時에 上이 未置太子러니 與王宴飮이라가 從容言曰 千秋萬歲後에 傳於王호리라 王이 辭謝하니
雖知非至言이나 然이나 心內喜하고 太后亦然之러니
詹事
注+[頭註]詹은 省也, 供也라 皇后太子 各置詹事하니 隨其所在하야 以名官이라 秩二千石이라竇嬰
이 引
酒進曰 天下者
는 高祖之天下
요 父子相傳
은 漢之約也
어늘 上
이 何以得傳梁王
이시닛고
○ 初
에 孝文時
에 吳太子入
에 得侍皇太子
하고 飮博
할새 吳太子博
이라가 爭道
注+[釋義]謂爭行棊之路라不恭
이어늘 皇太子引博局
注+[釋義]猶今言棊盤(槃)이라하야 提殺之
注+[釋義]徐廣曰 〈提音弟라〉 史記周勃世家에 太后以冒絮提文帝라한대 索隱曰 〈服虔云〉 提는 音弟니 或(音)[作]啼라하니 非也라 蕭該는 音底요 提는 擲也라하니 按蕭音爲是라하니 吳王
이 由此
로 稍失藩臣之禮
하야 稱疾不朝京師
하고 始有反謀
라
〈本傳無此句〉 文帝賜吳王几杖하고 老不朝라하니 吳得釋其罪하고 謀亦益解라
然
이나 其居國
이 以銅鹽爲資
注+[頭註]吳有銅山하니 招致天下亡命하야 以爲鑄錢하고 煮海水爲鹽이라 故無賦而國用足이라라 故
로 百姓
이 無佗(他)賦
하고 郡國吏欲來捕亡人者
注+[釋義]捕亡人은 謂避禍而逃亡者를 討捕之也라어든 公共禁弗予
注+[釋義]史記吳王濞傳에 公作訟하니 註에 如淳曰 訟은 公也라 正義曰 訟은 音容이니 言其相容하야 禁止不與也라하니 如此者四十餘年
이러라
鼂錯數上書言吳過可削이라호되 文帝寬不忍罰하니 以此로 吳日益橫이러라
昔에 高帝初定天下에 昆弟少하고 諸子弱이라하사 大封同姓하시니 齊七十餘城이요 楚四十餘城이요 吳五十餘城이라
封三庶孼
注+[釋義]王氏曰 正長曰嫡이요 其餘曰庶요 妾隷之子曰孼이니 孼之言은 蘖也라 有罪之女 沒廢役之而已어늘 得幸於君하야 有所生이면 若木旣伐而生枿也라 枿은 與蘖通이라하사 分天下半
이러시니
今吳王이 前有太子之郤(隙)이라하야 詐稱病不朝하니 於古法에 當誅어늘 文帝不忍하사 因賜几杖하시니 德至厚也라
當改過自新이어늘 反益驕溢하야 卽山鑄錢하고 煮海爲鹽하며 誘天下亡人하야 謀作亂하니
今에 削之亦反이요 不削亦反이어니와 削之면 反亟禍小하고 不削이면 反遲禍大하리이다
○ 初
에 楚元王
이 好書
하야 與魯申公
注+[釋義]申公은 魯人이라 史記云 言詩於魯則申培公이라한대 韋昭曰 培는 申公之名이라, 穆生, 白生
으로 俱受詩於浮丘伯
注+[釋義]齊人이니 浮丘는 複姓也요 伯은 名也라 索隱曰 呂后時에 浮丘伯이 在長安하니 申公이 與元王子郢으로 俱卒學也하니라이러니 及王楚
에 以三人
으로 爲中大夫
하다
穆生이 不嗜酒어늘 元王이 每置酒에 常爲穆生設醴하고
及子夷王, 孫王戊卽位하야도 常設이러니 後乃忘設焉이어늘
不去
면 楚人
이 將鉗
注+[附註]以鐵束頸也라 元王傳에 王戊淫暴어늘 申公, 白生이 諫호되 不聽하고 胥靡之하고 衣之赭衣하야 使杵臼雅舂於市라 胥靡는 聯繫하야 使隨而服役之라 杵臼는 爲木杵手舂이니 今謂步臼者요 赭衣는 罪人所服赤衣也라 正身舂之曰雅舂이라我於市
라하고 遂謝病去
하다
○ 楚王戊
注+[釋義]高帝弟楚王交孫이라 嗣二十一年에 反하니 都彭城하니라來朝
어늘 錯因言
호되 戊往年
에 爲薄太后服
할새 私奸服舍
注+[頭註]爲奸於服舍也니 服舍는 喪服之次라라하야 削東海郡
하고
前年
에 趙王
注+[釋義]名遂니 高帝孫幽王友子라 嗣二十六年에 反하니 都邯鄲하니라이 有罪
라하야 削其常山郡
하고
膠西王卬
注+[釋義]卬은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平〉昌侯라 〈立〉十〈一〉年에 反하니 都密州高密縣이라 按高密은 今屬膠州하니 膠州理膠西縣이라이 以賣爵事
로 有奸
이라하야 削其六縣
하고
廷臣
이 方議削吳
러니 吳王
注+[釋義]劉仲之子라 索隱曰 澎은 濞字也라 〈正義曰〉 都吳나 其實은 在江都라이 恐削地無已
하야 因發謀擧事
할새 說膠西王
하야 約齊, 菑川
注+[釋義]菑川王은 名賢이니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武城侯라 立十一年에 反하니 都劇이라 按劇縣은 屬菑川이라 菑川은 隋置菑州하니 今盤陽이 是라 括地志에 故劇城은 在靑州壽光南三十里라, 膠東
注+[釋義]膠東王은 雄渠니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昌)[白]石侯라 (五)[立]十一年에 反하니 都卽墨이라 括地志에 卽墨故城은 在今登州膠水縣東六十里라 故曰膠東이라, 濟南
注+[釋義]濟南王은 辟光이니 辟은 音壁이라 高帝孫齊悼惠王子니 故(初)[朸]侯라 立十一年에 反하니 都濟南이라 括地志에 濟南故城은 在菑川長(止)[山]縣西北三十里라하니 楚, 趙皆反
이라
發使遺諸侯書
하야 罪狀晁(鼂)錯
注+[釋義]狀은 〈形〉容之也라 其書形狀鼂錯之罪니 猶莊子自狀其過也라하야 欲合兵誅之
러라
○ 初에 文帝且崩에 戒太子曰 卽有緩急이어든 周亞夫는 眞可任將兵이라하더니
及七國反書聞에 上이 乃拜中尉周亞夫하야 爲太尉하야 將三十六將軍하야 往擊吳, 楚하고 遣酈寄擊趙하고 欒布擊齊하다
〈此句不同〉 盎
이 夜見竇嬰
하고 爲言吳所以反
하고 願至上前
하야 口對狀
注+[釋義]王氏曰 言不用奏章하고 願至主上前하야 口對說也라이어늘
上
이 方與錯
로 調兵食
注+[頭註]調는 計也니 謂計發兵食也라이러니 上
이 問盎
호되 今吳, 楚反
하니 於公意
에 何如
오 對曰 願屛左右
하소서
上이 卒問盎한대 對曰 吳, 楚相遺書하야 言高帝王子弟에 各有分地어늘 今賊臣鼂錯 擅適(謫)諸侯하야 削奪其地라
以故로 反하야 欲共誅錯하고 復故地而罷라하니 方今計는 獨有斬錯하고 發使赦七國하야 復其故地면 則兵可毋血刃而俱罷하리이다
上이 黙然良久에 曰 顧誠何如니 吾不愛一人以謝天下라하니 錯殊不知러라
上이 使中尉召錯하야 紿載行市하니 錯衣朝衣하고 斬東市하다
謁者僕
鄧公
注+[釋義]漢書에 作鄧先이라 孔文祥曰 姓은 鄧이요 名은 先이라이 上書言軍事曰 吳爲反計 數十歲矣
라
發怒削地하야 以誅錯爲名이나 其意는 不在錯也니이다
夫鼂錯患諸侯彊大하야 不可制라 故로 請削之하야 以尊京師하니 萬世之利也어늘
計畫이 始行에 卒受大戮하야 內杜忠臣之口하고 外爲諸侯報仇하니 臣은 竊爲陛下不取也하노이다
吳王이 招納亡叛하야 反形已具하니 漢固不可不爲之慮也어니와 其他若楚, 趙, 常山, 膠西之徒는 初曷嘗有反謀者哉리오
向使鼂錯之議가 止於削吳면 則其所反也 獨一吳耳리라
今也에 削地之令이 未加之謀反之吳하고 而先加之未反之國하야 使吳王得以藉口하야 誘諸侯爲左右手하야 幾於危劉氏之社稷하니
吳王濞之謀反也는 其志蓋萌於太子博局之死하니 而停蓄含忍於文帝几杖之賜요 西向之心이 未嘗不欲逞也라
而鼂錯削地之策
이 適犯其怒
하야 而泄其不逞
注+[頭註]不快也니 謂不得恣肆快意者也라 一云 包藏禍心하고 不得逞者也라之謀
하야 卒死讒鋒
하야 爲言事者戒
하니 錯誠可悲也哉
인저
○ 亞夫言於上曰 楚兵
이 剽輕
注+[釋義]剽는 亦輕也니 不持重也라하니 難與爭鋒
이라
願
하야 絶其食道
라야 乃可制也
리이다 上
이 許之
하다
亞夫乘傳
하고 將會兵滎陽
할새 發至霸上
하니 趙涉
이 遮
亞夫曰 吳王
이 知將軍且行
하고 必置人於殽,
注+[釋義]殽는 山名이니 今陝縣이 是也라 東崤至西崤二十五里니 在秦關之東, 漢關之西라 殽는 通作崤라 括地志에 洛州永寧西北二十里 古殽道也라 澠은 屬弘農하니 禹貢所屬河西郡이라 澠은 當作黽이니 俗作澠이라之間
하리이다
且兵事
는 尙神密
이니 將軍
은 何不右去
하야 走藍田
注+[釋義]按漢地志에 京兆有藍田縣이라 括地志云 藍田山은 三皇舊居니 在雍州東南八十里라 從藍田關하야 西入縣이라, 出武關
注+[釋義]秦之南關也니 通南陽이라 括地志에 故關은 在商州商洛東하니 春秋時少習也라, 抵洛陽
하야 直入武庫
注+[釋義]在未央宮하니 蕭何造하야 以藏兵器라오
太尉如其計러니 至洛陽하야 喜曰 今吾據滎陽하니 滎陽以東은 無足憂者라하고 使使搜殽, 澠間이러니 果得吳伏兵하다
吳攻梁急
이어늘 亞夫堅壁不出
하고 使輕騎
로 出淮泗口
注+[釋義]在今淮安州北이라 水經注에 淮水는 在山陽北五里하니 淮水之會는 卽城角也라 左右兩川이 夾翼二水以入하니 卽泗口也라 自鼈山北으로 縈迴楚城하야 東入于海라하야 絶吳, 楚兵後
하고 塞其饟(餉)道
하니 吳糧絶卒飢
하야 數挑戰
호되 終不出
하다
條侯軍中이 夜驚하야 內相攻擊하야 擾亂至帳下로되 亞夫堅臥不起러니 頃之요 復定하다
吳犇壁東南陬어늘 亞夫使備西北이러니 已而요 果犇西北하야 不得入이라
吳, 楚士卒이 多飢死叛散하야 乃引去어늘 亞夫出精兵하야 追擊大破之하다
吳王
이 棄軍走度(渡)淮
注+[釋義]王氏曰 度는 與渡通하니 濟也라 風俗通云 淮廟在唐州東二十里라 廟前槐樹下에 有一泉眼하니 淮水出焉이라 其源甚窄하야 可驀而踰라가 流至揚, 徐間하야 始大라 禹貢蔡氏傳曰 淮水出南陽平氏縣胎簪山하야 北過桐柏山하야 東南入海라 今唐州에 有桐柏縣이라 走는 疾趨也라하야 保東越
이러니 東越
이 殺之
하다
楚王은 自殺하고 齊王은 飮藥死하고 膠西王은 自殺하고 膠東, 菑川, 濟南王은 皆伏誅하다
이때 상上이 아직 태자를 세우지 않았는데, 왕(梁王)과 더불어 잔치하며 술을 마시다가 조용히 말하기를 “천추만세千秋萬歲 후에 왕에게 전위傳位하리라.” 하니, 왕이 사양하였다.
왕은 비록 진담이 아닌 줄은 알았으나 마음속으로 기뻐하였고 태후太后 또한 그러하였는데,
첨사詹事注+[頭註]첨詹은 살핌이고 바침이다. 황후皇后와 태자太子가 각기 첨사詹事를 두었으니, 있는 곳에 따라 관명을 삼았다. 품계가 2천 석이다. 두영竇嬰이 술잔을 들어 올리며 아뢰기를 “천하라는 것은
고조高祖의 천하이고
부자父子가 서로
전위傳位함은
한漢나라의 약속인데,
상上께서 어떻게
양왕梁王에게 전위한단 말입니까?” 하니,
태후太后가 이로 말미암아 두영竇嬰을 미워하니, 양왕梁王이 이 때문에 더욱 교만하였다.
처음
효문제孝文帝 때에
오吳나라 태자가 들어와 뵐 때에 황태자를 모시고 술을 마시며 바둑을 두었는데,
오吳나라 태자가 바둑을 두다가 길을 다투며
注+[釋義]쟁도爭道는 장기를 두는 길을 다툼을 이른다. 불공不恭하자, 황태자가 바둑판을
注+[釋義]박국博局은 지금 바둑판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끌어다가 던져서 죽이니,
注+[釋義]서광徐廣이 말하기를 “제提는 음이 제弟이다.” 하였다. 《사기史記》 〈주발세가周勃世家〉에 “태후太后가 모서冒絮를 문제文帝에게 던졌다.” 하였는데,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복건服虔이 이르기를 ‘제提는 음이 제弟이니 혹은 제啼자로도 쓴다.’ 하였으니, 잘못이다. 소해蕭該는 ‘음이 저이고 제提는 던짐이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소해蕭該의 음이 옳다.” 하였다. 오왕吳王이 이로 말미암아 차츰 제후왕의
예禮를 잃어서 병을 핑계 대고
경사京師에 조회 오지 않다가 처음으로 배반할 계획을 두었다.
- 《사기史記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는 이 구句가 없음 - 문제文帝가 오왕吳王에게 궤장几杖을 하사하고 늙었다 하여 조회하지 말라 하니, 오吳나라가 그 죄를 풀게 되었고 배반하려던 계획도 더욱 해이해졌다.
그러나
오왕吳王이 소유한 나라는 구리와 소금을 밑천으로 삼았기
注+[頭註]오吳나라에 동산銅山이 있으니, 천하의 망명한 자들을 불러 모아 동산銅山에서 동銅을 캐어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세금이 없어 국가의 재정이 풍족한 것이다. 때문에 〈재정이 풍족하여〉 백성들이 딴 부세가 없었고,
군국郡國의 관리가 와서 도망한 사람을 체포하고자 하면
注+[釋義]망인亡人을 체포한다는 것은 화禍를 피하여 도망한 자를 토벌하여 체포함을 이른다. 공공연히 금하고 내주지 않으니,
注+[釋義]《사기史記》 〈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는 공公이 송訟으로 되어 있는데, 주註에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송訟은 공公이다.”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송訟은 음이 용이니, 서로 용납하여 금지하고 주지 않음을 말한다.” 하였다. 이와 같이 한 것이 40여 년이었다.
조조鼂錯가 자주 글을 올려 오吳나라의 잘못은 영토를 떼어 낼 만하다고 말하였으나 문제文帝가 너그러워 차마 벌을 내리지 않으니, 이 때문에 오吳나라가 날로 더욱 횡포를 부렸다.
경제景帝가 새로 즉위하자, 조조鼂錯가 상上을 설득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옛날에 고제高帝가 처음 천하를 평정하시자 형제가 적고 여러 아들들이 약하다 하여 동성同姓을 크게 봉해주시니, 제齊나라는 70여 성읍城邑이요, 초楚나라는 40여 성읍이요, 오吳나라는 50여 성읍이었습니다.
그리하여 세
서얼庶孼을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정처正妻의 장자長子를 적嫡이라 하고, 그 나머지를 서庶라 하고, 첩과 노비의 자식을 얼孼이라 하니, 얼孼이라는 말은 나무의 옆에서 나온 싹이다. 죄가 있는 여자는 적몰籍沒하여 사역시킬 뿐인데, 군주에게 총애를 받아서 자식을 낳으면 나무가 이미 베어졌으나 움싹이 나오는 것과 같은 것이다. 알枿은 얼蘖과 통한다.” 봉하여 천하의 절반을 나누어 주셨습니다.
지금 오왕吳王이 예전에 태자의 일로 틈이 있다 하여 거짓으로 병을 핑계 대고 조회 오지 않으니, 옛 법에 마땅히 죽여야 하는데 문제文帝가 차마 하지 못하시어 인하여 궤장几杖을 하사하시니, 덕이 지극히 후합니다.
마땅히 잘못을 고쳐 스스로 새로워져야 하는데 도리어 더욱 교만하고 넘쳐서, 산에 나아가 구리를 캐어 돈을 주조하고 바닷물을 달여 소금을 만들며 천하의 도망한 사람들을 유인하여 난을 일으킬 것을 도모합니다.
지금 오吳나라의 영토를 떼어 내도 반란하고 떼어 내지 않더라도 또한 반란할 것이나 땅을 떼어 내면 반란은 빨라도 화가 작고 떼어 내지 않으면 반란은 더디나 화가 클 것입니다.”
- 이상은 《사기史記오왕비열전吳王濞列傳》에 나옴 -
상上이 공경公卿, 열후列侯와 종실宗室들로 하여금 여럿이 모여 의논하게 하니, 〈조조鼂錯의 말에〉 감히 논란하는 자가 없었다.
처음에
초楚나라
원왕元王이 글을 좋아하여
노魯나라
신공申公과
注+[釋義]신공申公은 노魯나라 사람이다. 《사기史記》 〈유림전儒林傳〉에 이르기를 “시詩로 말하면 노魯나라에서는 신배공申培公이다.” 하였는데, 위소韋昭가 말하기를 “배培는 신공申公의 이름이다.” 하였다.목생穆生,
백생白生과 함께
부구백浮丘伯에게
注+[釋義]부구백浮丘伯은 제齊나라 사람이니, 부구浮丘는 복성이고 백伯은 이름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여후呂后 때에 부구백浮丘伯이 장안長安에 있었는데, 신공申公이 원왕元王의 아들 영郢과 함께 모두 《시경詩經》을 배웠다.” 하였다. 《
시경詩經》을 배웠는데,
초楚나라에 왕 노릇 하게 되자 세 사람을
중대부中大夫로 삼았다.
목생穆生이 술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원왕元王은 매번 술자리를 베풀 적에 항상 목생穆生을 위하여 단술을 진설하였다.
아들 이왕夷王과 손자 왕무王戊가 즉위함에 미쳐서도 항상 단술을 진설하였는데, 뒤에는 마침내 진설하는 것을 잊었다.
목생穆生이 물러가며 말하기를 “떠나갈 만하다.
단술을 진설하지 않으니, 왕의 뜻이 태만해진 것이다.
떠나가지 않으면
초楚나라 사람이 장차 나를 〈죄인으로 만들어서〉 시장에서 재갈을
注+[附註]겸鉗은 쇠사슬로 목을 묶는 것이다. 《사기史記》 〈원왕열전元王列傳〉에 “왕무王戊가 지나치게 포악하자, 신공申公과 백생白生이 간하였으나 듣지 않고 이들을 죄인으로 만들고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을 입혀서 절구질하게 하여 시장에서 방아를 찧게 했다.” 하였다. 서미胥靡는 연결하여 묶어서 따라 다니며 복역하게 하는 것이다. 저구杵臼는 나무로 절구공이를 만들어 손으로 찧는 것이니, 지금 보구步臼하는 자를 이르고, 자의赭衣는 죄인이 입는 붉은 옷이다. 몸을 바로하여 방아찧는 것을 아용雅舂이라 한다. 물릴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병으로 사직하고 떠나갔다.
초왕楚王무戊가
注+[釋義]초왕楚王무戊는 고제高帝의 아우인 초왕楚王교交의 손자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21년에 반란하였으니, 팽성彭城에 도읍하였다. 조회를 오자,
조조鼂錯가 인하여 말하기를 “
무戊가 지난해
박태후薄太后를 위하여
복服을 입을 적에 복 입는 곳에서 은밀히 간통했습니다.”
注+[頭註]복사服舍에서 간음한 것이니, 복사服舍는 상복을 입는 장소이다. 라고 하여
동해군東海郡을 떼어 내고,
지난해에
조왕趙王이
注+[釋義]조왕趙王은 이름이 수遂이니, 고제高帝의 손자인 유왕幽王우友의 아들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26년에 반란하였는 바, 한단邯鄲에 도읍하였다. 죄가 있다 하여
상산군常山郡을 떼어 내고,
교서왕膠西王앙卬은
注+[釋義]앙卬은 고제高帝의 손자인 제齊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이니, 옛 평창후平昌侯이다. 왕위를 계승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밀주密州의 고밀현高密縣에 도읍하였다. 살펴보건대 고밀高密은 지금의 교주膠州에 속하니, 교주膠州의 치소治所가 교서현膠西縣이다. 관작을 팔아먹은 일로 간사(부정)함이 있다 하여 여섯
현縣을 떼어 내었다.
조정의 신하들이 막
오吳나라의 땅을 떼어 낼 것을 의논하였는데,
오왕吳王은
注+[釋義]오왕吳王(濞)은 유중劉仲의 아들이다. 《사기색은史記索隱》에 이르기를 “팽澎은 비濞의 자字이다.” 하였다. 《사기정의史記正義》에 이르기를 “오吳에 도읍하였다고 하였으나 실제는 강도江都에 있었다.” 하였다. 제후들의 땅을 떼어 냄이 끝이 없을까 두려워해서 인하여 계책을 내어
거사擧事할 적에
교서왕膠西王을 설득하여
제齊,
치천菑川,
注+[釋義]치천왕菑川王은 이름이 현賢이니, 고제高帝의 손자인 제齊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로 옛 무성후武城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극劇에 도읍하였다. 살펴보건대 극현劇縣은 치천菑川에 속하였다. 치천菑川은 수隋나라가 치주菑州를 두었으니, 지금의 반양盤陽이 이곳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극성劇城은 청주靑州수광현壽光縣 남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하였다. 교동膠東注+[釋義]교동왕膠東王은 이름이 웅거雄渠이니, 고제高帝의 손자인 제齊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로 옛 백석후白石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즉묵卽墨에 도읍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즉묵卽墨의 옛 성은 지금의 등주登州교수현膠水縣 동쪽 60리 지점에 있었다. 그러므로 교동膠東이라 한 것이다.” 하였다. ,
제남濟南과
注+[釋義]제남왕濟南王은 이름이 벽광辟光이니, 벽辟은 음이 벽이다. 고제高帝의 손자인 제齊나라 도혜왕悼惠王의 아들이니, 옛 역후朸侯이다. 즉위한 지 11년에 반란하였는 바, 제남濟南에 도읍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제남濟南의 옛 성은 치천菑川장산현長山縣 서북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하였다. 약속하게 하니,
초楚와
조趙가 모두 반란하였다.
사자使者를 내어 제후들에게 글을 보내어
조조鼂錯의 죄상을
注+[釋義]상狀은 형용함이다. 그 글에 조조鼂錯의 죄를 형용한 것이니, 《장자莊子》에 “스스로 그 과실을 기록했다.”고 말한 것과 같다. 적어서 병력을 연합하여 그를 죽이고자 하였다.
- 《한서漢書오왕비전吳王濞傳》에는 이 두 구句가 없음 -
처음에 문제文帝가 붕崩하려 할 적에 태자에게 경계하기를 “만일 위급한 일이 있거든 주아부周亞夫는 참으로 군대를 거느리는 임무를 맡길 만하다.” 하였는데,
오吳와 초楚 등 7국이 반란하였다는 글이 보고되자, 상上이 마침내 중위中尉인 주아부周亞夫를 임명하여 태위太尉로 삼아서 36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가서 오吳와 초楚를 공격하게 하고, 역기酈寄를 보내어 조趙를 공격하게 하고, 난포欒布를 보내어 제齊를 공격하게 하였다.
조조鼂錯는 본래 오吳나라 정승 원앙袁盎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 이
구句는 똑같지 않음 -
원앙袁盎이 밤에
두영竇嬰을 만나
오吳나라가 배반한 이유를 말한 다음
상上의 앞에 가서 구두로 상황을 대답할 것을 원하였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장주章奏를 사용하지 않고 주상主上의 앞에 이르러서 입으로 대답하기를 원함을 이른다.”
두영竇嬰이 궁중에 들어가 상上에게 말하자, 상上이 마침내 원앙袁盎을 부르니 원앙袁盎이 들어가 뵈었다.
상上이 이때 막
조조鼂錯와 군량 조달을 헤아리고 있었는데,
注+[頭註]조調는 계산함이니, 병식兵食(군량)을 계산해 냄을 이른다. 상上이
원앙袁盎에게 묻기를 “지금
오吳와
초楚가 배반하니,
공公의 뜻에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하자, 대답하기를 “좌우를 물리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조조鼂錯가 종종걸음으로 동쪽 행랑으로 피하면서 매우 한스럽게 여겼다.
상上이 마침내 원앙袁盎에게 묻자, 대답하기를 “오吳와 초楚가 서로 편지를 보내어 말하기를 ‘고제高帝가 자제子弟를 왕 노릇 시킬 적에 각각 나누어 준 땅이 있었는데, 지금 적신賊臣인 조조鼂錯가 제멋대로 제후들의 잘못을 지적하여 그 땅을 깎아 빼앗았다.
이 때문에 반란하여 함께 조조鼂錯를 죽이고 옛 땅을 회복하고서 그만두고자 한다.’ 하니, 지금의 계책은 오직 조조鼂錯를 목 베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칠국七國을 용서하고 그 옛 땅을 회복해 주면 군대가 병기의 칼날에 피를 묻히지 않고도 모두 중지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묵묵히 한동안 있다가 말하기를 “다만 진실로 어떠한가 할 뿐이니, 내가 한 사람을 아껴서 천하에 사죄하지는 않는다.” 하였는데, 조조鼂錯는 전혀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상上이 중위中尉로 하여금 조조鼂錯를 불러 속여서 수레를 태워 시장을 순행하게 하니, 조조鼂錯가 조복朝服을 입고 동쪽 시장에서 참형을 당하였다.
알자복야謁者僕射인
등공鄧公이
注+[釋義]등공鄧公은 《한서漢書》에 ‘등선鄧先’으로 되어 있다. 공문상孔文祥이 말하였다. “성은 등鄧이요 이름은 선先이다.” 상소하여
군사軍事에 대해 말하기를 “
오吳나라가 반란할 계획을 세운 지가 수십 년입니다.
땅을 깎은 데 성을 내어 조조鼂錯를 죽이는 것을 명분으로 삼았으나 그 뜻은 조조鼂錯에게 있지 않습니다.
조조鼂錯는 제후들이 강대해져서 제재할 수 없음을 근심하였기 때문에 땅을 떼어 내어 경사京師를 높이기를 청하였으니, 이는 만대萬代의 이로움입니다.
그런데 계획이 처음 행해짐에 갑자기 큰 죽임을 당하여 안으로는 충신의 입을 막고 밖으로는 제후를 위하여 원수를 갚아주니, 신은 삼가 폐하를 위하여 취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한숨을 쉬며 말하기를 “나 또한 한스럽게 여기노라.” 하였다.
“오왕吳王은 도망한 자와 배반한 자들을 불러들이고 받아들여 배반할 형세가 이미 갖추어졌으니, 한漢나라가 진실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었으나 기타 초楚나라와 조趙나라, 상산常山, 교서膠西의 무리로 말하면 처음에 어찌 일찍이 모반하려는 자가 있었겠는가.
그때 만일 조조鼂錯의 의론이 오吳나라의 땅을 깎는 데에 그쳤더라면 반란한 것이 다만 오吳나라뿐이었을 것이다.
이제 땅을 깎으라는 명령이 모반한 오吳나라에게 가해지지 않고 모반하지 않은 나라에 먼저 가해져서, 오왕吳王으로 하여금 이를 구실삼아 제후諸侯들을 유인하여 좌우左右의 수족手足으로 삼아서 유씨劉氏의 사직社稷을 거의 위태롭게 하였다.
그렇다면 양자운揚子雲이 조조鼂錯를 어리석다고 말하였으니, 진실로 어리석다고 이를 만하다.”
“오왕吳王비濞가 모반한 것은 그 뜻이 태자太子가 자기 아들을 장기판으로 쳐 죽인 데서 시작되었으니, 문제文帝가 궤장几杖을 하사해 줌으로 인해 분한 마음을 쌓아두고 참은 것이요, 서쪽(長安)을 향하여 공격하려는 마음은 〈분함을〉 풀고 싶어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경제景帝가 즉위했을 때에 비濞가 경사京師를 곁눈질하여 개처럼 으르렁거리고 물어뜯으려고 한 것이 여러 번이었다.
그런데
조조鼂錯의 땅을 깎는 계책이 마침 그의 노여움을 건드려 〈마음속에 품고〉 풀지 못한
注+[頭註]불령不逞은 불쾌不快함이니, 제멋대로 행동하여 뜻에 상쾌하지 못한 자를 이른다. 일설一說에는 “나쁜 마음을 마음속에 품고 이것을 풀지 못하는 자이다.”라고 하였다. 계책을 누설해서 끝내 참소하는 칼날에 죽음으로써 일을 말하는 자들의 경계가 되었으니,
조조鼂錯는 참으로 가련하다.”
주아부周亞夫가
상上에게 말하기를 “
초楚나라 군대는 날래고 가벼우니,
注+[釋義]표剽 또한 가벼움이니, 몸가짐이 진중하지 못한 것이다. 더불어
예봉銳鋒을 다투기가 어렵습니다.
원컨대 양梁나라를 버려서 그 식량 수송로를 끊어야만 비로소 제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상上이 이를 허락하였다.
주아부周亞夫가 역말을 타고 장차 군대를
형양滎陽에서 회합하려 하였는데, 출발하여
패상霸上에 이르니,
조섭趙涉이 길을 가로막고
주아부周亞夫를 설득하기를 “
오왕吳王은 장군이 장차 이곳으로 갈 것을 알고는 반드시
복병伏兵을
효산殽山과
민수澠水의
注+[釋義]효殽는 산 이름이니, 지금 섬현陝縣이 이곳이다. 동효東崤로부터 서효西崤에 이르기까지 25리이니, 진관秦關의 동쪽, 한관漢關의 서쪽에 있다. 효殽는 효崤와 통용한다. 《괄지지括地志》에 “낙주洛州영녕현永寧縣 서북쪽 20리 지점이 옛날 효도殽道이다.” 하였다. 민澠은 홍농弘農에 속하니, 《서경書經》 〈우공禹貢〉에는 하서군河西郡에 속하였다. 민澠은 민黽이 되어야 하니, 세속에서 민澠으로 쓴다. 사이에 두었을 것입니다.
또 군대의 일은 신속하고 은밀함을 숭상하니, 장군은 어찌하여 오른쪽으로 가서
남전藍田으로
注+[釋義]남전藍田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경조京兆에 남전현藍田縣이 있다.” 하였다. 《괄지지括地志》에 “남전산藍田山은 삼황三皇이 옛날에 살던 곳이니, 옹주雍州의 동남쪽 80리 지점에 있다. 남전관藍田關을 따라 서쪽으로 현縣에 들어간다.” 하였다. 달려가
무관武關을
注+[釋義]무관武關은 진秦나라의 남쪽 관문이니, 남양南陽과 통한다. 《괄지지括地志》에 “옛 관문은 상주商州상락현商洛縣 동쪽에 있었으니, 춘추春秋 때의 소습少習이다.” 하였다. 나와
낙양洛陽에 이르러 곧바로
무고武庫로
注+[釋義]무고武庫는 미앙궁未央宮에 있었으니, 소하蕭何가 만들어 병기를 보관하였다. 들어가지 않습니까?
〈이렇게 할 경우〉 제후들이 이것을 들으면 장군이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여길 것입니다.” 하였다.
태위太尉가 그의 계책과 같이 하였는데, 낙양洛陽에 이르러 기뻐하며 말하기를 “내 이제 형양滎陽을 점거하였으니, 형양滎陽 이동은 굳이 근심할 것이 없다.” 하고, 사자使者를 시켜 효산殽山과 민수澠水의 사이를 수색하게 하였는데, 과연 오吳나라의 복병伏兵을 찾아내었다.
오吳나라가
양梁나라를 맹렬히 공격하자,
주아부周亞夫가 성벽을 굳게 지키며 출전하지 않고, 경무장한 기병으로 하여금
회수淮水와
사수泗水의 어귀로
注+[釋義]회사구淮泗口는 지금 회안주淮安州의 북쪽에 있다. 《수경주水經注》에 “회수淮水는 산양山陽 북쪽 5리 지점에 있으니, 회수淮水가 모이는 곳은 바로 성城 모퉁이이다. 좌우의 두 냇물이 두 물을 나래처럼 끼고 들어오니, 바로 사구泗口이다. 별산鼈山 북쪽으로부터 초성楚城을 감돌아 동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나가
오吳‧
초楚의 군대의 후미를 차단하고 식량 수송로를 막게 하니,
오吳나라가 양식이 떨어져 군사들이 굶주려서 여러 번 도전하였으나
주아부周亞夫는 끝내 출전하지 않았다.
조후條侯(周亞夫)의 군중이 밤에 놀라서 안에서 서로 공격하여 소란함이 장막 아래까지 이르렀으나 주아부周亞夫가 꼼짝 않고 누워 일어나지 않았는데, 잠시 후 다시 진정되었다.
오吳나라 군대가 주아부周亞夫의 성벽 동남쪽 모퉁이로 달려오자, 주아부周亞夫는 서북쪽을 대비하게 하였는데, 얼마 후 과연 〈오吳나라 군대가〉 서북쪽으로 달려왔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오吳‧초楚의 사졸들이 대부분 굶어 죽고 배반하여 흩어져 마침내 군대를 이끌고 떠나가자, 주아부周亞夫가 정예병을 내어 추격해서 크게 격파하였다.
오왕吳王이 군대를 버리고 달아나
회수淮水를 건너서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도度는 도渡와 통하니, 건넘이다. 《풍속통風俗通》에 이르기를 ‘회수淮水의 사당이 당주唐州 동쪽 20리 지점에 있다. 사당 앞 회화나무 아래에 한 샘구멍이 있으니, 여기에서 회수淮水가 나온다. 그 수원水源이 매우 좁아서 사람들이 뛰어넘어 건널 수 있을 정도인데, 물이 흘러 양주揚州와 서주徐州 사이에 이르러 비로소 커진다.’ 하였다.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채씨전蔡氏傳에 이르기를 ‘회수淮水가 남양南陽평씨현平氏縣태잠산胎簪山에서 나와 북쪽으로 동백산桐柏山을 지나 동남쪽으로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지금 당주唐州에 동백현桐柏縣이 있다. 주走는 빨리 달림이다.” 동월東越을 확보하였는데,
동월東越이 그를 죽였다.
초왕楚王은 자살하였고, 제왕齊王은 독약을 마시고 죽었고, 교서왕膠西王은 자살하였고, 교동왕膠東王과 치천왕菑川王‧제남왕濟南王은 모두 죄를 받고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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