初
에 琅邪諸葛亮
이 寓居襄陽隆中
注+[釋義]襄陽은 春秋楚邑이러니 秦兼天下하고 自漢以北爲南陽하니 今鄧州是요 自漢以南爲南郡하니 今荊州是라 襄陽은 乃〈南陽南郡〉二郡之地라 本傳註에 家于南陽鄧縣하니 號曰隆中이라하야 每
自比管仲,
樂毅하니 時人
이 莫之許也
로되 惟潁川徐庶與崔州平
注+[頭註]烈之子라이 謂爲信然
이러라
劉備在荊州하야 訪士於襄陽司馬徽한대 徽曰 儒生俗士 豈識時務리오
識時務者는 在乎俊傑하니 此間에 自有伏龍, 鳳雛니라
曰 諸葛孔明
注+[頭註]亮字라과 龐士元
注+[頭註]統字라也
니라
徐庶見備於新野
하니 備器之
注+[頭註]物之有用者를 謂之器라하니 器之者는 重之也라러니
庶謂備曰 諸葛孔明은 臥龍也니 將軍은 豈願見之乎아
備曰 君與俱來하라 庶曰 此人은 可就見이언정 不可屈致也니 將軍이 宜枉駕顧之하라
孤不度德量力
하고 欲信(伸)大義於天下
호되 而智術
이 短淺
이라 遂用猖
注+[原註]蹶은 僵也니 失脚貌라하야 至于今日
이나
今曹操已擁百萬之衆
하야 挾天子以令諸侯
하니 此
는 誠不可與爭鋒
이요 孫權
은 據有江東
하야 已歷三世
注+[頭註]堅, 策, 權이라에 國險而民附
하고 賢能
이 爲之用
하니 此
는 可與爲援而不可圖也
라
荊州
는 北據漢,
注+[釋義]禹貢荊州注曰 荊州之域은 北距南條荊山하고 南盡衡山之陽이라하니 今江陵府是라 括地志云 沔水는 出武都郡하야 東南入江이라 漢水源出梁州金牛縣東一十八里嶓冢山하니라하고 利盡南海
하며 東連吳會
注+[釋義]吳都曰吳會니 今蘇州是라 宋陞平江府하니라[頭註]吳地니 爲荊揚交廣之都會라하고 西通巴蜀
하니 此
는 用武之國
이로되
益州
는 險塞
요 沃野千里하야 天府之土注+[釋義]財物所聚曰府니 言益州之地는 物産饒多하야 可備贍給이라어늘 劉璋
注+[頭註]焉之子也니 景帝子魯恭王之後라 焉은 以宗室로 拜中郞하고 領益州牧이러니 子璋襲位라이 闇弱
하고 張魯
注+[釋義]卽五斗米賊이니 以鬼道惑人하야 久據漢中하니라在北
하야 民殷國富
로되 而不知存恤
하니 智能之士
注+[頭註]張松法正之徒라 思得明君
이라
將軍
이 旣帝室之冑
注+[頭註]裔也라로 信義著於四海
하니 若跨有荊, 益
하야 保其巖阻
注+[頭註]巖險也라하고 撫和戎, 越
하고 結好孫權
하야 內修政治
하고 外觀時變
이면 則霸業
을 可成
이요 漢室
을 可興矣
리이다
備曰 善타하다 於是에 與亮情好日密하니 關羽, 張飛不悅이어늘
備解之曰 孤之有孔明은 猶魚之有水也니 願諸君은 勿復言하라 羽, 飛乃止하다
當漢之末
하야 群雄雲擾
에 凡一智一能之士 莫不乘時奮發
하야 蘄
注+[頭註]與祈通이라以自見
하니 孰謂一世人龍如孔明者 方且高臥隆中
하야 抱膝長吟
하야 略無意於當世
하고 而又以管樂自許者哉
아
向使昭烈이 不垂三顧之勤이면 則將槁死巖穴하야 與草木俱腐耳리라
及其一起
하야는 則功名事業
이 彪炳
注+[頭註]彪는 虎文也라顯著
하야 不可得而泯沒
하니 亮豈大言無當者
리오
彼其擇理甚精而處己甚明하니 謂枉己면 不可以直人也라
故로 不肯苟仕於僭竊하야 時乎未遇면 則高蹈丘園하고 道苟可行이면 則奮志事業이라
君臣旣合에 魚水相懽하니 則聲大義於天下하야 使興衰繼絶하야 翊扶正統之志가 昭如日星이라
然後
에 簒竊之徒
가 其罪始
白而不可掩
하니 是豈區區一智一能之士隨世就功名者 可同日語哉
아
朱子筆之曰 劉備見諸葛亮於隆中
이라하시니 其與聘莘野, 訪渭濱
注+[頭註]莘野는 伊尹이요 渭濱은 太公이라者
로 越千載如出一轍
이라
嗚呼라 三代而下로 孰謂出處之正이 有如孔明者哉아
亞於伊傅어늘 而以管樂自比者는 謙辭也니 才與管仲等而德則過之니라
同縣龐德公
注+[頭註]統從父也라이 素有重名
하니 徽兄事之
러라
德公
이 常(嘗)謂孔明爲臥龍
이요 士元爲鳳雛
요 德操
注+[釋義]司馬徽字라爲水鑑
이라하니 故
로 德操與劉備語而稱之
하니라
○ 秋七月에 曹操南擊劉表할새 會에 表卒하고 子琮이 爲嗣러니 九月에 操至新野하니 琮이 遂擧州降操하다
○ 時
에 劉備屯樊
注+[釋義]城名이니 在襄陽城西北五里하니라이러니 大驚
注+[通鑑要解]聞劉琮降於操하니 操之在宛故也라하야 呼部曲共議
하니 或
이 勸備攻琮
이면 荊州
를 可得
이라한대
備曰 劉荊州臨亡에 託我以孤遺하니 背信自濟는 吾所不爲로라
備將其衆去
하야 過襄陽
하니 荊州人
이 多歸備
하야 比到當陽
注+[頭註]縣名이라하야는 衆
이 十餘萬人
이요 輜重
이 數千兩
이라
日行十餘里
하고 別遣關羽
하야 乘船數百
注+[頭註]艘는 音騷이니 船之總名이라하야 使會江陵
注+[釋義]江陵者는 禹貢荊州니 春秋楚之郢都라 三國에 吳立荊州러니 後宋爲江陵府하니라하다
或謂備曰 宜速行하야 保江陵이니이다 備曰 夫濟大事인댄 必以人爲本이니 今人歸吾어늘 吾何忍棄去리오
劉玄德
注+[頭註]備字라이 雖顚沛險難
이나 而信義愈明
하고 勢偪事危
나 而言不失道
하야
追景升之顧
注+[頭註]思劉表之托孤幼라하야 則情感三軍
하고 戀赴義之士
注+[頭註]謂人歸而不忍棄去라하야 則甘與同敗
하니 終濟大業
이 不亦宜乎
아
曹操以江陵
에 有軍實
注+[頭註]謂車徒器械芻糧之類라하니 恐劉備據之
라하야 乃釋輜重
하고 輕軍至襄陽
하야 聞備已過
하고
操將精騎五千
하고 往追之
할새 一日一夜
에 行三百餘里
하야 及於當陽之長坂
注+[釋義]南陽當陽縣이니 今屬荊門州하니 縣在州西北九十里라 元和志云 綠林山이 在當陽縣東南百二十里하니 卽所謂當陽之長坂也라하니 備棄妻子走
하다
○ 初에 魯肅이 聞劉表卒하고 言於孫權호되 請往說劉備하야 使撫表衆하야 共治曹操라하더니 會에 備南走어늘
肅迎之於當陽長坂
하야 謂備曰 孫討虜
注+[釋義]孫權爲討虜將軍하니라는 敬賢禮士
하고 兵精糧多
하니 足以立事
라
備用肅計
하야 進住鄂縣之樊口
注+[釋義]在江夏郡鄂縣하니라하다
請奉命求救於孫將軍이라하고 遂與魯肅으로 詣孫權하다
亮說權曰 海內大亂
에 將軍
은 起兵江東
하고 劉豫州
注+[釋義]劉備爲豫州刺史라 故云劉豫州라하니라는 收衆漢南
하야 與曹操
로 竝爭天下
러니
今操
夷
注+[頭註]芟은 刈요 夷는 平이라大難
하야 略已平矣
요 遂破荊州
注+[頭註]劉表子琮이 降操하니라하야 威震四海
하니 英雄注+[頭註]謂劉豫州라이 無用武之地라
故로 豫州遁逃至此하니 願將軍은 量力而處之하소서
若能以吳, 越之衆으로 與中國抗衡인댄 不如早與之絶이요 若不能인댄 何不北面而事之릿고
權曰 劉豫州何不遂事之乎
아 亮曰 田橫
은 齊之壯士耳
로되 猶守義不辱
注+[釋義]七國時에 齊王田榮死어늘 橫自立이러니 及項羽滅에 橫懼誅하야 與其徒五百人으로 入居海島하다 漢高祖赦而召之한대 橫與其客二人으로 詣洛陽이라가 未至三十里自殺하니 帝拜二客爲都尉하고 以王禮葬하다 田橫旣葬에 二客穿其冢旁하고 皆自剄下從之어늘 帝又召其海中五百人하야 使至러니 聞橫死하고 亦皆自殺하니라이어든 況劉豫州
는 王室之冑
요 英才蓋世하니 安能爲之下乎
잇가
然
이나 豫州新敗之後
에 安能抗此難乎
아 亮曰 今戰士還者及關羽水軍精甲
이 萬人
이요 劉琦
注+[頭註]江夏太守니 表子琮兄이라合江夏
注+[釋義]春秋時에 謂之江汭하고 漢置江夏郡하야 領鄂縣이러니 三國에 吳更名武昌하고 隋改鄂州하니라戰士
하면 亦不下萬人
이라
曹操之衆
이 遠來疲敝하고 聞追豫州
하야 輕騎一日一夜
에 行三百餘里
라하니 此所謂
强弩之末이 勢不能穿魯縞注+[釋義]繒之精白者曰縞니 曲阜之俗이 善作之하야 尤爲輕細라 故謂之魯縞라者也
라
故
로 兵法
에 忌之曰 必
上將軍
注+[釋義]蹶은 斃也니 大將軍이 必致僵仆也라이라하니이다
且北方之人이 不習水戰하고 又荊州之民附操者는 偪兵勢耳요 非心服也니
今將軍
이 誠能與豫州
로 協規同力이면 破操軍
이 必矣
요 操軍敗
면 則荊, 吳
注+[頭註]荊은 謂備요 吳는 謂權이라之勢强
하고 鼎足之形成矣
리이다
是時에 曹操遺權書曰 近者에 奉辭伐罪하야 旌麾南指하니 劉琮이 束手라
今治水軍八十萬衆하야 方與將軍으로 會獵於吳호리라
長史張昭等曰 將軍大勢 可以拒操者는 長江也러니 今操得荊州하야 長江之險을 以與我共之矣니 不如迎之니이다
魯肅이 密言於權曰 向察衆人之議하니 專欲誤將軍이라
時
에 周瑜至
陽
이라 肅
이 勸權
하야 召瑜還
注+[通鑑要解]瑜已前受命이나 蓋行未遠이라 故로 召還也라한대
瑜至에 謂權曰 操雖托名漢相이나 其實은 漢賊也라
將軍
이 割據江東
하야 兵精足用하니 當橫行天下
하야 爲漢家除殘
注+[頭註]殘은 賊也요 害也라 孟子에 賊義者를 謂之殘이라去穢
어든 況操自送死 而可迎之耶
잇가
今北土未平
에 馬超, 韓遂
注+[頭註]超가 靈帝末에 與遂로 起事於西州하여 鎭關中하니라[通鑑要解]國誌에 超는 遂之甥姪也라 尙在關西
하야 爲操後患
이어늘
而操舍鞍馬
하고 杖舟楫
注+[頭註]杖은 持也라 北人은 便於鞍馬하고 南人은 便於舟楫하니 言操舍長取所短也라하야 與吳, 越爭衡
하고 又今盛寒
에 馬無藁草
어늘 驅中國士衆
하야 遠涉江, 湖之間
하니 不習水土하야 必生疾病하리니
權曰 老賊
이 欲廢漢自立
이 久矣
로되 徒忌二袁
注+[頭註]紹, 術이라, 呂布, 劉表與孤耳
러니 今數雄已滅
하고 惟孤尙存
하니 孤與老賊
으로 勢不兩立이라
因拔刀斫案曰 諸將吏 敢復有言當迎操者
면 與此案同
하리라하고 因撫瑜背曰 公瑾
注+[頭註]瑜字라아
五萬兵
은 難卒合
注+[頭註]卒은 急也라이어니와 已選三萬人
하니 卿與子敬
注+[原註]肅字也라, 程公
注+[釋義]程公은 謂程普라으로 便在前發
하라
遂以周瑜, 程普
로 爲左右督
하야 將兵
하야 與備幷力逆操
하고 以魯肅
으로 爲贊軍
注+[頭註]使之贊軍謀하고 因以爲官稱이라校尉
하야 助畫方略
하다
劉備在樊口
하야 日遣
吏
注+[頭註]邏는 遊偵也, 探伺也니 遊兵也라於水次
하야 候望權軍
이러니 吏望見瑜船
하고 馳往白備
한대
備乃乘單
하고 往見瑜
하고 問曰 今拒曹公
이 深爲得計니 戰卒
이 有幾
오 瑜曰 三萬人
이로라
備曰 恨少
로다 瑜曰
此自足用이니 豫州
는 但觀瑜破之
하라하고 進與操遇於赤壁
注+[釋義]王氏曰 按方輿勝覽黃州註에 引水經하야 載赤鼻山하고 齊安拾遺에 遂〈以赤鼻山〉爲赤壁山하니 其說乖繆라 蓋周瑜自柴桑으로 至武昌縣樊口하고 而後遇於赤壁하니 則赤壁은 當臨大江하야 在樊口之上이어늘 今赤鼻山은 在樊口對岸하니 何待進軍而後遇之乎아 又赤壁初戰에 操軍不利하야 引次江北하야 而後有烏林之敗하니 則烏林은 當在江之北岸이요 赤壁은 在江之南岸이어늘 今乃云赤壁在江之北이라하니 亦非也라하다
時에 操軍衆이 已有疾疫하야 初一交戰에 操軍不利하야 引次江北이라
瑜部將黃蓋曰 今
寇衆我寡하니 難與持久요 操軍
이 方連船
하야 首尾相接하니 可燒而走也
라하고
乃取蒙衝鬪艦
注+[釋義]蒙衝은 戰船也라 所以衝突敵船이니 字與艨艟通이라 釋名에 上下重板曰艦이요 外狹而長曰艨艟이라하야 載
枯柴
하고 灌油其中
하고 先以書遺操
하야 詐云欲降
이라하니
時에 東南風이 急이라 蓋以十艦으로 最著前하야 中江擧帆하고 餘船은 以次俱進하니 操軍吏士 皆出營立觀하고 指言蓋降이러라
去北軍二里餘에 同時發火하니 火烈風猛하야 船往如箭이라
燒盡北船
하고 延及岸上營落
注+[頭註]落은 居也니 人所聚居曰村落이라하니 人馬燒溺
하야 死者甚衆
이라
瑜等
이 率輕騎
하고 繼其後
하야 靁(雷)鼓
注+[頭註]靁는 與雷同하니 去聲이니 疾擊鼓也라大進
하니 北軍
이 大壞
라
操引兵從華容道步走어늘 劉備, 周瑜 水陸竝進하야 追操至南郡하다
時
에 操軍
이 兼以饑疫
死者太半注+[頭註]凡三分有二爲太半이요 有一爲少半이라이라
操乃留曹仁, 徐晃하야 守江陵하고 引軍北還하니 於是에 將士形勢自倍라
方其新破劉璋에 蜀人未附하야 一日而四五驚하야 斬之不能禁하니
釋此時不取라가 而其後에 遂至於不敢加兵者 終其身이라
孫權
은 勇而有謀
하니 此不可以聲勢恐喝取也
어늘 魏武不用中原之長技
注+[頭註]卽鞍馬라하고 而與之爭於舟楫之間
하고 一日一夜
에 行三百里以爭利
하야
方其危疑之間하야 卷甲而趨之가 雖兵法之所忌나 可以得志요
孫權은 可以計取而不可以勢破也어늘 而欲以荊州新附之卒로 乘勝而取之하니 彼非不知其難이요 特欲僥倖於權之不敢抗也니 此는 用之於新造之蜀이라야 乃可以逞이라
故로 夫魏武重發於劉備而喪其功하고 輕爲於孫權而至於敗하니 此不亦長於料事而不長於料人之過歟아
擧江東之力이면 足以抗天下之全師者는 赤壁之戰이 爲之張本也라
荊州之役에 長驅數十萬衆하야 飄忽奮迅而下江陵하니 目中에 已無吳越矣러니
尙賴江東諸將
의 忠憤激烈
하야 出而與劉豫州等
으로 合謀倂力
하야 一擧而焚之於赤壁之下
하니 當此之時
하야 老瞞褫魄
注+[釋義]老瞞은 曹操小字阿瞞也라 褫魄은 褫는 奪也니 言喪其魄也라하야 顚沛頻[瀕]死
하야 義師之勝氣
가 大振於東南
이라
江東君相
이 儻能乘此之銳
하야 蹶彼之困
하야 命一二驍將
하야 間道㗸枚
注+[釋義]似箸니 使士卒銜之하야 以止語也라하야 以要其歸路
하고 而周瑜輩
는 以大兵躡之
런들 則彼衆可盡得
이요 而操可生虜
리라
曹操旣遁하야 荊楚旣平하니 其意謂虎豹豺狼之屬을 旣已驅而出境이라하야 不啻便足이라
於是
에 關羽周瑜雜處南郡
하고 劉豫州亦駐兵公安
注+[頭註]縣名이라하야 聚三雄於荊州
하고 而縱曹操於河南
하니 則是曹操以荊州爲餌而漁天下也
라
以一荊州而縶三雄
하야 遽至於頓輿
注+[頭註]頓은 次也라息轡而倒戈相攻
하니 此何爲哉
아
知此然後
에 知赤壁之役
에 所以不能遂入中原者
는 非江東土綿力
注+[通鑑要解]綿은 弱也라薄之罪
요 而孫劉縱敵以爭荊州之罪也
라
天下有變
이어든 命一上將
하야 將荊州之衆
하야 以向宛洛
注+[頭註]宛은 南陽宛縣이요 洛은 洛陽也라이면 則足以衝敵人之胸腹
이니 孫劉於此而爭之 固也
라
然이나 愚以爲孫劉之爭荊州는 當爭於赤壁未戰之前이요 不當爭於赤壁旣戰之後라하노라
江東之師 聯鑣竝轡
하야 才(纔)過襄鄧
이면 則荊州已爲筌蹄
注+[頭註]筌은 取魚竹器요 蹄는 取兎之具니 得魚忘筌하고 得兎忘蹄라矣
어늘 奈何
로 周呂
注+[頭註]周瑜, 呂蒙也라之徒 眷眷於此
오
自赤壁旣勝之後로 且戰且攻이라가 至荊州而遽止하야 終不肯越荊襄一步하야 以向中原이라
今日借荊州
하고 明日索荊州
하며 今日奪荊州
하고 明日分荊州
하야 六七年間
에 以一荊州之故
로 內自相攻
하야 而中原國賊
注+[頭註]謂曹操라을 乃置之度外
하니 此果何爲者哉
아
十二月
에 劉備表劉琦
하야 爲荊州刺史
하고 引兵南徇
注+[頭註]略也라하니 武陵, 長沙, 桂陽, 零陵四郡
이 皆降之
하다
처음에
낭야琅邪 사람인
제갈량諸葛亮이
양양襄陽의
융중隆中注+[釋義]양양襄陽은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의 읍邑이었는데, 진秦나라가 천하를 겸병하고 한수漢水 이북을 남양南陽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등주鄧州가 이곳이요, 한수漢水 이남을 남군南郡이라 하였으니 지금의 형주荊州가 이곳이다. 양양襄陽은 바로 남양南陽과 남군南郡 두 군郡의 땅이다. 《삼국지三國志 촉지蜀志》 〈제갈량전諸葛亮傳〉의 주註에 “제갈량諸葛亮은 남양南陽의 등현鄧縣에 거주하였으니, 융중隆中이라 이름한다.” 하였다. 에 우거하여 항상 자신을
관중管仲과
악의樂毅에게 비교하니, 세상 사람들은 허여하지 않았으나 오직
영천潁川의
서서徐庶와
최주평崔州平注+[頭註]최주평崔州平은 최열崔烈의 아들이다.만은 진실로 그렇다고 말하였다.
유비劉備가 형주荊州에 있을 때에 양양襄陽의 사마휘司馬徽에게 훌륭한 선비를 묻자, 사마휘司馬徽가 말하기를 “유생儒生과 속사俗士가 어찌 시무時務를 알겠는가?
시무時務를 아는 것은 준걸俊傑에게 달려 있으니, 이 지역에 진실로 복룡伏龍과 봉추鳳雛가 있다.” 하였다.
하고 묻자, “
제갈공명諸葛孔明(諸葛亮)
注+[頭註]공명孔明은 제갈량諸葛亮의 자字이다.과
방사원龐士元(龐統)
注+[頭註]사원士元은 방통龐統의 자字이다. 이다.” 하였다.
서서徐庶가
신야新野에서
유비劉備를 만나 보니
유비劉備는 그를 소중히 여겼다.
注+[頭註]유용한 물건을 기器라고 이르니, 기지器之는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서서徐庶가 유비劉備에게 말하기를 “제갈공명諸葛孔明은 와룡臥龍(숨어 있는 용)이니, 장군은 어찌 그를 만나 보려고 하지 않습니까?” 하였다.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군君이 그와 함께 오라.” 하니, 서서徐庶가 말하기를 “이 사람은 찾아가서 볼 수는 있을지언정 굽혀서 오게 할 수는 없으니, 장군이 마땅히 왕가枉駕하여 가서 그를 만나야 합니다.” 하였다.
유비劉備는 이로 말미암아 제갈량諸葛亮을 찾아가, 무릇 세 번을 가서야 비로소 제갈량諸葛亮을 만나 보고 인하여 사람들을 물리치고 말하기를
“
한漢나라 황실이 기울어짐에
간신姦臣(曹操)
注+[頭註]간신姦臣은 조조曹操를 이른다. 들이
국권國權을 도둑질하니,
나는 자신의
덕德과
역량力量을 헤아리지 않고 천하에
대의大義를 펴고자 하나
지모智謀가 짧고 얕아서 마침내 좌절과 실패
注+[原註]궐蹶은 쓰러짐이니, 실족失足한 모양이다. 를 겪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러나 나의 뜻은 오히려 그치지 않으니, 군君은 장차 어떻게 계책을 내어야 한다고 생각합니까?” 하니, 제갈량諸葛亮이 대답하였다.
“이제
조조曹操는 이미 백만의 병력을 보유하고서
천자天子를 끼고 제후를 호령하니 이는 진실로 더불어
예봉銳鋒을 다툴 수 없으며,
손권孫權은
강동江東 지방을 점거하여 이미
삼대三代注+[頭註]3대代는 손견孫堅, 손책孫策, 손권孫權이다.를 지나서
지세地勢가 험하고 백성들이 따르며 덕 있는 자와 유능한 자들이 쓰여지고 있으니 이는 더불어
동맹同盟이 되어야 하고 도모할 수는 없습니다.
형주荊州는 북쪽으로
한수漢水와
면수沔水를 점거하고
注+[釋義]《서경書經》 〈우공禹貢〉의 형주荊州 주註에 “형주荊州 지역은 북으로 남조형산南條荊山에 이르고 남쪽으로 형산衡山의 남쪽을 다한다.” 하였으니, 지금 강릉부江陵府가 이곳이다. 《괄지지括地志》에 이르기를 “면수沔水는 무도군武都郡에서 나와 동남쪽으로 양자강으로 들어간다. 한수漢水는 근원이 양주梁州 금우현金牛縣 동쪽 18리 지점인 파총산嶓冢山에서 나온다.” 하였다. 남쪽으로
남해南海의 이익을 다 차지하며 동쪽으로
오회吳會注+[釋義]吳都를 오회吳會라 하니, 지금의 소주蘇州가 이곳이다. 송宋나라 때 평강부平江府로 승격되었다.[頭註]吳會는 오吳 지방이니, 형주荊州‧양주揚州‧교주交州‧광주廣州의 도회都會이다. 와 연접하고 서쪽으로
파촉巴蜀과 통하니, 이는
무력武力을 쓸 수 있는 나라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이 제대로 지키지 못하니, 이는 아마도 하늘이 내려 주어 장군의 밑천으로 삼게 하려는 것인 듯합니다.
익주益州는 험한 요새지이고 비옥한 들이 천 리에 이어져 있어
천부天府의 땅
注+[釋義]재물이 모이는 곳을 부府라 하니, 익주益州 땅은 물산이 풍부하여 넉넉히 공급함에 대비할 수 있음을 말한 것이다. 인데 이곳을 다스리는
유장劉璋注+[頭註]유장劉璋은 유언劉焉의 아들이니, 경제景帝의 아들인 노공왕魯恭王의 후손이다. 유언劉焉은 종실宗室로서 중랑中郞에 제수되고 영익주목領益州牧이 되었는데, 아들 유장劉璋이 지위를 세습하였다. 이 어리석고 무능하며,
장로張魯注+[釋義]장로張魯는 바로 오두미교五斗米敎의 적賊이니, 귀신의 방법으로 사람들을 미혹시켜 오랫동안 한중漢中을 점거하였다. 가 북쪽에 있어 백성이 많고 나라가 부유하나 백성들을 보존하고 구휼할 줄 모르니, 지혜롭고 유능한 선비들
注+[頭註]지혜롭고 유능한 선비는 장송張松과 법정法正의 무리이다. 이 현명한 군주를 얻을 것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장군將軍은
황실皇室의 후손
注+[頭註]주冑는 후예이다. 으로
신의信義가
사해四海에 드러났으니, 만약
형주荊州와
익주益州를 차지하여 산천의 험고함
注+[頭註]암조巖阻는 높고 험한 것이다. 을 확보하고
융족戎族과
월越 지방을 어루만져 화친하고
손권孫權과 우호를 맺어, 안으로 정치를 닦고 밖으로
시변時變을 관찰한다면
패업霸業을 이룩할 수 있고
한漢나라 황실을 부흥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좋다.” 하고, 이에 제갈량諸葛亮과 정의情誼가 날로 친밀해지니,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기뻐하지 않았다.
유비劉備는 이들에게 해명하기를 “나에게 공명孔明이 있음은 물고기에게 물이 있는 것과 같으니, 제군諸君들은 더 이상 말하지 말라.” 하니, 관우關羽와 장비張飛가 이에 그쳤다.
“삼대三代가 쇠하고 왕정王政이 폐해짐으로부터 세상을 따라 공명功名을 이룬 선비가 많았다.
한漢나라 말기를 당하여
군웅群雄들이 구름처럼 일어나자, 무릇 한 가지 지혜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선비들이 때를 타고 분발하여 자신을 드러내기를 바라지
注+[頭註]기蘄는 기祈와 통한다. 않은 자가 없었으니, 한 세상의
인룡人龍(俊傑)으로서
공명孔明과 같은 자가 막
융중隆中에 높이 누워(은거하여) 무릎을 껴안고 앉아 길게 시를 읊으면서 조금도 당세에 뜻이 없고, 또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로써 자신을 허여하는 자인 줄을 그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그때 만일 소열昭烈이 제갈량諸葛亮의 초옥草屋으로 세 번이나 찾아가지 않았다면 제갈량諸葛亮은 장차 암혈巖穴에서 말라 죽어서 초목과 함께 썩어 없어졌을 것이다.
한 번 세상에 나옴에 미쳐서는
공명功名과
사업事業이 찬란하게
注+[頭註]표彪는 호피 무늬이다. 드러나서 매몰될 수가 없었으니,
제갈량諸葛亮이 어찌 큰소리만 치고 부합함이 없는 자이겠는가.
저 사람은 이치를 가림이 매우 정밀하고 처신함이 매우 분명하였으니, 자기 몸을 굽히면 남을 바로잡을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구차히 영합하여 팔리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리고 몸을 의탁하는 것을 올바르지 않은 곳에 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므로 참람하고 도둑질한 자에게 구차히 벼슬하려고 하지 아니하여, 때를 만나지 못하면 산림山林에 은거하고 도道를 만일 행할 수 있으면 사업事業에 뜻을 분발하였다.
군주와 신하가 이미 부합함에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처럼 서로 기뻐하자 천하에 대의大義를 밝혀서 쇠한 것을 일으키고 끊어진 것을 이어서 정통正統을 도와 부지하려는 뜻이 해와 별처럼 밝았다.
그런 뒤에야 찬탈하고 도둑질한 무리들이 그 죄가 비로소 크게 드러나서 가릴 수가 없었으니, 이 어찌 구구하게 한 가지 지혜와 한 가지 재능이 있는 선비가 세상을 따라 공명功名을 이룬 것과 똑같이 말할 수 있겠는가.
주자朱子가 쓰기를 ‘
유비劉備가
제갈량諸葛亮을
융중隆中에서 만나 보았다.’ 하였으니, 이는
탕왕湯王이
이윤伊尹을
신야莘野에서 초빙한 것과
문왕文王이
태공망太公望을
위수渭水 가로 방문한 것
注+[頭註]聘莘野 방위빈訪渭濱:신야莘野는 신야莘野에서 농사지은 이윤伊尹이요, 위빈渭濱은 위수渭水 가에서 낚시질한 강태공姜太公이다. 과 천 년을 뛰어넘어 한 자취에서 나온 것과 같다.
아, 삼대三代 이후로 출처出處의 올바름이 공명孔明과 같은 자가 있을 줄을 누가 생각하였겠는가.
군자君子가 이것을 표출하지 않았다면 공명孔明 또한 후세의 인물일 뿐이었을 것이니, 아! 슬프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훌륭한 인재가 많음은 후세에 미칠 수가 없다.
그러나 제갈공명諸葛孔明은 고매하고 특출하여 우뚝이 삼대시대三代時代의 보좌였다.
그리하여 이윤伊尹과 부열傅說에 버금갈 정도였는데 관중管仲과 악의樂毅로써 자신을 비유한 것은 겸사이니, 재주는 관중管仲과 비슷하였으나 덕德은 관중管仲을 능가하였다.”
사마휘司馬徽는 깨끗하고 고상하여 사람을 알아보는 감식鑑識이 있었다.
동현同縣의
방덕공龐德公注+[頭註]덕공德公은 방통龐統의 종부從父(伯叔父)이다. 이 평소 중한 명망이 있었으니
사마휘司馬徽가 그를 형으로 섬겼다.
방덕공龐德公이 일찍이
공명孔明을
와룡臥龍이라 하고,
사원士元을
봉추鳳雛라 하고,
덕조德操(司馬徽)
注+[釋義]덕조德操는 사마휘司馬徽의 자字이다. 를
수감水鑑이라 하였으므로
덕조德操가
유비劉備와 말할 때에 이렇게 칭한 것이다.
○ 가을 7월에 조조曹操가 남쪽으로 유표劉表를 공격할 때에 마침 유표劉表가 죽고 아들 유종劉琮이 후사를 이었는데, 9월에 조조曹操가 신야新野에 이르니 유종劉琮이 마침내 주州를 들어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였다.
○ 이때
유비劉備가
번성樊城注+[釋義]번樊은 성城의 이름이니 양양성襄陽城 서북쪽 5리 지점에 있다. 에 주둔해 있었는데 〈
조조曹操가 공격해 온다는 말을 듣고〉 크게 놀라
注+[通鑑要解]유비劉備가 크게 놀란 것은 유종劉琮이 조조曹操에게 항복했다는 말을 들어서이니, 이때 조조曹操가 완宛 땅에 가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곡部曲을 불러 함께 의논하니, 혹자가
유비劉備에게
유종劉琮을 공격하면
형주荊州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였으나,
유비劉備는 말하기를 “유형주劉荊州(劉表)가 죽을 때에 나에게 그 고아孤兒를 부탁하였으니, 신의信義를 저버리고 자신의 일을 이루는 것은 내 하지 않겠다.” 하였다.
유비劉備가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떠나
양양襄陽을 지나가니,
형주荊州 사람들이
유비劉備에게 많이 귀의하여
당양當陽注+[頭註]당양當陽은 현縣의 이름이다. 에 이름에 미쳐서는 무리가 10여만 명이었고
치중輜重이 수천 대였다.
하루에 십여 리를 가고, 따로
관우關羽를 보내어 수백 척의 배
注+[頭註]소艘는 음이 소이니, 배의 총칭이다. 를 타고서
강릉江陵注+[釋義]강릉江陵은 《서경書經》 〈우공禹貢〉의 형주荊州이니, 춘추시대春秋時代 초楚나라의 영도郢都이다.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오吳나라가 형주荊州를 세웠는데, 뒤에 송宋나라가 강릉부江陵府로 삼았다.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혹자가 유비劉備에게 이르기를 “마땅히 신속히 가서 강릉江陵을 지켜야 합니다.” 하였으나, 유비劉備는 말하기를 “대사大事를 이루려면 반드시 사람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니, 이제 사람들이 나에게 귀의하는데 내 어찌 차마 버리고 가겠는가.” 하였다.
습착치習鑿齒注+[頭註]습착치習鑿齒는 진인晉人이다. 가 논하였다.
“
유현덕劉玄德注+[頭註]현덕玄德은 유비劉備의 자字이다. 이 비록
전패顚沛하고 험난하였으나
신의信義가 더욱 드러나고, 형세가 절박하고 사정이 위태로웠으나 말이 도리를 잃지 않았다.
경승景升(劉表)이 죽을 때 돌아보고 부탁한 일을
추념追念하여
注+[頭註]경승景升이 돌아보고 부탁한 일을 추념한다는 것은 유표劉表가 어린 고아를 부탁하였음을 생각한 것이다. 진정眞情이
삼군三軍을 감동시켰고,
의義를 따르는 선비들을 연연해하여
注+[頭註]의義를 따르는 선비들을 연연해한다는 것은 사람들이 유비劉備에게 귀의하므로 차마 버리고 떠나지 못함을 이른다. 그들과 환난을 함께 함을 달게 여겼으니, 끝내
대업大業을 이룬 것이 당연하지 않은가.”
조조曹操가
강릉江陵에
군실軍實(군사와 무기)
注+[頭註]군실軍實은 거병車兵과 보졸步卒, 기계器械, 꼴과 양식 따위를 이른다.이 있었으니
유비劉備가 점거할까 두렵다 하여 마침내
치중대輜重隊를 버리고 경무장한 군대로
양양襄陽에 이르러
유비劉備가 이미 지나갔다는 말을 들었다.
조조曹操는 정예 기병 5천 명을 데리고 가서 추격할 때에
일주야一晝夜 만에 300여 리를 행군하여
당양當陽의
장판長坂注+[釋義]당양當陽의 장판長坂은 남양南陽의 당양현當陽縣으로 지금 형문주荊門州에 속하니, 현縣은 주州의 서북쪽 90리 지점에 있다. 《원화지元和志》에 이르기를 “녹림산綠林山이 당양현當陽縣 동남쪽 120리 지점에 있으니, 바로 이른바 당양當陽의 장판長坂이라는 곳이다.” 하였다. 에서 따라잡으니,
유비劉備가 처자를 버리고 도망하였다.
○ 처음에 노숙魯肅은 유표劉表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손권孫權에게 말하기를 “가서 유비劉備를 설득하여 유표劉表의 무리를 어루만지게 해서 함께 조조曹操에게 대응하자.”고 하였는데, 마침 유비劉備가 남쪽으로 도망왔다.
노숙魯肅은
당양當陽의
장판長坂에서 맞이하여
유비劉備에게 이르기를 “
손토로孫討虜(孫權)
注+[釋義]손권孫權이 토로장군討虜將軍이 되었으므로 손토로孫討虜라 한 것이다. 는
현자賢者를 공경하고 선비를 예우하며 군사들이 정예하고 양식이 많으니 충분히 성공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군君을 위하여 계책을 헤아려 보건대 심복心腹을 보내어 스스로 강동江東과 동맹을 맺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유비劉備가
노숙魯肅의 계책을 따라 나아가서
악현鄂縣의
번구樊口注+[釋義]번구樊口는 강하군江夏郡 악현鄂縣에 있다. 에 주둔하였다.
○ 조조曹操가 강릉江陵으로부터 장차 강물을 따라 동쪽으로 내려오려 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유비劉備에게 말하기를 “일이 급하게 되었습니다.
청컨대 명령을 받들어 손장군孫將軍에게 구원을 요청하겠습니다.” 하고, 마침내 노숙魯肅과 함께 손권孫權을 찾아갔다.
제갈량諸葛亮이
손권孫權을 설득하기를 “
해내海內가 크게 어지러워 장군은
강동江東에서 군대를 일으켰고,
유예주劉豫州(劉備)
注+[釋義]유비劉備가 예주자사豫州刺史가 되었기 때문에 유예주劉豫州라고 이른 것이다. 는
한수漢水의 남쪽에서 병력을 수습하여
조조曹操와 함께 천하를 다투었는데,
이제
조조曹操가 큰 난리를 평정
注+[頭註]삼芟은 벰이요, 이夷는 평정함이다. 하여 대략 이미 평정되었고, 마침내
형주荊州를 격파하여
注+[頭註]형주荊州를 격파하였다는 것은 유표劉表의 아들인 유종劉琮이 조조曹操에게 항복하였으므로 말한 것이다. 위엄이
사해四海에 진동하니, 영웅
注+[頭註]영웅英雄은 유예주劉豫州(劉備)를 이른다. 이 무력을 쓸 여지가 없습니다.
이 때문에 유예주劉豫州가 도망하여 여기에 이르렀으니, 원컨대 장군께서는 힘을 헤아려 대처하시기 바랍니다.
만약 오吳‧월越의 병력을 가지고 중국과 맞서려 한다면 일찍 조조曹操와 끊어 버리는 것만 못하고, 만약 이렇게 할 수 없다면 어찌 북면北面하여 그를 섬기지 않습니까.” 하였다.
손권孫權이 말하기를 “
유예주劉豫州는 어찌하여 마침내 그를 섬기지 않는가?” 하니,
제갈량諸葛亮이 말하기를 “
전횡田橫은
제齊나라의
장사壯士였을 뿐인데도
의義를 지키고 굴복하지 않았는데,
注+[釋義]칠국시대七國時代(戰國時代)에 제왕齊王 전영田榮이 죽자 전횡田橫이 스스로 서서 왕이 되었는데, 항우項羽가 멸망하자 전횡田橫은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하여 그 무리 500명과 함께 해도海島에 들어가 거주하였다. 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사면하고 부르자, 전횡田橫은 그의 문객門客 두 사람과 함께 낙양洛陽으로 오다가 30리 못 미친 곳에서 자살하니, 고조高祖는 두 문객을 제수하여 도위都尉로 삼고 왕王의 예禮로 장사 지냈다. 전횡田橫을 장례한 뒤에 두 문객은 무덤의 옆을 뚫고 모두 스스로 목을 찔러 죽어서 구천九泉으로 따라갔다. 고조高祖가 또다시 해중海中의 500명을 불러서 오게 하였는데, 이들은 전횡田橫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또한 모두 자살하였다. 하물며
유예주劉豫州는 왕실의 후손이고 뛰어난 재주가 세상을 뒤덮을 만하니, 어찌 그의 아래에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하였다.
손권孫權이 발끈하여 말하기를 “내가 오吳나라 전 지역을 들어서 남에게 제재받지는 않을 것이다.
나의 계책이 이미 결정되었으니, 유예주劉豫州가 아니면 조조曹操를 당해 낼 만한 자가 없다.
그러나
유예주劉豫州가 새로 패전한 뒤에 어떻게 이러한 난에 맞서겠는가?” 하니,
제갈량諸葛亮이 말하기를 “지금 돌아온 병사와
관우關羽의 수군 정예병이 만 명이고,
유기劉琦注+[頭註]유기劉琦는 강하태수江夏太守였으니, 유표劉表의 아들이고 유종劉琮의 형이다. 가
강하江夏注+[釋義]강하江夏는 춘추시대春秋時代에는 강예江汭라 일렀고, 한漢나라는 강하군江夏郡을 설치하고 악현鄂縣을 거느렸는데,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오吳나라가 무창武昌으로 이름을 바꾸었고 수隋나라는 악주鄂州로 고쳤다. 의 병사를 규합하면 또한 만 명을 밑돌지 않을 것입니다.
조조曹操의 무리는 먼 길을 오느라 피폐하고, 듣건대
유예주劉豫州를 추격할 때에 경무장한 기병이
일주야一晝夜에 300여 리를 행군했다 하니, 이는 이른바 ‘강한 쇠뇌의 화살이 끝에 가면 형세가
노魯나라의 얇은 비단
注+[釋義]비단 중에 곱고 흰 것을 호縞라 하니, 곡부曲阜의 풍속이 이 비단을 잘 만들어서 특히 가볍고 가늘었기 때문에 노호魯縞라고 한 것이다. 도 뚫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
손자병법孫子兵法》에 이를 꺼려 말하기를 ‘반드시
상장군上將軍이 쓰러진다.’
注+[釋義]궐蹶은 쓰러짐이니 급히 행군하면 대장군大將軍이 반드시 쓰러지는 것이다. 고 하였습니다.
또 북방 사람들은 수전水戰에 익숙하지 못하고, 또 형주荊州의 백성들이 조조曹操에게 귀부歸附한 것은 군대의 위세에 핍박을 받아서일 뿐이요 마음으로 복종한 것은 아닙니다.
지금
장군將軍이 진실로
유예주劉豫州와 계획을 같이하고 힘을 합친다면 틀림없이
조조曹操의 군대를 격파할 수 있을 것이며,
조조曹操의 군대가 패하면
형주荊州와
오吳注+[頭註]형荊은 유비劉備를 이르고, 오吳는 손권孫權을 이른다. 의 형세가 강해져서
삼국三國이 솥발처럼 벌여 서는 형세가 이루어질 것입니다.” 하였다.
이때 조조曹操가 손권孫權에게 편지를 보내기를 “근자에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죄 있는 자를 토벌해서 깃발이 남쪽을 향하니, 유종劉琮이 두 손을 들고 항복하였다.
이제 수군水軍 80만 명을 다스려서 바야흐로 장군과 오吳 지방에서 만나 싸우려 한다.” 하였다.
손권孫權이 이 편지를 여러 부하들에게 보이니, 목소리가 떨리고 낯빛이 변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장사長史 장소張昭 등은 말하기를 “장군의 대세大勢로 볼 때 조조曹操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장강長江이었는데, 이제 조조曹操가 형주荊州를 얻어서 장강長江의 험고함을 우리와 함께 나누어 가졌으니, 그를 맞이하는 것만 못합니다.” 하였다.
노숙魯肅이 은밀하게 손권孫權에게 말하기를 “조금 전에 여러 사람들의 의논을 살펴보니, 오로지 장군을 그르치고자 합니다.
족히 큰일을 도모할 수 없으니, 큰 계책을 속히 정하소서.” 하였다.
이때
주유周瑜가
파양鄱陽에 이르렀는데,
노숙魯肅이
손권孫權에게 권하여
주유周瑜를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注+[通鑑要解]주유周瑜가 이미 전에 명을 받고 길을 떠났으나 아직 멀리 가지 않았으므로 불러서 돌아오게 한 것이다.
주유周瑜가 이르자, 손권孫權에게 이르기를 “조조曹操가 비록 명색은 한漢나라 정승이라고 칭탁하고 있으나 실제는 한漢나라의 역적입니다.
장군將軍은
강동江東 지방을 할거하여 군사들이 정예로워 충분히 쓸 수 있으니, 천하에 횡행하여
한漢나라를 위해
잔해殘害하는 자들을 제거하고
注+[頭註]잔殘은 상하게 함이요, 해침이다. 《맹자孟子》에 “의義를 해치는 자를 잔殘이라 이른다.” 하였다. 더러움을 제거해야 할 터인데, 더구나
조조曹操가 스스로 죽으러 왔는데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지금 북쪽 지방이 평정되지 못하여
마초馬超와
한수韓遂注+[頭註]馬超가 영제靈帝 말년에 한수韓遂와 더불어 서주西州에서 거사擧事하여 관중關中을 진무鎭撫하였다. [通鑑要解]《삼국지三國志》에 “마초馬超는 한수韓遂의 생질甥姪이다.” 하였다.가 아직도
관서關西 지방에 있어
조조曹操의 후환이 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조조曹操가 안장 얹은 말을 버리고 배와 노에 의지하여
注+[頭註]操舍鞍馬 장주즙杖舟楫:장杖은 잡음이다. 북쪽 지방 사람들은 안장 얹은 말(騎馬戰)을 편하게 여기고, 남쪽 지방 사람들은 배와 노(水戰)를 편하게 여기니, 조조曹操가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오吳‧
월越과 다투고, 또 지금 엄동설한에 말은 짚과 마초가 없는데
중국中國의 군사들을 몰아서 멀리
강江‧
호湖의 사이를 건너오니,
수토水土에 익숙하지 못하여 반드시 질병이 생길 것입니다.
제가 정예병 5만 명을 얻어서 보장하고(책임지고) 장군將軍을 위해 격파하겠습니다.” 하였다.
손권孫權이 말하기를 “
노적老賊(曹操)이
한漢나라를 폐하고 스스로 서려고 한 지가 오래되었으나 다만 두
원씨袁氏注+[頭註]두 원씨袁氏는 원소袁紹와 원술袁術이다. 와
여포呂布와
유표劉表와 나를 꺼릴 뿐이었는데, 이제 영웅들이 이미 멸망하고 오직 나만 남아 있으니, 나는
노적老賊과 형세가
양립兩立할 수 없다.
그대가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니,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준 것이다.” 하였다.
손권孫權은 인하여 칼을 뽑아 책상을 내리치며 말하기를 “여러 장수와 관리 중에 감히 다시
조조曹操를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이 책상과 똑같이 될 것이다.” 하고, 인하여
주유周瑜의 등을 어루만지면서 말하기를 “
공근公瑾注+[頭註]공근公瑾은 주유周瑜의 자字이다. 아!
경卿의 말이 여기에 이르니, 나의 마음과 매우 부합한다.
5만 명의 병력은 갑자기
注+[頭註]졸卒은 갑자기이다. 모으기 어려우나 이미 3만 명을 선발하였으니,
경卿이
자경子敬(魯肅)
注+[原註]자경子敬은 노숙魯肅의 자字이다. ‧
정공程公(程普)
注+[釋義]정공程公은 정보程普를 이른다. 과 함께 앞에서 출발하라.
나는 계속하여 사람들을 징발해서 경卿의 후원이 되겠다.” 하고는
마침내
주유周瑜와
정보程普를
좌우독左右督으로 삼아서 병력을 거느리고
유비劉備와 힘을 합해
조조曹操를 맞아 싸우게 하고,
노숙魯肅을
찬군교위贊軍校尉注+[頭註]찬군贊軍은 그로 하여금 군대의 책략策略을 돕게 하고, 인하여 이로써 관직의 명칭을 삼은 것이다. 로 삼아
방략方略을 도와서 계획하게 하였다.
유비劉備는
번구樊口에 있으면서 날마다
순라巡邏하는 관리
注+[頭註]나邏는 돌아다니며 정탐하고 탐색하여 엿보는 것이니, 정탐하기 위하여 일정한 장소 없이 돌아다니는 병사이다. 를 물가에 보내어
손권孫權의 군대를 정탐하게 하였는데,
순라巡邏하는 관리가
주유周瑜의 배가 오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달려가
유비劉備에게 아뢰었다.
유비劉備가 마침내 배 한 척을 타고 가서 주유周瑜을 만나 보고 묻기를 “지금 조공曹公에게 대항하는 것이 참으로 좋은 계책인데, 싸울 병력이 얼마나 되는가?” 하니, 주유周瑜가 대답하기를 “3만 명입니다.” 하였다.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적은 것이 한스럽다.” 하니,
주유周瑜가 말하기를 “이것만 가지고도 충분히 쓸 수 있으니,
유예주劉豫州는 다만 이
주유周瑜가
조조曹操의 군대를 격파하는 것을 구경만 하십시오.” 하고 나아가서
조조曹操와
적벽赤壁注+[釋義]왕씨王氏가 말하였다. “《방여승람方輿勝覽》의 황주黃州 주註에 《수경水經》을 인용하여 적비산赤鼻山이라 기재하였고, 《제안습유齊安拾遺》에는 마침내 적비산赤鼻山을 적벽산赤壁山이라 하였으니, 그 말이 잘못되었다. 주유周瑜가 시상柴桑으로부터 무창현武昌縣의 번구樊口에 이르고 뒤에 적벽赤壁에서 만났으니, 적벽赤壁은 마땅히 대강大江에 임하여 번구樊口의 위에 있어야 하는데, 지금 적비산赤鼻山은 번구樊口의 대안對岸에 있으니, 어찌 진군進軍한 뒤에 만날 필요가 있겠는가? 또 적벽赤壁의 처음 싸움에 조조曹操의 군대가 이롭지 못하여 군대를 이끌고 강북江北에 주둔하여 뒤에 오림烏林의 패전敗戰이 있었으니, 그렇다면 오림烏林은 마땅히 강의 북안北岸에 있어야 하고 적벽赤壁은 강의 남안南岸에 있어야 할 터인데, 지금 도리어 적벽赤壁이 강의 북쪽에 있다고 하였으니, 또한 잘못이다.” 에서 만났다.
이때 조조曹操의 군사들이 이미 역병疫病을 앓고 있어서 처음 한 번 교전했을 때에 조조曹操의 군대가 불리하였으므로 군대를 이끌고 강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주유周瑜의 부장部將 황개黃蓋가 말하기를 “이제 적敵은 병력이 많고 우리는 적으니 더불어 지구전持久戰을 하기 어렵고, 조조曹操의 군대는 막 함선艦船을 연결시켜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어져 있으니 불을 놓고 도망할 만하다.” 하고,
마침내
몽충蒙衝의
전함戰艦注+[釋義]몽충蒙衝은 전선戰船이다. 적의 선박에 충돌하는 배이니, 글자가 몽동艨艟와 통한다. 《석명釋名》에 “위아래에 두꺼운 판자가 있는 것을 함艦이라 하고, 밖이 좁고 긴 것을 몽동艨艟이라 한다.” 하였다. 을 가져다가 마른 갈대와 마른 나무를 가득 실은 다음 그 가운데 기름을 붓고는
조조曹操에게 미리 편지를 보내어 거짓으로 “항복하고자 한다.” 하였다.
이때 동남풍東南風이 거세게 불자, 황개黃蓋가 10척의 전함을 가장 전면前面에 배치한 다음 강 복판에서 닻을 들어 올리고 나머지 배들은 차례로 함께 나아가니, 조조曹操 군중軍中의 관리와 군사들이 모두 진영을 나와 서서 구경하고 손가락질하며 ‘황개黃蓋가 항복하려 한다.’고 말하였다.
북군北軍(江北의 조조曹操 군대)과 2리里 남짓 떨어졌을 때 동시에 불을 놓으니, 불이 맹렬하고 바람이 세차서 배가 쏜살같이 갔다.
북쪽의
전선戰船들을 모두 불태우고
강안江岸 위에 있는 진영과
군락群落注+[頭註]낙落은 거처하는 것이니,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을 촌락村落이라 한다. 에까지 뻗치니, 사람과 말이 불에 타고 물에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