春에 詔曰 有功不賞하고 有罪不誅면 雖唐虞라도 不能以化天下라
今膠東相王成
이 勞來
注+[釋義]謂慰勉而招延之라[通鑑要解]來는 古作倈하니 答其勤曰勞요 撫其至曰來라不怠
하야 流民自占
注+[釋義]韻會에 {載}隱戶口하야 來附本業曰自占이라하고 漢書註에 自隱度口數而名籍也라이 八萬餘口
요 治有異等之效
하니 其賜成爵關內侯
하고 秩中二千石
注+[釋義]中은 滿也라 漢制에 九卿已上秩은 一歲滿二千斛이라 漢官儀云 中二千石俸은 月百八十斛이라하라
未及徵用
하야 會病卒官
이러니 後
에 詔使丞相御史
로 問郡國上計長史守丞以政令得失
注+[釋義]王氏曰 郡使守丞과 國使長史 皆一物也라 故總言〈郡〉國上計長史守丞이라 凡郡國이 皆掌治民하야 常以春에 行所主縣하야 勸民農桑하고 振救乏絶하며 秋冬에 遣無害吏하야 案訊諸囚하고 論課殿最하며 歲盡에 遣詣京師(主)[上]計하니 者는 奉上戶口錢穀之數也라한대
或對言前膠東相成이 僞自增加하야 以蒙顯賞하니 其後에 俗吏多爲虛名云이러라
史稱宣帝有名實不相應者면 必知其所以然이라호되 而王成以僞增流民으로 蒙顯賞하니 自是로 俗吏多爲虛名하야 而綜核名實之政이 其疵多矣라
惟夫人君이 不篤實而好名일새 於是에 在下者靡然從風하야 爲欺爲罔하야 實則聚斂而名曰理財用이라하고 實則掊克而名曰抑兼幷이라하고 實則開邊而名曰討不庭이라하고 實則尙同而名曰一衆志라하고 移囚於外舍而奏囹圄空하고 水旱不以聞而稱大有年하고 諫諍路絶則曰無事可言이라하고 賢才盡廢則曰野無遺伏이라하니 人君이 樂其名良是也하야 而不知虛僞成風하고 矯詐成俗하야 朝廷內外가 歸於一虛하야 而天下之理亂矣니라
丞相韋賢
이 以老病
으로 이어늘 賜黃金百斤
과 安車駟馬
하야 罷就第
하니 丞相致仕 自賢始
러라
○ 霍氏驕侈縱橫
注+[原註]縱은 放縱也요 橫은 恣橫也라이라
上
이 頗聞霍氏毒殺許后而未察
이러니 乃徙光諸壻
하야 收其印綬
하고 諸領
及
衛將
注+[頭註]光兩女壻니 范明友爲未央宮衛尉하고 鄧廣漢爲長樂宮衛尉하니라屯兵
을 悉易
하야 以所親許史
注+[頭註]衛太子納史良娣하야 生子進하니 號史皇孫이라하고 皇孫納王夫人하야 生子病已하니라子弟
로 代之
하다
○ 初
에 孝武之世
에 徵發
이 煩
하니 百姓
이 貧耗
하고 窮民
이 犯法
하야 姦軌(宄)不勝
이라
於是
에 使張湯, 趙禹之屬
으로 條定法令
할새 作見知故縱監臨部主之法
注+[釋義]人有犯法에 或見或知而不擧告를 爲故縱이요 而所監臨部主 亦有罪幷連坐也라하야 緩深故之罪
注+[釋義]時에 武帝欲急刑하야 吏深害及故入人罪者를 皆寬緩之라[通鑑要解]吏之深害人과 及故入人於罪之罪를 皆緩之면 則是急刑也라하고 急縱出之誅
하니 其後
에 姦猾
이 巧法
하야 轉相比況注+[釋義]比는 例也요 況은 譬擬也라 記王制篇에 疑獄은 比以成之라한대 註云 已行故事曰比라하니라하야 禁罔(網)
이 寖密
하고 律令
이 煩苛
하야 文書盈於几閣
하니 典者不能徧睹
라
是以
로 郡國承用者駁
하야 或罪同而論異하고 姦吏因緣爲市注+[釋義]王氏曰 姦詐之吏 旁緣弄法受財를 若市賈交易이라하야 所欲活則傅(附)生議
하고 所欲陷則予死比
注+[釋義]與死例相比況也라하니 議者咸寃傷之
러라
廷尉史路溫舒上書曰 陛下初登至尊하시니 宜改前世之失하시고 正始受命之統하사 滌煩文, 除民疾하야 以應天意하소서
臣聞秦有十失
注+[釋義]王氏曰 十失은 謂一(差)[羞]文學이요 二好武勇이요 三賤仁義요 四貴獄吏요 五罪誹謗이요 六禁妖言이요 七盛服先(王)[生]이 不用於世요 八忠良切言이 皆鬱於胸이요 九喜虛譽요 十蒙實禍라에 其一
이 尙存
하니 治獄之吏是也
라
書曰 與其殺不辜
론 寧失不經
注+[通鑑要解]辜는 罪也요 經은 常也라 謂法可以殺, 可以無殺에 殺之則恐陷於非辜요 不殺之則恐失輕縱하니 二者는 皆非聖人至公至平之意로되 而殺不辜者는 尤聖人所不忍也라 故로 與其殺之而害彼之生으론 寧姑全之而自受自失之責이니 見大禹謨하니라이라하니 今治獄吏則不然
하야 上下相敺(驅)
하야 以刻爲明
注+[釋義]王氏曰 言上而朝廷과 下而郡縣과 上而官長과 下而僚屬이 皆相敺迫하야 以苛刻從事라하야 深者
는 獲公名
注+[釋義]王氏曰 言深文者 得奉公之名稱이라하고 平者
는 多後患
注+[釋義]王氏曰 言持法平者는 厥後反多患害라이라
故로 治獄之吏 皆欲人死는 非憎人也요 自安之道 在人之死일새니 太平之未治는 凡以此也니이다
俗語曰
地爲獄
이라도 議不入注+[釋義]王氏曰 言指畫地爲獄戶면 雖知非眞獄이라도 人且擬議而不願入也라하고 刻木爲吏라도 期不對注+[釋義]王氏曰 言雕刻木偶爲吏면 人雖識非眞吏라도 且期望而不對也라 路溫舒傳註에 期는 猶必也라라하니 此
는 皆疾吏之風
이요 悲痛之辭也
라
唯陛下
法制, 寬刑罰
하시면 則
太平之風을 可興於世하리이다 上
이 善其言
하다
○ 十二月에 詔曰 間者에 吏用法巧하고 文寖深하야 使不辜蒙戮하니 朕甚傷之하노라
今遣廷史
注+[頭註]라하야 與郡鞠(鞫)獄
注+[原註]鞠은 音菊이니 推窮也라호되 任輕祿薄하니 其爲置廷尉平
注+[釋義]漢書註에 平은 音病이니 平其不平也라하야 秩六百石
하고 員四人
하야 其務平之
하야 以稱朕意
하라
於是
에 每季秋後
에 請讞
注+[原註]讞은 平(評)議也라[釋義]讞은 議罪也니 用季秋議罪는 順時殺之氣也라하다
時에 上이 常幸宣室하야 齋居而決事하니 獄刑이 號爲平矣러라
涿郡太守鄭昌이 上疏言호되 今明主躬垂明聽하시니 雖不置廷平이나 獄將自正이어니와
若開後嗣인댄 不若刪定律令이니 律令이 一定이면 愚民이 知所避하고 姦吏無所弄矣리이다
今不正其本而置廷平하야 以理其末하시니 政衰聽怠면 則廷平이 將招權而爲亂首矣리이다
봄에 조서를 내리기를 “공功이 있어도 상을 주지 않고 죄가 있어도 처벌하지 않으면 비록 요堯‧순舜이라도 천하를 교화할 수 없다.
지금
교동왕膠東王의
상相인
왕성王成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오게 하기
注+[釋義]勞來는 위로하고 권면하여 불러서 맞이함을 이른다. [通鑑要解]來는 옛날에는 내倈로 썼으니, 노고에 보답함을 노勞라 하고 이르는 자들을 어루만짐을 내來라 한다. 를 게을리 하지 않아서
유민流民들이 스스로 호적에 이름을
등재登載한 것
注+[釋義]《고금운회거요古今韻會擧要》에 “호구를 은밀히 헤아려 본업本業(농업)에 와서 속하는 것을 자점自占이라 한다.” 하였고, 《한서漢書》의 주註에 “스스로 인구수를 은밀히 헤아려 이름을 장부에 기록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 8만여 명이고
치적治績에 월등한 공로가 있으니,
왕성王成에게
관내후關內侯의 작위를 하사하고 품계가
중이천석中二千石이 되게 하라.
注+[釋義]중中은 만滿이다. 한漢나라 제도에 구경九卿 이상의 품계는 〈녹봉이〉 1년에 만滿 2천 곡斛이었다. 《한관의漢官儀》에 이르기를 “중이천석中二千石의 녹봉은 매월 180곡斛이다.” 하였다. ” 하였다.
왕성王成은 미처 등용되기도 전에 마침 병으로 관청에서 죽었는데, 뒤에 명하여
승상丞相과
어사御史로 하여금
군국郡國의
상계上計하는
장사長史와
수승守丞(郡守의 관속)에게
정령政令의 잘잘못을 가지고 묻게 하자,
注+[釋義]詔使丞相……政令得失:왕씨王氏가 말하였다. “군郡의 사使인 수승守丞과 국國의 사使인 장사長史가 모두 똑같은 지위이다. 그러므로 군국郡國의 상계上計하는 장사長史와 수승守丞이라고 총괄하여 말한 것이다. 무릇 군국郡國은 백성들을 다스리는 일을 모두 관장하여, 항상 봄에는 관할하는 현縣을 순행하여 백성들에게 농상農桑을 권장하고 궁핍한 자들을 진휼하고 구제하며, 가을과 겨울에는 백성들에게 폐해를 끼치지 않는 관리를 보내어 여러 죄수들을 살펴 조사하고 고과考課의 전최殿最를 논하며, 연말에 경사京師에 보내어 상계上計하게 하니, 상계上計는 호구戶口와 전곡錢穀의 수數를 받들어 올리는 것이다.”
혹자가 대답하기를 “전에 교동왕膠東王의 상相인 왕성王成이 허위로 스스로 인구수를 늘려서 후한 상을 받으니, 그 뒤에 속리俗吏들이 대부분 허명虛名을 취했다.” 하였다.
호씨胡氏(胡寅)의 《독사관견讀史管見》에 말하였다.
역사책에 선제宣帝는 이름과 실상이 서로 맞지 않음이 있으면 반드시 그 소이연所以然을 알았다고 말하였으나 왕성王成이 유민流民의 수數를 거짓으로 부풀려 올림으로써 후한 상을 받으니, 이로부터 속리俗吏들이 대부분 빈 이름(부풀린 명성)을 만들어서 이름과 실상을 따지는 정사政事에 하자가 많았다.
인군人君이 독실하지 않고 이름을 좋아하였으므로 이에 아래에 있는 자들이 바람 부는 대로 쓰러지는 풀처럼 따라서 기망欺罔을 하여 실제로는 가렴주구苛斂誅求를 하면서 이재理財를 한다고 이름하고, 실제로는 수탈收奪을 하면서 겸병兼幷을 억제한다고 이름하고, 실제로는 변경을 개척하면서 조정에 오지 않는 자들을 토벌한다고 이름하고, 실제로는 같음을 숭상하면서 여러 사람의 마음을 통일한다고 이름하고, 죄수를 외사外舍에 옮겨 놓고는 감옥이 텅 비었다고 아뢰고, 수재水災와 한해旱害를 제때에 아뢰지 않고는 큰 풍년이 들었다고 칭하고, 간쟁하는 길이 끊기면 말씀드릴 만한 일이 없다고 말하고, 현자와 인재가 다 폐출되면 초야에 버려진 현자賢者와 숨은 인재가 없다고 말하니, 인군人君이 그 이름이 참으로 아름다움을 좋아해서 허위의 풍속이 이루어짐을 알지 못하여 기만하는 풍속이 이루어져서 조정朝廷과 내외內外가 전부 허위로 돌아가 천하의 다스려짐이 혼란하게 되는 것이다.”
승상 위현韋賢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치사致仕를 청하자, 황금 100근斤과 안거安車와 사마駟馬를 하사하여 관직에서 물러나 집으로 가게 하니, 승상의 치사致仕가 위현韋賢으로부터 시작되었다.
○
곽씨霍氏가 교만하고 사치하며 방종하고 제멋대로 행동하였다.
注+[原註]종縱은 방종함이고, 횡橫은 멋대로 행함이다.
상上은
곽씨霍氏가
허후許后를 독살하였다는 말을 들었으나 아직 살피지 못했는데, 마침내
곽광霍光의 여러 사위들을 좌천시켜 그
인수印綬를 거두고
우림군羽林軍을 거느린 자들과 두 궁의 호위병을 거느린
위장衛將들
注+[頭註]곽광霍光은 두 사위가 있었으니, 범명우范明友는 미앙궁未央宮의 위위衛尉가 되고 등광한鄧廣漢은 장락궁長樂宮의 위위衛尉가 되었다. 을 모두 바꾸어서 자신과 친한
허씨許氏와
사씨史氏注+[頭註]위태자衛太子가 사량제史良娣를 맞아들여 아들 진進을 낳으니 호號를 사황손史皇孫이라 하였고, 사황손史皇孫이 왕부인王夫人을 맞아들여 아들 병이病已를 낳았다. 의 자제로 대신하게 하였다.
○ 처음 효무제孝武帝 때에 징발이 번거롭고 잦으니, 백성들이 빈모貧耗(가난)하고 곤궁한 백성들이 법을 범하여 간사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이에
장탕張湯과
조우趙禹의 무리로 하여금
법령法令을 조목별로 정할 때에
견지고종법見知故縱法과
감림부주법監臨部主法을 만들어서
注+[釋義]타인이 법을 범했을 적에 이것을 혹 보았거나 혹 알면서도 고발하지 않는 것을 고종故縱이라 하며, 〈감림부주監臨部主는 관할하의 하급 관서나 부하가 부정을 저질렀을 경우〉 감독하는 부주部主도 죄에 함께 연좌되는 것이다. 옥리獄吏가 죄인을 각박하게 다스리거나 고의로 죄에 빠뜨린 죄는 완화해 주고
注+[釋義]당시에 무제武帝가 형벌을 준엄하게 하고자 하여 옥리들이 법을 까다롭게 적용하여 죄인을 각박하게 해치거나 고의로 사람을 죄에 빠뜨린 죄를 모두 너그럽게 용서해 준 것이다. [通鑑要解]옥리들이 사람을 각박하게 해치거나 고의로 사람을 죄에 빠뜨린 것을 모두 완화해 주었다면 이는 형벌을 준엄하게 한 것이다. 죄인을 풀어 준 죄는 준엄하게 하니, 그 뒤에 간사한 자들이 법을 교묘히 농간하여 돌려 가며 서로 준례로 삼아
注+[釋義]비比는 사례事例이고, 황況은 비유하는 것이다. 《예기禮記》 〈왕제편王制篇〉에 “의심스러운 옥사는 비슷한 사례를 들어 이룬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미 행한 고사故事를 비比라 한다.” 하였다. 금망禁網이 점점 치밀해지고
율령律令이 번거롭고 까다로워져서 〈죄인을 다루는〉 문서가 책상에 가득하니, 주관하는 자가 두루 다 볼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군국郡國에서 받들어 적용하는 자들이 난잡하여 혹은 죄가 같은데도
논죄論罪가 다르고 간악한
옥리獄吏들이 이로 인하여 장사하듯이 〈돈을 받고 흥정하여〉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간사한 옥리가 빙자하여 법을 농간해서 재물을 받기를 시장에서 장사꾼이 물건을 팔듯이 하는 것이다.” 살려 주고자 하면 살려 주는 의논에 붙이고 죽음에 빠뜨리고자 하면 죽이는
사례事例에 넣으니,
注+[釋義]사비死比는 죽이는 사례事例와 서로 비슷하게 하는 것이다. 의논하는 자들이 모두 원통해 하고 서글퍼하였다.
정위사廷尉史 노온서路溫舒가 글을 올려 아뢰기를 “폐하께서 처음 지존至尊의 자리에 오르시니, 마땅히 전대前代의 잘못을 고치시고 처음 천명天命을 받은 전통을 바로잡으시어 번거로운 법조문法條文을 없애고 백성들의 고통을 제거해서 하늘의 뜻에 부응하소서.
신이 들으니
진秦나라에 열 가지 잘못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십실十失은 첫 번째는 문학文學을 부끄러워하는 것이고, 두 번째는 무용武勇을 좋아하는 것이고, 세 번째는 인의仁義를 천하게 여기는 것이고, 네 번째는 옥리獄吏를 귀하게 여기는 것이고, 다섯 번째는 조정을 비방하는 자를 벌주는 것이고, 여섯 번째는 요망한 말을 금지하는 것이고, 일곱 번째는 성복盛服한 선생先生(儒者)이 세상에 쓰여지지 않는 것이고, 여덟 번째는 충량忠良한 사람의 간절한 말이 모두 가슴속에 답답하게 쌓여 있는 것이고, 아홉 번째는 헛된 명예를 좋아하는 것이고, 열 번째는 실제 화禍를 입는 것이다.” 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가지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옥리獄吏가 이것입니다.
옥사獄事는 천하의 운명이 걸린 중대한 일입니다.
죽은 자는 다시 살릴 수 없고 〈형벌을 받아〉 사지四肢가 절단된 자는 다시 이어 붙일 수 없습니다.
《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
무고無辜한 자를 죽이기보다는 차라리 법대로 하지 않은 잘못을 저지르라.’
注+[通鑑要解]與其殺不辜 영실불경寧失不經:고辜는 죄이고 경經은 떳떳함이다. 법에 죽일 수도 있고 죽이지 않을 수도 있는데, 죽이면 죄 없는 자를 죽임에 빠질까 두렵고 죽이지 않으면 가볍게 풀어줌에 잘못될까 두려우니, 두 가지는 모두 성인聖人의 지극히 공정하고 공평한 뜻이 아니나 죄 없는 자를 죽이는 것은 더더욱 성인聖人이 차마 못하는 바이다. 그러므로 죽여서 저의 생명을 해치기보다는 차라리 우선 목숨을 보전해 주어서 위정자가 스스로 형벌을 잘못 행한 책임을 받는 것이니, 이 내용은 《서경書經》 〈대우모大禹謨〉에 보인다. 하였는데, 지금
옥리獄吏들은 그렇지 아니하여
상하上下가 서로 몰아서 각박함을 현명하다고 여겨
注+[釋義]上下相敺 이각위명以刻爲明:왕씨王氏가 말하였다. “위로는 조정朝廷과 아래로는 군현郡縣, 위로는 관장官長과 아래로는 요속僚屬들이 모두 서로 몰아붙이고 핍박하여 까다롭고 각박함을 일삼음을 말한 것이다.” 법을 까다롭게 적용하는 자는 공무를 잘 수행한다는 명성을 얻고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법조문法條文을 각박하게 하는 자가 공무公務를 잘 수행했다는 명칭을 얻음을 이른다.” 공평하게 다스리는 자는 후환이 많습니다.
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법을 공평히 집행하는 자는 그 뒤에 도리어 환해患害가 많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므로 옥리獄吏들이 모두 사람(죄인)이 죽기를 바라니 이는 사람들을 미워해서가 아니고 자신이 편안한 방도가 죄인이 죽는 데에 있어서이니, 태평한 정치가 이루어지지 않는 것은 모두 이 때문입니다.
시속의 말에 이르기를 ‘땅에 금을 그어 놓고 감옥이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의논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하고,
注+[釋義]畫地爲獄 의불입議不入: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땅에 금을 그어 옥문獄門이라 하면 비록 진짜 옥獄이 아님을 알더라도 사람들이 또 헤아리고 의논하여 들어가지 않으려 함을 말한 것이다.” 나무를 조각하여
옥리獄吏라 하더라도 사람들이 기필코 상대하지 않으려 한다.
注+[釋義]刻木爲吏 기부대期不對: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목우木偶(나무로 만든 인형)를 조각하여 옥리獄吏라 하면 사람들이 비록 진짜 옥리獄吏가 아님을 알더라도 반드시 바라보기만 하고 상대하지 않으려 함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 〈노온서전路溫舒傳〉의 주註에 ‘기期는 필必과 같다.’ 하였다.” ’ 하였으니, 이는 모두
옥리獄吏를 미워하는 풍조이고 비통해 하는 말입니다.
오직 폐하께서 법제法制를 줄이시고 형벌을 너그럽게 하신다면 태평한 기풍을 세상에 일으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자, 상上이 그의 말을 좋게 여겼다.
○ 12월에 조서를 내리기를 “근간에 관리들이 법을 적용하기를 교묘히 하고 법문法文이 점점 각박해져서 죄 없는 자들로 하여금 죽임을 당하게 하니, 짐이 매우 슬퍼하노라.
지금
정위사廷尉史注+[頭註]정사廷史는 정위廷尉의 사史이다. 를 보내어
군郡의
태수太守와
옥사獄事를
국문鞫問注+[原註]국鞠은 음이 국이니, 추궁하는 것이다. 하게 하되 임무가 가볍고 녹봉이 적으니,
정위평廷尉平注+[釋義]정위평廷尉平은 《한서漢書》 주註에 “평平은 음이 병(평)이니, 공평하지 않은 것을 공평하게 하는 것이다.” 하였다. 을 두어서 품계는
육백석六百石으로 하고 인원은 4명으로 하여 되도록 공평하게 처리해서 짐의 뜻에 걸맞게 하라.” 하였다.
이에 매년
계추季秋가 된 뒤에 옥사를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注+[原註]讞은 옥사(형벌)를 의논하는 것이다.[釋義]讞은 죄를 의논하는 것이니, 계추季秋에 죄를 의논하는 것은 철(가을)의 숙살肅殺(날씨가 추워져 초목草木을 죽임)하는 기운을 따른 것이다.
이때 상上이 항상 선실宣室에 행차하여 재계하고 있으면서 옥사를 결단하니, 옥사와 형벌이 공평하다고 이름났다.
탁군태수涿郡太守 정창鄭昌이 상소하여 말하기를 “지금 현명하신 군주께서 몸소 밝게 들어 다스리고 계시니, 비록 정위평廷尉平을 두지 않더라도 옥사獄事가 저절로 바르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 후사後嗣를 계도啓導하려 하신다면 율령律令을 산정刪定하는 것만 못하니, 율령律令이 한번 정해지면 어리석은 백성들은 피할 바를 알고 간사한 옥리獄吏들은 농간하는 바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제 그 근본을 바로잡지 않고 정위평廷尉平을 두어 그 말末(지엽)만을 다스리시니, 정사하려는 의욕이 쇠퇴하고 다스림이 태만해지시면 정위평廷尉平이 장차 권력을 휘둘러 난亂의 우두머리가 될 것입니다.” 하였다.
1
[갑인] 3년
12
2
[갑인] 3년
1090
3
[갑인] 3년
385
4
[갑인] 3년
310
5
[갑인] 3년
4
6
[갑인] 3년
1920
7
[갑인] 3년
16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