帝每旦視朝
하고 日仄(昃)
注+[釋義]仄은 古側字니 與昃同이라 日向西曰昃이라乃罷
하며 數引公卿郞將
하야 講論經理
注+[釋義]謂五經之義理라하고 夜分乃寐하니 皇太子見帝勤勞不怠
하고 乘間諫曰
陛下有禹湯之明
이시어늘 而失黃老養性之福
하시니 願頤愛
注+[頭註]頤는 養也라精神
하야 優游自寧
하노이다
雖以征伐濟大業이나 及天下旣定에 乃退功臣而進文吏하야 明愼政體하고 總攬權綱하며 量時度力하야 擧無過事라
光武膺受命之符
하야 起兵舂陵
하야 興復帝室
할새 戰昆陽
에 人服其武
하고 司隷入洛
에 人服其度
하고 持節渡河
에 人服其德
하니 此三者
는 中興之本也
라
卽位之後에 首以卓茂爲太傅하야 封褒德侯하야 而當世多循吏하고 天下略定에 卽起太學하야 親臨視之하야 而東都盛儒學하고 徵三處士하야 而末造多節義之士하니 其所以祀漢配天하야 以垂二百年之基者 實在於此라
然이나 以私愛로 廢皇后太子하고 聽讒言하야 收新息侯印綬하고 信圖讖하야 竟事封禪하니 此三者는 不能不爲盛德之累어니와
至其加恩廢后母子親黨하야는 則又後世人主所難能也니라
炎正
注+[頭註]漢以火德故로 曰炎正이라中微
에 大盜移國
하니 九縣飇回
注+[頭註]九縣은 也라 飇回는 謂亂也라에 三精
注+[頭註]日月星也라霧塞
이라
人厭淫祚
하고 神思反德
하니 光武誕命
하야 靈貺自
注+[頭註]甄은 音眞이니 明也라이라
尋邑百萬
이 貔虎爲群
하야 長轂雷野
하고 高鋒彗雲
注+[頭註]長轂은 兵車라 雷野는 言聲盛이라 彗는 掃也라이러니 英威旣振
에 新都
注+[頭註]莽初封新都侯라自焚
이라
虔劉庸代
注+[頭註]虔, 劉는 皆殺也라 庸, 代는 公孫述稱帝於庸蜀하고 盧芳據代都라하고 紛紜梁趙
注+[頭註]梁은 謂劉永이요 趙는 謂王郞이라하며 三河未澄
注+[頭註]三河는 河南河北河東이니 朱鮪據洛州하야 未附也라하고 四關重擾
注+[頭註]四關은 謂長安四塞之國이라 更始已定關中이어늘 劉盆子入關하야 殺更始하고 發掘諸陵也라러니 神旌乃顧
하야 遽行天討
라
金湯失險
注+[頭註]金湯은 金城湯池니 喩城池之堅固也라하고 車書共道
하니 靈慶
注+[頭註]也라旣啓
에 人謀咸贊
이라
至天下已定
하야 務用安靜
하야 하며 身衣
하고 色無重綵
하며 耳不聽鄭衛之音
하고 手不持珠玉之玩
하며 宮房
에 無私愛
하고 左右
에 無偏恩
하며 其以手迹
으로 賜方國者 皆
一札十行에 細書成文하니 勤約之風
이 行於上下
라
故로 朱浮數上書諫하고 而鍾離意亦規諷하야 殷勤以長者爲言호되 而不能得也라
世祖旣立에 上懲韓彭之難하고 中鑑七國之變하고 下悼王氏之禍라
於是에 盡侯諸將하고 而不任以事하며 裁減同姓之封하고 而黜三公之權하야 以爲前世之弊를 盡去矣러니 及其衰也엔 宦官之權盛而黨錮之難起라
士大夫相與搤腕而游談者 以爲天子一日誅宦官而解黨錮면 則天下猶可以無事라하니
於是
에 外召諸將
注+[頭註]在二十一卷己巳年이라而內脅其君
하야 宦官旣誅
에 而董卓曹操之徒亦因以亡漢
이라
漢之所憂者 凡六變
注+[頭註]六變은 謂韓彭, 七國, 王氏, 黨錮, 宦官, 召外將이라이로되 而其亂與亡
은 輒出於其所不憂
하야 而終不可備
하니 由此觀之
하면 治亂存亡之勢 其皆有以取之歟
아
抑將不可推하야 如江河之推移하야 其勢自有以相激而不可救歟아
高祖創西漢하고 光武創東漢하니 皆是創業垂統하야 以爲一代之規模體統이나 以大要論之하면 高祖는 識大體로되 其間條目品節은 有疏漏處요 光武는 條目品節이 甚詳悉이나 然於大體에 却遺하니 所以兩漢의 風聲氣習寬狹厚薄緩急이 大抵不同이라
光武
는 不任三公
하야 事歸臺閣
注+[頭註]尙書諸司라하야 以人主
로 下親簿書期會之事
하니 此最是失政事體統
이니라
황제가 매일 아침 일찍 조회를 보고 해가 기울어야
注+[釋義]측仄은 측側의 고자古字이니, 측昃과 같다. 해가 서쪽을 향함을 측昃이라 한다. 비로소 파하였으며, 자주
공경公卿과
낭장郎將들을 인견하여
경전經傳의 의리
注+[釋義]경리經理는 오경五經의 의리義理를 이른다. 를 강론하고 밤이 깊어서야 비로소 잠을 자니, 황태자는 황제가 근로하여 게을리 하지 않음을 보고는 틈을 타서 간하기를
“폐하께서는
우왕禹王과
탕왕湯王의 총명함이 있으신데
황제黃帝와
노자老子의
양성養性(養生)하는
복福을 잃으시니, 원컨대 정신을 기르고 아껴서
注+[頭註]이頤는 기름이다. 한가롭게 지내어 스스로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하였다.
황제가 말하기를 “나는 본래 이것을 즐거워하니, 피곤하지 않다.” 하였다.
황제가 비록 정벌로 대업大業을 이루었으나 천하가 이미 평정되자, 마침내 공신功臣을 물리치고 문관文官을 등용해서 정사하는 체통을 밝게 알고 삼가며, 권세와 기강紀綱을 총괄하고 때를 헤아리고 힘을 헤아려서 조처함에 잘못된 일이 없었다.
그러므로 전대前代의 공렬功烈을 회복하여 몸소 태평太平을 이룩할 수 있었다.
-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에 나옴 -
“광무제光武帝가 천명天命을 받는다는 부서符書에 응하여 용릉舂陵에서 군대를 일으켜 황실皇室을 다시 일으켰는데, 곤양昆陽에서 싸울 때에는 사람들이 그 무용武勇에 감복하였고, 사례司隷로 낙양洛陽에 들어갔을 때에는 사람들이 그 도량度量에 감복하였고, 부절符節을 잡고 황하黃河를 건널 때에는 사람들이 그 덕德에 탄복하였으니, 이 세 가지는 중흥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종묘宗廟 사직社稷을 다시 수복하여 옛 물건을 고치지 않은 것이다.
즉위한 뒤에는 맨 먼저 탁무卓茂를 태부太傅로 삼아 포덕후褒德侯에 봉해서 당대에 순리循吏가 많았고, 천하가 대략 평정되자 즉시 태학太學을 일으키고 친히 왕림하여 시찰해서 동도東都(洛陽)에 유학儒學이 성하였고, 세 처사處士(周黨, 왕량王良, 왕성王成)를 불러 말년에 절의節義의 선비가 많았으니, 한漢나라를 제사하여 하늘에 배향配享해서 2백 년의 기업을 드리운 것이 실로 여기에 있었다.
그러나 사사로운 사랑으로 황후皇后와 태자太子를 폐하고, 참소하는 말을 따라서 신식후新息侯(馬援)의 인수印綬를 거두고, 도참설圖讖說을 믿어서 끝내 봉선封禪을 일삼았으니, 이 세 가지는 성덕盛德의 누가 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폐출한 황후皇后의 모자母子와 친당親黨에 은혜를 가함에 이르러서는 또 후세의 임금이 하기 어려운 바였다.”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광무제기光武帝紀〉 찬贊에 말하였다.
“
염정炎正注+[頭註]한漢나라는 화덕火德으로 왕 노릇 하였기 때문에 염정炎正이라고 한 것이다.이 중간에 쇠하자
대도大盜가
국통國統을 차지하니,
구현九縣이 어지러워
注+[頭註]구현九縣은 구주九州이다. 표회飇回는 어지러움을 이른다. 삼정三精注+[頭註]삼정三精은 해와 달과 별이다.이 안개 속에 가려졌다.
사람들은
음조淫祚를 싫어하고
신神은
덕德을 돌이킬 것을 생각하니,
광무제光武帝가 크게
천명天命을 받아 신령을 내려 주어 스스로 밝혔다.
注+[頭註]견甄은 음이 진이니, 밝음이다.
침착한 기미幾微는 남보다 먼저 알고 깊은 지략智略은 문文으로 다스렸다.
왕심王尋과
왕읍王邑의 백만 군대가
비호貔虎처럼 떼를 이루어서
병거兵車의 바퀴소리는 들에서 천둥처럼 울리고 높은 칼날은 구름(하늘)을 뒤덮었는데,
注+[頭註]長轂雷野 고봉혜운高鋒彗雲:장곡長轂(수레바퀴 통이 긴 것)은 병거兵車이다. 천둥처럼 울린다는 것은 소리가 성대함을 말한 것이다. 혜彗는 비로 쓰는 것이다. 영위英威를 이미 떨치자
신도후新都侯(王莽)
注+[頭註]왕망王莽이 처음에 신도후新都侯에 봉해졌다.가 스스로 불타 죽었다.
용庸(公孫述)과
대代(盧芳)를 죽이고
注+[頭註]건虔과 유劉는 모두 죽이는 것이다. 용庸과 대代는 〈공손술公孫述과 노방盧芳을 이르니〉 공손술公孫述은 용촉庸蜀에서 황제皇帝를 칭하였고 노방盧芳은 대도代都에 웅거하였다. 양梁(劉永)과
조趙(王郞)
注+[頭註]양梁은 유영劉永을 이르고, 조趙는 왕랑王郞을 이른다. 두 지방이 어지러웠으며
삼하三河가 맑지 못하고
注+[頭註]삼하三河는 하남河南‧하북河北‧하동河東이니, 주유朱鮪가 낙주洛州에 웅거하여 따르지 않았다.사관四關(長安)이 거듭 소요하였는데,
注+[頭註]사관四關은 장안長安이 사방으로 요새인 지방임을 이른다. 경시更始가 이미 관중關中(長安)을 평정하자, 유분자劉盆子가 관중關中에 들어가 경시更始를 죽이고 제릉諸陵을 파내었다. 신명스런 깃발로 돌아보아 급히 천벌을 행하였다.
금성탕지金城湯池가 험함을 잃고
注+[頭註]금탕金湯은 쇠로 만든 성과 그 둘레에 파놓은 뜨거운 물로 가득 찬 못이니, 성과 못의 견고함을 비유한 것이다. 수레의 궤도와 문서의 글자가
도道를 함께하니, 신령스러운 경사의
부참符讖注+[頭註]신령스러운 경사는 부참符讖을 가리킨 것이다. 이 이미 나오자 사람들의 계책이 모두 도왔다.
묘당廟堂의 계책이 분명하고 영웅다운 결단이 씩씩하였다.
《한서漢書》 〈순리전循吏傳〉 서序에 말하였다.
“광무제光武帝는 민간에서 생장하여 자못 실정과 거짓을 알았고, 농사의 어려움과 백성들의 괴로움을 알았다.
그러므로 천하가 이미 안정되자, 〈천하를 다스림에〉 되도록 편안하고 고요함을 써서 왕망王莽의 번거롭고 치밀함을 풀어 주고 한대漢代의 간략한 법을 회복하였으며, 몸소 대련大練을 입고 색깔은 채색을 이중으로 함이 없었으며, 귀로는 정鄭나라와 위衛나라의 음탕한 음악을 듣지 않고 손으로는 주옥珠玉 등의 완호玩好하는 물건을 잡지 않았으며, 궁방宮房(後宮)에는 사사로이 사랑하는 이가 없고 좌우에는 편벽되이 은혜를 받은 자가 없으며, 직접 쓴 간찰을 사방의 나라에 하사할 때에는 모두 한 장에 열 줄을 써서 작은 글씨로 글을 적으니, 부지런하고 검약한 풍속이 상하에 행해졌다.
이 때문에 내외內外가 게으르지 않고 백성들이 편안히 쉴 수가 있었다.
그러나 건무建武와 영평永平 연간에는 옥리獄吏들이 까다롭고 가혹함을 일삼아 자주 요언謠言(떠도는 말)과 신빙성 없는 말 때문에 수령들을 바꾸었다.
그러므로 주부朱浮가 자주 글을 올려 간하였고 종리의鍾離意 또한 풍간諷諫하여 은근하게 너그러운 장자長者여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바로잡을 수가 없었다.
“세조世祖가 이미 즉위한 뒤에 위로는 한신韓信‧팽월彭越의 난리를 징계하고 중간에는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변란變亂을 거울로 삼고 아래로는 왕씨王氏의 화禍를 서글퍼하였다.
이에 여러 장수들을 모두 후侯로 삼고 정사를 맡기지 않았으며 동성同姓의 봉함을 줄이고 삼공三公의 권한을 축소해서 전대前代의 폐단을 모두 제거하였다고 생각했는데, 쇠할 때에 미쳐서는 환관의 권력이 성해져서 당고黨錮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사대부士大夫로서 서로 팔뚝을 걷어붙이고 유세하는 자가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단 하루 환관을 죽이고 당고黨錮를 풀면 천하가 오히려 무사할 수 있다.’라고 하니,
이에 밖으로 여러 장수들을 부르고
注+[頭註]밖으로 장수들을 부른 일은 본서本書 21권 영제靈帝 중평中平6년 기사년조己巳年條에 있다. 안으로 그 군주를 위협하여 환관들을 죽였는데,
동탁董卓과
조조曹操의 무리가 또한 인하여
한漢나라를 망쳤다.
한漢나라가 걱정한 것은 모두 여섯 번의 변란
注+[頭註]여섯 번의 변란은 한신韓信과 팽월彭越의 난, 오초칠국吳楚七國의 반란, 왕씨王氏의 화, 당고黨錮의 화, 환관宦官의 화, 외지外地의 장수(董卓)를 부른 일 등을 이른다. 이었는데 혼란과 멸망은 번번이 걱정하지 않은 데에서 나와 끝내 대비할 수 없었으니, 이로 말미암아 관찰한다면
치란治亂과
존망存亡의 형세는 다
자취自取함이 있는 것인가.
아니면 장차 추측할 수 없어서 강하江河가 옮겨가듯 하여 그 형세가 서로 격해져서 구원할 수 없는 것인가.
또한 이치로 미루고 힘으로 구원할 수 있으나 하지 않은 것이다.
“고조高祖는 서한西漢을 창건하고 광무제光武帝는 동한東漢을 창건하였으니, 다 창업하여 전통을 드리워서 한 왕조의 규모規模와 체통體統으로 삼았으나 대요大要를 가지고 논하면 고조高祖는 대체大體를 알았지만 그 사이의 조목과 품절은 소략한 부분이 있었고, 광무제光武帝는 조목과 품절은 매우 상세하고 다하였으나 대체大體에 있어서는 도리어 빠뜨렸으니, 이 때문에 양한兩漢의 풍성風聲과 기습氣習의 관대함과 좁음, 후함과 박함, 느림과 급함이 대체로 똑같지 않은 것이다.
광무제光武帝는
삼공三公에게 정사를 맡기지 않아서 일이
대각臺閣注+[頭註]대각臺閣은 상서尙書와 여러 관사官司이다. 으로 돌아가 군주로서 아래로 문서와
기회期會를 따지는 일을 직접 다스렸으니, 이는
정사政事의
체통體統을 가장 잃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