卽皇帝位
하고 太后臨朝
注+[頭註]太后는 太傅鄧禹之孫이요 和帝之后요 殤帝之母라하다
自和帝以後
로 漢統
絶
에 皆是諸侯王入繼
하고 又不得明君
하니 所以愈亂
이라
然所以不得賢君者는 正緣權不在大臣하야 外戚宦官이 利於立昏故也니라
孝和以幼沖之資
로 嗣守大業
하야 年才(纔)十四
에 而能慨然獨斷
하야 芟除大
하야 使朝廷肅淸
하고 宮闈寧晏
하야 遠紹昭帝之烈
하니 何其明哉
오
竇憲誅後에 又能躬總萬機하야 威權不失하며 發倉廩以周不給하고 弛苑囿以假貧民하며 優禮賢臣하고 克納直諫이라
是以로 內則生民歲增하고 拓土日廣하며 外則北空朔庭하고 西通重譯하니 方之章帝하면 或者過之라
惜其誅憲之時에 不與大臣計事하고 而與刑臣決謀하야 以致宦豎弄權하야 卒亡漢室하니 後之言治亂者 每於斯而太息焉이라
自是以來로 漢統屢絶이어늘 大抵皆以諸侯王入繼에 多是幼沖하니 所以然者는 蓋由權在外戚宦官하야 利於立昏故也니라
12월에 황제가 별세하니, 작은아들 융隆이 태어난 지 겨우 백여 일째였다.
융隆이 황제의 자리에 즉위하고
태후太后注+[頭註]태후太后는 태부太傅 등우鄧禹의 손녀이고, 화제和帝의 후비后妃이고, 상제殤帝의 모후母后이다. 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였다.
- 《후한서後漢書 효화황제기孝和皇帝紀》에 나옴 -
“화제和帝 이후로 한漢나라의 국통國統이 자주 끊기자 모두 제후왕諸侯王이 들어와 대통大統을 이었고, 또 밝은 군주를 얻지 못하니, 이 때문에 더욱 혼란하였다.
그러나 어진 인군人君을 얻지 못한 까닭은 바로 권력이 대신大臣에게 있지 않아서 외척外戚과 환관宦官들이 어두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겼기 때문이다.”
“효화황제孝和皇帝는 유충幼沖한(어린) 몸으로 대업大業을 이어받아 겨우 14세에 개연慨然히 홀로 결단해서 크게 악한 자를 제거하여 조정을 깨끗하게 하고 궁중을 편안하게 하여 소제昭帝의 공렬功烈을 멀리 이었으니, 어쩌면 그리도 총명한가.
두헌竇憲이 주살誅殺된 뒤에 또 몸소 만기萬機를 총괄하여 위엄과 권력을 잃지 않았으며, 창고를 열어 부족한 자들을 구휼해 주고 원유苑囿를 열어 가난한 백성들에게 빌려 주었으며, 어진 신하들을 예우하고 직언直言으로 간하는 것을 받아들였다.
이 때문에 안으로는 백성이 해마다 증가하고 영토를 개척하여 영지가 날로 넓어졌으며, 밖으로는 북쪽으로 삭방朔方에 있는 흉노의 조정을 텅 비게 하고 서쪽으로 여러 번 통역을 거쳐야 하는 나라에까지 통하였으니, 장제章帝에 비하면 혹 낫기도 하였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두헌竇憲을 죽일 때에 대신과 일을 도모하지 않고 형벌 받은 신하(환관)와 계책을 결정하여 환관들이 권력을 농간해서 끝내 한漢나라 황실을 망하게 만들었으니, 후세에 치란治亂을 말하는 자들이 매양 이에 대하여 크게 탄식한다.
이후로 한漢나라의 국통國統이 여러 번 끊어졌는데, 대저 모두 제후왕諸侯王으로 들어와 계통系統을 이음에 대부분 나이가 어렸으니, 이러한 까닭은 권력이 외척外戚과 환관宦官에게 있어 사리에 어두운 군주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겼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