信臣이 先爲南陽太守하고 後遷河南하니 治行이 常第一이라
視民如子하고 好爲民興利하야 躬勸耕稼하고 開通溝瀆하니 戶口增倍하고 吏民親愛하야 號曰召父라하니라
○ 甘延壽, 陳湯이 旣至에 論功이러니 石顯, 匡衡이 以爲延壽, 湯이 擅興師矯制하니 幸得不誅라
如復加爵土면 則後奉使者 爭欲乘危徼幸하야 生事於蠻夷하야 爲國招難하리이다
帝內嘉延壽, 湯功이나 而重違衡, 顯之議하야 久之不決이라
故宗正劉向
이 上疏曰 貳師將軍李廣利 捐五萬之師
하고 靡億萬之費
하고 經四年之勞
하야 而僅獲駿馬三十匹
하고 雖斬宛王
寡之首
나 猶不足以
注+[原註]償也라費
요 其私罪惡
이 甚多
로되
孝武以爲萬里征伐
이라하사 不錄其過
하고 遂封拜兩侯
注+[頭註]廣利等侯者二人이요 卿者三人이요 二千石이 百有餘人이라[通鑑要解]兩侯는 武帝封廣利兄弟라하시니이다
今康居之國이 彊於大宛하고 郅支之號 重於宛王하고 殺使者罪 甚於留馬어늘
而延壽, 湯
이 不煩漢士
하고 不費斗糧
하니 比於貳師
컨대 功德
이 百之
注+[釋義]言功與德이 百倍勝之라니이다
於是에 天子下詔하야 赦延壽, 湯罪하야 勿治하고 令公卿議封焉하야 封延壽爲義成侯하고 賜湯爵關內侯하다
語臣曰 元帝多材藝
하야 善史書
注+[頭註]周宣王太史史所作大篆이라하고 〈鼓琴瑟
하고 吹洞簫
하며 自度曲
하야 被歌聲
하야 分刌節度
하야 窮極幼眇(要妙)
라〉
少而好儒러니 及卽位에 徵用儒生하야 委之以政하야 貢薛韋匡이 迭爲宰相이로되
而上牽制文義하고 優游不斷하야 孝宣之業이 衰焉이라
然이나 寬弘盡下하야 出於恭儉하고 號令溫雅하야 有古之風烈이라하니라
元帝以昏懦之資로 繼統之初에 首以公田으로 賑業貧民하고 賦貸種食하며 未幾에 減樂府員하고 省苑馬하야 以賑困乏하며 又罷宮館하고 減馬獸肉食하야 數月之內에 善政이 迭書하니 率是而行이면 文景도 亦不是過어늘
奈何로 主德不明하고 群小在位하야 知蕭周之賢호되 善善而不能用하고 知恭顯之姦호되 惡惡而不能去하야 事無巨細히 悉委中書하야 專事邪僻하고 賊害忠良하니 西漢之衰 決於此矣로다
太子卽皇帝位
하야 以元舅
注+[頭註]母之兄弟曰舅라平陽侯王鳳
으로 爲大司馬大將軍
하야 領尙書事
하다
元舅未有書어늘 而此書之者는 所以著外氏得權之始와 新莽簒竊之漸爾니 履霜堅氷을 可不戒哉아
하남태수河南太守 소신신召信臣이 소부少府가 되었다.
소신신召信臣은 먼저는 남양태수南陽太守가 되고 뒤에는 하남河南으로 옮겼는데, 치적治績이 항상 제일이었다.
백성을 보기를 자식처럼 아끼고 백성들을 위해 이로운 일을 일으키기를 좋아하여 몸소 농사일을 권장하고 수로水路를 개통하니, 호구戶口가 배로 증가하고 관리와 백성들이 친애하여 소부召父라고 불렀다.
○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이 이르자, 이들의 공功을 논하였는데, 석현石顯과 광형匡衡이 말하기를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이 제멋대로 군대를 일으키고 황제의 명을 사칭하였으니, 죄를 받아 죽지 않으면 다행입니다.
만일 다시 작위爵位와 토지土地를 더해 준다면 뒤에 사명使命을 받드는 자들이 다투어 위태로운 일을 무릅쓰고 요행을 바라서 오랑캐에게 일을 벌이고자 하여 국가에 난리를 초래할 것입니다.” 하였다.
황제는 내심으로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의 공功을 가상히 여겼으나 광형匡衡과 석현石顯의 의논을 어기기가 어려워 오랫동안 결정하지 못하였다.
예전의
종정宗正인
유향劉向이 상소하기를 “
이사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가 5만의 군사를 버리고 억만 전의 비용을 허비하고 4년 동안의 수고로움을 감내하여 겨우
준마駿馬 30필을 얻었고 비록
대완국大宛國의
왕王인
관과毌寡의 머리를 베었으나 오히려 비용을 다 보상
注+[原註]복復은 보상함이다. 하지 못하였으며 사사로운 죄악이 매우 많았습니다.
그러나
효무제孝武帝는 만 리 먼 곳을 정벌했다 하여 그의 허물을 기록하지 않고 마침내 두
후侯注+[頭註]李廣利 등 후侯에 봉해진 자가 두 명이고, 경卿이 된 자가 세 명이고, 이천석二千石이 된 자가 백여 명이었다. [通鑑要解]두 후侯는 무제武帝가 이광리李廣利 형제를 봉한 것이다. 에 봉하였습니다.
지금 강거국康居國이 대완국大宛國보다 강하고, 질지郅支의 칭호가 대완왕大宛王보다 중하고, 사자使者를 죽인 죄가 대완국大宛國에서 말을 숨기고 내주지 않은 것보다 더 심한데,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이
한漢나라 군사를 번거롭게 동원하지 않고 한 말의 양식도 허비하지 않았으니,
이사장군貳師將軍에 비하건대
공功과
덕德이 백배나 낫습니다.
注+[釋義]공덕백지功德百之는 공功과 덕德이 백배나 나음을 말한 것이다. ” 하였다.
이에 천자天子가 조서를 내려 감연수甘延壽와 진탕陳湯의 죄를 사면하여 다스리지 말게 하고, 공경公卿들로 하여금 봉작封爵을 의논하게 해서 감연수甘延壽를 봉하여 의성후義成侯로 삼고, 진탕陳湯에게는 관내후關內侯의 벼슬을 하사하였다.
반표班彪의 《한서漢書》 〈원제기元帝紀〉 찬贊에 말하였다.
“신臣의 외조外祖 형제가 원제元帝의 시중侍中이 되었었는데,
신臣에게 말씀하기를 ‘
원제元帝는
재예才藝가 많아
사주史籒의 글씨체
注+[頭註]사서史書는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의 태사太史였던 사주史籒가 만든 대전大篆이다. 를 잘 쓰고 거문고와 비파를 잘 타고 퉁소를 잘 불며 스스로 곡조를 만들어 노랫소리에 입혀서
절도節度에 맞아 오묘함을 다하였다.
젊어서부터 유학儒學을 좋아하였는데, 즉위하자 유생儒生들을 초빙해서 정사를 맡겨 공우貢禹, 설광덕薛廣德, 위현성韋玄成, 광형匡衡이 차례로 재상이 되었다.
그러나 상上은 글의 뜻에 구애되고 우유부단優游不斷하여 효선제孝宣帝의 업業이 쇠퇴하였다.
그러나 너그럽고 도량이 커서 아랫사람들의 마음을 다하고 공손함과 검소함에서 나왔으며, 호령號令이 온화하고 고상하여 옛 풍모가 있었다.’ 하였습니다.”
“원제元帝가 혼우昏愚하고 나약한 자질로 대통大統을 이은 초기에 첫 번째로 공전公田을 가지고 가난한 백성들의 생업을 도와주고 조세를 종자 곡식으로 꾸어 주며, 얼마 있지 않아 악부樂府의 인원을 줄이고 상림원上林苑의 말을 줄여서 곤궁한 자들을 구휼하였으며, 또 궁관宮館을 없애고 말과 고기 먹는 짐승을 줄여서 몇 달 사이에 선정善政이 번갈아 기록되었으니, 이를 따라서 행하였다면 문제文帝와 경제景帝 또한 이보다 더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어찌하여 군주의 덕德이 밝지 못하고 여러 소인들이 지위에 있어서 소망지蕭望之와 주감周堪의 어짊을 알았으나 선善을 선하게 여기면서도 등용하지 못하고, 홍공弘恭과 석현石顯의 간사함을 알았으나 악惡을 미워하면서도 제거하지 못해서, 크고 작은 일을 모두 중서中書에 맡겨서 오로지 사벽邪僻함을 일삼고 충량忠良한 사람을 해쳤으니, 서한西漢의 쇠퇴함이 여기에서 결정되었다.”
태자가 황제에 즉위하여
원구元舅(큰외삼촌)
注+[頭註]어머니의 형제를 구舅라 한다. 인
평양후平陽侯 왕봉王鳳을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으로 삼아서
상서尙書의 일을 총괄하게 하였다.
“원구元舅를 기록한 적이 없는데, 여기에 특별히 쓴 것은 외척들이 권력를 얻은 시초와 신新나라의 왕망王莽이 찬탈한 조짐을 드러낸 것이니, 서리를 밟으면 단단한 얼음이 이르는 것을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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