魏文帝稱明帝察察
注+[釋義]老子曰 俗人察察이어늘 我獨悶悶이라하고 又曰 其政察察이면 其民缺缺이라한대 註云 悶悶은 不作聰明也요 察察은 煩碎也라하니라하고 章帝長者
라하니 章帝
는 素知人厭明帝苛切
하고 事從寬厚
라
奉承明德太后
注+[頭註]馬援之女요 明帝后也라 無子하야 養賈貴人子호되 盡心撫育하야 勞悴過於所生하니 是爲章帝라하야 盡心孝道
하고 平徭簡賦
하야 而民賴其慶
하며 又體之以忠恕
하고 文之以禮樂
하니 謂之長者
가 不亦宜乎
아
○ 北匈奴飢亂이어늘 以竇憲으로 爲車騎將軍하야 伐北匈奴하다
如解楚王之獄하고 罷西域之戍하며 輕徭薄賦하야 與天下休息하니 此所以爲東漢之賢君이니 大抵皆是慈祥長者라
竇憲
이 奪公主園
하니 此外戚專恣之漸也
어늘 卒不能正其罪
하고 竇后譖廢太子
注+[附註]帝納宋貴人하야 生太子慶하고 又納梁竦女하야 生皇子肇하다 竇皇后無子하야 養肇爲子러니 謀陷宋氏하야 誣言爲壓勝之術이라한대 乃廢慶爲淸河王하고 以肇爲皇太子하니 竇后는 勳之女也라하니 亦宮闈害政之端也
어늘 卒不免陷其說
하니 此皆優柔不斷之過
라
又如當時에 班超는 要功西域하고 傅育張紆는 擾動羌胡하니 以章帝慈祥長者로 本非武帝好大喜功之君이나
然所行之事 去武帝無幾는 亦緣慈祥長者之過로 奪於人之說하야 不能自守하야 卒至勞敝中國이니 所以雖無好大喜功之心이나 未免有好大喜功之失이라
天行이 健하니 君子以하야 自强不息하나니 若於剛上에 少欠이면 雖有慈祥之意나 不過能謹其小하고 往往失之於大하니 章帝是也니라
孝章이 繼明帝察慧之後하야 承之以寬大하야 聽楊終諫而罷西域之戍하고 用陳寵言而除嚴刻之刑하며 輕徭薄賦하야 與民休息하고 勸課農桑하고 明愼選擧하며 進柔良而退貪猾하고 順時令而理寃獄하며 雅好文章하고 褒崇儒術하니 史稱長者 不亦宜乎아
然이나 過於寬柔하야 不能濟之以剛하야 竇憲이 奪公主園하니 此外戚專恣之漸也어늘 卒不能正其罪하고 竇后譖廢太子하니 亦宮闈害政之端也어늘 卒不免陷其說하니
범엽范曄의 《후한서後漢書》 〈장제기章帝紀〉 논論에 말하였다.
“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이르기를 ‘
명제明帝는
찰찰察察注+[釋義]《노자老子》에 이르기를 “속인俗人들은 찰찰察察한데 나만 홀로 민민悶悶하다.”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정사가 찰찰察察하면 백성이 이지러지고 이지러진다.” 하였는데, 주註에 이르기를 “민민悶悶은 총명聰明을 내세우지 않는 것이고, 찰찰察察은 번거롭고 자잘하게 살피는 것이다.” 하였다. 하고
장제章帝는
장자長者이다.’라고 하였으니,
장제章帝는 평소 사람들이
명제明帝의 까다롭고 박절함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는 일을 함에
관후寬厚함을 따랐다.
명덕태후明德太后注+[頭註]명덕태후明德太后는 마원馬援의 딸이고 명제明帝의 후后이다. 자식이 없어 가귀인賈貴人의 아들을 양육하였는데, 진심으로 어루만지고 잘 길러 애쓰고 수고하기를 자기 소생보다 더하게 하였으니, 이가 바로 장제章帝이다. 를 받들어 섬겨서 효도에 마음을 다하였으며
요역徭役을 공평하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 백성들이 그 은택을 입었으며, 또
충서忠恕로써 체득하고
예악禮樂으로써 문채를 내었으니
장자長者라고 이르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두태후竇太后가 조회에 임하고 두헌竇憲 형제兄弟가 모두 가깝고 요긴한 지위에 있었다.
○ 북흉노北匈奴가 기아飢餓에 시달리고 혼란하자 두헌竇憲을 거기장군車騎將軍으로 삼아서 북흉노北匈奴를 정벌하였다.
“장제章帝는 밝게 살피는 명제明帝의 뒤를 이어 관대함으로 계승하였다.
예를 들면 초왕楚王의 옥獄을 풀어 주고 서역西域의 수자리를 중지하였으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부세를 적게 하여 천하와 함께 휴식하였으니, 이 때문에 동한東漢의 훌륭한 군주가 된 것이니, 대저 모두 자상慈祥한 장자長者였다.
그러나 자상한 장자는 단점도 또한 서로 나타나게 마련이다.
두헌竇憲이
공주公主의
전원田園을 빼앗으려 하였으니 이는
외척外戚이
전횡專橫하고 방자할 조짐이었는데도 끝내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고,
두후竇后가 태자를 참소하여 폐위하였으니
注+[附註]황제가 송귀인宋貴人을 받아들여 태자太子 경慶을 낳았고, 또 양송梁竦의 딸을 받아들여 황자皇子인 조肇를 낳았다. 두황후竇皇后가 아들이 없으므로 조肇를 양자로 길렀는데, 두황후竇皇后는 송씨宋氏를 모함하여 압승壓勝하는 주술을 한다고 무고하니, 황제가 마침내 송귀인宋貴人이 낳은 경慶을 폐하여 청하왕淸河王으로 삼고 조肇를 황태자로 삼았다. 두후竇后는 두훈竇勳의 딸이다. 또한 궁중에서 정사를 해치는 단서였는데도 끝내 그의 말에 빠짐을 면치 못했으니, 이는 모두 우유부단한 잘못이다.
또 당시에 반초班超는 서역西域에서 공功을 세우려 하였고 부육傅育과 장우張紆는 강족羌族과 오랑캐들을 요동하게 하였으니, 장제章帝는 자상한 장자長者로서 본래 무제武帝처럼 큰 일을 좋아하고 공功을 좋아하는 군주가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행한 일이 무제武帝와 차이가 별로 없는 것은 또한 자상한 장자長者의 과실로 남의 말에 빼앗겨서 스스로 자기 의견을 지키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끝내 중국中國을 수고롭고 피폐하게 만든 것이니, 이 때문에 비록 큰 일을 좋아하고 공功을 좋아하는 마음이 없었으나 큰 일을 좋아하고 공功을 좋아하는 잘못이 있음을 면치 못한 것이다.
고금古今에 군주君主의 덕德을 논할 때에 강함을 위주로 하였다.
하늘의 운행이 굳세니 군자가 이것을 본받아서 스스로 강하고 쉬지 않는 것이니, 만약 강함에 조금이라도 부족하면 비록 자상한 뜻이 있으나 그 작은 것은 잘 삼감에 지나지 않고 왕왕 큰 것에 실수하니, 장제章帝가 이런 사람이다.”
“장제章帝는 밝게 살피는 명제明帝의 뒤를 이어 관대함으로 계승해서, 양종楊終의 간언을 듣고 서역西域에 수자리 보내는 군사를 파하였고, 진총陳寵의 말을 따라 엄하고 까다로운 형벌을 제거하였으며, 요역徭役을 가볍게 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어 백성들과 함께 휴식하였고, 농사와 양잠을 권장하고 선거選擧를 분명하게 하고 삼가며, 유순하고 선량한 자를 등용하고 탐욕스럽고 교활한 자를 물리치며, 시령時令을 따르고 억울한 옥사를 다스리며, 평소 문장文章을 좋아하고 유학儒學을 높였으니, 역사책에서 장자長者라고 칭하는 것이 또한 당연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지나치게 관대하고 유순하여 강剛함으로 구제하지 못해서 두헌竇憲이 공주公主의 전원田園을 빼앗으려 하였으니 이는 외척外戚이 전횡專橫할 조짐인데도 끝내 그 죄를 바로잡지 못하였고, 두후竇后가 태자太子를 참소하여 폐위廢位하였으니 이는 또한 궁중에서 정사를 해칠 단서였는데도 끝내 그 말에 빠짐을 면치 못하였다.
그리하여 동한東漢의 쇠퇴함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