有司言縣官用度太空
이어늘 而富商大賈
는 冶鑄煮鹽
하야 財或
萬金
이로되 不佐國家之急
하니 請更錢造幣
하야 以贍用
하노이다
於是
에 以東郭咸陽, 孔僅
으로 爲大農丞
하야 領鹽鐵事
하고 桑弘羊
으로 以計算
하니 三人
이 言利事
에 析秋毫
注+[釋義]應劭曰 百物毫芒이 至秋皆美細하니 今謂三人言利事纖悉하야 皆能分析其秋毫也라矣
러라
公卿이 又請算及民車船하니 其法이 大抵出張湯이라
自古爲國에 將厚斂以取民이면 必以嚴刑峻法爲先하니
所以然者는 蓋衣食은 生民之命이라 賦斂繁多하면 怨讟將興하여 物議將騰하리니 若非峻法以鉗天下之口하여 使之俛首喪氣於下면 則法無緣可行일새라
武帝之興에 外事四夷하고 內興工役하여 財用不繼하니 始取文景賦斂之法하여 一切變易하여 增加初來未理會財賦호되 只於刑法上加工하여 招進張湯杜周之屬하여 爲廷尉하여
作
廢格
注+[頭註]格은 音閣이니 廢止也니 阻隔不行也라沮誹之獄
하여 上自公卿大臣
으로 下至百姓
히 皆畏法鉗口而不敢議
하니
太史公識得此意故로 不與桑弘羊孔僅作傳하고 却於張湯傳見之하며 不於刑法志에 說張湯杜周變法之因하고 却於食貨志言之라
如所謂法嚴令具와 興利之臣이 自此而始면 則其意를 可知矣니라
○ 初에 河南人卜式이 數請輸財縣官하야 以助邊이어늘 天子使使하야 問式欲官乎아 曰 不願也니이다
天子誅匈奴
하시니 愚以爲 賢者
는 宜死節於邊
하고 有財者
는 宜輸委
注+[頭註]委는 積也니 謂輸其所委라니 如此
면 而匈奴
를 可滅也
리이다
乃召拜式爲中郞하고 賜田十頃하고 布告天下하야 使明知之러니 未幾에 又擢式爲齊太傅하다
○ 上
이 與諸將議曰 翕侯趙信
注+[頭註]武帝元朔六年에 降于匈奴하니 單于以其姨妻之하고 與之謀漢하니라이 爲單于畫計
하야 常以爲漢兵
이 不能度(渡)幕輕留
注+[釋義]謂度沙漠하야 輕入而久留也라라하니
乃粟馬十萬
하야 令大將軍靑
과 票(驃)騎將軍
注+[原註]票는 勁疾貌라去病
으로 各將五萬騎
하니
大將軍은 出塞千餘里하야 度幕하야 捕斬首虜萬九千級하고
遂至
顔山 趙信城
하야 得匈奴積粟
하야 軍留一日
하고 悉燒其城餘粟而歸
하다
票騎將軍
은 出代, 右北平二千餘里
하야 封狼居胥山
注+[釋義]在匈奴中이라하고 禪於姑衍
注+[釋義]在匈奴中하니 封禪書註에 山阪曰衍이라하며 登臨翰海
注+[釋義]登海邊山以望海也라 如淳曰 北海名이니 在沙漠北이라 王氏曰 按翰海는 自是一大海名이니 群鳥解羽伏乳於此라 因名焉하니라하야 鹵(虜)獲七萬四百四十三級
하다
兩軍之出塞에 塞閱官及私馬하니 凡十四萬匹이러니 而後入塞者 不滿三萬匹이라
乃益置大司馬位하야 大將軍과 票騎將軍이 皆爲大司馬하다
是時에 漢所殺虜匈奴 合八九萬이요 而漢士卒의 物故 亦數萬이라
是後
에 匈奴遠遁
하야 而幕南
에 無王庭
注+[釋義]王氏曰 匈奴穹廬若庭이라 故云王庭也라이라
漢
이 度河
하야 自朔方以西
로 至令居
注+[釋義]地志에 張掖에 有令居縣하니 或音連이라히 往往通渠
하고 置田官吏卒五六萬人
하야 稍蠶食匈奴以北
이라
○ 齊人少翁이 以鬼神方으로 見上이어늘 上이 拜爲文成將軍이러니 歲餘에 其方이 益衰하야 神不至라
於是
에 誅文成將軍而隱之
注+[通鑑要解]隱之는 謂秘誅文成之事而不令人知之也라 齊人少翁이 以鬼神方見上한대 上有所幸王夫人卒이러니 少翁이 以方夜致鬼하야 如王夫人之貌라 太子自帷中望焉하다 拜少翁文成將軍이러니 後翁爲帛書하야 雜草飯牛하고 言曰 此牛腹中에 有奇라하야늘 殺牛하야 始得書甚怪러니 天子識其手書하고 於是에 誅而隱之하니라하다
유사有司가 말하기를 “현관縣官(지방 관서官署)의 용도(경비)가 크게 부족한데, 부유한 상인과 큰 장사꾼들이 쇠를 주조하고 소금을 구워서 재물이 혹 누만금累萬金이면서도 국가의 위급함을 돕지 않으니, 청컨대 돈을 바꾸어 화폐로 만들어서 재용財用을 넉넉하게 하소서.” 하였다.
이에
동곽함양東郭咸陽과
공근孔僅을
대농승大農丞으로 삼아서 소금을 굽고 쇠를 주조하는 일을 맡게 하고
상홍양桑弘羊으로 계산하게 하니, 세 사람이 이익이 될 일을 말함에 털끝만한 것까지도 분석하였다.
注+[釋義]응소應劭가 말하였다. “온갖 동물의 털이 가을이 되면 모두 아름답고 가늘어지니, 이제 세 사람이 이익이 될 일을 말함에 세밀하여 모두 아주 작은 것까지도 분석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공경公卿이 또 백성의 수레와 배에도 세금을 매길 것을 청하니, 그 법이 대부분 장탕張湯에게서 나왔다.
그러므로 백성들이 생업을 편안하게 여기지 못하여 모두 장탕張湯을 손가락질하며 원망하였다.
-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에 나오는 바, ‘공경우청公卿又請’ 이하부터는 글이 똑같지 않음 -
“예로부터 나라를 다스릴 적에 장차 세금을 많이 거두어 백성들을 수탈하려 하면 반드시 형벌을 엄하게 하고 법을 준엄하게 하는 것을 먼저 하였다.
이렇게 하는 이유는 의복과 음식은 백성의 생명이므로 세금을 많이 거두게 되면 원망하는 말이 장차 일어나서 사람들의 비난이 크게 비등沸騰할 것이니, 만약 법을 준엄하게 하여 천하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서 아래에서 고개를 떨구고 기운을 잃게 하지 않으면 법이 시행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무제武帝가 즉위한 뒤에 밖으로는 사방의 오랑캐들을 토벌하고 안으로는 토목공사를 크게 일으켜서 재정이 뒤를 잇지 못하자, 비로소 문제文帝와 경제景帝가 세금을 적게 거두던 법을 일체 바꾸어서 처음에 부가하지 않던 세금을 늘리려 하였는데, 다만 형법상刑法上에 가공加工을 하려 해서 장탕張湯과 두주杜周 등을 불러들여 정위廷尉로 삼았다.
그리하여
견지고종법見知故縱法과
감림부주법監臨部主法과 국가의 명령을 폐지하고
注+[頭註]격格은 음音이 각으로 폐지함이니, 막아서 행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비방하는
옥사獄事를 만들어서 위로는
공경대신公卿大臣으로부터 아래로는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법法을 두려워하여 입을 다물고 감히 비난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야 상홍양桑弘羊과 공근孔僅의 무리가 그 계책을 시행할 수 있었다.
태사공太史公(司馬遷)은 이러한 뜻을 알았기 때문에 〈《사기史記》에서〉 상홍양桑弘羊과 공근孔僅을 함께 묶어서 전傳을 짓지 않고 도리어 〈장탕전張湯傳〉에 이러한 사실을 드러내었으며, 《한서漢書》 〈형법지刑法志〉에는 장탕張湯과 두주杜周가 법을 변경한 이유를 말하지 않고 도리어 〈식화지食貨志〉에 이것을 말한 것이다.
이른바 ‘법이 엄해지고 명령이 구비되었다.’는 것과 ‘이익을 늘리는 신하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 것에서 그 뜻을 알 수 있다.”
처음에 하남河南 사람 복식卜式이 현관縣官에게 재물을 바쳐서 변경을 도울 것을 자주 청하자, 천자天子가 사자使者을 시켜 복식卜式에게 묻기를 “벼슬을 하고자 하는가?” 하니, 복식卜式이 대답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하였다.
“원통한 일이 있어서 말하고자 하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말하고 싶은 것이 없습니다.
천자天子께서
흉노匈奴를 토벌하시니,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건대 어진(싸움을 잘하는) 자는 마땅히 변방에서 몸을 바쳐 죽어야 하고, 재물이 있는 자는 마땅히 국가에 바쳐야 하니,
注+[頭註]위委는 쌓음이니 쌓아놓은 것을 실어서 보냄을 이른다. 이와 같이 하면
흉노匈奴를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상上이 이로 말미암아 그를 어질게 여겨서 높이고 드러내어 백성들을 넌지시 깨우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복식卜式을 불러 중랑中郎에 임명하고 밭 10경頃을 하사하고는 천하에 포고하여 이를 분명히 알게 하였는데, 얼마 안 있어 또다시 복식卜式을 발탁하여 제태부齊太傅로 삼았다.
- 《사기史記평준서平準書》에 나오고, 또 《한서漢書복식전卜式傳》에도 보임 -
상上이 여러 장수들과 의논하기를 “〈
흉노匈奴에게 투항한〉
흡후翕侯조신趙信이
注+[頭註]조신趙信이 무제武帝원삭元朔 6년年에 흉노匈奴에게 항복하자, 선우單于는 그의 이모姨母를 조신趙信에게 시집보내고 그와 더불어 한漢나라를 정벌할 것을 모의하였다. 선우單于를 위하여 계책을 세워 항상 이르기를 ‘
한漢나라 군대가 사막을 건너 쉽사리 들어와 오래 머물지 못할 것’
注+[釋義]도막경류度幕輕留는 사막을 건너서 쉽게 들어가 오랫동안 머뭄을 이른다. 이라고 하니,
이제 크게 사졸을 출동시키면 그 형세가 반드시 우리의 소원을 얻을 것이다.” 하고는
마침내 10만 필의 말에게 곡식을 먹이고
대장군大將軍위청衛靑과
표기장군驃騎將軍注+[原註]표票는 굳세고 빠른 모양이다. 곽거병霍去病으로 하여금 각각 5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게 하니,
대장군(衛靑)은 변방 천여 리를 나가 사막을 건너서 수급을 베고 포로로 잡은 것이 1만 9천 명이었다.
마침내 전안산窴顔山조신성趙信城에 이르러 흉노匈奴가 쌓아둔 곡식을 얻어 군사들을 먹이고 하루를 머문 다음 그 성城에 남아 있는 곡식을 모두 불태우고 돌아왔다.
표기장군(霍去病)은
대군代郡과
우북평右北平으로 2천여 리를 나가
낭거서산狼居胥山에서
注+[釋義]낭거서산狼居胥山은 흉노匈奴 가운데에 있다. 봉제封祭를 지내고
고연산姑衍山에서
注+[釋義]고연姑衍은 흉노匈奴 가운데에 있으니, 《사기史記》 〈봉선서封禪書〉의 주註에 “산판山阪을 연衍이라 한다.” 하였다. 선제禪祭를 지내고,
한해翰海의 산에 올라가
注+[釋義]등림한해登臨翰海는 해변의 산에 올라가 바다를 관망한 것이다. 여순如淳이 말하였다. “한해翰海는 북해北海의 이름이니, 사막의 북쪽에 있다.” 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살펴보건대 한해翰海는 본래 한 큰 바다의 이름이니, 새떼가 여기에서 깃털을 갈고 새끼를 치므로 인하여 이름하였다.” 7만 443명의
수급首級을 노획하였다.
두 군대가 변방을 나갈 적에 변방에서 관마官馬와 사마私馬를 점고하니 모두 14만 필이었는데, 뒤에 변방으로 들어온 것은 채 3만 필이 못 되었다.
이에 대사마大司馬의 지위를 더 두어 대장군과 표기장군이 모두 대사마大司馬가 되었다.
- 이상은 《한서漢書곽거병전霍去病傳》에 나옴 -
이때에 한漢나라가 죽이거나 사로잡은 흉노匈奴가 도합 8, 9만이었고, 한漢나라 사졸이 죽은 것도 또한 수만 명이었다.
이 뒤로
흉노匈奴가 멀리 도망하여 사막 남쪽에는
흉노왕匈奴王의 거처가 없게 되었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흉노匈奴의 왕이 거처하는 곳은 초막을 높게 지어 뜰과 같게 하였으므로 왕정王庭이라 한 것이다.”
한漢나라가
황하黃河를 건너
삭방朔方으로부터 서쪽으로
영거令居에
注+[釋義]《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장액군張掖郡에 영거현令居縣이 있으니, 영令은 혹 음을 련이라 한다. 이르기까지 왕왕 운하를 파서 물을 통하게 하고
둔전관屯田官과
이졸吏卒 5, 6만 명을 두어서
흉노匈奴이북以北 지역을 차츰 잠식하였다.
그러나 또한 마필馬匹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다시는 크게 흉노匈奴를 치기 위해 출격하지 못하였다.
- 이상은 《한서漢書》 〈흉노전匈奴傳〉과 〈위청전衛靑傳〉에 나옴 -
제齊나라 사람 소옹少翁이 귀신을 부리는 방술方術을 가지고 상上을 뵙자, 상上이 임명하여 문성장군文成將軍으로 삼았는데, 1년이 넘자 그 방술이 더욱 쇠퇴하여 신神이 이르지 않았다.
이에
문성장군文成將軍을 죽이고 이 사실을 숨겼다.
注+[通鑑要解]齊人少翁……誅文成將軍而隱之:숨겼다는 것은 문성장군文成將軍을 죽인 일을 숨겨 사람들로 하여금 알지 못하게 함을 이른다. 제齊나라 사람인 소옹少翁이 귀신을 부리는 방법을 가지고 상上을 뵈었다. 상上이 총애하던 왕부인王夫人이 죽었는데, 소옹少翁이 방술方術로 밤마다 귀신을 불러내니 왕부인王夫人의 모습과 똑같았다. 태자太子가 장막 안에서 그가 하는 것을 보고서 속임수임을 알았다. 소옹少翁을 문성장군文成將軍에 제수하였는데, 뒤에 소옹少翁이 비단에 글을 써서 풀과 섞어 소에게 먹이고는 말하기를 “이 소의 뱃속에 기이한 글이 있다.” 하므로 소를 잡아서 글을 얻고는 매우 기이하게 여겼으나 천자天子(武帝)가 마침내 그가 직접 쓴 것임을 알고는 이에 그를 죽이고 이 사실을 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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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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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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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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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술]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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