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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3)

통감절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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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癸丑]二年이라
霍光하다
○ 上 思報大將軍德하야 乃封光兄孫山하야 爲樂平侯하야 使以奉車都尉 領尙書事하다
魏相 奏封事注+[釋義]漢舊儀 密奏皁囊封板이라 故曰封事호되 春秋 譏世卿注+[釋義]王氏曰 公羊傳隱三年 尹氏卒하니 尹氏者 天子之大夫也 其稱尹氏 譏世卿이니 世卿 非禮也 註云 世卿者 父死子繼也 貶去名者 氏者 起其世也 若曰世世尹氏也 公卿大夫士 皆選賢而用之 不當世爲 其秉政久 必奪君之威權이라하고 惡宋三世(爲)[無] 大夫注+[釋義]王氏曰 公羊傳僖二十五年 宋殺其大夫하니 何以不名 宋三世無大夫하니 三世內娶故 註云 三世 謂慈王臣處臼也 內娶 大夫女也 言無大夫者 不臣妻之父母하니 國內皆臣하야 無娶道 宋以內娶故 公族以弱하고 妃黨益强하야 卒生簒弑 君子疾惡之니라[頭註]爲 恐當作無 慈父 襄公名也 王臣 成公名也 處臼 昭公名也하니
今光死 子復爲右將軍注+[頭註] 名禹하고 兄子秉樞機注+[通鑑要解]兄子子 恐孫字之誤 霍山 是去病之孫이니 今言兄子 誤矣하고 昆弟諸壻據權勢하야 在兵官하야 驕奢放縱하니
宜有以損奪其權하고 破散陰謀하야 以全功臣之世하소서
又故事 諸上書者 皆爲二封하야 署其一曰副어든 領尙書者 先發副封하야 所言 不善이면 屛去不奏러니 復因許伯하야 白去副封注+[釋義] 謂魏相이요 卽許廣漢이라 按魏相 先嘗因許伯하야 奏封事러니 今又因以建白上前而除(其)[去]副本이라하야 以防壅蔽한대 帝善之하야 詔相하고 皆從其議하다
〈出本傳〉
○ 帝興于閭閻하야 知民事之艱難이러니 霍光 旣薨 始親政事하야 厲精爲治하야 五日 一聽事하니 自丞相以下 各奉職奏事하야 敷奏其言이어든 考試功能하고 侍中尙書功勞當遷 及有異善이어든 厚加賞賜하야 至于子孫 終不改易注+[釋義]王氏曰 謂賞賜逮及子孫耳 非謂侍中尙書至子孫不改易이라하니 樞機注+[通鑑要解]尙要之官이니 謂領尙書事也周密하고 品式備具하야 上下相安하야 莫有苟且之意러라
〈出本紀〉
及拜刺史守相 輒親見問하야 觀其所由하고 退而考察所行하야 以質其言하야名實不相應이어든 必知其所以然이러라
嘗稱曰 庶民所以安其田里而亡(無)嘆息愁恨之心者 政平訟理也 與我共此者 其惟良二千石注+[釋義] 循良也 謂郡守, 諸侯王相이라 漢官儀云 二千石俸 月百二十이요 又有眞二千石하야 月百五十斛이라 如淳曰 律 二千石俸 月萬六千이요 眞二千石 月二萬이라 인저
以爲太守 吏民之本이니 變易이면 則下不安하고 民知其將久 不可欺罔하야 乃服從其敎化
二千石 有治理效 輒以璽書勉勵하야 增秩賜金하고 或爵至라가 公卿缺이면 則選諸所表하야 以次用之注+[釋義]選用嘗蒙增秩賜金進爵所旌表者하니 是故 漢世良吏 於是爲盛하야 稱中興焉이러라
〈出循吏傳〉
[新增]唐仲友曰
宣帝時 雖有循吏注+[頭註] 順也 上順公法하고 下順民情也 酷吏亦不少
循吏 只是數人이니 皆緣宣帝德意薄故 名歸良吏 若文帝時 豈可勝紀리오
又曰
緣帝長於民間이라 知民疾苦하고 緣在民間하야 知官吏欺(弊)[蔽] 賞罰不明이라 綜核名實하야 信賞必罰하고 緣知民間愁歎 由吏不良이라 選良二千石하니 〈此良吏所以盛也
이나 宣帝雜霸任刑하니 一時能吏 皆以嚴治 承帝意向이로되 惟王成黃霸龔遂召信臣朱邑 有德遜之風이라
文帝吏 不入循吏酷吏傳하니라


지절地節 2년(계축 B.C.68)
봄에 곽광霍光이 죽었다.
대장군大將軍 곽광霍光의 은덕에 보답할 것을 생각해서 마침내 곽광霍光의 형의 손자인 곽산霍山을 봉하여 낙평후樂平侯로 삼아 봉거도위奉車都尉로서 상서尙書의 일을 겸하게 하였다.
위상魏相봉사封事를 올려注+[釋義]나라의 옛 의식儀式에 검은 주머니로 봉함하여 은밀히 아뢰었기 때문에 봉사封事라 하였다. 말하기를 “《춘추春秋》에 대대로 이 됨을 비판하였고,注+[釋義]왕씨王氏(王幼學)가 말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은공隱公 3년조年條에 ‘윤씨尹氏가 죽었으니, 윤씨尹氏라는 자는 누구인가? 천자의 대부大夫이다. 윤씨尹氏라고 칭한 것은 어째서인가? 대대로 이 됨을 비판한 것이니, 대대로 이 됨은 가 아니다.’ 하였다. 에 이르기를 ‘세경世卿은 아버지가 죽으면 아들이 계승하는 것이다. 폄하하여 이름을 뺀 것이니, 는 그 를 시작하는 것인 바, 대대로 윤씨尹氏이 되었다고 말한 것과 같다. 공경公卿대부大夫는 모두 어진 이를 가려서 등용해야 하고 대대로 시켜서는 안 되니, 정권을 잡은 지가 오래되면 반드시 군주의 위엄과 권력을 빼앗게 된다.’ 하였다.”나라에 3대 동안 대부大夫가 없음을 미워하였습니다.注+[釋義]王氏가 말하였다.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희공僖公 25년조年條에 ‘나라가 그 대부大夫를 죽였으니, 어째서 이름을 쓰지 않았는가? 나라는 3대 동안 대부大夫가 없었으니, 3대 동안 나라 안에서 장가들었기 때문이다.’ 하였다. 에 이르기를 ‘3대는 자부慈父왕신王臣처구處臼를 이른다. 나라 안에서 장가들었다는 것은 나라 임금이 대부大夫의 딸을 취한 것이다. 대부大夫가 없다고 말한 것은 처부모妻父母를 신하로 삼지 않으니, 나라 안이 모두 신하여서 장가드는 도가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라가 나라 안에서 장가들었기 때문에 공족公族은 약해지고 후비后妃은 더욱 강성해져서 마침내 찬탈簒奪하고 시해弑害하는 일이 생겼다. 그러므로 군자가 미워한 것이다.’ 하였다.”[頭註]‘’는 마땅히 ‘’자가 되어야 할 듯하다. 자부慈父양공襄公의 이름이고, 왕신王臣성공成公의 이름이고, 처구處臼소공昭公의 이름이다.
지금 곽광霍光이 죽자, 아들注+[頭註]곽광霍光의〉 아들은 이름이 이다. 이 다시 우장군右將軍이 되고 형의 아들注+[通鑑要解]형자兄子자의 오자誤字인 듯하다. 곽산霍山은 바로 곽거병霍去病의 손자이니, 이제 형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잘못이다. 이 중요한 기관을 관장하고, 형제와 여러 사위들이 권세를 점거하여 병권을 맡는 관직에 있어서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종하니,
마땅히 그 권력을 줄이고 빼앗으며 음모를 깨뜨려 흩어서 공신功臣세가世家를 온전히 해야 할 것입니다.” 하였다.
고사故事에 글을 올리는 자들은 모두 상소를 두 벌 작성하여 그중 하나에 ‘부봉副封’이라고 쓰면 상서尙書를 관장하는 자가 먼저 부봉副封(副本)을 꺼내어 보고 말한 내용이 좋지 않으면 물리치고 아뢰지 않았는데, 위상魏相이 다시 허백許伯을 인하여 부봉副封을 없애어注+[釋義]相……白去副封:위상魏相을 이르고, 허백許伯은 바로 허광한許廣漢이다. 위상魏相이 먼저 일찍이 허백許伯으로 인하여 봉사封事를 올렸는데, 지금 또다시 인하여 의 앞에서 건의하여 부본副本을 없앤 것이다. 군주의 총명을 가리는 일을 막을 것을 아뢰자, 황제가 이를 좋게 여겨 위상魏相급사중給事中에 임명하고 모두 그의 의논을 따랐다.
- 《한서漢書 위상전魏相傳》에 나옴 -
○ 황제가 여염閭閻에서 일어나 민사民事(농사)의 어려움을 알았는데, 곽광霍光이 죽자 처음으로 직접 정사를 다스려서 정신을 가다듬어 정치를 하여 5일 만에 한 번 정사를 다스리니, 승상丞相으로부터 이하가 각각 직책을 받들어 수행하고 일을 아뢰어서 말을 상주하면 과 재능을 고시考試하고, 시중侍中상서尙書로서 공로가 있어 승진시켜야 할 자와 특별히 잘한 일이 있으면 상사賞賜를 후하게 가하여 자손에 이르기까지 끝내 고치거나 바꾸지 않으니,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으로 하사하는 것이 자손에게 미침을 말했을 뿐이고, 시중侍中상서尙書를 자손에 이르도록 바꾸지 않았음을 말한 것은 아니다.” 중요한 국정注+[通鑑要解]추기樞機는 중요한 관직이니, 상서尙書의 일을 관장함을 이른다. 이 주도면밀하고 법식이 갖추어져서 상하가 서로 편안하여 구차한 뜻이 없었다.
- 《한서漢書 선제기宣帝記》에 나옴 -
자사刺史태수太守, 국상國相을 임명할 때에 번번이 직접 만나 보고 물어서 그 연유한 바를 관찰하고, 물러가서는 행하는 바를 고찰하여 그 말을 질정質正해서 이 서로 부응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았다.
일찍이 말하기를 “서민들이 전리田里를 편안히 여기고 탄식하거나 근심하고 한하는 마음이 없는 까닭은 정치가 공평하고 송사가 잘 다스려지기 때문이니, 나와 함께 이를 수행할 자는 오직 훌륭한 이천석二千石注+[釋義]은 백성들의 뜻을 따르는 양리良吏이고, 이천석二千石군수郡守제후왕諸侯王을 이른다. 《한관의漢官儀》에 이르기를 “이천석二千石의 봉급은 매월 120이고, 또 진이천석眞二千石이 있어서 매월 150이었다.” 하였다. 여순如淳이 말하기를 “법률에 이천석二千石의 봉급은 매월 1만 6천이고, 진이천석眞二千石은 매월 2만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매월 2만 면 이는 진이천석眞二千石이다. 일 것이다.
태수太守는 관리와 백성의 근본이니 자주 바꾸면 아랫사람들이 편안하지 못하고, 백성들이 그가 장차 오래 재임할 것임을 알면 속일 수가 없어서 마침내 그 교화에 복종할 것이다.” 하였다.
그러므로 이천석二千石 중에 잘 다스린 공적이 있으면 그때마다 친서親書로써 권면하여 품계를 올려 주고 금을 하사하며, 혹 작위를 내려 관내후關內侯에 이르게 하였다가 공경公卿 중에 결원이 있으면 표창한 사람들 중에서 가려 뽑아 차례대로 등용하니,注+[釋義]選諸所表 이차용지以次用之:일찍이 품계를 올려 주고 금을 하사해 주며 관작을 승진시켜 정표旌表했던 자를 선발하여 등용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한대漢代의 훌륭한 관리들이 이때에 많아서 중흥中興이라 일컬어졌다.
- 《한서漢書 순리전循吏傳》에 나옴 -
[新增]唐仲友가 말하였다.
선제宣帝 때에 비록 순리循吏注+[頭註]은 순히 따름이니, 위로는 공공公共한 법을 따르고 아래로는 백성들의 실정實情을 따르는 것이다. 가 있었으나 혹리酷吏 또한 적지 않았다.
순리循吏는 다만 몇 명뿐이었으니, 이는 모두 선제宣帝의 덕스러운 뜻이 부족하였기 때문에 이름이 양리良吏로 돌아간 것이니, 만약 문제文帝 때라면 순리循吏를 어찌 이루 다 기록할 수 있었겠는가.
바로 《시경詩經》의 풍아風雅와 같은 것이다.”
또 말하였다.
선제宣帝민간民間에서 생장生長하였기 때문에 백성들의 고통을 알았고, 민간民間에 있어서 관리官吏들이 속이고 상벌賞罰이 분명하지 못함을 알았기 때문에 을 조사하여 을 분명히 내리고 을 반드시 내렸으며, 백성들이 근심하고 탄식함은 지방관이 선량하지 못해서임을 알았기 때문에 훌륭한 이천석二千石을 선발하였으니, 이는 양리良吏가 많아지게 된 이유이다.
그러나 선제宣帝패도霸道를 섞어 쓰고 형벌에 맡기니, 한때의 유능한 관리들이 모두 엄하게 다스리는 것으로 황제의 의향意向을 맞추었으나 오직 왕성王成, 황패黃霸, 공수龔遂, 소신신召信臣, 주읍朱邑만이 과 겸손한 유풍遺風이 있었다.
문제文帝의 관리들은 순리전循吏傳혹리전酷吏傳에 들지 않았다.”


역주
역주1 : 보
역주2 許伯 : 伯이라고 칭한 것은 그를 높인 것이다.
역주3 給事中 : 관명으로 겸직이었는데, 궁중의 일을 맡았기 때문에 이름한 것이다.
역주4 二千石 : 漢代에 관리의 등급을 俸祿의 多寡에 따라 정한 명칭으로, 比二千石‧二千石‧眞二千石‧中二千石의 4등급이 있었는 바, 比二千石은 매월 100石, 二千石은 매월 120石, 眞二千石은 매월 150石, 中二千石은 매월 180石을 받았다.
역주5 : 糧食을 헤아릴 때에 쓰는 量詞로, 古代에는 10斗를 1斛이라 하였다.
역주6 按是二萬㪷 則是眞二千石也 : 이 내용은 《史記索隱》에 나오는 바, 원래 ‘按是二萬㪷 則二萬斗亦足二千石也’로 되어 있는 바, 잘못 인용한 것으로 보인다.
역주7 : 삭
역주8 關內侯 : 關內에 있는 제후를 이른다. 顔師古가 말하기를 “侯라는 명칭은 있어도 京畿 안에 거처하기 때문에 封土는 없다.” 하였다.
역주9 宣帝時……正如詩之風雅 : 循吏는 백성들의 뜻을 따라 다스리는 지방관을 이른다. 《詩經》의 風은 正風인 周南‧召南과 變風인 列國風이 있으며, 雅 역시 正小雅와 變小雅가 있는 바, 正은 바른 것이고 變은 바르지 못한 것이다. 文帝 때에는 循吏가 적고 宣帝 때에는 循吏가 많았으니, 이는 德化가 지극하면 굳이 循吏를 칭찬할 필요가 없고 德化가 부족하면 循吏가 유명해지기 때문이다. 文帝 때에 循吏가 적었던 것은 실제로 循吏가 없었던 것이 아니라 德化가 지극하여 굳이 循吏를 칭찬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 《詩經》의 風雅에 비유하면 正風인 周南‧召南는 매우 훌륭하여 굳이 칭찬할 필요가 없는 것과 같고, 宣帝 때에 循吏가 많았던 것은 실제로 循吏가 많았던 것이 아니라 德化가 부족하기 때문에 循吏가 유명한 것이니, 循吏는 變風 중의 아름다운 것이고 酷吏는 變小雅의 풍자시와 같으므로 말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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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축] 2년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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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계축] 2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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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계축] 2년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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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계축] 2년 1415

통감절요(3)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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