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中大夫公孫卿과 壺遂와 太史令司馬遷等이 言 曆紀壞廢하니 宜改正朔이니이다
上
이 詔兒(倪)寬
하야 與博士賜等
으로 共議
하니 以爲宜用夏正
注+[釋義]王氏曰 語云 行夏之時라한대 朱子集註曰 夏時는 謂以斗柄初昏建寅之月로 爲歲首也云云하니 蓋取其時之正與其令之善也라하니라이라하다
夏五月
에 詔卿, 遂, 遷等
하야 共造漢太初曆
하야 〈出律曆志〉 以正月
로 爲歲首
하고 色上(尙)黃
하고 數用五
注+[釋義]五는 土數也니 漢據土德이라 故用五라 嬾眞子曰 漢武造太初曆하고 數用五하니 注에 數用五는 謂印文也니 若丞相曰丞相之印章이니 諸卿及守相印文不足五字者를 皆以之字足之라하고 定官名
注+[附註]改郞中令曰光祿이요 大行令曰大鴻臚요 大農令曰大司農이요 尉曰執金吾요 右內史曰京兆尹이요 左內史曰左馮翊이요 主爵都尉曰右扶風이라하고 協音律
하다
自秦人으로 始用十月이러니 漢興에 因而不改하여 甚失建正之義라
至是하여 治曆明時하여 始以正月爲歲首하니 然後에 百年之繆가 一旦始革이라
○ 漢使入西域
이러니 言 宛有善馬
하야 在貳師城
注+[釋義]在大宛國하니 其地多善馬라호되 匿不肯與漢
이라한대
天子欲侯寵姬李氏하야 乃拜李夫人兄廣利하야 爲貳師將軍하야 以伐宛하니 期至貳師城하야 取善馬라
武帝欲侯寵姬하야 而使廣利將이나 意以爲非有功이면 不侯라하야 不欲負高帝之約也라
然
이나 軍旅
注+[附註]五人爲伍요 五伍爲兩이요 四兩爲卒이요 五卒爲旅니 五百人也라 五旅爲師요 五師爲軍이니 萬人也라 春秋之兵은 雖累萬之衆이라도 皆稱師라 軍之言師는 乃是單稱이니 多以軍爲名하고 次以師爲名하고 少以旅爲名하니 師者는 擧中之名이라는 大事
라 國之安危
와 民之死生
이 繫焉
이어늘 苟爲不擇賢愚而授之
하고 欲徼幸咫尺之功
하야 藉以爲名
하야 而私其所愛
면 蓋有見於封國
이요 無見於置將
이니 謂之能守先帝之約
이면 過矣
니라
태중대부太中大夫공손경公孫卿과 호수壺遂와 태사령太史令사마천司馬遷 등이 말하기를 “역기曆紀(曆法)가 무너지고 폐지되었으니, 마땅히 정삭正朔을 고쳐야 합니다.” 하였다.
상上이
아관兒寬에게 명하여
박사博士사賜 등과 함께 의논하게 하니,
하夏나라의
정삭正朔을 써야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논어論語》에 ‘하夏나라의 시時(曆法)를 사용한다.’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이르기를 ‘하夏나라의 시時라는 것은 북두칠성의 자루가 처음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인방寅方을 가리키는 달을 세수歲首로 삼음을 이르니, 이는 그 시時의 바름과 월령月令(농가에서 매월 해야 할 일)의 좋음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한다고 말하였다.
여름 5월에
공손경公孫卿과
호수壺遂,
사마천司馬遷 등에게 명하여
한漢나라
태초력太初曆을 함께 만들게 하여 - 《
한서漢書율력지律曆志》에 나옴 -
정월正月을
세수歲首로 삼고, 색깔은
황색黃色을 숭상하고
수數는 5를 사용하고
注+[釋義]오五는 토土의 수數이니, 한漢나라가 토덕土德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5를 사용한 것이다. 난진자嬾眞子가 말하였다. “한漢나라 무제武帝가 태초력太初曆을 만들고 수數는 5를 사용하였는데, 주注에 수數는 5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인문印文을 이르니, 예컨대 승상丞相의 인문印文을 ‘승상지인장丞相之印章’이라 한 것과 같으니, 여러 경卿과 수守, 상相의 인문印文 중에 다섯 자가 못 되는 것은 모두 지자之字를 가지고 〈다섯 글자가 되도록〉 채웠다.” 관명官名을 정하고
注+[附註]관직명을 정했다는 것은 낭중령郎中令을 고쳐 광록光祿이라 하고, 대행령大行令을 대홍려大鴻臚라 하고, 대농령大農令을 대사농大司農이라 하고, 위尉를 집금오執金吾라 하고, 우내사右內史를 경조윤京兆尹이라 하고, 좌내사左內史를 좌풍익左馮翊이라 하고, 주작도위主爵都尉를 우부풍右扶風이라 하였다. 음률音律을 맞추었다.
“성문聖門에서 사대四代의 예악禮樂을 〈말씀할 때에〉 반드시 하夏나라의 철을 맨 먼저로 삼았으니, 이는 진실로 백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이다.
진秦나라 때부터 비로소 10월을 정월로 사용하였는데, 한漢나라가 일어나자 이것을 인습하고 고치지 아니하여 정월을 세우는 뜻이 매우 잘못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력冊曆을 다스리고
를 밝혀서 비로소
정월正月을
세수歲首로 삼았으니, 그런 뒤에야 백년의 잘못이 하루아침에 비로소 고쳐졌다.
무제武帝가 분분紛紛하게 제작制作한 것 중에 오직 이것만이 가장 알맞음이 된다.”
한漢나라
사신使臣이
서역西域에 들어갔다가 와서 말하기를 “
대완국大宛國에 좋은 말이 있어
이사성貳師城에
注+[釋義]이사성貳師城은 대완국大宛國에 있으니, 그 땅에 좋은 말이 많았다. 있는데, 말을 숨기고
한漢나라에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천자天子가 총희寵姬인 이씨李氏의 집안을 후侯로 삼고자 하였는데, 〈공功이 있는 자가 아니면 후侯로 삼을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이부인李夫人의 오라비인 광리廣利를 임명하여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아 대완大宛을 정벌하게 하니, 이사성貳師城에 이르러서 좋은 말을 취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 호칭하였다.
“무제武帝가 총희寵姬의 집안을 후侯로 삼고자 하여 이광리李廣利로 하여금 장수가 되게 하였으나 마음속에 ‘공功이 있는 자가 아니면 후侯로 삼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제高帝의 약속을 저버리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
注+[附註]5인人을 오伍라 하고, 5오伍를 양兩이라 하고, 4양兩을 졸卒이라 하고, 5졸卒을 여旅라 하니, 여旅는 5백 명이다. 5여旅를 사師라 하고, 5사師를 군軍이라 하니, 1군은 1만 명이다.(실제는 1만 2천 5백 명이다.) 《춘추春秋》의 군대는 비록 수만의 군사라도 모두 사師라고 칭하였다. 군대를 사師라고 말함은 바로 간략하게 칭한 것이니, 많으면 군軍이라 이름하고 다음은 사師라고 이름하고 적으면 여旅라고 이름하였는데, 사師라는 것은 그 중간의 이름을 든 것이다.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국가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사생死生이 달려 있는데 만약 어질고 어리석음을 가리지 않고 장군을 제수하며, 작은 공을 요행으로 바라 이것을 구실로 명분을 삼아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사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는 나라를 봉해주는 것만 보고(알고) 장군을 세울 줄은 알지 못한 것이니, 이를 일러
선제先帝의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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