樊崇等
이 聞莽將討之
하고 恐其衆與莽兵亂
하야 乃皆朱其眉
하야 以相
別
注+[頭註]識는 讀曰誌니 別異也라하니 由是
로 號曰赤眉
라하다
○ 初
에 長沙定王發
注+[頭註]景帝子라의 四世孫南頓令欽
이 生三男
하니 , 仲, 秀
라
縯
은 性
이 剛毅慷慨
하야 有大節
하고 秀
는 隆準日角注+[釋義]隆은 高也요 準은 謂鼻頭也라 日角은 謂庭中骨起하야 狀如日也라이요 性勤稼穡
하니 縯
이 常非笑之
注+[釋義]縯好俠養士러니 每見其弟事田業하고 輒非而笑之하니라하야 比於高祖兄仲
注+[釋義]仲은 高祖兄之名也라 高祖曰 始大人이 常以臣亡(無)賴하야 不能治産業하야 不如仲力이라하시더니 今某之(力)[業]이 孰與仲多오하니라이러라
宛人李守 好星曆讖記
注+[頭註]符命之書라 讖은 驗也니 凡讖緯는 皆言將來之驗이라러니 嘗謂其子通曰 劉氏當興
이니 李氏爲輔
라하더라
及新市, 平林兵
注+[附註]綠林賊이 乃各分散하야 王匡等은 北入南陽하야 號新市兵이라하고 王常等은 西入南郡하야 號下江兵이라하고 平林人陳牧, 等은 復聚衆千餘人하야 號平林兵이라하고 以應新市하니라起
하야 南陽
이 騷動
이어늘 通
의 從弟
이 謂通曰 今四方擾亂
하니 漢當復興
이라
南陽宗室에 獨劉伯升兄弟 汎愛容衆하니 可與謀大事라한대 通이 笑曰 吾意也라하고
遣軼往迎秀
하야 與相約結
하야 定謀議
하고 歸舂陵擧兵
注+[釋義]舂陵은 鄕名이니 本屬零陵郡〈冷道縣〉이라 漢元時에 (從)[徙]南陽蔡陽縣白水鄕하고 仍號舂陵하니라 按今道州 古舂陵郡이라하다
於是
에 縯
이 自發舂陵子弟
注+[頭註]定王發이 生舂陵節侯買하니라하니 諸家子弟恐懼
하야 皆亡匿
이러니 及見秀絳衣大冠
注+[釋義]大冠은 武冠也라 俗爲之大冠에 環纓無蕤하고 以靑絲爲緄하야 加雙尾하야 豎左右하고 謂之鶡冠이라하니 鶡은 音芬이니 勇雉也라 其鬪對一死而止니라[頭註]卽將軍服이라하고 皆驚曰
謹厚者도 亦復爲之라하고 乃稍自安
하야
凡得子弟七八千人하야 與下江將王常及新市, 平林兵合하니 於是에 諸部齊心하야 銳氣益壯이러라
번숭樊崇 등은
왕망王莽이 장차 자신들을 토벌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자기 무리들이
왕망王莽의 군대와 뒤섞일까 염려하여, 마침내 모두 눈썹을 붉게 칠하여 서로 표시해서 구별하니,
注+[頭註]지識는 지誌로 읽으니, 구별하여 다르게 하는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적미赤眉라고 불렀다.
○ 처음에
장사정왕長沙定王 유발劉發注+[頭註]정왕定王 발發은 경제景帝의 아들이다. 의 4대손인
남돈령南頓令 유흠劉欽이 세 아들을 낳으니,
유연劉縯‧
유중劉仲‧
유수劉秀이다.
유연劉縯은 성품이
강의剛毅하고
강개慷慨하여 큰 절개가 있고,
유수劉秀는 콧날이 우뚝하고 이마가 해처럼 불거져 나왔으며
注+[釋義]융隆은 높음이고 준準은 콧날을 이른다. 일각日角은 이마 가운데의 뼈가 불거져 나와서 모양이 해와 같은 것이다. 성품이 농사를 부지런히 힘쓰니,
유연劉縯이 항상 아우를 비웃어서
注+[釋義]유연劉縯은 의협義俠을 좋아하고 선비를 길렀는데, 그 아우가 농업에 종사하는 것을 보고는 그때마다 비웃었다. 고조高祖의 형인
유중劉仲注+[釋義]유중劉仲은 고조高祖의 형의 이름이다. 고조高祖가 황제가 된 다음 그 아버지에게 이르기를 “처음 대인大人(부친)께서 항상 저더러 무뢰無賴하여 가산家産을 다스리지 못해서 중仲의 힘(노력)만 못하다고 하시더니, 지금 제가 성취한 업業이 중仲과 더불어 누가 낫습니까?” 하였다. 에게 견주었다.
완宛땅 사람
이수李守가
성력星曆(점성술)과
참기讖記(도참설)
注+[頭註]참기讖記는 부명符命의 글이다. 참讖은 징험(징조)이니, 무릇 참위讖緯는 모두 미래의 〈길흉화복에 대한〉 징조를 말한 것이다. 를 좋아하였는데, 일찍이 그 아들
이통李通에게 이르기를 “
유씨劉氏가 마땅히 일어날 것이니, 우리
이씨李氏가 보필이 되어야 한다.” 하였다.
신시新市와
평림平林의 군대
注+[附註]녹림산綠林山의 적賊들이 마침내 각각 분산하여 왕광王匡 등은 북쪽으로 남양南陽에 들어가 이름을 신시병新市兵이라 하고, 왕상王常 등은 서쪽으로 남군南郡에 들어가 이름을 하강병下江兵이라 하고, 평림平林 사람 진목陳牧과 요담廖湛 등은 다시 무리 천여 명을 모아 평림병平林兵이라 이름하고 신시新市에 응하였다. 가 일어나
남양南陽이 소란하자,
이통李通의
종제從弟인
이일李軼이
이통李通에게 이르기를 “지금 사방이 소란하니,
한漢나라가 마땅히 다시 일어날 것이다.
남양南陽의 종실宗室 중에 유독 유백승劉伯升(劉縯) 형제가 사람을 널리 사랑하고 무리들을 포용하니, 함께 대사大事를 도모할 수 있다.”라고 하자, 이통李通이 웃으며 말하기를 “나의 뜻도 그러하다.” 하고,
이일李軼을 보내어 가서
유수劉秀를 맞이해서 서로 약속하여
계책計策을 정하고
용릉舂陵으로 돌아가 군대를 일으키게 하였다.
注+[釋義]용릉舂陵은 고을 이름이니, 본래 영릉군零陵郡 냉도현冷道縣에 속하였다. 한漢나라 원제元帝 때에 남양군南陽郡의 채양현蔡陽縣 백수향白水鄕으로 옮기고 인하여 용릉舂陵이라 이름하였다. 살펴보건대 지금의 도주道州가 옛날의 용릉군舂陵郡이다.
이에
유연劉縯이 스스로
용릉舂陵의 자제들
注+[頭註]정왕定王 발發이 용릉절후舂陵節侯 매買를 낳았다. 을 징발하니, 여러 집의 자제들이 두려워하여 모두 도망해 숨었는데,
유수劉秀가 붉은옷에 큰 관
注+[釋義]大冠은 무관武冠이다. 세속에서 큰 관冠을 만들 때에 고리로 갓끈을 만들되 끈을 늘어뜨림이 없고, 푸른 실로 끈을 만들어 분鶡(새 이름)의 두 꼬리를 가加하여 좌우에 세우고 이것을 할관鶡冠이라 하였다. 분鶡은 음이 분이니, 용맹한 꿩인데, 둘이 싸워 하나가 죽어야만 싸움을 그친다.[頭註]붉은옷에 큰 관은 바로 장군의 복장이다. 을 쓰고 온 것을 보고는 모두 놀라며 말하기를 “근후한 자도 다시 이 일을 한다.” 하고, 이에 차츰 저절로 안정되었다.
그리하여 모두 7, 8천 명을 얻어서 하강下江의 장수인 왕상王常과 신시新市‧평림平林의 군대와 합하니, 이에 여러 부대가 마음을 함께하여 예기銳氣가 더욱 장대壯大하였다.
- 《한서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와 〈유연전劉縯傳〉, 〈왕상전王常傳〉에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