更始至長安하야 居長樂宮할새 升前殿하니 郞吏以次列庭中이라
更始
하야 俛首刮席注+[釋義]俛은 與俯同하니 低頭也라 刮은 古刹反이니 摩也라하야 不敢視
하고 委政於
하고 日夜飮讌後庭
하야 以至群小膳夫
注+[通鑑要解]具食也니 庖人知味하야 必加善故로 字形以善이라히 皆濫授官爵
하니
長安
이 爲之語曰
竈下養은 中郞將注+[釋義]王氏曰 炊烹爲養이니 言此徒亦得授中郞將이라 按百官表에 中郞有五官左右三將하니 秩皆比二千石이라이요 爛羊胃는 騎都尉注+[釋義]初에 武帝置羽林騎러니 至宣帝하야 令騎都尉監之하고 〈秩〉比二千石하니라요 爛羊頭는 關內侯注+[釋義]列侯는 出關就國이요 侯但爵(身其)[其身]이니 有家累者는 與之關內之邑하야 食其租稅하니라라하니 由是
로 關中離心
하고 四海怨叛
이러라
○ 大司馬秀至
하니 會
에 王子接
注+[頭註]接은 名也니 武帝五世孫廣陽王嘉之子라이 起兵薊中
하야 以應王郞
이라
城內擾亂
注+[頭註]王郞移檄하야 購光武하니라이어늘 秀趣(促)駕而出
하야 不敢入城邑
하고 舍食
注+[通鑑要解]師一宿曰舍라道傍
하다
至亭
注+[釋義]蕪蔞故城은 在晉州饒陽縣北하니 亭亦在焉이라하니 時
에 天寒洌
이라
馮異上豆粥
하고 至下曲陽
注+[釋義]在鉅鹿郡이라傳
하야 聞王郞兵在後
하고 從者皆恐
이러니 至
河
注+[釋義]沱는 或作沲라 地理志에 滹沱河는 自代郡鹵城縣東으로 去參合縣하고 又東經眞定南關하고 又東過霸州文安하야 入海라하니 候吏還白
호되 河水流
注+[釋義]凘는 音斯니 流冰也라하고 無船不可濟
니이다
秀使
王霸往視之
한대 霸恐驚衆
하고 欲且前阻水
注+[頭註]前은 進也요 阻는 恃險自固也라하야 還卽詭曰 冰堅可度(渡)
라하니 官屬
이 皆喜
라
秀笑曰 候吏果妄語也로다하고 遂前比至河하니 河冰이 亦合이라
古之人君이 不恃其或然之數而忽其必然之理하니 或然之數者는 天也요 必然之理者는 人也라
天意之不集이라도 人事猶可以自盡이어니와 幸乎天而人不繼之면 鮮有不敗事者矣라
睢水之圍에 幾入乎項氏之掌握이러니 而以大風脫하고 滹沱之役에 幾塡於餓虎之喙矣러니 而以冰合濟하니 是豈人力也哉아
二君於此에 不以其幾不免者自沮하고 亦不以其幸而免者自賀하야
方且益聽三傑
注+[頭註]子房, 蕭何, 韓信이라之謀
하고 而延攬二十八將之族
하야 以伺其隙
하고 而俟其可乘之機
하야 卒之垓下之圍合而項氏擒
하고 邯鄲之戰交而王郞虜
하니 是果天耶
아
能知高帝五年之業이 不成於睢水之脫而成於垓下之勝하고 光武之中興이 亦不在於滹沱之濟而在於邯鄲之克이면 則知人君之有爲於天下者 其始也는 雖天啓之나 而成之者는 常以人也라
嗟乎라 天之欲啓是君而使之有所就者는 不遽爾也라 置諸危而福之하고 投諸難而全之하야 使之迫於利害하야 而深其謀하고 臨於死生하야 以固其志하며 挫其驕矜하고 抑其果銳하야 以大其所受어늘 而人君者不能因乎天而善用之하고 而方且安乎天而棄其所以在人하야 退處乎無事之地하야 亦坐觀夫自定之勢면 則向之所以福之者는 乃所以禍之也요 全之者는 所以敗之也라
嗚呼라 人君이 有天下之慮어든 其毋以天之所以福我而全我者로 而自取禍敗也哉인저
至南宮
注+[釋義]地理志에 信都郡南宮縣이라 按信都는 今冀州是也라하야 遇大風
하야 秀引車入道傍空舍
하니 馮異
는 抱薪
하고 鄧禹
는 火
라
馳赴信都
注+[釋義]地理志에 趙地北有信都라하니 按今冀州是라 春秋에 爲晉東陽地러니 三家分晉하야 因屬趙라 秦於此에 置信都縣하고 屬鉅鹿하니라하니 是時
에 郡國
이 皆降王郞
호되 獨信都太守任光
과 和戎
注+[釋義]郡名也니 王莽이 分鉅鹿〈郡〉하야 爲和戎하니라太守
이 不肯從
이러니 光
이 聞秀至大喜
하고 邳肜
이 亦自和戎來會
하다
可因信都兵하야 自送西還長安이라한대 邳肜曰 吏民이 歌吟思漢이 久矣라
今卜者王郞이 假名因勢하야 驅集烏合之衆하야 遂振燕, 趙之地나 無有根本之固하니 明公이 奮二郡之兵하야 以討之면 何患不克이리오
必更驚動三輔
하야 損威重
하리니 非計之得者也
니이다 秀乃止
하다
任光이 發傍縣하야 得精兵四千人하니 衆이 稍合至萬人이라
移檄邊郡하야 共擊邯鄲하니 郡縣이 還復響應이러라
○ 秀披輿地圖
注+[釋義]披는 閱視也요 圖는 畫也라 地象車輿載物이라 故曰輿(也)[地]라하야 指示鄧禹曰 天下郡國
이 如是
어늘 今始乃得其一
注+[頭註]初得廣阿郡也라하니 子前言以吾慮天下不足定
은 何也
오 禹曰 方今海內
亂
이라
人思明君을 猶赤子之慕慈母하나니 古之興者는 在德薄厚요 不以大小也니이다
秀收郞文書
하야 得吏民與郞交關
注+[頭註]交는 結이요 關은 通也라謗毁者數千章
하야 秀不省
하고 會諸將燒之
하고 曰
令反側子自安하노라
○ 秀部分吏卒하야 各隷諸軍할새 士皆言願屬大樹將軍이라하니 大樹將軍者는 偏將軍馮異也라
爲人
이 謙退不伐注+[釋義](隷)[語]에 孟之反不伐이라한대 (堯)[饒]氏曰 伐은 如伐木之伐이니 凡人矜誇其能은 乃所以自(伐)[戕]其能也라 故謂之伐이라하니라하야 勅吏士
하야 非交戰受敵
이면 常行諸營之後
하고 每所止舍
에 諸將
이 竝論功
이어든 異常獨屛樹下
라
○ 更始遣使
하야 立秀爲蕭王
注+[釋義]括地志에 今徐州縣이 古蕭叔國也라하고 悉令罷兵
이어늘
今更始爲天子
에 而諸將擅命
하고 貴戚縱橫
注+[頭註]縱은 放縱也요 橫은 恣橫也라하야 虜掠自恣
하니 元元叩心
하야 更思莽朝
라
公이 功名已著하니 〈本傳에 無此句라〉以義征伐이면 天下를 可傳檄而定也라
天下는 至重하니 公可自取하고 毋令他姓得之하소서 〈以上 出弇本傳〉
蕭王이 乃辭以河北未平하야 不就徵하니 始貳於更始러라
○ 是時
에 諸賊銅馬, 鐵脛, 尤來, 大槍, 上江, 靑犢, 富平, 獲索
注+[釋義]八者는 皆是賊名이라[頭註]獲索等諸賊이 或以山川土地爲名하고 或以軍容强盛爲號하니라等
이 하니 衆
이 合數百萬人
이라
所在寇掠
이러니 秋
에 蕭王
이 擊銅馬於
注+[釋義]地理志에 鉅鹿郡에 有鄡縣이라할새 吳漢
이 將突騎
하고 來會淸陽
하니 士馬甚盛
이라
銅馬食盡夜遁이어늘 蕭王이 追擊於館陶하야 悉破降之하고 封其渠帥하야 爲列侯하다
諸將이 未能信賊하고 降者亦不自安이러니 王이 知其意하고 勅令降者로 各歸營勒兵하고 自乘輕騎하야 按行部陳한대
降者
相語曰 蕭王
이 하니 安得不投死乎
리오하고 由是皆服
이어늘
○ 赤眉樊崇等
이 將兵攻長安
이어늘 蕭王
이 將北徇燕, 趙
러니 赤眉必破長安
하고 又欲乘釁幷關中
이나 而不知所寄
하야
乃拜鄧禹前將軍
注+[頭註]漢有前將軍, 後將軍하니라하야 中分麾下精兵三萬人
하야 遣西入關
하다
○ 蕭王이 以河內險要富實이라하야 欲擇諸將守河內者而難其人하야 問於鄧禹한대
禹曰 寇恂이 文武備足하야 有牧民御衆之才하니 非此子면 莫可使也니이다
乃拜恂河內太守하야 行大將軍事하고 蕭王이 謂恂曰
昔에 高祖留蕭何守關中이러시니 吾今에 委公以河內하노니 當給足軍粮하고 率厲士馬하야 防遏他兵하야 勿令北度而已로라
○ 蕭王이 親送鄧禹하야 至野王이러니 禹旣西에 蕭王이 乃復引兵而北하다
寇恂
이 調餱糧
注+[原註]調는 謂計發之也라[通鑑要解]餱는 乾食也니 詩乃裹餱糧이라하니라하고 治器械
하야 以供軍
하야 軍雖遠征
이나 未嘗乏絶
이러라
경시更始가 장안長安에 이르러서 장락궁長樂宮에 거처할 적에 전전前殿에 오르니, 낭리郎吏들이 차례로 뜰 가운데에 나열하였다.
경시更始가 부끄러워하여 머리를 숙이고 자리만 만지작거리며
注+[釋義]면俛은 부俯와 같으니 머리를 숙이는 것이다. 괄刮은 古刹反(괄)이니 만지는 것이다. 감히 신하를 쳐다보지 못하였으며, 정사를
조맹趙萌에게 맡기고는 밤낮으로
후정後庭에서 술 마시고 잔치하면서 여러 소인들과
선부膳夫注+[通鑑要解]선부膳夫는 음식을 장만하는 자이니, 푸줏간을 맡은 사람은 음식 맛을 잘 알아서 반드시 더 좋게 하기 때문에 자형字形에 선자善字를 붙인 것이다. 에 이르기까지 모두 함부로 관작을 제수하였다.
장안長安 사람들이 이 때문에 말하기를 “부엌에서 밥 짓고 요리하는 사람은
중랑장中郞將이고
注+[釋義]竈下養 중랑장中郞將: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밥 짓고 요리하는 것을 양養이라 하니, 이러한 무리 또한 중랑장中郞將에 제수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한서漢書》 〈백관표百官表〉에 ‘중랑中郞은 오관중랑장五官中郞將과 좌중랑장左中郞將, 우중랑장右中郞將 3명이 있으니, 품계가 모두 비이천석比二千石이었다.’ 하였다.” 양羊의 밥통을 굽는 사람은
기도위騎都尉注+[釋義]처음에 무제武帝가 우림기羽林騎를 두었는데, 선제宣帝 때에 이르러서 기도위騎都尉를 두어 이들을 감독하게 하고 품계가 비이천석比二千石이었다. 이고
양羊의 머리를 삶는 사람은
관내후關內侯注+[釋義]열후列侯는 관문關門을 나가 본국本國으로 나아가고, 관내후關內侯는 다만 자신에게만 관작을 내리는 것이니, 딸린 가솔家率이 있는 자는 관내關內의 읍邑을 주어 조세를 먹게 한 것이다. 이다.” 하니, 이로 말미암아
관중關中 지방의
민심民心이 이반되고 온 천하가 원망하고 배반하였다.
○
대사마大司馬 유수劉秀가
계현薊縣에 이르니, 마침
왕자王子 접接注+[頭註]접接은 이름이니, 무제武帝의 5세손인 광양왕廣陽王 유가劉嘉의 아들이다. 이
계현薊縣에서 군대를 일으켜
왕랑王郞에게 호응하였다.
성城 안이 요란하자
注+[頭註]왕랑王郞이 격문檄文을 돌려서 광무光武를 잡으면 상을 주겠다고 내걸었다. 유수劉秀가 멍에를 재촉하여 나와서 감히
성읍城邑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길가에 묵으면서 밥을 먹었다.
注+[通鑑要解]군대가 하룻밤을 묵는 것을 사舍라고 한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무려정蕪蔞亭注+[釋義]무려蕪蔞의 옛 성城이 진주晉州 요양현饒陽縣 북쪽에 있으니, 정자도 있다. 에 이르니 이때 날씨가 몹시 추웠다.
풍이馮異가 〈먹을 것이 없어서〉 팥죽을 올렸고,
하곡양下曲陽注+[釋義]곡양曲陽은 거록군鉅鹿郡에 있다. 의 여관에 이르러서
왕랑王郞의 군대가 뒤에 있다는 말을 듣고 수행하던 자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는데,
호타하滹沱河注+[釋義]타沱는 혹 타沲로도 쓴다.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호타하滹沱河는 대군代郡 노성현鹵城縣 동쪽으로부터 참합현參合縣으로 흘러가고, 또 동쪽으로 진정眞定 남관南關을 경유하고, 또 동쪽으로 패주霸州 문안文安을 지나 바다로 들어간다.” 하였다. 에 이르니 정탐하는 관리가 돌아와 아뢰기를 “
하수河水가
해빙解冰이 되어
유빙流冰이 떠다니고
注+[釋義]사凘는 음이 사(시)이니 유빙流冰(물 위에 떠다니는 얼음덩이)이다. 배가 없어 건널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유수劉秀가
왕패王霸로 하여금 가서 살펴보게 하자
왕패王霸는 사람들이 놀랄까 염려하고 또 앞으로 나아가 물에 의지하여 막고자 해서
注+[頭註]전前은 전진함이고, 조阻는 험함을 믿고 스스로 견고하게 하는 것이다. 돌아와 즉시 거짓말하기를 “얼음이 단단히 얼어 건널 수가 있습니다.” 하니,
관속官屬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유수劉秀가 웃으며 말하기를 “정탐하는 관리가 참으로 망령된 말을 하였다.” 하고는 마침내 앞으로 나아가 하수河水에 이르니, 하수河水의 얼음이 또한 얼어 있었다.
이에 왕패王霸로 하여금 호위하여 건너게 하였는데, 몇 기騎가 남아 다 건너기 전에 얼음이 풀렸다.
“옛날의 인군人君은 혹연或然(혹 그럴지도 모르는)의 운수를 믿고서 필연적인 이치를 소홀히 하지 않았으니, 혹연或然의 운수라는 것은 천운天運이고 필연적인 이치라는 것은 사람이다.
하늘의 뜻이 사람과 합하지 않더라도 사람의 일은 오히려 스스로 다할 수 있지만 하늘에 요행만을 바라고 사람의 일이 뒤따르지 못하면 실패하지 않는 자가 드물다.
한漢나라 고제高帝와 광무제光武帝는 일찍이 천운天運을 얻었었다.
고조高祖는 수수睢水에 포위되었을 때에 항씨項氏의 손아귀에 들어갈 뻔하였으나 큰 바람 때문에 벗어났고, 광무제光武帝는 호타하滹沱河의 싸움에서 굶주린 호랑이의 입에 들어갈 뻔하였으나 얼음이 얼어서 물을 건넜으니, 이것이 어찌 인력人力이었겠는가?
그러나 이 두 임금은 이때 거의 면하지 못할 뻔한 화禍를 가지고 스스로 저상沮喪하지 않고, 또한 우연히 화禍를 면한 것을 가지고 스스로 축하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고조高祖는 세
호걸豪傑注+[頭註]세 호걸은 자방子房(張良), 소하蕭何, 한신韓信이다. 의 계책을 더욱 따르고
광무제光武帝는 스물여덟 장수의 무리를 취해서 상대방의 틈을 엿보고 탈 만한 기회를 기다려서,
고조高祖는 끝내
해하垓下에서 포위하여
항씨項氏를 사로잡았고
광무제光武帝는
한단邯鄲에서
교전交戰하여
왕랑王郞을 사로잡았으니, 이것이 과연
천운天運인가?
고제高帝가 5년 동안 이룩한 제업帝業이 수수睢水의 탈출에서 이루어지지 않고 해하垓下의 승리에서 이루어졌음을 알며, 광무제光武帝의 중흥中興이 또한 호타하滹沱河를 건넘에 있지 않고 한단邯鄲의 승리에 있었음을 안다면, 인군人君으로서 천하에 훌륭한 일을 행하는 자가 그 처음은 비록 하늘이 열어 주지만 성공함은 항상 사람에게 달려 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아, 하늘이 이 임금을 열어 주어 성취하게 하려고 할 때에는 갑자기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라 위태로운 곳에 두어 복福을 내려 주고 어려운 곳에 던져두어 온전하게 해 주어서 이해利害에 절박하여 그 계책을 깊게 세우고 사생死生에 임하여 의지를 굳게 하며, 교만함과 자랑하는 마음을 꺾고 과단성과 날카로운 기세를 억제해서 큰 기국器局을 만들어 수용受容하는 바를 크게 하려고 하는 것인데, 임금된 자가 하늘이 내려 준 기회를 잘 이용하지 못하고, 하늘이 정한 운수에 안주하여 사람에게 달려 있는 일을 버리고 아무 탈이 없는 곳에 물러나 있으면서 또한 스스로 안정되는 형세를 앉아서 보기만 한다면 지난번에 복을 내려 준 것은 바로 화禍를 준 것이고 지난번에 온전하게 해 준 것은 바로 패망하게 한 것이다.
아, 임금이 천하를 다스릴 뜻을 가지고 있다면 하늘이 나에게 복을 내려 주고 나를 온전하게 해 주는 것을 가지고 스스로 화와 패망을 취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남궁南宮注+[釋義]남궁南宮은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신도군信都郡 남궁현南宮縣이다.” 하였다. 살펴보건대 신도信都는 지금의 기주冀州가 이곳이다. 에 이르러 큰 바람을 만나서
유수劉秀가 수레를 이끌고 길가의 빈집에 들어가니,
풍이馮異는 나무섶을 안아 오고
등우鄧禹는 불을 피웠다.
유수劉秀가 아궁이에 옷을 말리고 있었는데 풍이馮異가 다시 보리밥을 올렸다.
달려서
신도군信都郡注+[釋義]신도信都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조趙나라 땅 북쪽에 신도信都가 있다.” 하였으니, 살펴보건대 지금의 기주冀州가 이곳이다.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진晉나라 동양東陽 땅이었는데, 삼가三家(韓, 위魏, 조趙)가 진晉나라를 나눔에 따라 조趙나라에 소속되었다. 진秦나라가 여기에 신도현信都縣을 설치하고 거록군鉅鹿郡에 소속시켰다. 에 이르니, 이때
군국郡國이 모두
왕랑王郞에게 항복하였으나 오직
신도태수信都太守 임광任光과
화융和戎注+[釋義]화융和戎은 고을 이름이니, 왕망王莽이 거록군鉅鹿郡을 나누어 화융和戎을 만들었다. 太守
비융邳肜만은 따르려고 하지 않았는데,
임광任光은
유수劉秀가 왔다는 말을 듣고는 크게 기뻐하였고
비융邳肜 또한
화융和戎에서 와서 모였다.
- 이상은 《후한서後漢書》 〈임광전任光傳〉과 〈비융전邳肜傳〉의 글을 참고하여 썼음 -
의논하는 자들이 많이 말하기를 “신도信都의 군대를 인하여 스스로 호송하고 장안長安으로 돌아가야 한다.”라고 하자, 비융邳肜이 아뢰기를 “관리와 백성들이 노래하면서 한漢나라를 그리워한 지가 오래입니다.
지금 점치는 자인 왕랑王郞이 이름을 빌리고 세력을 이용해서 오합지졸들을 모아 마침내 연燕‧조趙 지방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으나 근본의 견고함이 없으니, 명공明公께서 신도信都와 화융和戎 두 군郡의 군대를 분발시켜 토벌한다면 어찌 이기지 못함을 걱정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제 이들을 버려두고 돌아간다면 어찌 다만 헛되이 하북河北만을 잃을 뿐이겠습니까.
반드시 다시 삼보三輔 지방을 놀라게 하여 중한 위엄을 훼손시킬 것이니, 좋은 계책이 아닙니다.” 하니, 유수劉秀가 마침내 중지하였다.
임광任光이 이웃 현縣에서 징발하여 정병精兵 4천 명을 얻으니, 병력이 차츰 모여 만 명에 이르렀다.
변방 고을에 격문檄文을 돌려서 함께 한단邯鄲을 공격하게 하니, 군현郡縣들이 돌아와 다시 호응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
유수劉秀가
여지도輿地圖를 펴서
注+[釋義]피披는 펴보는 것이고 도圖는 그림이다. 땅은 수레가 물건을 싣는 것과 비슷하므로 여지輿地라고 한 것이다. 등우鄧禹에게 가리켜 보이며 말하기를 “천하의
군국郡國이 이와 같이 많은데 지금에야 비로소 그중 하나를 얻었으니,
注+[頭註]그 하나를 얻었다는 것은 처음으로 광아군廣阿郡을 얻은 것이다. 그대가 전에 나를 가지고 생각해 보건대 천하는 굳이 평정할 것도 못 된다고 말한 것은 어째서인가?” 하니,
등우鄧禹가 대답하기를 “현재
해내海內가 소란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명군明君을 생각하기를 적자赤子가 자모慈母를 사모하듯이 하니, 옛날에 흥왕興旺한 자는 덕德의 후박厚薄에 달려 있었고 국토의 크기로써 하지 않았습니다.” 하였다.
○ 4월에 유수劉秀가 한단邯鄲으로 진격하여 연달아 싸워 격파하였다.
○ 5월에 왕패王霸가 왕랑王郞을 추격하여 목을 베었다.
유수劉秀가
왕랑王郞의 문서를 거두어 관리와 백성들이
왕랑王郞과
교관交關(內通)
注+[頭註]교交는 결탁함이요, 관關은 통함이다. 하여
유수劉秀를 훼방한 문서를 수천 장 얻었는데,
유수劉秀가 살펴보지 않고
제장諸將들을 모아 놓고 문서를 불태우며 말하기를 “
반측자反側子(輾轉反側하여 불안해 하는 자)로 하여금 스스로 안심하게 한다.” 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 유수劉秀가 관리와 병졸들을 나누어서 각각 제군諸軍에 예속시킬 때에 군사들이 모두 말하기를 “대수장군大樹將軍에게 소속되기를 원한다.”라고 하니, 대수장군大樹將軍은 편장군偏將軍 풍이馮異였다.
사람됨이 겸손하고 공로를 자랑하지 않아서
注+[釋義]《논어論語》에 “맹지반孟之反은 공을 자랑하지 않았다.” 하였는데, 요씨饒氏(饒魯)가 말하기를 “벌伐은 벌목伐木의 벌伐과 같으니,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재능을 자랑함은 바로 자신을 해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의 공을 자랑함을 벌伐이라 한다.” 하였다. 관리와 군사들에게 명령하여 적과 교전하거나 적의 침공을 받은 경우가 아니면 항상 여러 군영의 뒤에 있게 하고, 매번 머무는 곳에서
제장諸將들이 함께
공功을 논하면
풍이馮異는 항상 홀로 나무 아래로 물러가 있었다.
그러므로 군중에서 그를 대수장군大樹將軍이라 불렀다.
○
경시更始가
사자使者를 보내어
유수劉秀를 세워
소왕蕭王注+[釋義]소蕭는 《괄지지括地志》에 “지금 서주현徐州縣이 옛날 소숙국蕭叔國이다.” 하였다. 으로 삼고 군대를 모두 해산하게 하자,
경엄耿弇이 나아가 아뢰기를 “백성들이 왕망王莽에게 시달려 다시 유씨劉氏를 그리워하였는데,
이제
경시更始가
천자天子가 됨에
제장諸將들이 제멋대로 명령을 내리고
귀척貴戚들이 방종하고 횡포를 부려
注+[頭註]종縱은 방종함이요, 횡橫은 제멋대로 함이다. 노략질을 자행하니, 백성들이 가슴을 치고 다시
왕망王莽의 조정을 생각합니다.
저는 이 때문에 경시更始가 반드시 패할 줄을 압니다.
공公은 공명功名이 이미 드러났으니, - 《후한서後漢書 경시전更始傳》에는 이 구句가 없음 - 의義로써 정벌한다면 격문檄文만 돌리고도 천하를 평정할 수 있습니다.
천하는 지극히 소중하니, 공公은 스스로 취하고 타성他姓으로 하여금 얻게 하지 마소서.” 하였다. - 이상은 《후한서後漢書 경엄전耿弇傳》의 내용임 -
소왕蕭王이 마침내 하북河北이 아직 평정되지 않은 것을 구실삼아 부름에 나아가지 않으니, 비로소 경시更始와 갈라지게 되었다.
- 이상은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 이때 여러
적賊인
동마銅馬,
철경鐵脛,
우래尤來,
대창大槍,
상강上江,
청독靑犢,
부평富平,
획색獲索注+[釋義]銅馬 이하 여덟 가지는 모두 적賊의 이름이다.[頭註]獲索 등 여러 적賊들이 혹은 산천과 토지에 따라 이름하고, 혹은 군용軍容의 강성함을 따라 이름한 것이다. 등이 각각
부곡部曲(군대)을 거느리니, 무리가 합하여 수백만 명이었다.
있는 곳마다 도둑질하고 노략질하였는데, 가을에
소왕蕭王이
동마銅馬를
교현鄡縣注+[釋義]교鄡는 《한서漢書》 〈지리지地理志〉에 “거록군鉅鹿郡에 교현鄡縣이 있다.” 하였다. 에서 공격할 때에
오한吳漢이
돌기突騎를 거느리고
청양淸陽으로 와서 모이니, 군사와 말이 매우
강성强盛하였다.
동마銅馬가 양식이 다하여 밤에 도망하자, 소왕蕭王이 관도館陶에서 추격해서 모두 격파하여 항복시키고 큰 우두머리를 봉하여 열후列侯로 삼았다.
제장諸將들도 적賊을 믿지 못하고 항복한 자들도 스스로 안심하지 못하였는데, 소왕蕭王이 그 뜻을 알고는 칙령을 내려 항복한 자들로 하여금 각각 자기 진영으로 돌아가 무장하게 한 다음 직접 경무장한 기마를 타고서 부대部隊와 진영陣營을 순행하니,
항복한 자들이 번갈아 서로 말하기를 “소왕蕭王이 진심眞心을 미루어 사람의 뱃속에 넣어 두니, 어찌 목숨을 바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는 이로 말미암아 모두 복종하였다.
이에 항복한 사람을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어 배속시키니, 무리가 마침내 수십만이었다.
그러므로 관서關西 지방에서는 유수劉秀를 이름하여 동마제銅馬帝라 하였다.
○ 적미赤眉의 번숭樊崇 등이 군대를 거느리고 장안長安을 공격하자, 소왕蕭王이 장차 북쪽으로 연燕‧조趙 지방을 순행하려 하였는데, 적미赤眉가 반드시 장안長安을 격파할 것을 헤아리고는 또 이 틈을 타서 관중關中(長安)을 겸병하고자 하였으나 맡길 만한 사람을 찾지 못하였다.
이에
등우鄧禹를
전장군前將軍注+[頭註]한漢나라에는 전장군前將軍과 후장군後將軍이 있었다. 에 임명하고 휘하의
정병精兵 3만 명을 반으로 나누어 주고 서쪽으로 보내
관중關中에 들어가게 하였다.
○ 소왕蕭王은 하내河內 지방이 험한 요새이고 풍부하고 충실하다 하여 제장諸將 중에서 하내河內를 지킬 자를 뽑으려 하였는데 적임자를 신중히 가리기 위하여 등우鄧禹에게 물으니,
등우鄧禹가 대답하기를 “구순寇恂은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백성을 기르고 무리를 거느릴 수 있는 재주가 있으니, 이 사람이 아니면 시킬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이에 구순寇恂을 하내태수河內太守로 임명하여 대장군大將軍의 일을 행하게 하고는 소왕蕭王이 구순寇恂에게 이르기를
“옛날에 고조高祖가 소하蕭何를 남겨 두어 관중關中을 지키게 하였는데, 지금 내가 공公에게 하내河內를 맡기노니, 마땅히 군량을 풍족하게 공급하며 병사와 군마軍馬를 인솔하고 격려하여, 다른 군대를 막아서 다시 북쪽으로 건너오지 못하게 할 뿐이다.” 하였다.
○ 소왕蕭王이 친히 등우鄧禹를 전송하여 야왕野王에 이르렀는데, 등우鄧禹가 서쪽으로 가자 소왕蕭王이 마침내 다시 병력을 이끌고 북쪽으로 갔다.
구순寇恂이
후량餱糧을 조달하고
注+[原註]調는 계산하여 징발함을 이른다. [通鑑要解]餱는 말린 밥이니 《시경詩經》에 “말린 밥과 양식을 싼다.” 하였다. 병기를 수리하여 군대에 공급해서 군대가 비록 멀리 정벌하였으나 일찍이 물자가 떨어진 적이 없었다.
- 이상은 《후한서後漢書 구순전寇恂傳》 등에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