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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2)

통감절요(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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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丁丑]太初元年이라
太中大夫公孫卿 壺遂 太史令司馬遷等 言 曆紀壞廢하니 宜改正朔이니이다
詔兒(倪)寬하야 與博士賜等으로 共議하니 以爲宜用夏正注+[釋義]王氏曰 語云 行夏之時라한대 朱子集註曰 夏時 謂以斗柄初昏建寅之月 爲歲首也云云하니 蓋取其時之正與其令之善也라하니라이라하다
夏五月 詔卿, 遂, 遷等하야 共造漢太初曆하야 〈出律曆志〉 以正月 爲歲首하고 色上(尙)黃하고 數用五注+[釋義] 土數也 漢據土德이라 故用五 嬾眞子曰 漢武造太初曆하고 數用五하니 數用五 謂印文也 若丞相曰丞相之印章이니 諸卿及守相印文不足五字者 皆以之字足之하고 定官名注+[附註]改郞中令曰光祿이요 大行令曰大鴻臚 大農令曰大司農이요 尉曰執金吾 右內史曰京兆尹이요 左內史曰左馮翊이요 主爵都尉曰右扶風이라하고 協音律하다
〈出本紀〉
[新增] 尹氏曰
하니 此固百世不可易之法也
自秦人으로 始用十月이러니 漢興 因而不改하여 甚失建正之義
至是하여 治曆明時하여 始以正月爲歲首하니 然後 百年之繆 一旦始革이라
武帝紛紛制作 獨此最爲有得也니라
○ 漢使入西域이러니 言 宛有善馬하야 在貳師城注+[釋義]在大宛國하니 其地多善馬호되 匿不肯與漢이라한대
天子欲侯寵姬李氏하야 乃拜李夫人兄廣利하야 爲貳師將軍하야 以伐宛하니 期至貳師城하야 取善馬
號貳師將軍이라하다
[新增] 司馬公曰
武帝欲侯寵姬하야 而使廣利將이나 意以爲非有功이면 不侯라하야 不欲負高帝之約也
이나 軍旅注+[附註]五人爲伍 五伍爲兩이요 四兩爲卒이요 五卒爲旅 五百人也 五旅爲師 五師爲軍이니 萬人也 春秋之兵 雖累萬之衆이라도 皆稱師 軍之言師 乃是單稱이니 多以軍爲名하고 次以師爲名하고 少以旅爲名하니 師者 擧中之名이라 大事 國之安危 民之死生 繫焉이어늘 苟爲不擇賢愚而授之하고 欲徼幸咫尺之功하야 藉以爲名하야 而私其所愛 蓋有見於封國이요 無見於置將이니 謂之能守先帝之約이면 過矣니라


태초太初원년元年(정축 B.C.104)
태중대부太中大夫공손경公孫卿호수壺遂태사령太史令사마천司馬遷 등이 말하기를 “역기曆紀(曆法)가 무너지고 폐지되었으니, 마땅히 정삭正朔을 고쳐야 합니다.” 하였다.
아관兒寬에게 명하여 박사博士 등과 함께 의논하게 하니, 나라의 정삭正朔을 써야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논어論語》에 ‘나라의 (曆法)를 사용한다.’ 하였는데, 주자朱子의 《논어집주論語集註》에 이르기를 ‘나라의 라는 것은 북두칠성의 자루가 처음 날이 어두워졌을 때 인방寅方을 가리키는 달을 세수歲首로 삼음을 이르니, 이는 그 의 바름과 월령月令(농가에서 매월 해야 할 일)의 좋음을 취한 것이다.’ 하였다.” 한다고 말하였다.
여름 5월에 공손경公孫卿호수壺遂, 사마천司馬遷 등에게 명하여 나라 태초력太初曆을 함께 만들게 하여 - 《한서漢書율력지律曆志》에 나옴 - 정월正月세수歲首로 삼고, 색깔은 황색黃色을 숭상하고 는 5를 사용하고注+[釋義]이니, 나라가 토덕土德에 의거하였기 때문에 5를 사용한 것이다. 난진자嬾眞子가 말하였다. “나라 무제武帝태초력太初曆을 만들고 는 5를 사용하였는데, 는 5를 사용하였다는 것은 인문印文을 이르니, 예컨대 승상丞相인문印文을 ‘승상지인장丞相之印章’이라 한 것과 같으니, 여러 , 인문印文 중에 다섯 자가 못 되는 것은 모두 지자之字를 가지고 〈다섯 글자가 되도록〉 채웠다.” 관명官名을 정하고注+[附註]관직명을 정했다는 것은 낭중령郎中令을 고쳐 광록光祿이라 하고, 대행령大行令대홍려大鴻臚라 하고, 대농령大農令대사농大司農이라 하고, 집금오執金吾라 하고, 우내사右內史경조윤京兆尹이라 하고, 좌내사左內史좌풍익左馮翊이라 하고, 주작도위主爵都尉우부풍右扶風이라 하였다. 음률音律을 맞추었다.
- 《한서漢書무제기武帝紀》에 나옴 -
윤씨尹氏가 말하였다.
성문聖門에서 사대四代예악禮樂을 〈말씀할 때에〉 반드시 나라의 철을 맨 먼저로 삼았으니, 이는 진실로 백세토록 바꿀 수 없는 법이다.
나라 때부터 비로소 10월을 정월로 사용하였는데, 나라가 일어나자 이것을 인습하고 고치지 아니하여 정월을 세우는 뜻이 매우 잘못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책력冊曆을 다스리고 를 밝혀서 비로소 정월正月세수歲首로 삼았으니, 그런 뒤에야 백년의 잘못이 하루아침에 비로소 고쳐졌다.
무제武帝분분紛紛하게 제작制作한 것 중에 오직 이것만이 가장 알맞음이 된다.”
나라 사신使臣서역西域에 들어갔다가 와서 말하기를 “대완국大宛國에 좋은 말이 있어 이사성貳師城注+[釋義]이사성貳師城대완국大宛國에 있으니, 그 땅에 좋은 말이 많았다. 있는데, 말을 숨기고 나라에 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천자天子총희寵姬이씨李氏의 집안을 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 있는 자가 아니면 로 삼을 수가 없으므로〉 마침내 이부인李夫人의 오라비인 광리廣利를 임명하여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삼아 대완大宛을 정벌하게 하니, 이사성貳師城에 이르러서 좋은 말을 취할 것을 기약하였다.
그러므로 그를 이사장군貳師將軍이라 호칭하였다.
사마온공司馬溫公이 말하였다.
무제武帝총희寵姬의 집안을 로 삼고자 하여 이광리李廣利로 하여금 장수가 되게 하였으나 마음속에 ‘이 있는 자가 아니면 로 삼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여 고제高帝의 약속을 저버리고자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군대는注+[附註]5라 하고, 5이라 하고, 4이라 하고, 5라 하니, 는 5백 명이다. 5라 하고, 5이라 하니, 1군은 1만 명이다.(실제는 1만 2천 5백 명이다.) 《춘추春秋》의 군대는 비록 수만의 군사라도 모두 라고 칭하였다. 군대를 라고 말함은 바로 간략하게 칭한 것이니, 많으면 이라 이름하고 다음은 라고 이름하고 적으면 라고 이름하였는데, 라는 것은 그 중간의 이름을 든 것이다. 국가의 대사大事여서 국가의 안위安危와 백성의 사생死生이 달려 있는데 만약 어질고 어리석음을 가리지 않고 장군을 제수하며, 작은 공을 요행으로 바라 이것을 구실로 명분을 삼아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에게 사사롭게 하고자 한다면 이는 나라를 봉해주는 것만 보고(알고) 장군을 세울 줄은 알지 못한 것이니, 이를 일러 선제先帝의 약속을 지켰다고 한다면 잘못이다.”


역주
역주1 聖門四代禮樂 必以夏時爲先 : 聖門은 孔子의 門下를 이르고 四代는 虞‧夏‧商‧周의 네 王朝를 가리키는 바, 《論語》 〈衛靈公〉에 顔子가 孔子에게 나라를 다스리는 방법을 묻자, 말씀하기를 “夏나라의 時(책력)를 행하며, 殷나라의 수레를 타며, 周나라의 면류관을 쓰며, 음악은 순임금의 음악인 韶舞를 써야 한다.” 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역주2 : 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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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축] 태초원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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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정축] 태초원년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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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정축] 태초원년 129

통감절요(2) 책은 2022.01.13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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