上이 素聞王吉, 貢禹皆明經潔行하고 遣使者徵之러니 吉은 道病卒하고 禹는 至라
拜爲諫大夫
하고 上
이 虛己
하야 問以政事
한대 禹奏言
호되
古者에 人君節儉하야 什一而稅하고 亡(無)他賦役이라 故로 家給人足하니
臣愚는 以爲如太古는 難이어니와 宜少放古하야 以自節焉이라하노이다
天子納善其言
하야 〈出貢禹本傳〉詔令諸宮館希(稀)御幸
注+[頭註]衣服之加於身과 飮食之入於口와 妃妾之接於寢을 皆曰御요 上之親愛者曰幸이라者
를 勿繕治
하고 太僕
에 減穀食馬
하고 水衡
注+[釋義]水衡都尉는 主都水及上林苑이라에 肉食獸
注+[頭註]減은 謂損其數요 은 謂全去之라하다
忠臣之事君也에 責其所難이면 則其易者不勞而正이요 補其所短이면 則其長者不勸而遂라
孝元踐位之初에 虛心以問禹하니 禹宜先其所急하고 後其所緩이니
然則優游不斷과 讒佞用權은 當時之大患也어늘 而禹不以爲言하고 恭謹節儉은 孝元之素志也어늘 而禹孜孜言之는 何哉아
漢元帝와 唐文宗은 寬厚恭儉하야 有人君之德이로되 而受制閹宦하야 百度廢弛하야 賢不肖雜亂하고 賞罰倒置하야 終身泯黙하야 至於不振하니 可哀也已라
故로 予嘗謂漢之業이 所以遂衰而不振者는 元帝柔弱之過요 漢之祚 所以旣亡而復興者는 元帝恭儉之功이라하노라
상上이 평소에 왕길王吉과 공우貢禹가 모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깨끗하다는 말을 듣고 사자使者를 보내어 부르니, 왕길王吉은 도중에 병으로 죽고 공우貢禹는 이르렀다.
공우貢禹를 임명하여 간대부諫大夫로 삼고 상上이 자주 자기 몸을 겸손히 하여 정사를 묻자 공우貢禹가 상주上奏하여 말하기를
“옛날에 인군人君이 절약하고 검소해서 10분의 1을 세금으로 받고 딴 부역(세금과 신역)이 없었으므로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였으니,
어리석은 신은 생각하건대 태고太古처럼 하기는 어려우나 마땅히 다소 옛날을 본받아 스스로 절약해야 한다고 여깁니다.” 하였다.
천자天子는 그 말을 좋게 여겨 받아들여서 - 《
한서漢書 공우전貢禹傳》에 나옴 - 명령을 내려 여러
궁관宮館 중에 황제가 자주 행차
注+[頭註]몸에 가하는 의복과 입에 넣는 음식과 침소에서 시중하는 비妃와 첩妾을 모두 어御라 하고, 상上이 친애하는 자를 행幸이라 한다. 하지 않는 곳을 수선하지 말게 하고
태복太僕에는 곡식을 먹이는 말을 줄이게 하고,
수형水衡注+[釋義]수형水衡의 도위都尉는 도성都城의 물과 상림원上林苑을 주관하였다. 에는 고기를 먹이는 짐승을 전부 없애도록 하였다.
注+[頭註]減穀……省肉食獸:감減은 숫자를 줄임을 이르고, 생省은 전부 없앰을 이른다.
“충신忠臣이 군주君主를 섬길 적에 군주가 하기 어려운 것을 군주에게 요구하면 쉬운 것은 수고롭지 않고도 바루어지고, 부족한 것을 보충하면 잘하는 것은 권하지 않고도 이루어진다.
효원제孝元帝가 즉위하던 초기에 마음을 겸허히 하여 공우貢禹에게 물었으니, 공우貢禹는 마땅히 급한 것을 먼저 하고 늦추어도 되는 것을 뒤에 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우유부단함과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권세를 부리는 것은 당시의 큰 병폐였는데 공우貢禹가 이것을 말하지 않고, 공손하고 절약함은 효원제孝元帝의 평소의 뜻이었는데 공우貢禹가 이것을 부지런히 말함은 어째서인가?
만일 공우貢禹의 지혜가 이것을 알지 못했다면 어찌 어질다고 할 수 있겠는가.
알면서도 말하지 않았다면 죄가 됨이 더욱 크다.”
한漢나라 원제元帝와 당唐나라 문종文宗은 관후寬厚하고 공검恭儉하여 인군人君의 덕德이 있었으나 환관宦官들에게 제재를 받아서 온갖 법도가 폐지되고 해이해져서 현자賢者와 불초不肖한 자들이 뒤섞여 어지럽고 상벌賞罰이 도치되어 종신토록 침묵해서 진작振作하지 못함에 이르렀으니, 가련하다.
그러므로 내(戴溪)가 일찍이 이르기를 ‘한漢나라의 기업基業이 마침내 쇠퇴하여 진작振作하지 못한 까닭은 원제元帝의 유약柔弱한 과실 때문이고, 한漢나라의 국운國運이 이미 망했다가 다시 일어난 까닭은 원제元帝의 공검恭儉한 공로 때문이었다.’라고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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