太后臨朝
注+[原註]太后는 卽安帝閻后라하야 欲久專國政
하야 貪立幼年
하야 與閻顯等
으로 定策禁中
하고 迎濟北惠王
注+[頭註]濟北惠王은 章帝第七子이니 名壽라의 子北鄕侯懿
注+[釋義]北鄕은 郡名이니 在濟北地라하야 爲嗣
하다
○ 十一月
에 中常侍孫程, 王康等十九人
이 聚謀於德陽殿
하고 迎濟陰王
注+[頭註]閻皇后性妬忌하여 王母李氏生帝하니 閻后鴆殺之라 庚申年에 立爲皇太子라가 後被廢爲濟陰王이라하야 卽皇帝位
하니 時年
이 十二
라
收閻顯하야 下獄誅하고 遷太后於離宮하고 封孫程等하야 皆爲列侯하니 是爲十九侯러라
孝殤이 始生百日而爲君하니 無足道者요 淸河王慶은 孝章之長子라 嘗正位儲宮이러니 廢不以罪하고 且年齡益長에 過失無聞하니 使於此時迎立하야 以主漢祀면 不亦善哉아
而鄧后終利幼弱하고 欲久臨朝하야 安帝年才十三에 俾稱尊享御라
然이나 權歸外戚하고 令出房幃하야 帝年三十에 猶未及親政이라
故
로 自永寧以後
로 日食地震
과 雨水風雹之變
이 歲不一書
하고 母后常隆
에 宦寺得政
하야 에 委寄國命
하야 手握天爵
하고 口銜天憲
하야 擧動移山海
하고 呼吸變霜露
하야 海內愁怨
하고 志士窮棲
어늘
方且計金授官하며 移民逃寇하고 推咎台衡하야 以答災眚하니 吾誰欺오
태후太后注+[原註]태후太后는 바로 안제安帝의 염후閻后이다. 가 조정에
임어臨御하여 오랫동안
국정國政을 독차지하고자 해서 나이 어린 임금을 세우려고 하여
염현閻顯 등과 궁중에서 계책을 정하고
제북혜왕濟北惠王注+[頭註]제북혜왕濟北惠王은 장제章帝의 일곱째 아들이니, 이름이 수壽이다. 의 아들
북향후北鄕侯 의懿注+[釋義]북향北鄕은 고을 이름이니, 제북濟北 땅에 있었다. 를 맞이하여
후사後嗣로 삼았다.
을유일乙酉日에 북향후北鄕侯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 11월에
중상시中常侍 손정孫程과
왕강王康 등 19명이
덕양전德陽殿에서 모여 모의하고는
제음왕濟陰王注+[頭註]염황후閻皇后가 성품이 질투하여 제음왕濟陰王의 생모生母 이씨李氏가 황제를 낳자, 그녀를 독살하였다. 제음왕濟陰王은 경신년庚申年에 서서 황태자皇太子가 되었다가 뒤에 폐위당하여 제음왕濟陰王으로 있었다. 을 맞이하여
황제皇帝의 자리에 오르게 하니, 이때 나이가 12세였다.
염현閻顯을 체포하여 하옥시켜 죽이고 태후太后를 이궁離宮에 옮기고는 손정孫程 등을 봉하여 모두 열후列侯로 삼으니, 이들이 십구후十九侯이다.
“효상황제孝殤皇帝는 갓 태어난 지 백일 만에 군주가 되었으니 굳이 말할 것이 없고, 청하왕淸河王 경慶은 효장황제孝章皇帝의 장자長子로 일찍이 동궁東宮에서 태자太子의 자리에 올랐는데 죄 없이 폐위당하였고, 또 나이가 들어 더욱 장성하자 알려진 과실이 없었으니, 만일 이때 그를 맞이하여 세워서 한漢나라 제사를 주관하게 했더라면 좋지 않았겠는가.
그런데 등후鄧后는 끝내 유약한 자를 세우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오랫동안 조정에 임어臨御하고자 하여 나이 겨우 13세인 안제安帝에게 존위尊位를 칭하고 등극하게 하였다.
그러나 권세가 외척에게 돌아가고 명령이 궁중에서 나와서 황제의 나이가 30세인데도 오히려 친정親政하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영녕연간永寧年間 이후로 일식日食과 지진地震과 장마와 홍수와 바람과 우박의 변고가 해마다 한 번 기록하는 데에 그치지 않았고, 모후母后가 항상 융성함에 모시는 환관宦官들이 정권을 얻어 거세당한 자들에게 국가의 운명을 맡겨서, 손에는 천작天爵을 쥐고 입에는 천헌天憲을 머금어서 일거일동一擧一動이 산과 바다를 움직이고 호흡하는 사이에 가을 서리와 봄 이슬로 변화하여, 해내海內가 근심하고 원망하며 지사志士들이 곤궁하였다.
그런데도 금전을 계산하여 관직을 주었으며 백성을 옮겨 적침敵侵을 피하게 하고 정승에게 허물을 돌려 재앙을 막으려 하였으니, 내 누구를 속이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