요 用之於家
면 則內外有別
하야 而九族睦焉
이요 用之於鄕
이면 則長幼有倫
하야 而俗化美焉
이요 用之於國
이면 則君臣有敍
하야 而政治成焉
이요 用之於天下
면 則諸侯順服
하야 而紀綱正焉
이니 豈直
에 得之而不亂哉
아
夫以高祖之明達로 聞陸賈之言而稱善하고 睹叔孫通之儀而歎息이나
當是之時하야 得大儒而佐之하야 與之以禮爲天下런들 其功烈이 豈若是而止哉아
遂使先王之禮로 淪沒而不振하야 以迄于今하니 豈不痛甚哉아
上
이 自將擊韓王信
注+[頭註]韓王信이 二年에 以馬邑으로 降匈奴也라할새 居晉陽
이러니 聞
居代谷
하고 欲擊之
하야 使人覘匈奴
한대 冒頓
이 匿其壯士肥牛馬
하고 但
老弱及
畜
注+[釋義]은 露也니 下見所長, 見短幷同이라이라
使者十輩來하야 皆言匈奴可擊이라한대 上이 復使劉敬往이러니
敬
이 還曰 兩國
이 相擊
하니 此宜夸矜
所長
이어늘 今臣往
에 徒
羸瘠老弱
하니 此
는 必欲
短
하고 伏奇兵以爭利
니
上
이 怒罵敬曰 齊虜以口舌得官
注+[釋義]婁敬은 齊人也라 故云齊虜라 本姓婁러니 高祖賜姓劉하니라이러니 今乃妄言沮吾軍
이라하고 械繫敬廣武
注+[釋義]地志에 雁門郡廣武縣이라 括地志에 故城이 在代州雁門縣句注山南四十五里라하다
帝先至平城
注+[釋義]地志에 雁門郡平城縣이니 秦雲中郡雲中縣이다. 括地志에 朔州東三十里定襄縣이 漢平城也니 今大同府是라하야 兵未盡到
에 冒頓
이 縱精兵四十萬騎
注+[原註]匈奴傳云 縱精兵三十餘萬騎라하야 圍帝於白登
注+[釋義]括地志에 平城東北三十里에 有白登山하니 白登臺在焉이라七日
이러니
帝用陳平秘計
하야 厚遺
注+[原註]閼氏는 匈奴皇后號라[釋義] 應劭曰 平이 使畫工圖美女하야 間遣人遺閼氏云호되 漢有美女如此하니 今皇帝困阨하야 欲獻之라한대 閼氏畏奪己寵하야 因謂單于曰 漢天子亦有神靈하야 得其土地하니 非能有之라하니 於是에 匈奴開其一角하야 得突出이라 師古曰 應說은 出桓譚新論이요 非記傳所載니 譚以意測耳라한대 乃解圍
라
上
이 至廣武
하야 赦劉敬
하고 斬前使十輩
하고 封敬爲關內侯
注+[通鑑要解]秦制에 有侯號而居京畿하야 無國邑이러니 至漢하야 有食邑하니라하야 號爲建信侯
하다
吾行天下
에 獨見洛陽與是耳
라하고 乃
封陳平
하야 爲曲逆侯
注+[釋義]地志에 中山國曲逆縣이니 因濡水至城北하야 曲而西流하야 因名曲逆이러니 章帝醜其名하야 改曰蒲陰이라 括地志에 定州北平縣東南十五里蒲陰故城이 是라 或讀曲逆 音去遇하니 非是라하다
平
이 常從征伐
하야 凡六出奇計
注+[釋義]王氏曰 六出奇計는 請捐金行反間이 一也요 以惡草具進楚使 二也요 夜出女子二千人하야 解滎陽圍 三也요 躡足請封齊王信이 四也요 請僞遊雲夢하야 縛信이 五也요 今解白登之圍 六也라하니 輒益封邑焉
이러라
○ 上
이 至長安
하니 蕭何治未央宮
注+[釋義]在雍州長安縣西北十里長安故城中이라 名未央者는 取詩夜未央하니 勤政之義也라이어늘
上이 見其壯麗하고 甚怒하야 謂何曰 天下匈匈하야 勞苦數歲에 成敗를 未可知어늘 是何治宮室過度也오
且夫天子는 以四海爲家하니 非壯麗면 亡(無)以重威요 且亡(無)令後世有以加也니이다 上이 說하다
王者는 以仁義爲麗하고 道德爲威하나니 未聞以宮室鎭服天下也라
天下未定이면 當克己節用하야 以趨民之急이어늘 而顧以宮室爲先하니 豈可謂之知所務哉아
昔에 禹卑宮室이어늘 而桀爲瓊宮하니 創業垂統之君이 躬行節儉하야 以訓示子孫이라도 其末流猶入於淫靡어든 況示之以侈乎아
至於孝武
하야 卒以宮室
로敝天下
하니 未必不由酇侯啓之也
니라
何爲家而不治垣屋하고 曰 令後世賢이면 師吾儉이라하더니
今其爲國엔 而獨以侈示之하니 是는 分國家爲二하야 不以待其子孫者로 而望其君之後世也라
柏梁建章之作이 比未央하면 不知幾倍하니 安在其無以加乎아
겨울 10월에
注+[通鑑要解]이때는 아직도 진秦나라 제도를 따라 10월을 세수歲首로 삼았기 때문에 조하朝賀하는 예禮를 행한 것이다.장락궁長樂宮이 완성되었다.
제후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조하朝賀할 적에 제후왕 이하로 연봉 6백 석을 받는 관리에 이르기까지 두려워하고 엄숙히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으며,
예禮가 끝나자 다시
법주法酒(법식을 갖춘
주연酒宴)를
注+[釋義]법주法酒는 예작禮酌이란 말과 같으니, 법法은 나아가고 멈춤에 예법禮法이 있는 것이다. 옛사람은 술을 마실 적에 석 잔을 넘지 않았고, 군신간君臣間에 백 번 절하여 종일토록 잔치를 해도 문란하지 않았다. 베풀었는데
전殿 위에서 모시고 앉은 여러 신하들이 모두 엎드려 머리를 숙여서
존비尊卑의 순서에 따라 일어나
축수祝壽를 올리고
注+[頭註]수壽는 사람들이 원하는 바이므로 낮은 자들이 술잔을 받들어 술을 올릴 때에 모두 상수上壽라고 칭한다. 감히 떠들어
실례失禮하는 자가 없었다.
이에 황제가 말하기를 “내 오늘날에야 비로소 황제가 된 귀함을 알았다.” 하고는 마침내
숙손통叔孫通을
태상太常으로 임명하였다.
注+[原註]拜叔孫通 위태상爲太常 : [原註] 《한서漢書》 〈숙손통전叔孫通傳〉에는 “숙손통叔孫通을 봉상奉常으로 임명했다.” 하였으니, 위의 내용은 《사기史記》 〈숙손통전叔孫通傳〉에 나온 것이다. [釋義] 《후한서後漢書》 〈백관지百官志〉에 “태상경太常卿은 예의禮儀와 제사祭祀를 관장하여 제사 지낼 때마다 먼저 예의禮儀를 아뢰고 제사 지낼 때에 이르면 항상 천자天子를 돕는다.” 하였다.
처음에
진秦나라가 천하를 소유했을 적에
육국六國의 예의를 모두 받아들여 그 중에 군주를 높이고 신하를 억제하는 것을 채택해 남겨두었는데,
숙손통叔孫通이
예禮를 제정하게 되자 모두
진秦나라의 옛것을 인습하였다.
注+[釋義]습襲은 인습함이니, 습진고襲秦故는 진秦나라 때의 고사故事를 인습한 것이다.
자기 몸에 사용하면 동정動靜이 법도가 있어서 온갖 행실이 구비되고, 가정에서 사용하면 내외內外가 분별이 있어서 구족九族이 화목하고, 향리鄕里에서 사용하면 장유長幼가 차례가 있어서 풍속의 교화가 아름답고, 국가에서 사용하면 군신君臣이 차례가 있어서 정치가 이루어지고, 천하에 사용하면 제후들이 순히 복종하여 기강이 바루어지니, 어찌 궤석几席의 위와 호정戶庭의 사이에서 예禮를 얻어 혼란하지 않을 뿐이겠는가.
고조高祖의 밝고 통달함으로 육가陸賈의 말을 듣고서 좋다고 칭찬하였고 숙손통叔孫通의 의식을 보고서 감탄하였다.
그러나 삼대三代의 왕王에게 비견되지 못하는 까닭은 배우지 않은 병통일 뿐이다.
이때를 당하여 큰 유학자를 얻어 보좌하게 해서 그와 더불어 예禮로써 천하를 다스렸던들 그 공렬功烈(업적)이 어찌 이와 같을 뿐이겠는가.
한갓 예禮의 강비糠粃(허울)만 도둑질하여 세상을 따르고 풍속에 영합하여 영광을 취했을 뿐이다.
그리하여 마침내 선왕先王의 예禮로 하여금 매몰되어 떨치지 못해서 지금에 이르게 하였으니, 어찌 심히 애통하지 않겠는가.”
상上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한왕韓王신信을
注+[頭註]한왕韓王신信이 2년에 마읍馬邑을 가지고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였으므로 공격한 것이다. 공격할 적에
진양晉陽에 머물러 있었는데,
묵특冒頓이
대곡代谷에 있다는 말을 듣고 그를 공격하고자 하여 사람을 시켜
흉노匈奴를 엿보게 하였는 바,
묵특冒頓이
장사壯士와 살찐 소와 말은 숨겨두고 다만 노약자와 파리한 가축만을 보이게 하였다.
注+[釋義]현見은 드러냄이니, 아래의 ‘현소장見所長’과 ‘현단見短’의 현見도 모두 같다.
사자使者 10명이 와서 모두 흉노匈奴를 공격할 만 하다고 말하자, 상上이 다시 유경劉敬을 시켜 가서 보게 하니,
유경劉敬이 돌아와서 보고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공격하니, 마땅히 뛰어난 점을 과시하고 자랑하여 보여주어야 할 터인데, 이제 신이 가서 다만 파리하고 수척한 노약자만 보았으니, 이는 반드시 단점을 보여주고 기병奇兵(기습하는 군대)을 매복하여 이익을 다투고자 하는 것입니다.
어리석은 신은 흉노匈奴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상上이 노하여
유경劉敬을 꾸짖기를 “
제齊나라 포로가
구설口舌로 벼슬을 얻더니
注+[釋義]누경婁敬이 제齊나라 사람이기 때문에 제齊나라 포로라고 말하였다. 본래 성姓은 누婁인데, 고조高祖가 유성劉姓을 하사하였다. 이제 마침내 망언을 하여 우리 군대의 사기를
저상沮喪하게 한다.” 하고는
유경劉敬을 형틀을 씌워
광무廣武에
注+[釋義]광무廣武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안문군雁門郡광무현廣武縣이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옛 성城이 대주代州안문현雁門縣구주산句注山 남쪽 45리 지점에 있다.”고 하였다. 구류하였다.
황제가 먼저
평성平城에
注+[釋義]평성平城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안문군雁門郡평성현平城縣이니 진秦나라 운중군雲中郡운중현雲中縣이다.” 하였고, 《괄지지括地志》에 “삭주朔州 동쪽 30리 정양현定襄縣이 한漢나라 평성平城이니 지금의 대동부大同府가 이곳이다.” 하였다. 이르러 군대가 다 도착하지 않았는데,
묵특冒頓이
정병精兵 40만
기병騎兵을 풀어놓아
注+[原註]《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에는 “정병精兵 30여만 기騎를 풀어놓았다.” 하였다. 황제를
백등白登에서
注+[釋義]백등白登은 《괄지지括地志》에 “평성平城 동북쪽 30리에 백등산白登山이 있으니, 백등대白登臺가 이곳에 있다.” 하였다. 7일 동안 포위하였다.
황제가
진평陳平의 은밀한 계책을 써서
연지閼氏에게 후하게 선물을 주니,
注+[原註]연지閼氏는 흉노匈奴황후皇后의 호칭이다. [釋義]응소應劭가 말하였다. “진평陳平이 화공畫工을 시켜 미녀美女를 그리게 한 다음 몰래 사람을 시켜 이를 연지閼氏에게 보내고 이르기를 ‘한漢나라에 이와 같은 미녀美女가 있으니, 지금 황제皇帝가 곤궁하여 이 미녀를 바치고자 한다.’고 하자, 연지閼氏가 자신의 총애를 빼앗길까 두려워하여 선우單于에게 이르기를 ‘한漢나라 천자天子는 또한 신령神靈함이 있어서 그 땅을 얻었으니, 우리가 소유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였다. 이에 흉노匈奴가 한 귀퉁이를 열어주어 탈출할 수가 있었다.” 안사고顔師古가 말하였다. “응씨應氏의 말은 환담桓譚의 《신론新論》에서 나온 내용이고 역사歷史의 전기傳記에 실려있는 것이 아니니, 환담桓譚이 자신의 생각을 가지고 억측한 것일 뿐이다.” 마침내 포위를 풀었다.
상上이
광무廣武에 이르러
유경劉敬을 사면하고 먼저 갔던 사신 10명을 목 베었으며,
유경劉敬을
관내후關內侯로
注+[通鑑要解]관내후關內侯는 진秦나라 제도에는 후侯의 칭호는 있으나 경기京畿에 거하여 국읍國邑이 없었는데, 한漢나라 때에 이르러 식읍食邑이 있었다. 삼고
호號를
건신후建信侯라 하였다.
- 《사기史記》 〈고조본기高祖本紀〉, 〈유경전劉敬傳〉, 〈흉노전匈奴傳〉 등에 나옴 -
황제가 남쪽으로 곡역현曲逆縣을 지나다가 말하기를 “웅장하다.
내가 천하를 다녀봄에 다만
낙양洛陽과 이곳만을 보았을 뿐이다.” 하고는 마침내
진평陳平을 바꾸어 봉하여
곡역후曲逆侯로
注+[釋義]곡역曲逆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중산국中山國곡역현曲逆縣이니 유수濡水를 따라 성城 북쪽에 이르러 굽어 서쪽으로 흘러가므로 인하여 곡역曲逆이라고 이름하였는데, 장제章帝가 그 이름을 나쁘게 여겨 포음蒲陰으로 고쳤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정주定州북평현北平縣 동남쪽 15리 지점의 포음蒲陰의 옛 성城이 이곳이다.” 하였다. 혹은 곡역曲逆의 음을 거우去遇라고 읽으니 옳지 않다. 삼았다.
진평陳平이 항상 정벌에 따라다니면서 무릇 여섯 번 기이한 계책을 내니,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여섯 번 기이한 계책을 내었다는 것은, 황금黃金을 내어 초楚나라에 반간反間을 행한 것이 첫 번째이고, 나쁘고 거친 음식을 초楚나라 사신에게 올린 것이 두 번째이고, 밤에 여자 2천 명을 내보내어 형양滎陽의 포위를 풀게 한 것이 세 번째이고, 한왕漢王의 발을 밟아 노여움을 제지하여 한신韓信을 제왕齊王에 봉하게 한 것이 네 번째이고, 거짓으로 운몽雲夢에 노닐게 하여 한신韓信을 사로잡은 것이 다섯 번째이고, 백등白登의 포위를 풀게 한 것이 여섯 번째이다.” 그때마다
봉읍封邑을 더하였다.
상上이
장안長安에 이르니,
소하蕭何가
미앙궁未央宮을
注+[釋義]미앙궁未央宮은 옹주雍州장안현長安縣 서북쪽 10리 지점인 장안長安의 옛 성城 가운데에 있다. 미앙未央이라고 이름한 것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정료庭燎〉의 “밤이 아직 다하지 않았다.[夜未央]”는 뜻을 취한 것이니, 정사에 부지런히 힘쓴다는 뜻이다. 잘 꾸몄다.
상上은 궁궐이 너무 웅장하고 화려한 것을 보고는 매우 노하여 소하蕭何에게 이르기를 “천하가 흉흉하여 노고한 지 수년이 되었으나 성패를 아직 알 수 없는데, 이 어찌 궁실을 꾸미기를 도에 지나치게 하는가?” 하였다.
소하蕭何가 대답하기를 “천하가 막 안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인하여 궁실을 경영할 수 있는 것입니다.
또 천자는 사해四海를 집으로 삼으니,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위엄을 중하게 할 수가 없으며, 또 후세로 하여금 궁궐을 이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하게 짓지 못하게 하려는 것입니다.” 하니, 상이 기뻐하였다.
“왕자王者는 인의仁義를 화려함으로 삼고 도덕道德을 위엄으로 삼으니, 궁실을 가지고 천하를 제압하고 복종했다는 말을 들어 보지 못하였다.
천하가 안정되지 못했으면 마땅히 사욕私欲을 이기고 비용을 절약하여 백성들에게 시급한 것을 따라야 할 터인데, 도리어 궁실을 우선으로 삼았으니, 어찌 힘써야 할 바를 안다고 이르겠는가.
옛날 우禹임금은 궁실을 낮게 지었는데 걸왕桀王은 옥으로 궁실을 꾸몄으니, 창업創業하여 후세에 훌륭한 전통을 남긴 군주가 몸소 절약과 검소함을 실천하여 자손에게 훈시해도 그 말류末流에는 음탕하고 화려한 데로 들어갔는데, 하물며 사치함을 보여준단 말인가.
그런데 도리어 후세로 하여금 이보다 더할 수 없게 하려 한다고 말하였으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는가.
효무제孝武帝에 이르러 마침내 궁실로 인해 천하를 피폐하게 하였으니, 이는 반드시 찬후酇侯(蕭何)로 말미암아 계도啓導한 것이 아니라고 하지 못할 것이다.”
“소하蕭何가 집을 지으면서 담장과 지붕을 수리하지 않고는 말하기를 ‘만일 후세後世가 어질면 나의 검소함을 본받을 것이다.’ 하였는데,
지금 나라를 다스릴 때에는 유독 사치함을 보여주었으니, 이는 집과 나라를 나누어 둘로 만들어서 그 자손을 대하는 것을 가지고 군주의 후세에 바라지 않은 것이다.
백량대柏梁臺와 건장대建章臺를 지은 것이 미앙궁未央宮에 비하면 몇 배나 되는지 알 수 없으니, 이보다 더할 수 없게 한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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