皇太后鄧氏崩
注+[頭註]宮人誣告太后兄弟悝弘閶等이 謀立平原君이라하니 帝怒하야 遂廢西平侯廣宗等하야 爲庶人하니라커늘 帝始親政事
하다
帝少號聰明故
로 鄧太后立之
러니 及長
에 多不德
하야 稍不可
注+[通鑑要解]言意不以爲可也라太后意
라
及太后崩
에 鄧氏五侯
注+[頭註]西平侯廣宗, 葉侯廣德, 西華侯忠, 陽安侯珍, 都鄕侯甫德이니 皆安帝之舅之子也라를 皆廢爲庶人
하고 以閻皇后兄弟
로 竝爲卿校
注+[頭註]卿은 九卿이요 校는 校尉라하야 典禁兵
하니 於是
에 內寵
이 始盛
이라
○ 汝南太守王龔
이 好才愛士하야 以袁閬爲功曹
하고 引進郡人陳蕃, 黃憲
注+[頭註]初擧孝廉하고 又辟公府하니 人勸仕한대 暫至京師라가 卽還하야 四十八終하니라等
하니 憲
은 不屈
하고 蕃
은 遂就吏
注+[頭註]就辟而爲吏也라하다
憲
이 世貧賤
하야 父爲牛醫
러니 潁川荀淑
이 遇憲於逆旅
注+[頭註]客舍라[通鑑要解]設館舍하야 迎客故로 逆旅라하니 時年
이 十四
라
淑
이 竦然異之
하야 揖與語
하야 移日注+[頭註]日移晷也라不能去하고 謂憲曰
子는 吾之師表也
로다
旣而
오 前至
注+[頭註]前은 進也라袁閬所
하야 問曰 子國
에 有顔子
하니 寧
注+[頭註]豈也라識之乎
아 閬曰 見吾叔度
注+[原註]憲의 字叔度라耶
아
是時에 同郡戴良이 才高倨傲호되 而見憲이면 未嘗不正容하고 及歸에 罔然若有失也어늘
對曰 良이 不見叔度엔 自以爲無不及이러니 旣覩其人엔 則瞻之在前이라가 忽然在後하야 固難得而測矣라하더라
陳蕃及周擧 常相謂曰
時月之間注+[頭註]自朔至晦爲一月이요 三月爲一時라에 不見黃生이면 則鄙吝之萌注+[釋義]鄙吝은 猶之意라[頭註]作事可卑賤者를 謂之鄙요 作事可羞愧者를 謂之吝이라이 復存乎心矣라하더라
太原郭泰
注+[原註]郭泰는 字林宗이라 少遊汝南
할새 先過袁閬
하야 不宿而退
하고 進往從憲
하야 累日方還
이어늘
或以問泰
한대 泰曰 奉高之器
注+[釋義]奉高는 袁閬字也라는 譬諸
注+[釋義]王氏曰 氿音軌니 字從九無點이라 或作汍하니 誤也라 濫은 通作檻이라 爾雅註云 氿는 泉仄出也니 從傍出也요 濫은 泉涌出也라이 雖淸而易
注+[通鑑要解]挹은 量也라이어니와
叔度
는 汪汪若千頃波하야 澄之不淸하고 之不濁하야 不可量也
라하더라
黃憲의 言論風旨 無所傳聞焉이로되 士君子見之者 靡不服深遠하야 去玼吝이라
故
로 予曾祖穆侯以爲 憲
이 하고 하니 若及門於孔氏
면 인저하시니라
황태후皇太后 등씨鄧氏가 별세하자,
注+[頭註]궁인宮人이 등태후鄧太后의 형제兄弟인 회悝, 홍弘, 창閶 등이 평원군平原君을 황제로 세울 것을 모의한다고 무고誣告하니, 황제가 노하여 마침내 〈등홍鄧弘의 아들인〉 서평후西平侯 광종廣宗 등을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았다. 황제가 비로소 정사를 직접 다스렸다.
황제가 어렸을 적에 총명하다고 이름이 났기 때문에
등태후鄧太后가 세운 것인데, 장성하자 부덕한 일이 많아서 차츰
태후太后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注+[通鑑要解]초불가稍不可는 마음에 가可하다고 여기지 않음을 말한다.
태후太后가 별세하자
등씨鄧氏의
오후五侯注+[頭註]오후五侯는 서평후西平侯 광종廣宗, 섭후葉侯 광덕廣德, 서화후西華侯 충忠, 양안후陽安侯 진珍, 도향후都鄕侯 보덕甫德이니, 모두 안제安帝의 외숙의 아들이다. 를 모두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고,
염황후閻皇后의 형제를 모두
구경九卿과
교위校尉注+[頭註]경卿은 구경九卿이고, 교校는 교위校尉이다. 로 삼아서
금병禁兵을 맡게 하니, 이에
내총內寵이 비로소 성하였다.
중상시中常侍 강경江京 등이 내외內外를 선동하여 다투어 사치하고 포악한 짓을 하였다.
○
여남태수汝南太守 왕공王龔이 인재를 좋아하고 선비를 아껴서
원랑袁閬을
공조功曹로 삼고 고을 사람인
진번陳蕃과
황헌黃憲注+[頭註]황헌黃憲이 처음에 효렴孝廉으로 천거되고 또 공부公府에서 부르자 사람들이 벼슬할 것을 권하니, 잠시 경사京師에 이르렀다가 곧바로 돌아와 48세에 죽었다. 등을 이끌어 등용하니,
황헌黃憲은 절개를 굽히지 않았고
진번陳蕃은 마침내 관리에 취직
注+[頭註]부름에 나아가 관리가 된 것이다. 하였다.
황헌黃憲은 집안이 대대로 가난하고 천하여 아버지가
우의牛醫(소의 병을 치료하는 의원)가 되었는데
영천潁川의
순숙荀淑이
황헌黃憲을 여관
注+[頭註]逆旅는 객사이다. [通鑑要解]館舍를 설치하여 손님(나그네)을 맞이하기 때문에 역려逆旅라 한 것이다. 에서 만나니, 이때 나이가 14세였다.
순숙荀淑이 공경히 예우하여 읍하고서 더불어 말을 하되 한참이 지나도록
注+[頭註]이일移日은 〈시간이 흘러〉 해 그림자가 옮겨 가는 것이다. 자리를 떠나지 못하고
황헌黃憲에게 이르기를 “그대는 나의
사표師表이다.” 하였다.
이윽고 앞으로 나아가
注+[頭註]전前은 나아감이다. 원랑袁閬의 처소에 이르러 묻기를 “그대의 고을에
안자顔子가 있으니, 그대는 알고 있는가?
注+[頭註]영寧은 기豈이다. ” 하니,
원랑袁閬이 말하기를 “우리
숙도叔度(黃憲)
注+[原註]황헌黃憲의 자字가 숙도叔度이다. 를 보았는가?” 하였다.
이때 같은 고을의 대량戴良이 재주가 뛰어나 거만하였으나 황헌黃憲을 보면 용모를 단정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고 돌아와서는 망연자실하였다.
그 어머니가 묻기를 “네가 또 우의牛醫의 아들을 따라 놀다가 왔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제가 숙도叔度를 보기 전에는 스스로 미치지 못하는 것이 없다고 여겼는데, 이미 그를 본 뒤에는 바라봄에 앞에 있다가 홀연히 뒤에 있어서 진실로 측량하기가 어렵습니다.” 하였다.
진번陳蕃과
주거周擧가 항상 서로 이르기를 “한 철이나 한 달 동안
注+[頭註]초하루부터 그믐까지를 한 달[月]이라 하고, 3개월을 한 철[時]이라 한다.황생黃生을 보지 않으면 비루하고 인색한 생각
注+[釋義]鄙吝은 모색茅塞이라는 뜻과 같다.[頭註]일을 함에 낮고 천하게 여길 만한 것을 비鄙라 이르고, 일을 함에 부끄러워할 만한 것을 인吝이라 이른다. 이 다시 마음속에 생긴다.” 하였다.
태원太原의
곽태郭泰注+[原註]곽태郭泰는 자字가 임종林宗이다. 가 젊어서
여남汝南에서 놀 때에 먼저
원랑袁閬을 방문했을 때에는
유숙留宿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 나오고, 나아가서
황헌黃憲을 따라 놀 때에는 며칠이 지나서야 비로소 돌아왔다.
혹자가
곽태郭泰에게 그 이유를 묻자,
곽태郭泰가 말하기를 “
봉고奉高(袁閬
注+[釋義]봉고奉高는 원랑袁閬의 자字이다. )의
기국器局은 비유하면
궤람氿濫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궤氿는 음이 궤이니, 글자 모양이 구자九字를 따르고 점이 없다. 혹은 환汍으로 쓰니, 잘못이다. 남濫은 함檻과 통한다. 《이아爾雅》의 주註에 이르기를 “궤氿는 샘물이 옆으로 나오니 곁에서 흘러나오는 것이고, 남濫은 샘물이 용솟음쳐 곧바로 나오는 것이다.” 하였다. 이 비록 맑지만 측량하기 쉬운
注+[通鑑要解]읍挹은 헤아림이다. 것과 같다.
그러나 숙도叔度는 넓디넓은 천경千頃의 물결과 같아서 맑게 해도 맑아지지 않고 흐리게 해도 흐려지지 않아 측량할 수가 없다.” 하였다.
“황헌黃憲의 언론과 풍지風旨는 전하여 알려진 것이 없으나 선비와 군자君子 중에 그를 만나 본 자들은 그의 심원深遠함에 감복하여 자신의 잘못과 인색한 마음을 버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므로 나의 증조曾祖이신 목후穆侯는 이르시기를 ‘황헌黃憲은 유순하여 순함에 처하고 마음이 깊어 도道와 같았으니, 만약 공씨孔氏의 문하에 이르렀다면 안회顔回처럼 거의 도道에 가까웠을 것이다.’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