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通鑑節要(4)

통감절요(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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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乙巳]元興元年이라
十二月 帝崩하니 少子隆 生始百餘日이라
卽皇帝位하고 太后臨朝注+[頭註]太后 太傅鄧禹之孫이요 和帝之后 殤帝之母하다
〈出本紀〉
[新增]唐仲友曰
自和帝以後 漢統 皆是諸侯王入繼하고 又不得明君하니 所以愈亂이라
然所以不得賢君者 正緣權不在大臣하야 外戚宦官 利於立昏故也니라
[史略 史評]史斷曰
孝和以幼沖之資 嗣守大業하야 年才(纔)十四 而能慨然獨斷하야 芟除大하야 使朝廷肅淸하고 宮闈寧晏하야 遠紹昭帝之烈하니 何其明哉
竇憲誅後 又能躬總萬機하야 威權不失하며 發倉廩以周不給하고 弛苑囿以假貧民하며 優禮賢臣하고 克納直諫이라
是以 內則生民歲增하고 拓土日廣하며 外則北空朔庭하고 西通重譯하니 方之章帝하면 或者過之
惜其誅憲之時 不與大臣計事하고 而與刑臣決謀하야 以致宦豎弄權하야 卒亡漢室하니 後之言治亂者 每於斯而太息焉이라
自是以來 漢統屢絶이어늘 大抵皆以諸侯王入繼 多是幼沖하니 所以然者 蓋由權在外戚宦官하야 利於立昏故也니라


원흥元興 원년元年(을사 105)
12월에 황제가 별세하니, 작은아들 이 태어난 지 겨우 백여 일째였다.
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고 태후太后注+[頭註]태후太后태부太傅 등우鄧禹의 손녀이고, 화제和帝후비后妃이고, 상제殤帝모후母后이다. 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효화황제기孝和皇帝紀》에 나옴 -
[新增]唐仲友가 말하였다.
화제和帝 이후로 나라의 국통國統이 자주 끊기자 모두 제후왕諸侯王이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고, 또 밝은 군주를 얻지 못하니, 이 때문에 더욱 혼란하였다.
그러나 어진 인군人君을 얻지 못한 까닭은 바로 권력이 대신大臣에게 있지 않아서 외척外戚환관宦官들이 어두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史略 사평史評]史斷에 말하였다.
효화황제孝和皇帝유충幼沖한(어린) 몸으로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겨우 14세에 개연慨然히 홀로 결단해서 크게 악한 자를 제거하여 조정을 깨끗하게 하고 궁중을 편안하게 하여 소제昭帝공렬功烈을 멀리 이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총명한가.
두헌竇憲주살誅殺된 뒤에 또 몸소 만기萬機를 총괄하여 위엄과 권력을 잃지 않았으며, 창고를 열어 부족한 자들을 구휼해 주고 원유苑囿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으며, 어진 신하들을 예우하고 직언直言으로 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안으로는 백성이 해마다 증가하고 영토를 개척하여 영지가 날로 넓어졌으며, 밖으로는 북쪽으로 삭방朔方에 있는 흉노의 조정을 텅 비게 하고 서쪽으로 여러 번 통역을 거쳐야 하는 나라에까지 통하였으니, 장제章帝에 비하면 혹 낫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헌竇憲을 죽일 때에 대신과 일을 도모하지 않고 형벌 받은 신하(환관)와 계책을 결정하여 환관들이 권력을 농간해서 끝내 나라 황실을 망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치란治亂을 말하는 자들이 매양 이에 대하여 크게 탄식한다.
이후로 나라의 국통國統이 여러 번 끊어졌는데, 대저 모두 제후왕諸侯王으로 들어와 계통系統을 이음에 대부분 나이가 어렸으니, 이러한 까닭은 권력이 외척外戚환관宦官에게 있어 사리에 어두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역주
역주1 : 삭
역주2 : 대

통감절요(4) 책은 2019.05.15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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