十二月에 帝崩하고 太子卽皇帝位하니 年十六이러라
漢興
에 接秦之弊
하야 自天子
로 不得具鈞駟
注+[釋義]王氏曰 天子駕駟馬하니 其色宜齊同이로되 言當時國家貧하야 天子不能具鈞色之駟馬라 漢書에 作醇駟하니 注에 醇은 與純同이니 一色也라하고 而將相
이 或乘牛車
하고 齊民
이 無蓋藏
注+[釋義]如淳曰 齊等하야 無有貴賤이라 故曰齊民이니 若今言平民也라 記王制曰 古者에 公田을 籍而不稅라하니 其法이 計口授田하야 初無貧富不均之患이라 故曰齊民이니 言民業均齊也라 無蓋藏은 謂無物可蓋藏也라 月令에 孟冬에 命百官하야 謹蓋藏이라한대 註에 府庫囷倉에 有藏物也라이라
天下已平에 高祖乃令賈人으로 不得衣絲乘車하고 重租稅以困辱之러니 孝惠, 高后時에 爲天下初定이라하야 復弛商賈之律이라
然
이나 이 亦不得仕宦爲吏
하고 量吏祿,
官用
하야 以賦於民
하고 而山川園池市井租稅之入
을 自天子
로 以至于封君湯沐邑
히 皆各爲私奉養焉
하야 不領於天下之經費
하고 하야 以給中都官
注+[頭註]京師諸官府라호되 歲不過數十萬石
이러라
繼以孝文, 孝景
이 淸淨恭儉
하야 安養天下
하니 〈史無此二句〉 七十餘年之間
에 國家無事
하고 非遇水旱之災
하야 民則人給家足
하야 都鄙
注+[頭註]國都及邊鄙라에 廩庾皆滿
하고 而府庫
에 餘貨財
하야 京師之錢
이 累巨萬
이라
貫朽而不可校
하고 太倉之粟
이 陳陳相因
하야 充溢露積
注+[通鑑要解]積은 音恣니 儲蓄也라 凡指所聚之物而言之則去聲이요 聚物而積累之則入聲也라於外
하야 至腐敗不可食
이라
衆庶街巷
注+[頭註]邑中道也니 又直曰街요 曲曰巷이라 阡陌은 田間界也요 又壟也라有馬
하니 而阡陌之間
에 成群
하야 乘字牝者
를 擯而不得聚會
注+[釋義]王氏曰 字牝은 畜母也라 漢書音義曰 皆乘父馬하니 有牝馬間其間이면 則相이라 故斥不得聚會라하고 守閭閻者食粱肉
하고 爲吏者長子孫
注+[釋義]時無事하야 吏不數遷하야 至於子孫長大而不轉職任이라하고 居官者以爲姓號
注+[釋義]王氏曰 謂以官名爲姓氏라 如淳曰 倉氏庾氏는 則倉庫吏之後라라
故
로 人人自愛而重犯法
注+[釋義]重은 難也라하야 先行義而後絀(屈)辱焉
이러라
當此之時
하야 罔(網)疏而民富
하고 役財驕溢
하야 或至兼幷
하며 豪黨之徒 以武斷於鄕曲
注+[釋義]鄕曲豪富 無官位로되 而以威勢主斷曲直이라 故曰武斷이라 秦國策注에 曲者는 里之一曲이니 如韋曲杜曲이라하고 宗室有土
注+[頭註]宗室受封邑有地者라와 公卿大夫以下 爭事奢侈
하야 室廬輿服
이 僭于上
하야 無限度
하니 物盛而衰
는 固其變也
라
自是之後로 孝武內窮侈靡하고 外攘夷狄하니 天下蕭然하야 財力耗矣러라
孔子稱 斯民也는 三代之所以直道而行也라하시니 信哉라
周秦之弊
는 罔(網)密文峻
이로되 而奸軌
注+[頭註]軌는 音咎니 與究通하니 亂在外爲奸이요 在內爲軌라不勝
이러니 漢興
에 掃除煩苛
하고 與民休息
하며 至于孝文
하야 加之以恭儉
하고 孝景遵業
하야 五六十載之間
에 至於移風易俗
하야 黎民醇厚
하야
文景養民이 厚矣나 稽諸仲尼之言이면 則亦富庶之而已요 未有以敎之也라
然이나 文帝는 寬厚長者라 以德化民하야 無事則謙抑如不能하고 有事則英氣奮發이어니와
景帝
는 刻薄任數
하야 以詐力御下
하야 平居則誅賞肆行
하고 緩急則惴慄失措
하며 而又以無寵廢正后
하야 而夫婦之道薄
하고 以無罪廢太子
하야 而父子之恩睽
하고 過愛梁王
하야 輕許傳位
하야 而兄弟之好 不終
하고 信讒用佞
하야 絀申屠嘉
注+[頭註]鼂錯寵幸하야 言事輒聽하고 法令多更定이라 丞相嘉自絀疾錯러니 因事請誅錯호되 上不聽한대 嘉嘔血死하니라하고 戮鼂錯
하고 殺周亞夫
注+[頭註]亞夫子盜賣官物하야 連汚亞夫하야 下廷尉한대 嘔血死하니라하야 而君臣之義 有缺
하니 其大致懸絶
이 如此
요
獨節儉愛民一事가 克遵前業耳니 夫豈可與文帝同稱也哉아
12월에 황제가 붕崩하고 태자가 황제의 지위에 오르니, 나이가 16세였다.
“
한漢나라가 일어날 적에
진秦나라의 피폐함을 이어서
천자天子로부터 같은 색깔의
사마駟馬를 갖추지 못하였고,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천자天子는 사마駟馬를 타니, 말의 색깔이 똑같아야 하는데, 당시에 국가가 가난하여 천자天子가 똑같은 색깔의 사마駟馬를 갖출 수 없었음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에는 ‘순사醇駟’로 되어 있는데, 주注에 ‘순醇은 순純과 같으니, 색깔이 똑같은 것이다.’ 하였다.” 장수와 정승이 혹 소가 끄는 수레를 탔으며, 평민들은 덮어 보관할 만한 물건이 없었다.
注+[釋義]여순如淳이 말하였다. “등급이 똑같아서 귀천이 없으므로 제민齊民이라 한 것이니, 지금 평민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예기禮記》 〈왕제王制〉에 이르기를 “옛날에 공전公田은 백성들의 힘을 빌려 경작하고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 하였으니, 그 법이 식구를 계산하여 전지田地를 주어서 애초에 빈부가 똑같지 않은 근심이 없었기 때문에 제민齊民이라 한 것이니, 백성의 생업이 똑같음을 말한 것이다. 무개장無蓋藏은 덮어 보관할 만한 물건이 없음을 말한 것이다. 〈월령月令〉에 “맹동孟冬에 백관百官에게 명하여 개장蓋藏을 삼간다.” 하였는데, 주註에 “부고府庫와 균창囷倉에 보관한 물건이 있다.” 하였다.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고제高帝가 마침내 상인들로 하여금 비단옷을 입거나 수레를 타지 못하게 하였고, 조세를 무겁게 하여 곤욕스럽게 하였는데, 효혜제孝惠帝와 고후高后 때에는 천하가 처음으로 평정되었다 하여 다시 상고商賈를 제재하는 법률을 풀어주었다.
그러나
시정市井(상인)의 자손이 또한 벼슬하여 관리가 될 수는 없었으며, 관리의 녹봉을 헤아리고 관청의 비용을 헤아려서 백성들에게 세금을 거두고,
산천山川과
원지園池와
시정市井에 대한 조세의 수입을
천자天子로부터
봉군封君(제후)의
탕목읍湯沐邑에 이르기까지 모두 각각 사사로이 봉양하게 하여 천하의 경비에 넣지 않고,
산동山東의 곡식을
조운漕運하고 수송하여
중도中都(京師)의 여러
관부官府에
注+[頭註]중도관中都官은 경사京師의 여러 관부官府들이다. 공급하였으나 1년에 수십만 석에 지나지 않았다.
뒤이어
효문제孝文帝와
효경제孝景帝가
청정淸淨하고 공손하고 검소하여 천하를 편안히 기르니, - 《
사기史記》에는 이 두
구句가 없음 - 70여 년 동안 국가에 일이 없고
수재水災와
한재旱災를 만나지 않아, 백성들은 사람마다 넉넉하고 집집마다 풍족하여
도비都鄙(도시와 시골)에
注+[頭註]도비都鄙는 국도國都와 변비邊鄙(먼 시골)이다. 창고가 모두 가득하고
부고府庫에
재화財貨가 남아서
경사京師의 돈이 여러
거만巨萬이었다.
그리하여 돈꿰미가 썩어서 돈이 얼마인지를 따질 수가 없고,
태창太倉의 곡식이 묵고 묵어 서로 쌓여서 차고 넘쳐 밖에 노적을 쌓아서
注+[通鑑要解]적積은 음이 자이니 저축함이다. 무릇 모아놓은 물건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거去이고, 물건을 모아 쌓아놓는 것을 가리켜 말할 때에는 입入이다. 곡식이 부패하여 먹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여러 서민들도 길거리에
注+[頭註]가항街巷은 읍邑 안의 길이니, 또 곧은 것을 가街라 하고 굽은 것을 항巷이라 한다. 천맥阡陌은 밭 사이의 경계이고 또 밭두둑이다. 말을 보유하니, 길 사이에 말이 무리를 이루어서 새끼 딸린 암말을 탄 자는 물리쳐 모임에 모이지 못하게 하고,
注+[釋義]乘字牝者 빈이부득취회擯而不得聚會: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자빈字牝은 새끼를 기르는 어미 말이다. 《한서음의漢書音義》에 ‘사람들이 모두 수말을 탔으니, 암말이 그 사이에 끼면 서로 차고 물기 때문에 배척하여 모이지 못하게 한 것이다.’ 하였다.” 여염을 지키는 자들이 기장과 고기를 먹고, 관리가 된 자는 자손이 장성할 때까지 계속하였고(직임을 바꾸지 않았고),
注+[釋義]당시에 일이 없어 관리들이 자주 옮겨 다니지 않아서 자손이 장성하고 큼에 이르도록 직임을 바꾸지 않은 것이다. 관직에 있는 자는 관명을
성姓의 칭호로 삼았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관직의 이름을 가지고 성씨를 삼음을 이른다.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창씨倉氏와 유씨庾氏는 창고를 맡은 관리의 후손이다.’ 하였다.”
이 때문에 사람마다 자기 몸을 아껴서 법을 범하는 것을 어렵게 여겨
注+[釋義]중重은 어렵게 여김이다. 자신이
의義를 행함을 우선으로 여기고 남에게 굴욕을 보이는 것을 뒤에 하였다.
이때를 당하여
법망法網이 엉성하고 백성들이 부유하며 재물을 쓰는 것이 교만하고 지나쳐서 혹은
겸병兼幷함에 이르렀으며, 세력 있는 무리들이
향곡鄕曲에서 무력을 사용하여 위세를 부리고,
注+[釋義]豪黨之徒 이무단어향곡以武斷於鄕曲:향곡鄕曲에 부유한 자들은 관직과 지위가 없었으나 위세威勢로 곡직曲直을 결단함을 주관하였다. 그러므로 무단武斷이라 한 것이다. 《전국책戰國策》 〈진책秦策〉의 주注에 “곡曲이란 마을의 한 굽이이니, 위곡韋曲‧두곡杜曲과 같다.” 하였다. 토지를 소유한
종실宗室과
注+[頭註]유토有土는 종실宗室로서 봉읍封邑을 받아 토지를 소유한 자이다. 공경公卿과
대부大夫 이하가 다투어 사치를 일삼아서 집과 수레와 의복이
상上보다 참람하여 한도가 없었으니, 사물이 성하면 쇠하는 것은 진실로 변화의 이치이다.
이로부터 효무제孝武帝가 안으로는 사치와 화려함을 지극히 하고 밖으로는 이적夷狄을 물리치니, 천하가 소란하여 재력이 소모되었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경제기景帝紀〉 찬贊에 말하였다.
“공자孔子가 말씀하기를 ‘지금 이 백성들은 삼대시대三代時代에 정직한 도道를 행하던 백성이다.’ 하였으니, 참으로 옳은 말씀이다.
주周나라와
진秦나라의 병폐는 법망이 치밀하고 법조문이 준엄하였으나 간사한 자들을
注+[頭註]궤軌는 음이 구이니 궤宄와 통하는 바, 난亂이 외부에 있는 것을 간奸이라 하고 내부에 있는 것을 궤軌라 한다.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번거롭고 까다로운 법령을 제거하고 백성들과 함께 편안히 쉬었으며,
효문제孝文帝에 이르러서는 겸하여 공손하고 겸손하였고
효경제孝景帝는
선왕先王의
기업基業을 따라 5, 60년 동안 풍속을 바꿈에 이르러서 백성들이
순후醇厚하였다.
그리하여 주周나라에서는 성왕成王과 강왕康王을 칭하고 한漢나라에서는 문제文帝와 경제景帝를 말하니, 참으로 아름답다.”
치당致堂(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말하였다.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백성을 기른 것이 후하였으나 중니仲尼의 말씀을 가지고 상고해 보면 또한 백성들을 부유하게 하고 많게 하였을 뿐이요 가르침이 있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문제文帝는 관후寬厚한 장자長者라서 덕德으로써 백성들을 교화하여, 일이 없으면 겸양하여 능하지 못한 것처럼 하였고 일이 있으면 영기英氣가 빛을 발하였다.
그러나
경제景帝는 각박하고
술수術數에 맡겨서 속임수와 힘으로 아랫사람들을 제어하여, 평소에는 주벌과 상을 제멋대로 행하고 위급한 일이 발생하면 두려워서 조처할 바를 몰랐으며, 또 총애가 없다 하여
정후正后를 폐해서
부부간夫婦間의
도道가 박해졌고, 죄없이
태자太子를 폐하여
부자간父子間의 은혜가 괴리되었고,
양왕梁王을 지나치게 사랑하여 경솔하게
전위傳位하겠다고 허락하여
형제간兄弟間의 우호가 끝까지 이어지지 못하였고, 참소하는 말을 믿고서 간신을 등용하여
신도가申屠嘉를
注+[頭註]조조鼂錯가 총애를 받아 일을 말하면 그때마다 들어주고 법령을 많이 변경하였다. 신도가申屠嘉가 내침을 당하고는 조조鼂錯를 미워하였는데, 일로 인하여 조조鼂錯를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상上이 들어주지 않으니, 신도가申屠嘉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내치고
조조鼂錯를 죽이고
주아부周亞夫를 죽여서
注+[頭註]주아부周亞夫의 아들이 관청의 물건을 도둑질하여 팔아서 죄가 주아부周亞夫에게까지 연루되어 정위廷尉에게 내리니, 주아부周亞夫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군신간君臣間의 의리에 결함이 있었으니,
대체상大體上에 현격함이 이와 같았다.
다만 절약하고 검소하여 백성을 사랑한 한 가지 일만이 전왕前王의 업業을 따랐을 뿐이니, 어찌 문제文帝와 함께 칭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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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자] 3년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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