三月
에 魏王操 自長安
으로 出斜谷
하야 軍遮要
注+[釋義]地名이니 在褒斜谷之南하야 與陽平關相近이라[通鑑要解]二意하니 初는 斜谷道險하니 操爲恐備所邀截하야 先以軍遮要害之處하고 乃進臨漢中이요 後意는 卽同此註라以臨漢中
이어늘
劉備曰 曹公雖來나 無能爲也리니 我必有漢川矣라하고 乃斂衆拒險하야 終不交鋒하다
操運米北山下어늘 黃忠이 引兵欲取之러니 過期不還이어늘
趙雲이 將數十騎하고 出營視之라가 値操揚兵大出이라
雲이 猝與相遇하야 遂前突其陳하야 且鬪且却하니 魏兵이 散而復合하야 追至營下라
雲이 入營하야 更大開門하고 偃旗息鼓하니 魏兵이 疑雲有伏하야 引去라
雲
이 雷鼓震天
하고 惟以勁弩
로 於後射魏兵
하니 魏兵驚駭
하야 自相
하야 墮漢水中死者 甚衆
이러라
備明旦
에 自來至雲營
하야 視昨戰處
하고 曰
子龍一身이 都是膽也
注+[頭註]子龍은 雲字라 膽은 言其膽大하야 能以孤軍抗操大兵也라로다
關羽自率衆하고 攻曹仁於樊한대 仁이 使于禁, 龐德으로 屯樊北이러니 八月에 大霖雨하야 漢水溢하니 禁等七軍이 皆沒이라
禁이 與諸將登高避水어늘 羽乘船攻之하니 禁等이 窮迫遂降이라
魏王操 議徙許都하야 以避其銳러니 司馬懿, 蔣濟 言於操曰 劉備, 孫權이 外親內疎하니 關羽得志를 權必不願也리니
可遣人勸權하야 躡其後하고 許割江南以封權이면 則樊圍自解하리이다 操從之하다
○ 初
에 魯肅
이 嘗勸孫權
하야 以曹操尙存
하니 宜且撫輯
注+[釋義]與集同하니 和也라關羽
하야 與之同仇(逑)
注+[頭註]仇는 與逑通이라 詩에 修我戈矛하야 與子同仇호리라한대 注에 其歡愛之心이 足以相死라요 不可失也
라하더니
及呂蒙이 代魯肅하야 屯陸口에 以爲羽素驍雄하야 有兼幷之心하고 且居國上流하니 其勢難久라하야
密言於權曰 今令征虜
注+[釋義]孫皎爲征虜將軍하니라守南郡
하고 潘璋住白帝
注+[釋義]今夔州是라 周初에 爲魚復國이러니 公孫述이 更名白帝城하고 三國漢改永安하니라하고 蔣欽將游兵萬人
하야 循江上下
하야 應敵所在
하고
蒙爲國家하야 前據襄陽이니 如此면 何憂於操며 何賴於羽리오
且羽君臣이 矜其詐力하야 所在反覆하니 不可以腹心待也니
不如取羽
하고 全據長江
하야 形勢益張
注+[釋義]心自侈大也라이면 易爲守也
리이다 權
이 善之
하다
權이 嘗爲其子하야 求昏(婚)於羽한대 羽罵其使하고 不許昏하니 權이 由是怒러라
及羽攻樊에 呂蒙이 上疏曰 羽討樊而多留備兵하니 必恐蒙圖其後故也라
蒙嘗有病하니 乞分士衆하고 還建業하야 以治疾爲名이면 羽聞之하고 必撤備兵하야 盡赴襄陽하리니
大軍
이 浮江
하야 晝夜馳上
하야 襲其空虛
면 則諸郡
注+[頭註]江陵諸郡이라을 可下
요 而羽
를 可禽也
리이다
蒙이 至蕪湖하니 定威校尉陸遜이 謂蒙曰 關羽接境이어늘 如何遠下오
後不當可憂
注+[頭註]言代蒙者 恐非羽敵也라也
잇가
羽矜其驍氣
하야 陵
注+[通鑑要解]轢은 音亦이니 車陵踐也라於人
하고 始有大功
에 意驕志逸하야 但務北進
하고 未嫌於我
하니 有相聞病
注+[頭註]綱目에 作今聞君病이라이면 必益無備
하리니
今出其不意면 自可禽制리이다 蒙曰 羽素勇猛하니 未易圖也니라
蒙至都에 權問誰可代卿者오 蒙對曰 陸遜이 意思深長하고 才堪負重이라
觀其規慮컨대 終可大任이요 而未有遠名하니 非羽所忌니 無復是過라
若用之
면 當令外自韜
注+[通鑑要解]音滔니 藏也라隱
하고 內察形便
이니 然後
에 可克
하리이다
遜至陸口에 爲書與羽하야 稱其功美하고 深自謙抑하야 爲盡忠自託之意하니 羽意大安하야 無復所嫌하고 稍撤兵以赴樊이라
遜이 具啓形狀하야 陳其可禽之要하니 權이 遂發兵襲羽할새 令呂蒙으로 爲大都督하고 命征虜將軍孫皎하야 爲後繼하다
呂蒙
이 至尋陽
하야 盡伏其精兵
注+[釋義]船名이라中
하고 使白衣
注+[頭註]言無兵甲也라搖
하고 作商賈人服
하야 晝夜兼行
하야 羽所置江邊屯候
를 盡收縛之
하니 是故
로 羽不聞知
러라
麋芳, 傅士仁
注+[通鑑要解]二人姓名이라 傳云 傅士仁이라하고 蒙傳云 士仁이라하니 士亦姓也라이 素皆嫌羽輕己
하야 開門出降하니
蒙入江陵
하야 釋于禁之囚
注+[釋義]初에 曹操之將曹仁이 使于禁屯樊北한대 關羽攻降禁而囚之於江陵이러니 今呂蒙釋之하니라하고 得關羽及將士家屬
하야 皆撫慰之
하고 約令軍中
호되 不得干歷人家
하야 有所求取
하다
取民家一笠
注+[通鑑要解]笠은 所以禦雨라하야 以
官鎧
注+[通鑑要解]鎧는 音蓋니 甲也라러니 官鎧
는 雖公
이나 蒙
이 猶以爲犯軍令
하니 不可以鄕里故而廢法
이라하고 遂垂涕斬之
하니
○ 羽聞南郡破하고 卽走南還하야 數使人하야 與呂蒙相聞하니 蒙이 輒厚遇其使하고 周游城中하야 家家致問하고 或手書示信하니
羽人還에 私相參訊하야 咸知家門無恙하고 見待過於平時라 故로 羽吏士無鬪心이러라
羽自知孤窮
하고 乃西保麥城
하야 因遁走
어늘 馬忠
注+[頭註]吳將潘璋司馬也라이 獲羽及其子平於章鄕
하야 斬之
하고 遂定荊州
하다
公瑾
注+[釋義]周瑜字也라은 雄烈
하고 膽略兼人
하야 遂
破孟德注+[頭註]曹操字라하고 開拓荊州
하니 邈焉寡儔요
子敬
注+[釋義]魯肅字也라은 因公瑾
하야 致達於孤
라
孤與宴語
에 便及大略帝王之業
하니 此一快也
요 後
에 孟德
이 因獲劉琮之勢
하야 張言
注+[頭註]張大而言也라方率數十萬衆
하고 水步俱下
라하니 孤普請諸將
하야 咨問所宜
호되 無適先對
요 至張子布
注+[頭註]張昭字라, 秦文表
注+[頭註]名松이라하야는 俱言宜遣使修檄迎之
라호되 子敬
이 卽駁言
注+[頭註]駁者는 執意不同이 如色之間雜也요 又駁異也니 立異議하야 以糾駁衆議之非라不可
하고 勸孤急呼公瑾
하야 付任以衆
하야 逆而擊之
하니 此二快也
라
後雖勸吾借玄德地
注+[頭註]玄德은 先主字라 備見權하야 求都督荊州어늘 魯肅勸權하야 借之拒操하니라하니 是其一短
이나 不足以損其二長也
라
故
로 孤
忘其短而貴其長하야 常以比方鄧禹
注+[頭註]禹建策하야 以開光武中興之業이나 而其後에 不能定赤眉라 故로 以肅比禹라也
로라
子明
注+[釋義]呂蒙字라은 少時
에 孤謂
不辭劇易注+[釋義]謂艱與易也라하야 果敢有膽而已
러니 及身長大
에 學問이 開益하고 籌略이 奇至하야 可以次於公瑾
이나 但言議英發
이 不及之爾
요 圖取關羽
는 勝於子敬
이라
羽는 不足忌라하니 此는 子敬이 內不能辦하고 外爲大言耳라
然
이나 其作軍屯營
에 不失
令行禁止하야 部界
에 無廢負
注+[頭註]廢職以爲負罪也라하고 道無拾遺
하니 其法
이 亦美矣
로다
○ 魏王操 表孫權하야 爲票(驃)騎將軍하고 假節領荊州牧한대 權이 遣校尉梁寓하야 入貢稱臣於操하고 稱說天命하다
侍中陳群等
이 皆曰 漢祚已終
하니 非適注+[釋義]猶言非特也라今日이라
殿下功德巍巍
하야 群生
이 注望
注+[通鑑要解]注는 猶也라이라
故로 孫權이 在遠稱臣하니 此는 天人之應이 異氣齊聲이라
殿下宜正大位
니 復何疑哉
잇고 操曰 若天命在吾
면 吾爲周文王
注+[頭註]文王이 三分天下에 有其二로되 以服事殷하니라矣
리라
敎化는 國家之急務也어늘 而俗吏慢之하고 風俗은 天下之大事也어늘 而庸君忽之라
夫惟明智君子는 深識遠慮하나니 然後에 知其爲益之大而收功之遠也라
光武遭漢中衰
하야 群雄糜沸
注+[頭註]糜는 粥也라 如粥之沸는 言其亂擾也라에 奮起布衣
하야 紹恢前緖
하고 征伐四方
하야 日不暇給
이로되 乃能敦尙經術
하고 賓延儒雅
하며 開廣學校
하고 修明禮樂
하야 武功旣成
에 文德亦洽
이라
繼以孝明, 孝章
이 追先志
注+[釋義]遹은 遵이요 追는 隨也니 遠遵前人之志意也라하야 臨雍拜老
注+[釋義]臨幸辟雍하야 行養老禮也라하고 橫經問道
하며 自公卿大夫
로 至于郡縣之吏
히 咸選用經明行修之人
하야
是以
로 敎立於上
하고 俗成於下
하니 其忠厚淸修之士 豈惟取重於
紳
注+[釋義]搢은 揷也요 紳은 大帶也니 搢紳은 謂揷笏於帶也라이리오
亦見慕於衆庶하며 愚鄙汚穢之人이 豈唯不容於朝廷이리오
及孝和以降
하야는 貴戚擅權
注+[頭註]貴戚은 如和帝時竇憲, 順帝時梁商梁冀, 安帝時鄧隲, 靈帝時竇武之輩라하고 嬖倖
注+[頭註]賤而得幸曰嬖라하니 嬖倖은 如乳母宦官也라用事
하야 賞罰無章
하고 賄賂公行
하며 賢愚渾殽
하고 是非顚倒
하니 可謂亂矣
라
然猶綿綿不至於亡者
는 上則有公卿大夫袁安, 楊震, 李固, 杜喬, 陳蕃, 李膺之徒
가 面折廷爭
하야 用公義以扶其危
하고 下則有布衣之士符融, 郭泰, 范滂, 許劭之流
가 立私論以救其敗
注+[頭註]不得預議於朝하고 而私立論於下하야 以矯朝議之失也라라
是以
로 政治雖濁
이나 而風俗不衰
라 至有觸冒斧鉞
하야 於前
이나 而忠義奮發
이 繼起於後
하야 隨踵就戮
하야 視死如歸
하니 夫豈特數子之賢哉
리오
當是之時하야 苟有明君作而振之면 則漢氏之祚를 猶未可量也라
不幸承陵夷頹敝之餘하고 重以桓, 靈之昏虐하야 保養姦回를 過於骨肉하고 殄滅忠良을 甚於寇讐하야 積多士之憤하고 蓄四海之怒라
於是
에 何進召戎
하고 董卓乘釁
하고 袁紹之徒 從而構難
하야 遂使乘輿播越
하고 宗廟丘墟
注+[釋義]丘는 空也요 墟는 大丘也라 墟本作虛하니 虛者는 毁滅無後之地라하야 王室蕩覆
하고 烝民塗炭
하야 大命殞絶
하야 不可復救
라
然州郡擁兵專地者 雖互相呑噬로되 猶未嘗不以尊漢爲辭라
以魏武之暴戾强
注+[釋義]謂强暴伉健也라으로 加有大功於天下
하야 其蓄無君之心
이 久矣
로되 乃至沒身
토록 不敢廢漢而自立
하니 豈其意之不欲哉
아
3월에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장안長安에서
사곡斜谷으로 진출해서
차요遮要注+[釋義]遮要는 지명이니, 포사곡褒斜谷의 남쪽에 있어 양평관陽平關과 서로 가깝다. [通鑑要解]遮要는 두 가지 뜻이 있으니, 첫 번째는 사곡斜谷이 길이 험하므로 조조曹操가 유비劉備에게 요격邀擊당할까 두려워하여 먼저 군대로써 요해처를 차단하고 비로소 전진하여 한중漢中에 임하였다는 것이요, 나중의 뜻은 바로 이 주註(釋義)와 같은 것이다. 에 주둔하여
한중漢中에 임하였다.
유비劉備가 말하기를 “조공曹公이 비록 왔으나 어찌할 수가 없을 것이니, 우리가 반드시 한천漢川을 소유할 것이다.” 하고, 마침내 병력을 거두어 험한 곳을 막고서 끝내 교전하지 않았다.
조조曹操가 북산北山 아래로 쌀을 수송해 가자 황충黃忠이 군대를 이끌고 가서 빼앗고자 하였는데, 기한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았다.
조운趙雲이 수십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진영을 나가 시찰하다가 위용威容을 과시하는 조조曹操의 대군大軍과 맞닥뜨렸다.
조운趙雲은 갑자기 조조曹操의 대군과 마주치게 되자, 마침내 그 진영으로 돌진하여 한편으로 싸우고 한편으로 퇴각하니, 위魏나라 군대가 흩어졌다가 다시 모여 진영 아래까지 쫓아왔다.
조운趙雲이 진영으로 들어와서 다시 성문을 크게 열고 깃발을 눕히고 북소리를 그치니, 위魏나라 군사들은 조운趙雲이 군사를 매복해 두었을까 의심하여 군대를 이끌고 떠나갔다.
조운趙雲이 북을 울려 북소리가 천지를 진동하고 다만 강한 쇠뇌를 사용하여 후면에서 위魏나라 군사들을 향해 발사하니, 위魏나라 군사들이 놀라 자기들끼리 서로 밟혀 한수漢水 가운데 빠져 죽은 자가 매우 많았다.
유비劉備가 다음 날 아침 직접 와서
조운趙雲의 진영에 이르러 전날 전투했던 곳을 순시하고는 말하기를 “
자룡子龍의 온몸은 모두
담膽뿐이다.”
注+[頭註]자룡子龍은 조운趙雲의 자字이다. 조운趙雲이 담膽이 커서(大膽하여) 고립된 군대를 가지고 조조曹操의 대군大軍에 맞설 수 있었음을 말한 것이다. 하였다.
조조曹操가 군대를 이끌고 장안長安으로 돌아가니, 유비劉備가 마침내 한중漢中을 소유하였다.
○ 7월에 유비劉備가 한중왕漢中王을 자칭하고 돌아와서 성도成都에 치소治所를 정하였다.
관우關羽가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번성樊城에서 조인曹仁을 공격하자, 조인曹仁은 우금于禁과 방덕龐德으로 하여금 번성樊城 북쪽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8월에 큰 장맛비가 내려서 한수漢水가 범람하니, 우금于禁 등 일곱 군영이 모두 물에 잠겼다.
우금于禁이 여러 장수들과 높은 지대에 올라가 홍수를 피하였는데, 관우關羽가 배를 타고 공격하니 우금于禁 등이 곤궁하고 급박하여 마침내 항복하였다.
그리하여 허도許都로부터 이남으로 왕왕 멀리 관우關羽에게 응하니, 관우關羽의 위엄이 화하華夏에 진동하였다.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허도許都를 옮겨서 그 예봉銳鋒을 피할 것을 의논하였는데, 사마의司馬懿와 장제蔣濟가 조조曹操에게 말하기를 “유비劉備와 손권孫權이 겉으로는 친하나 속으로는 소원하니, 관우關羽가 소원을 이루는 것을 손권孫權은 반드시 바라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을 보내 손권孫權에게 권해서 관우關羽의 뒤를 밟게 하고, 강남 지방을 떼어서 손권孫權에게 봉해 줄 것을 허락하신다면 번성樊城의 포위가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하니, 조조曹操가 그 말을 따랐다.
○ 처음에
노숙魯肅이 일찍이
손권孫權에게 권하여 이르기를 “
조조曹操가 아직도 남아 있으니, 우선
관우關羽를 어루만지고
화호和好하여
注+[釋義]집輯은 집集과 같으니 화함이다. 그와 더불어 한 짝이 되어야
注+[頭註]구仇는 구逑와 통한다. 《시경詩經》에 “우리 과모戈矛를 수선하여 그대와 한 짝이 되리라.” 하였는데, 주注에 “그 기뻐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서로를 위하여 죽을 수 있는 것이다.” 하였다. 할 것이요, 반목해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여몽呂蒙이 노숙魯肅을 대신하여 육구陸口에 주둔하게 되자, 생각하기를 ‘관우關羽는 평소 용맹스럽고 웅건雄健하여 겸병할 마음이 있고 더구나 나라의 상류上流 지역에 있으니, 형세상 우호 관계가 오래 지속되기 어렵다.’ 하여
은밀히
손권孫權에게 말하기를 “이제
정로장군征虜將軍 손교孫皎注+[釋義]손교孫皎가 정로장군征虜將軍으로 있었다. 로 하여금
남군南郡을 지키게 하고,
반장潘璋은
백제성白帝城注+[釋義]백제白帝는 지금의 기주夔州이다. 주周나라 초기에 어복국魚復國이라 하였는데 공손술公孫述이 이름을 백제성白帝城으로 바꾸었고 삼국시대三國時代에 촉한蜀漢이 영안永安으로 고쳤다. 에 주둔하게 하고
장흠蔣欽은
유병游兵(유격대) 만 명을 거느리고 강을 따라 오르내리다가 적들이 출몰하는 곳에 응전하게 하고,
저는 국가를 위해 전진하여 양양襄陽을 점거할 것이니, 이와 같이 하면 어찌 조조曹操를 걱정하며 어찌 관우關羽에게 의뢰할 것이 있겠습니까?
또 관우關羽의 군주와 신하는 속임수와 무력을 뽐내어 있는 곳마다 번복하니, 진심으로 대해서는 안 됩니다.
관우關羽를 잡고 완전히
장강長江을 전부 점거하여 형세가 더욱 커지는
注+[釋義]장張은 마음속으로 스스로 큰 체하는 것이다. 것만 못하니, 이렇게 되면 지키기가 쉬울 것입니다.” 하니,
손권孫權이 그 말을 좋게 여겼다.
손권孫權이 일찍이 그의 자식을 위하여 관우關羽에게 혼인할 것을 요구하였는데, 관우關羽가 그 사자使者를 꾸짖고 혼인을 허락하지 않으니, 손권孫權이 이로 말미암아 노하였다.
관우關羽가 번성樊城을 공격하자, 여몽呂蒙이 상소하기를 “관우關羽가 번성樊城을 토벌하면서 수비병을 많이 남겨 두었으니, 이는 반드시 제가 그 후미를 도모할까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일찍이 병이 있으니, 바라건대 병력을 분산시키고 건업建業으로 돌아가 병을 치료한다고 구실을 삼으면 관우關羽가 이 말을 듣고 반드시 수비병을 철수하여 모두 양양襄陽으로 달려갈 것이니,
대군大軍이 강에 배를 띄워 밤낮으로 달려
상류上流로 올라가서 그의 빈 진영을 습격한다면
강릉江陵의 여러
군郡注+[頭註]제군諸郡은 강릉江陵의 여러 고을이다. 을 함락시키고
관우關羽를 사로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는
마침내 병이 위독하다고 칭하니, 손권孫權이 급히 격문檄文을 보내 여몽呂蒙을 불러 돌아오게 하였다.
여몽呂蒙이 무호蕪湖에 이르니, 정위교위定威校尉 육손陸遜이 여몽呂蒙에게 이르기를 “관우關羽와 인접하고 있는데, 어찌 먼 곳까지 내려오십니까?
후임자後任者가
관우關羽를 감당하지 못할까 우려할 만합니다.
注+[頭註]여몽呂蒙을 대신한 자가 관우關羽의 적수가 못 될까 우려됨을 말한 것이다.
관우關羽가 용맹한 기운을 자랑하여 사람들을 능멸
注+[通鑑要解]역轢은 음이 역이니, 수레에 치여 깔리는 것이다. 하고, 처음 큰 공을 세우자 뜻이 교만하고 마음이 방탕하여 다만
북진北進만을 힘쓰고 우리를 혐의하지 않으니, 지금
장군將軍께서 병이 계시다는 말을 들으면
注+[頭註]‘유상문병有相聞病’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금문군병今聞君病’으로 되어 있다. 반드시 더욱 대비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그가 예상하지 못한 데로 나오면 자연히 사로잡아 제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니, 여몽呂蒙이 말하기를 “관우關羽는 평소 용맹하니, 쉽게 도모할 수 없다.” 하였다.
여몽呂蒙이 도성(建業)에 이르자, 손권孫權이 묻기를 “누가 경卿을 대신할 만한 자인가?” 하니, 여몽呂蒙이 대답하기를 “육손陸遜은 사려가 매우 깊으며 재주가 중임重任을 감당할 만합니다.
그의 계책과 생각하는 것을 살펴보건대 마침내 큰 책임을 맡길 만하고, 아직 원대한 명성이 없어서 관우關羽가 꺼리는 바가 아니니, 이보다 더 나은 자가 없습니다.
만약 그를 쓰신다면 겉으로는 자신의 의도를 감추고
注+[通鑑要解]도韜는 음이 도이니, 감춤이다. 마음속으로 형세를 살피게 해야 할 것이니, 그런 뒤에야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손권孫權이 마침내 육손陸遜을 불러서 편장군偏將軍에 제수하고 여몽呂蒙을 대신하게 하였다.
육손陸遜은 육구陸口에 이르자 편지를 써서 관우關羽에게 보내어 그의 공로와 아름다운 덕을 칭찬하고 깊이 스스로 겸양하여 충심을 다해 스스로 의탁하려는 뜻을 표명하니, 관우關羽의 마음이 크게 안심되어 다시는 혐의하는 바가 없었고 차츰 수비병을 철수하여 번성樊城으로 달려갔다.
육손陸遜이 이러한 상황을 자세히 아뢰어 사로잡을 수 있는 요점을 말하니, 손권孫權이 마침내 군대를 내어 관우關羽를 습격하게 할 적에 여몽呂蒙을 대도독大都督으로 삼고 정로장군征虜將軍 손교孫皎에게 명하여 뒤를 잇게 하였다.
여몽呂蒙이
심양尋陽에 이르러서 정예병을 배
注+[釋義]𦩷𦪇:𦩷𦪇은 배의 이름이다. 안에 모두 숨겨 두고,
백의白衣注+[頭註]백의白衣는 병기와 갑옷이 없음을 말한다. 를 입은 자들로 하여금 노를 젓게 하고 장사꾼의 의복을 만들어 입혀서 밤낮으로 행군 속도를
배가倍加하여
관우關羽가 배치한 강변에 주둔한 병사들을 모두 포박하니, 이 때문에
관우關羽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미방麋芳과
부사인傅士仁注+[通鑑要解]미방麋芳과 부사인傅士仁은 두 사람의 성명이다. 〈관우전關羽傳〉에는 ‘부사인傅士仁’이라 하였고, 〈여몽전呂蒙傳〉에는 ‘사인士仁’이라 하였으니, 사士 또한 성姓이다. 은 평소 모두
관우關羽가 자신들을 멸시함을 혐의하여 성문을 열고 나와 항복하니,
여몽呂蒙은
강릉江陵으로 들어가서 갇혀 있던
우금于禁을 석방하고,
注+[釋義]蒙入江陵 석우금지수釋于禁之囚:처음에 조조曹操의 장수 조인曹仁이 우금于禁으로 하여금 번성樊城 북쪽에 주둔하게 하자, 관우關羽가 우금于禁을 공격하여 항복받고 그를 강릉江陵에 가두었는데, 이제 여몽呂蒙이 풀어준 것이다. 관우關羽와 장병들의 가솔을 찾아 다 어루만지고 위로하였으며,
군중軍中에 명령을 내려 약속하기를 “
인가人家에 들어가서 물건을 요구하거나 탈취하지 말라.” 하였다.
여몽呂蒙의 휘하 병사가 여몽呂蒙과 같은 고을 사람이었다.
그가
민가民家의 삿갓
注+[通鑑要解]입笠은 비를 막는 것이다. 하나를 취하여
관官의 갑옷
注+[通鑑要解]개鎧는 음이 개이니, 갑옷이다. 을 덮었는데,
관官의 갑옷은 비록 공적인 물건이지만
여몽呂蒙은 오히려 이르기를 “
군령軍令을 범하였으니,
동향同鄕 사람이라 해서 법을 폐할 수 없다.” 하고는 마침내 눈물을 흘리며 그의 목을 베었다.
이에 군중軍中이 두려워하여 길에 흘린 것도 줍지 않았다.
○ 관우關羽가 남군南郡이 격파되었다는 말을 듣고 즉시 달려 남쪽으로 돌아와서 자주 사람을 보내어 여몽呂蒙과 서로 연락하니, 여몽呂蒙이 그때마다 관우關羽의 사자使者를 후대하고 성城 안을 두루 다니면서 집집마다 위문하고 혹은 친서親書를 보내어 신의를 보였다.
관우關羽의 사자使者가 돌아오자, 사람들이 은밀히 서로 물어서 자기 집안에 아무 탈이 없고 대우를 받음이 평상시보다 더하다는 것을 모두 알게 되었으므로 이 때문에 관우關羽의 군사와 백성들이 싸울 마음이 없었다.
마침 손권孫權이 강릉江陵에 이르니, 형주荊州의 장수와 관리들이 모두 다 귀부歸附하였다.
관우關羽는 스스로 고립되어 곤궁함을 알고 마침내 서쪽으로
맥성麥城을 확보하고 인하여
맥성麥城으로 도망하였는데,
마충馬忠注+[頭註]마충馬忠은 오吳나라 장수 반장潘璋의 사마司馬이다. 이
관우關羽와 그의 아들
관평關平을
장향章鄕에서 사로잡아 목을 베고 마침내
형주荊州를 평정하였다.
여몽呂蒙은 미처 봉작을 받기도 전에 병이 나서 죽으니, 나이가 42세였다.
- 《삼국지三國志 오지吳志 여몽전呂蒙傳》에 나옴 -
○ 손권孫權은 뒤에 육손陸遜과 함께 주유周瑜와 노숙魯肅 및 여몽呂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
공근公瑾(周瑜)
注+[釋義]공근公瑾은 주유周瑜의 자字이다. 은
웅건강렬雄健剛烈하고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마침내
맹덕孟德(曹操)
注+[頭註]맹덕孟德은 조조曹操의 자字이다. 을 격파하고
형주荊州를 개척하였으니 아득히 높아 필적할 만한 자가 드물다.
자경子敬(魯肅)
注+[釋義]자경子敬은 노숙魯肅의 자字이다. 은
공근公瑾을 통하여 나에게 이르렀다.
내가 그와 사사로이 말할 때에 큰 도략과 제왕의
업業을 언급하였으니 이것이 첫 번째 통쾌한 일이요, 뒤에
맹덕孟德이
유종劉琮의 세력을 얻고서 막 수십만
대군大軍을 거느리고
수군水軍과
보병步兵이 함께 내려온다고 장담
注+[頭註]장언張言은 떠벌려(과장하여) 말하는 것이다. 하므로, 내가 여러 장수들에게 널리 청하여 마땅한 대책을 자문하였으나 먼저 나서서 대답하는 자가 없었고,
장자포張子布(張昭)
注+[頭註]자포子布는 장소張昭의 자字이다. 와
진문표秦文表(秦松)
注+[頭註]문표文表는 이름이 송松이다. 에 이르러는 모두
맹덕孟德에게
사자使者를 보내어
격문檄文을 올려 맞이해야 한다고 말하였으나
자경子敬이 즉시 논박
注+[頭註]박駁은 의견이 똑같지 않음이 색깔이 섞여 있는 것과 같은 것이요, 또 이론異論을 반박하는 것이니, 다른 의견을 내세워 여러 의논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고 반박하는 것이다. 하여 불가함을 말하고, 나에게 급히
공근公瑾을 부르도록 권하여 군대를 맡겨 주어서 그로 하여금
맹덕孟德의 군대를 맞이해 싸우게 하였으니, 이것이 두 번째 통쾌한 일이다.
뒤에 비록 나에게 권하여
유현덕劉玄德에게 땅을 빌려 주게 하였으니,
注+[頭註]현덕玄德은 선주先主(劉備)의 자字이다. 유비劉備가 손권孫權을 보고 형주荊州의 도독都督이 될 것을 요구하자, 노숙魯肅이 손권孫權에게 권하여 형주荊州를 유비劉備에게 빌려 주어 함께 조조曹操를 막게 하였다. 이것이 한 가지 단점이나 두 가지 장점을 덜 수 없다.
주공周公은 한 사람에게 완비하기를 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그의 단점을 잊고 그의 장점을 훌륭하게 여겨서 항상
등우鄧禹注+[頭註]등우鄧禹가 계책을 세워 광무제光武帝의 중흥中興의 업적을 열었으나 그 뒤에 적미赤眉를 평정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노숙魯肅을 등우鄧禹에 비교한 것이다. 에 비교하는 바이다.
자명子明(呂蒙)
注+[釋義]자명子明은 여몽呂蒙의 자字이다. 이 젊었을 때에 나는 그가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注+[釋義]극역劇易는 어려움과 쉬움을 이른다. 사양하지 않아 과감하고 담력이 있을 뿐이라고 여겼는데, 사람이 성숙해지자 학문이 진전되고 지략이 남달라서
공근公瑾의 다음이 될 수 있으나, 다만 언론이 그에게 미치지 못할 뿐이고,
관우關羽를 도모하여 잡은 것은
자경子敬보다 낫다.
자경子敬이 나에게 답한 글에 이르기를 ‘제왕帝王이 일어날 때에는 모두 제왕帝王을 위하여 적들을 몰아 제거해 주는 자가 있었습니다.
관우關羽는 꺼릴 만한 상대가 못 됩니다.’ 하였으니, 이는 자경子敬이 내심으로 일을 다스리지 못하고는 겉으로 큰소리 친 것일 뿐이다.
내가 또한 그를 용서하여 구차하게 꾸짖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군대를 일으켜 싸우고
영營에 주둔하여 지킬 때에 명령하면 명령이 행해지고 금하면 금하는 것이 그쳐짐을 잃지 아니하여,
부部의 경계 안에 직임을 폐함으로써 죄를 지은 사람이 없고
注+[頭註]폐부廢負는 직무를 폐하여 죄를 짓는 것이다. 도로에 흘린 물건도 줍지 않았으니, 그 법이 또한 아름다웠다.”
○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표문을 올려 손권孫權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고 부절符節을 빌려 주어 형주목荊州牧을 겸하게 하자, 손권孫權은 교위校尉 양우梁寓를 보내어 들어가 공물貢物을 바치고 조조曹操에게 신臣를 칭하고는 천명天命이 조조曹操에게 있다고 말하였다.
시중侍中 진군陳群 등이 모두 말하기를 “
한漢나라의 국운이 이미 끝났으니, 단지
注+[釋義]비적非適은 비특非特(非但)이라는 말과 같다. 오늘 뿐만이 아닙니다.
전하殿下의
공덕功德이 높아서 여러
생민生民들이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注+[通鑑要解]주注는 모음과 같다.
그러므로 손권孫權이 먼 곳에 있으면서 신臣을 칭하였으니, 이는 하늘과 사람의 응함이 기운은 다르나 소리는 같은 것입니다.
전하殿下께서 마땅히
대위大位에 오르셔야 하니, 다시 무엇을 의심하겠습니까?” 하니,
조조曹操가 말하기를 “만약
천명天命이 내 몸에 있다면 나는
주周나라
문왕文王注+[頭註]문왕文王은 천하天下를 셋으로 나눌 적에 그 둘을 소유하였으나 복종하여 은殷나라 주왕紂王을 섬겼다. 이 되겠다.” 하였다.
“교화敎化는 국가의 급선무인데 세속의 관리들이 태만히 하고, 풍속風俗은 천하의 큰일인데 용렬한 군주가 소홀히 한다.
오직 밝고 지혜로운 군자君子는 깊이 알고 멀리 생각하니, 그런 뒤에야 유익함이 크고 공을 거둠이 원대함을 안다.
광무제光武帝는
한漢나라가 중간에 쇠락할 때를 만나 영웅들이 죽 끓듯
注+[頭註]미糜는 죽이다. 죽이 끓는 것과 같음은 어지러움을 말한다. 할 때에
포의布衣(평민)의 신분으로 분발하여 일어나
전인前人들이 남겨 놓은
기업基業의 실마리를 이어 회복하고
사방四方을
정벌征伐하여 날마다 한가할 겨를이 없었으나, 마침내
경학經學을 돈독히 숭상하고 선비들을 손님의
예禮로 맞이하며 학교를 열어 넓히고
예악禮樂을 닦고 밝혀서
무공武功이 이미 이루어지자
문덕文德 또한 흡족하였다.
뒤를 이어
효명제孝明帝와
효장제孝章帝는
선조先祖의
유지遺志를 따라
注+[釋義]휼遹은 따름이요 추追는 따름이니, 앞 사람의 뜻을 멀리 따르는 것이다. 벽옹辟雍에 친히 임하여
노인老人(三老五更)에게 절하고
注+[釋義]벽옹辟雍에 행차하여 노인을 봉양하는 예禮를 행한 것이다. 경서經書를 옆에 펼쳐 놓고
도道를 물었으며,
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군현郡縣의 관리에 이르기까지 모두
경학經學에 밝고 행실이 닦여진 사람을 선발하였다.
그리하여 호위하는 군사들도 모두 《효경孝經》을 익혔고 흉노匈奴의 자제들 또한 태학太學에 유학하였다.
이 때문에 교육이 위에서 확립되고 풍속이 아래에서 이루어졌으니, 충후하고 행실이 결백한 선비들이 어찌 다만
사대부士大夫들
注+[釋義]진搢은 꽂음이고 신紳은 큰 띠이니, 진신搢紳은 띠에 홀을 꽂음을 이른다. 사이에서 존중을 받을 뿐이었겠는가.
또한 여러 백성들에게 흠모를 받았으며, 어리석고 비루하고 더러운 사람이 어찌 다만 조정에서 용납되지 못할 뿐이었겠는가.
삼대三代가 멸망한 이후로 풍속과 교화의 아름다움이 동한東漢처럼 성대한 적이 있지 않았다.
그러다가
효화제孝和帝 이후로는
귀척貴戚들
注+[頭註]귀척貴戚은 화제和帝 때의 두헌竇憲, 순제順帝 때의 양상梁商‧양기梁冀, 안제安帝 때의 등즐鄧隲, 영제靈帝 때의 두무竇武와 같은 무리이다. 이 권력을 독점하고 총애받는 자(乳母와
환관宦官)들
注+[頭註]신분이 천하면서 총애를 받는 것을 폐嬖라 하니, 폐행嬖倖은 유모와 환관 같은 자들이다. 이
용사用事하여 상벌에 기준이 없고 뇌물이 공공연히 성행하였으며, 어진 이와 어리석은 이가 뒤섞이고
시비是非가 전도되었으니, 혼란하다고 이를 만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면면히 이어져 멸망함에 이르지 않을 수 있었던 것은 위로는
공경대부公卿大夫인
원안袁安‧
양진楊震‧
이고李固‧
두교杜喬‧
진번陳蕃‧
이응李膺의 무리가 황제의 면전에서 꺾고 조정에서 간쟁하여
공의公義로써 국가의 위태로움을
부지扶持하고, 아래로는
포의布衣의 선비인
부융符融‧
곽태郭泰‧
범방范滂‧
허소許劭의 무리가
사론私論을 세워
한漢나라 조정의 잘못을 바로잡았기
注+[頭註]조정에 참여하여 의논하지 못하고 아래에서 사사로이 의논을 세워 조정의 의논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는 것이다.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정치가 비록 혼탁하였으나 풍속이 쇠하지 않아서 심지어는 부월斧鉞을 범하여 앞에서 쓰러져 죽었으나 충의忠義에 분발하는 자가 뒤를 이어 나와 앞사람을 따라 계속해서 죽음에 나아가 죽음을 보기를 돌아가는 것처럼 여겼으니, 어찌 다만 몇 사람이 어질었기 때문이었겠는가?
이 또한 광무제光武帝와 명제明帝와 장제章帝가 남긴 교화 때문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만일 현명한 군주가 나와서 진작振作시켰다면 한漢나라의 국운國運은 오히려 헤아릴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침체하고 무너진 뒤를 이었고, 또 환제桓帝와 영제靈帝가 혼우하고 포악해서 간사한 자들을 보호하고 기르기를 자기 골육보다 더 심하게 하고, 충신과 어진 자를 죽이고 멸하기를 원수보다 더 심하게 하여 많은 선비들의 울분을 쌓이게 하고 온 천하 백성들의 노여움을 쌓이게 하였다.
이에
하진何進이 군대를 부르고
동탁董卓이 틈을 타며
원소袁紹의 무리가 따라서 난을 일으켜, 마침내
천자天子의 수레가
파천播遷하고
종묘宗廟가 빈터
注+[釋義]구丘는 빔이요, 허墟는 큰 언덕이다. 허墟는 본래 허虛로 되어 있으니, 허虛는 허물어지고 멸망하여 뒤를 잇는 자가 없는 곳이다. 가 되게 하여,
왕실王室이 전복되고
생민生民들이 도탄에 빠져서
대명大命(天命)이 끊어져 다시는 구원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주군州郡에서 병력을 보유하고 땅을 차지한 자들이 비록 서로 삼키고 물어뜯었으나 그래도 일찍이 한漢나라를 존숭尊崇함을 구실로 삼지 않은 적이 없었다.
위魏 무제武帝(曹操)는 사납고 강포
注+[釋義]강항强伉은 강포하고 굳셈을 이른다. 한데다가 천하 사람들에게 큰 공이 있어서 군주를 무시하는 마음을 쌓은 지가 오래되었으나 마침내 종신토록 감히
한漢나라 황제를 폐하고 스스로 서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 마음속에 이를 원하지 않았겠는가?
그래도 명분과 의리를 두려워하여 스스로 억제한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살펴보건대 교화를 어찌 태만히 할 수 있으며 풍속을 어찌 소홀히 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