莽이 恃府庫之富하고 欲立威匈奴하야 乃遣孫(惠)[建]等하야 率十二將하고 分道竝出이어늘
匈奴爲害 所從來久矣로되 未聞上世有必征之者也니이다
後世三家周, 秦, 漢이 征之나 然而未有得上策者也요 周得中策하고 漢得下策하고 秦無策焉이라
周宣王時
에 注+[釋義]按匈奴之號는 唐虞以上曰山戎이요 亦曰이요 夏曰淳維요 殷曰鬼方이요 周曰玁狁이요 秦漢曰匈奴라內侵
하야 至于涇陽
이어늘 命將征之
하야 盡境而還
하니 其視玁狁之侵
을 譬猶
하야 敺之而已
라
漢武帝는 選將鍊兵하고 約齎輕糧하야 深入遠戍하야 雖有克獲之功이나 胡輒報之라
兵連禍結하야 三十餘年에 中國疲弊하고 匈奴亦創艾(刈)而天下稱武하니 是爲下策이니이다
秦皇
은 不忍小恥而輕民力
하야 築長城
하니 延
萬里
라
轉輸之行이 起於負海하야 疆境旣全호되 中國內竭하야 以喪社稷하니 是爲無策이니이다
今天下比年飢饉
注+[頭註]穀不熟曰飢요 菜不熟曰饉이라호되 北邊
이 尤甚
하니 大用民力
이라도 功不可必
이니 臣伏憂之
하노이다
○ 北邊
이 自宣帝以來
로 數世
를 不見煙火之警
하야 人民熾盛
하고 牛馬布野
러니 及莽
이 撓亂匈奴
하야 與之構難
에 邊民
이 死亡係獲
하니 數年之間
에 北邊
이 空虛
하고 野有
骨矣
러라
○ 莽이 遣使者하야 奉璽書印綬하고 迎龔勝하니 勝이 稱病篤이라
使者以印綬
로 就加勝身
한대 勝
이 輒
不受
하고 謂門人高暉等曰 吾受漢家厚恩
하야 無以報
요 今年老矣
라
誼豈以一身事二姓이리오하고 語畢에 遂不復開口飮食하야 積十四日에 死하니라
○ 是時
에 淸名之士
에 又有紀
, 薛方,
越, 郇相, 唐林, 唐遵
하니 皆以明經飭行
으로 顯名於世
라
紀逡兩唐
은 皆仕莽
하고 郇相
은 爲莽太子四友
注+[頭註]莽爲太子하야 置師友各四人호되 秩以大夫하니 師疑傅丞阿輔保弼이 是爲四師요 胥附犇走先後禦侮是爲四友라하다
莽
이 以安車迎薛方
한대 方謝曰
堯,
舜在上에 下有巢,
由注+[附註]巢父, 許由也라 高士傳에 許由는 字武仲이니 聞堯治天下而讓焉하고 遁於潁水之陽, 箕山之下하니라 堯又召爲九州之長한대 由不欲聞之하야 洗耳於潁濱이러니 巢父牽犢欲飮之라가 見由洗耳하고 曰 汚吾犢口라하고 遂牽犢上流하야 飮之하니라라
今明主方隆唐虞之德
하시니 小臣
이 欲守
하노이다 莽
이 說其言
하야 不彊致
하니라
春秋列國卿大夫로 及至漢興將相名臣히 懷祿耽寵以失其世者多矣라
王貢之材
注+[釋義]前漢王吉與貢禹라는 優於龔鮑
로되 는 勝實蹈焉
이요 貞而不諒
注+[頭註]貞은 正而固也요 諒은 則不擇是非而必於信이라은 薛方近之
하고 하야 絶紀唐矣
니라
왕망王莽은 부고府庫의 부유함을 믿고 흉노匈奴에게 위엄을 세우려고 하여 마침내 손건孫建 등을 보내어 12명의 장군을 거느리고 길을 나누어 함께 출격하게 하였다.
“흉노匈奴가 중국中國의 폐해가 된 지 유래가 오래되었으나 상고시대上古時代에 반드시 정벌한 자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후세에 세 나라인 주周나라‧진秦나라‧한漢나라가 정벌하였으나 상책上策을 얻은 자가 있지 않았고, 주周나라는 중책中策을 얻었고 한漢나라는 하책下策을 얻었으며 진秦나라는 무책無策이었습니다.
주周나라
선왕宣王 때에
험윤玁狁(匈奴)
注+[釋義]살펴보건대 흉노匈奴의 칭호는 당唐‧우虞 이전에는 산융山戎이라 하고 또한 훈육獯鬻이라 하였으며, 하夏나라는 순유淳維, 은殷나라는 귀방鬼方, 주周나라는 험윤玁狁, 진秦‧한漢은 흉노匈奴라 하였다. 이 국내로 침입하여
경양涇陽에 이르자 장수를 명하여 정벌하게 해서 국경까지 내쫒고 돌아왔으니,
험윤玁狁의 침략을 보기를 비유하면 모기와 등에처럼 여겨서 몰아낼 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천하가 영명英明하다고 칭하였으니 이는 중책中策이 됩니다.
한漢나라 무제武帝는 장군을 선발하고 군대를 훈련시키며 가벼운 군장軍裝과 양식을 휴대하고 깊숙이 쳐들어가고 멀리 수자리를 시켜 비록 적을 이기고 사로잡은 공이 있으나 오랑캐들이 번번이 보복하였습니다.
전란戰亂과 화禍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 지 30여 년에 중국中國이 피폐해지고 흉노匈奴 또한 징계되고 두려워하여 천하가 무제武帝라고 일컬으니 이는 하책下策이 됩니다.
진秦나라 시황始皇은 작은 수치를 참지 못하고 백성들의 힘을 하찮게 여겨 만리장성을 쌓으니 길이가 만 리에 뻗쳤습니다.
물자를 수송하는 행렬이 바닷가에서부터 시작되어 국경은 이미 온전하였으나 중국은 안으로 고갈되어서 사직社稷을 망하게 하였으니 이는 무책無策이 됩니다.
지금 천하가 해마다
기근飢饉注+[頭註]곡식이 성숙하지 않은 것을 기飢라 하고, 채소가 성숙하지 않은 것을 근饉이라 한다. 이 들었는데 북쪽 변경이 더욱 심하니 백성의 힘을 크게 쓰더라도
공功을 기필할 수가 없으니, 신은 엎드려 이를 걱정합니다.”
○ 북쪽 변경邊境이 선제宣帝 이래로 여러 대 동안 봉화불을 올려 경계하는 것을 보지 못하여 인민人民들이 번성하고 소와 말이 들에 널려 있었는데, 왕망王莽이 흉노를 소란하게 하여 그들과 병란을 일으킴에 미쳐서는 변경의 백성들이 사망하고 포로로 잡히니, 몇 년 사이에 북쪽 변경이 텅 비고 들에는 버려진 해골이 있었다.
○ 왕망王莽이 사자使者를 보내어 새서璽書와 인수印綬를 받들고 가서 공승龔勝을 맞이하니, 공승龔勝은 병이 위독하다고 핑계 대었다.
사자使者가 인수印綬를 가지고 가서 공승龔勝의 몸에 가하자 공승龔勝이 곧 물리치고 받지 않고, 문인門人 고휘高暉 등에게 이르기를 “내가 한漢나라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으나 보답하지 못하고 이제 나이가 늙었다.
의리상 어찌 한 몸을 가지고 두 성姓의 군주를 섬기겠는가.” 하고는 말을 마치자, 마침내 다시는 입을 벌려 음식을 먹지 않아서 14일 만에 죽었다.
○ 이때 깨끗한 명성이 있는 선비 중에 또 기준紀逡‧설방薛方‧순월郇越‧순상郇相‧당림唐林‧당준唐遵이 있었는데, 모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을 삼가는 것으로 당세에 이름이 알려졌다.
기준紀逡‧
당림唐林‧
당준唐遵은 모두
왕망王莽에게 벼슬하였고,
순상郇相은
왕망王莽의
태자太子의
사우四友注+[頭註]왕망王莽이 태자太子를 위하여 사師와 우友를 각각 네 사람씩 두었는데 대부大夫의 품계로 하였는 바, 사의師疑‧부승傅丞‧아보阿輔‧보필保弼을 사사四師라 하고 서부胥附‧분주犇走‧선후先後‧어모禦侮를 사우四友라 하였다. 가 되었다.
왕망王莽이
안거安車로
설방薛方을 맞이하자,
설방薛方은 사양하기를 “
요堯‧
순舜이 임금으로 계실 때에 아래에는
소보巢父와
허유許由注+[附註][附註]巢, 유由:소巢와 유由는 소보巢父와 허유許由이다. 《고사전高士傳》에 “허유許由는 자가 무중武仲이니, 요堯임금이 천하를 다스리다가 그에게 사양한다는 말을 듣고는 영수潁水의 물가 기산箕山의 아래에 은둔하였다. 요堯임금이 또다시 불러 구주九州의 장長으로 삼자, 허유許由는 그 말을 듣고자 하지 아니하여 영수潁水 가에서 귀를 씻었는데, 소보巢父가 송아지를 끌고 와서 이 물을 먹이려고 하다가 허유許由가 귀를 씻는 것을 보고는 말하기를 ‘내 송아지 입을 더럽힐 뻔 했다.’ 하고는 마침내 송아지를 끌고 상류上流로 가서 물을 먹였다.” 하였다. 가 있었습니다.
지금 현명한 군주께서 막 당唐‧우虞의 덕德을 높이시니, 소신小臣은 기산箕山의 절개를 지키고자 합니다.” 하니, 왕망王莽이 그 말을 기뻐하여 억지로 데려가지 않았다.
반고班固의 《한서漢書》 〈왕공양공포전王貢兩龔鮑傳〉 찬贊에 말하였다.
“춘추시대春秋時代 열국列國의 경대부卿大夫로부터 한漢나라가 일어난 뒤의 장상將相과 명신名臣들에 이르기까지 녹祿을 생각하고 은총을 탐하여 대대로 지켜 오는 문벌을 잃는 자가 많았다.
이 때문에 깨끗한 절개를 지키는 선비가 이에 귀하였다.
그러나 깨끗한 절개가 있는 선비들은 대체로 자기 몸은 잘 다스리지만 남을 잘 다스리지는 못한다.
왕길王吉과
공우貢禹注+[釋義]왕공王貢은 전한前漢 때의 왕길王吉과 공우貢禹이다. 의 재주가
공승龔勝과
포선鮑宣보다 나았지만 죽음으로 지키면서도
도道를 잘한 것은
공승龔勝이 실로 이를 행하였으며, 바르고 곧으며 작은 신의에 얽매이지 않는 것은
注+[頭註]정貞은 바르고 곧음이요, 양諒은 옳고 그름을 가리지 않고 신信만 기필하는 것이다. 설방薛方이 이에 가까웠고,
곽흠郭欽과
장후蔣詡는 은둔하기를 좋아하고 몸을 더럽히지 않아
기준紀逡과
당림唐林‧
당준唐遵보다 크게 뛰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