竇氏父子兄弟 充滿朝廷하니 是時에 憲兄弟專權이라
帝以朝臣上下 莫不附憲
이나 獨中常侍
注+[頭註]宦者常侍左右라鄭衆
이 謹敏有心幾
注+[頭註]幾는 讀作機니 關機라라하야 遂與衆定議誅憲
할새 帝以太后故
로 不欲名誅憲
하야 迫令自殺
하다
竇氏根據하야 已生逆謀하니 誠欲誅之나 未易擧手어늘
和帝年纔十四로 乃能選用秘臣하고 密求故事하야 勒兵收捕하야 中外肅淸하니 足以繼孝昭之烈矣라
固嘗著漢書
러니 尙未就
라 詔固女弟曹壽妻昭
注+[原註]壽妻名昭니 所謂者也라하야 踵
注+[頭註]追也요 繼也라而成之
하다
固之序事
에 不激詭
하고 不抑抗
注+[頭註]激은 揚也요 詭는 毁也며 抑은 退也요 抗은 進也니 皆指史家作意以爲文之病이라하야 贍而不穢
注+[頭註]穢는 蕪也요 惡也라하고 詳而有體
하야 使讀之者
로 亹亹
注+[頭註]不倦之意라而不厭
하니 信哉
라
固譏司馬遷是非頗謬於聖人
注+[頭註]言遷所是非與聖人乖謬하니 卽崇黃老而薄六經하고 輕仁義而賤守節이 是也라이라
然
이나 其論議常排死節
하고 否正直
注+[頭註]排死節은 謂言龔勝竟夭天年之類요 否正直은 謂言王陵汲黯之戇之類라하야 而不敍殺身成仁之美
注+[頭註]謂不立忠義傳이라하니 則輕仁義, 賤守節
이 甚矣
니라
帝
班賞
할새 鄭衆
이 每辭多受少하니 帝由是賢之
하야 常與之議論政事
하니 宦官用權
이 自此始矣
러라
두씨竇氏의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가 조정에 가득하니, 이때 두헌竇憲의 형제가 권력을 전횡하였다.
황제는 조정의 높고 낮은 신하들이
두헌竇憲에게 붙지 않는 이가 없었으나 오직
중상시中常侍注+[頭註]중상시中常侍는 환관宦官이 좌우에서 항상 모신다는 뜻이다. 정중鄭衆만은 삼가고 민첩하며
심기心機(마음속으로 깊이 생각함)
注+[頭註]기幾는 기機로 읽어야 하니, 기관機關이다. 가 있다 하여 마침내
정중鄭衆과 의논을 정하여
두헌竇憲을 죽이기로 하였는데, 황제는
두헌竇憲이
두태후竇太后의 오라비이므로 죄명으로
두헌竇憲을 주살하고자 하지 않아서
두헌竇憲에게 압박을 가하여 자살하게 하였다.
“두씨竇氏가 뿌리를 내리고 세력을 차지하여 이미 반역할 꾀를 내었으니, 진실로 이들을 죽이고자 하였으나 쉽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화제和帝가 겨우 14세의 나이로 마침내 비신秘臣을 가려 쓰고 고사故事를 은밀히 찾아서 군대를 무장시켜 체포하여 중외中外가 숙청肅淸되었으니, 충분히 효소황제孝昭皇帝의 공렬功烈을 계승할 수 있었다.
한스러운 것은 삼공三公이 국정國政에 참여하지 못하고 정중鄭衆이 공이 있었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환관들이 권세를 부려 점점 한漢나라를 멸망하게 만들었으니, 한탄스러움을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반고班固가 두씨竇氏의 빈객賓客으로 체포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반고班固가 일찍이 《
한서漢書》를 저술하였는데, 미처 완성하지 못하였으므로
반고班固의 여동생인
조수曹壽의 아내
반소班昭注+[原註]조수曹壽의 아내로 이름이 소昭이니, 이른바 조대가曹大家라는 자이다. 에게 명하여 뒤이어
注+[頭註]종踵은 좇음이고, 이음이다. 완성하게 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열녀전列女傳 조세숙처曹世叔妻》에 나옴 -
화교華嶠注+[頭註]화교華嶠는 진晉나라 사람이니, 《후한서後漢書》를 지었다. 의 《
후한서後漢書》 〈
반고전班固傳〉
논論에 말하였다.
“
반고班固가 일을 서술할 때에 지나치게 남을 칭찬하거나 헐뜯지 않고 물리치거나 올려 주지 않아서,
注+[頭註]격激은 칭찬함이고 궤詭는 헐뜯음이며, 억抑은 물리침이고 항抗은 올려 줌이니, 모두 사가史家들이 자신의 뜻으로 글을 쓰는 병통을 가리킨 것이다. 넉넉하되 거칠지 않고
注+[頭註]예穢는 거칠고 나쁨이다. 자세하되 체통이 있어 《
한서漢書》를 읽는 자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쓰고
注+[頭註]미미亹亹는 게을리 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싫증 내지 않게 하였으니, 진실하다!
반고班固는
사마천司馬遷의
시비是非가 자못
성인聖人(孔子)과 다름
注+[頭註]유어성인謬於聖人은 사마천司馬遷이 옳다 하고 그르다 한 것이 성인聖人과 다름을 말하니, 곧 황로黃老를 숭상하고 육경六經을 하찮게 여기며 인의仁義를 경시하고 절의節義를 지킴을 천하게 여긴 것이 이것이다. 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그의 의논은 항상 절개에 죽은 사람을 배척하고 정직한 사람을 부정하여
注+[頭註]排死節 부정직否正直:절개에 죽은 사람을 배척했다는 것은 공승龔勝이 끝내 요절했음을 말한 따위를 이르고, 정직한 사람을 부정했다는 것은 왕릉王陵과 급암汲黯의 우직함을 말한 따위를 이른다. 살신성인殺身成仁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지 않았으니,
注+[頭註]살신성인殺身成仁의 아름다움을 서술하지 않았다는 것은 《한서漢書》에 충의전忠義傳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이른다. 그렇다면
인의仁義를 경시하고 절개를 지킴을 천하게 여김이 심한 것이다.”
황제가 공훈을 책록策錄하여 상을 나눠 줄 때에 정중鄭衆이 항상 많은 것을 사양하고 적은 것을 받으니, 황제가 이 때문에 그를 어질게 여겨서 항상 그와 더불어 정사를 의논하니, 환관이 권세를 부림이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 《후한서後漢書 환자열전宦者列傳 정중전鄭衆傳》에 나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