孝惠高后時에 海內得離戰爭之苦하야 君臣俱欲無爲라
故로 惠帝拱己하고 高后女主制政이 不出房闥하야 而天下晏然하고 刑罰罕用하며 民務稼穡하야 衣食滋殖하니라
○ 呂祿, 呂産
이 欲作亂
호되 憚絳侯, 朱虛等
하야 猶豫未決
이러니 絳侯使
寄
로 하야 以兵屬太尉
한대
太尉入軍門
하야 行令曰
하라 軍中
이 皆左袒
이어늘
太尉遂將北軍
注+[附註]宿衛宮門內호되 於周垣下에 爲區廬하니 禁軍也라 漢書南北軍圖에 北軍尉兵三萬人이니 以郡國材官騎士番上者充之하고 又中尉兵掌巡徼京師하니 以三輔兵番上者充之러니 後에 武帝改名執金吾하니라하고 分部
하야 悉捕諸呂
하야 男女
를 無少長
히 皆斬之
하다
有如軍士不應하여 或皆右袒이어나 或參半焉이면 則如之何오
故로 先賢謂是時에 直當諭以大義하야 率而用之爾라하니라
況太尉已得北軍하니 士卒이 固惟舊將之聽이니 非惟不當問이라 蓋亦不必問也니라
勃이 令軍中左右袒하니 設使右袒이런들 其可已乎아
伊川先生以爲此屬은 盡爲身謀요 非眞爲國家也라하니라
惠帝仁柔之資로 內修親親하고 外禮宰相하고 優寵兄弟하여 恩敬이 篤矣라
當時에 海內息戰爭之苦하야 君臣拱手하야 俱欲無爲라
是以로 天下晏然하고 刑罰罕用하며 民務稼穡하야 衣食滋殖이러니 不幸遭母后하야 虧損至德하니 惜哉라
呂后以婦人臨朝하여 背高帝之約하고 欲王諸呂호되 當時에 面折廷爭은 僅見王陵一人이요 而波流風靡하야 阿附呂后者는 雖平勃이라도 不免也라
自是
로 權歸呂氏
하야 漢祚之危
가 如一髮引千鈞
하니 이면 則漢亦殆矣
리니 其能成功
이 豈非天邪
아
夫以呂后仇陷戚姬하고 鴆殺趙王하며 駭沒嗣君하고 幽殺少主하며 擅王呂氏하고 誅鋤高帝諸子하며 居位僭竊은 自有天地以來로 所謂非常之變이니 不可言也라
子朱子綱目에 於呂氏制朝之後에 分註其年하야 特以變例書之하니 所以著女后僭亂之原하야 爲萬世鑑戒니 宜哉라
○ 諸大臣
이 相與謀曰
及梁, 淮陽,
이 皆非眞孝惠子
注+[附註]張皇后는 帝娣魯元公主之女니 呂太后欲爲重親이라 故以配帝하고 張后無子어늘 太后命張后하야 取他人子하야 殺其母而養之하고 令孝惠子之러니 諸大臣이 迎代王爲帝에 而有司分部하야 皆滅之하니라라하야 乃使人
으로 迎
한대
張武等이 議호되 皆曰 漢大臣이 皆故高帝時將으로 習兵事하고 多謀詐라 今已誅諸呂하고 以迎大王爲名하니 實不可信이라
中尉
이 進曰 夫秦失其政
에 豪傑竝起
하야 人人
이 自以爲得之者 以萬數
나 然卒踐天子位者
는 劉氏也
니 天下絶望
이 一矣
요
高帝王子弟
하야 地犬牙相制
注+[釋義]言封子弟에 其境(土)[上]交接이 若犬牙하야 不正相當而相銜入也라하니 所謂磐石之宗
注+[釋義]此語見太公六韜라 又荀子國富篇曰 國安于磐石이라한대 注에 磐은 固也니 國之安彊이 如磐踞之大石하야 不可拔이라也
라 天下服其彊
이 二矣
요
漢興에 除秦煩苛하야 約法令, 施德惠하야 人人自安하니 難動擾 三矣라
夫以呂太后之嚴으로 擅權專制나 然而太尉以一節入北軍하야 一呼에 士皆左袒하야 爲劉氏하고 畔諸呂하야 卒以滅之하니 此乃天授요 非人力也니이다
大王賢聖仁孝 聞於天下라 故로 大臣이 因天下之心而迎立大王하나니 大王은 勿疑也하소서
代王
이 至長安
하니 太尉勃
이 請間(閒)
注+[釋義]索隱注에 間은 音閑이니 言欲向空閑處語라이어늘 宋昌曰 所言
이 公
인댄 公言之
하고 所言
이 私
인댄 王者
는 無私
니이다
代王
이 西鄕(向)讓者三
이요 南鄕讓者再
注+[附註]賓主는 位東西面이요 君臣은 位南北面이라 王入代邸에 群臣繼至어늘 王以賓主禮接之하야 西向三讓하고 群臣扶王하야 正南面之位에 又再讓하니라라 遂卽天子位
하다
夜拜宋昌하야 爲衛將軍하야 領南北軍하고 以張武로 爲郞中令하야 行殿中하다
宋昌一折之
에 其情立見
하야 遽上璽符
하니 夫渭橋
注+[頭註]漢書에 於渭橋에 群臣拜上璽符라하니라는 非邸殿所在
니 王若何而受之
리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고후기高后紀〉 찬贊에 말하였다.
“효혜제孝惠帝와 고후高后 때에 온 천하가 전쟁의 고통에서 벗어나 군주와 신하가 모두 무위無爲를 하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혜제惠帝가 자기 몸을 공손히 하고 고후高后가 여자 군주로서 정사를 함이 규방閨房을 벗어나지 아니하여, 천하가 편안하고 형벌을 적게 썼으며 백성들이 농사를 힘써서 의식이 풍족하였다.”
여록呂祿과 여산呂産이 난을 일으키고자 하였으나 강후絳侯와 주허후朱虛侯 등을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결단하지 못하였는데, 강후絳侯가 역기酈寄로 하여금 여록呂祿을 속여 설득해서 병력을 태위太尉에게 맡기게 하였다.
태위太尉가 군문軍門에 들어가서 명령을 전달하기를 “여씨呂氏를 위하거든 우단右袒을 하고, 유씨劉氏를 위하거든 좌단左袒을 하라.” 하니, 군중軍中이 모두 좌단左袒을 하였다.
태위太尉가 마침내
북군北軍을
注+[附註]북군北軍은 궁문 안을 숙위宿衛하는데 빙 둘러 있는 담장 아래에 구려區廬(초소)를 만드니, 금군禁軍이다. 《한서漢書》의 남북군南北軍도식圖式에 북군의 위병尉兵이 3만 명이니 군국郡國의 재관材官과 기사騎士 중에 번상番上하는 자로 충원하고, 또 중위中尉의 군대는 경사京師를 순찰하는 것을 관장하니 삼보三輔의 병사 중에 번상番上하는 자로 충원하였는 바, 뒤에 무제武帝가 집금오執金吾라고 이름을 고쳤다. 거느리고 부서를 나누어
여씨呂氏들을 모두 체포해서 남녀를 아이와 어른 할 것 없이 모두 목 베었다.
만일 군사들이 호응하지 아니하여 혹 모두 우단右袒을 하였거나, 혹 반만 참여하였다면 어찌하였겠는가.
그러므로 선현先賢이 이르기를 ‘이때에는 다만 의리로 깨우쳐서 거느리고 가서 쓸 뿐이다.’라고 한 것이다.
하물며 태위太尉가 이미 북군北軍을 얻었으니, 사졸들이 진실로 옛 장수의 명령을 따를 것이니, 단지 묻지 말아야 할 뿐만 아니라 또한 굳이 물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주발周勃이 군중軍中으로 하여금 좌단左袒을 하고 우단右袒을 하게 하였으니, 설사 우단右袒을 했더라도 이 일을 그만둘 수 있었겠는가.
이천선생伊川先生이 말씀하기를 ‘이러한 등속은 모두 자신을 위하여 도모한 것이요, 참으로 국가國家를 위한 것이 아니다.’ 하였다.”
남궁씨南宮氏(南宮靖一)의 《소학사단小學史斷》에 말하였다.
“혜제惠帝는 인자하고 유순한 자질로 안으로는 친친親親을 닦고 밖으로는 재상宰相들을 예우하였으며, 형제들을 우대하여 은혜와 공경이 돈독하였다.
당시에 온 천하가 전쟁의 고통이 종식되어 군주와 신하가 팔짱을 끼고 모두 무위無爲를 하고자 하였다.
이 때문에 천하가 편안하고 형벌을 적게 썼으며 백성들이 농사를 힘써서 의식이 풍족하였는데, 불행히 모후母后를 만나 지극한 덕을 훼손하였으니 애석하다.
여후呂后는 부인으로서 조정에 임하여 고제高帝의 약속을 저버리고 여씨呂氏들을 왕 노릇 시키고자 하였으나 당시에 대면하여 꺾고 조정에서 간쟁한 자는 겨우 왕릉王陵 한 사람뿐이었고, 물결치는 대로 휩쓸리고 바람부는 대로 쏠려서 여후呂后에게 아부한 것은 비록 진평陳平과 주발周勃이라도 면하지 못하였다.
이로부터 권세가 여씨呂氏에게 돌아가서 한漢나라 국운國運의 위태로움이 마치 한 올의 머리털로 천균千鈞을 끌어당기는 것과 같았으니, 그때 만일 역기酈寄를 위협할 수 없고 여록呂祿을 속일 수 없고 기통紀通의 부절을 황명皇命이라고 사칭할 수 없고 북군北軍이 주발周勃을 받아들이지 않아서 여수呂須의 계책이 행해졌다면 한漢나라가 또한 위태로웠을 것이니,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어찌 천운天運이 아니겠는가.
여후呂后는 척희戚姬를 원수로 여겨 죽임에 빠뜨리고 조왕趙王을 짐독鴆毒으로 죽였으며, 사군嗣君을 놀라서 죽게 하고 소주少主를 유폐하여 죽였으며, 제멋대로 여씨呂氏를 왕 노릇 시키고 고제高帝의 여러 아들들을 죽였으며, 지위에 있으면서 참람하고 도둑질하였으니, 이는 천지가 생겨난 이래로 이른바 비상한 변고라는 것이니 말할 수가 없다.
주자朱子의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여씨呂氏가 조정에 임하여 제制를 칭한 뒤에 그 연도(干支) 아래에 분주分注하여 특별히 변례變例로 썼으니, 이는 여후女后가 참람하고 어지럽힌 근원을 드러내어 만세의 감계鑑戒를 삼은 것이니, 당연하다.”
여러 대신들이 서로 모의하기를 “
소제少帝와
양왕梁王,
회양왕淮陽王,
항산왕恒山王이 모두 진짜
효혜황제孝惠皇帝의 아들이 아니다.”
注+[附註]장황후張皇后는 혜제惠帝의 여동생인 노원공주魯元公主의 딸이니, 여태후呂太后가 중친重親(겹사돈)을 맺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그녀를 혜제惠帝의 배필로 삼았으며, 장후張后가 자식이 없자, 여태후呂太后는 장후張后에게 명하여 딴 사람의 자식(少帝)을 데려다가 그 어미를 죽이고 기르게 하고는 혜제惠帝로 하여금 자식으로 삼게 하였는데, 여러 대신들이 대왕代王을 맞이하여 황제로 삼자 유사有司가 부서를 나누어 공격해서 이들을 모두 멸망시켰다. 하여, 이에 사람을 시켜
대왕代王을 맞이하였다.
장무張武 등이 의논을 올릴 적에 모두 말하기를 “한漢나라 대신들은 다 옛날 고제高帝 때의 장수로 병사兵事에 숙달하고 속임수가 많습니다. 이제 이미 여씨呂氏들을 주벌하고 대왕代王을 맞이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삼으니, 실제로 믿을 수가 없습니다.
원컨대 병을 칭탁하고 가지 마시고 그 변화를 관찰하소서.” 하였다.
중위中尉송창宋昌이 나아가 아뢰기를 “진秦나라가 왕권을 잃자, 호걸豪傑들이 함께 일어나서 사람마다 각자 왕권을 얻을 것이라고 여긴 자가 만으로 헤아려졌으나 끝내 천자의 지위에 오른 자는 유씨劉氏이니, 천하의 호걸들이 절망한 것이 첫 번째입니다.
고제高帝가
자제子弟를 왕으로 봉하여 땅이 개 이빨처럼 맞물려 서로 견제하니,
注+[釋義]견아상제犬牙相制는 자제子弟를 봉할 적에 그 국경이 서로 맞물려 마치 개의 이빨과 같아서 바르게 서로 맞지 않고 서로 맞물려 들어감을 이른다. 이른바 반석처럼 편안한
종친宗親이라는 것이어서
注+[釋義]이 내용은 태공太公의 《육도六韜》에 보인다. 또 《순자荀子》 〈국부편國富篇〉에 이르기를 “나라가 반석磐石처럼 편안하다.” 하였는데, 주注에 “반磐은 견고함이니, 나라의 편안하고 강함이 널려 있는 큰 바위와 같아서 뽑을 수 없는 것이다.” 하였다. 천하가 그 강함에 복종함이 두 번째입니다.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진秦나라의 번거롭고 까다로운 것을 제거하여 법령法令을 줄이고 은덕을 베풀어서 사람마다 스스로 편안해 하니, 동요시키기 어려운 것이 세 번째입니다.
여태후呂太后의 위엄으로써 권력을 독단하고 제멋대로 전제專制하였으나 태위太尉가 한 부절을 가지고 북군北軍에 들어가서 한 번 호령하자 군사들이 모두 좌단左袒을 하여 유씨劉氏를 위하고 여러 여씨呂氏를 배반해서 끝내 여씨呂氏를 멸망시켰으니, 이는 바로 하늘이 준 것이요 인력人力이 아닙니다.
대왕大王의 어질고 성스럽고 인자하고 효성스러움이 천하에 알려졌기 때문에 대신大臣이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인하여 대왕大王을 맞이해 세우려는 것이니, 대왕大王께서는 의심하지 마소서.” 하였다.
대왕代王이
장안長安에 이르자, 태위
주발周勃이 한가한 틈을 내주기를 청하니,
注+[釋義]《사기색은史記索隱》의 주注에 “간間은 음音이 한이니, 비고 한가로운 곳을 향하여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하였다. 송창宋昌이 말하기를 “말할 내용이
공적公的인 것이면
공적公的으로 말하고, 말할 내용이
사적私的이면
왕자王者는 사사로움이 없습니다.” 하였다.
태위太尉가 마침내 무릎을 꿇고 천자天子의 옥새玉璽와 부절符節를 올렸다.
대왕代王이 서쪽을 향하여 사양하기를 세 번 하고 남쪽을 향하여 사양하기를 두 번 하고는,
注+[附註]西鄕讓者三 남향양자재南鄕讓者再:손님과 주인은 동면東面과 서면西面에 자리하고, 군주君主와 신하臣下는 남면南面과 북면北面에 자리한다. 대왕代王이 대저代邸(代王의 저택)로 들어옴에 여러 신하들이 뒤따르자, 대왕代王이 손님과 주인의 예禮로 접견하여 서쪽을 향하여 세 번 사양하였고, 여러 신하들이 왕을 부축하여 남면南面의 자리에 앉게 하자, 또다시 두 번 사양한 것이다. 마침내
천자天子의 지위에 올랐다.
밤에 송창宋昌을 임명하여 위장군衛將軍으로 삼아 남군南軍과 북군北軍을 거느리게 하고, 장무張武를 낭중령郎中令으로 삼아서 궁전 안을 순찰하게 하였다.
여씨呂氏들을 토벌하고 대왕代王을 맞이한 공로를 서술하여 사사로운 정성을 펴고자 함에 불과하였을 뿐이다.
송창宋昌이 한 마디 말로 꺾자 그
정情이 즉시 드러나서 황급히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올렸으니,
위수渭水의
注+[頭註]《한서漢書》에 “위수渭水 다리에서 신하들이 절하고 옥새玉璽와 부절符節을 올렸다.” 하였다. 다리는
대왕代王의
저전邸殿이 있는 곳이 아니니,
대왕代王이 어떻게 이것을 받는단 말인가.
한 번 행동함에 세 가지가 잘못되었으니, 이는 배우지 않은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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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 고후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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