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庚子]二十五年
이라 〈魏文帝曹丕黃初元年
이라 ○是歲
에 이라
操
知人善察하야 難眩以僞注+[通鑑要解]謂人不能亂其明也라요 識拔奇才
에 不拘微賤
하고 隨能任使하야 皆獲其用하다
與敵對陳에 意思安閑하야 如不欲戰이나 然이나 及至決機乘勝하얀 氣勢盈溢하며
勳勞宜賞엔 不吝千金하고 無功妄注+[頭註]綱目及資治에 竝作望이라施엔 分毫不與하며 用法峻急
하야 有犯必戮
하니
或對之流涕
나 然
이나 終無所赦
하고 雅
注+[頭註]素也라性
이 節儉
하야 不好華麗
라
○ 尙書陳群
이 以天朝
注+[通鑑要解]謂漢朝也라選用
이 不盡人才
라하야 乃立九品官人之法
하니 州郡
에 皆置中正
하야 以定其選
할새 擇州郡之賢有識鑑者爲之
하야 區別人物
하야 第其高下
하다
○ 十月
에 漢帝使御史大夫張音
으로 持節奉璽綬詔冊
하야 禪
注+[頭註]見十六卷이라位于魏王
하니 王
이 卽皇帝位
하야 改元黃初
注+[頭註]魏受漢禪하고 推五德之運하야 以土繼火하니 土色黃이라 故로 紀元曰 黃初라하고 大赦
하다
天生烝民에 立之司牧하니 天下不可以無君也요 天無二日하고 民無二王이니 天下不可以二君也라
自唐虞禪繼로 舜禹承之하니 循其名이면 可以責其實이니 古人이 豈固假此以欺天下哉아
成湯放桀에 猶有慚德하고 武王伐紂에 義士非之로되 湯武不失爲聖人하시고 商周不失爲正統하니 亦惟求其實耳라
考其實하면 皆羿浞莽卓之徒로되 而求其名은 乃欲高出商周之上이라
前史信其僞辭하고 衰世襲其遺蹟하야 一則曰禪位요 二則曰受禪이라하니 胡爲自漢而下로 一何堯舜之多耶아
今之綱目에 直書魏王曹丕稱皇帝하고 廢帝爲山陽公이라하야 大書于冊하고 至於傳禪之說하야는 絶不復擧하니 斯言一出에 諸史皆廢라
嗚呼라 亂臣賊子竊人家國에 常患於取之無名이면 則必曲爲委折以文之라
三家分晉하고 田氏倂齊에 借周人之命以自好하고 莽賊簒漢에 欲求其說而不可得일새 乃以周公居攝稱之하고 至操丕하야 始以傳禪爲文이라
自後로 簒竊相繼에 皆踵而行之하니 其原이 始於曹氏之作俑也라
朱子旣破其說하시니 然後에 姦僞之徒가 始無以爲欺天下後世之目하니
右東漢은 自光武로 盡孝獻히 十二帝요 共一百九十六年이라
新室之末에 民心思漢을 如渴之望飮하고 飢之待哺也라
是以
로 諸劉奮臂一呼
에 而遠近響應
하야 曾未朞年
에 元惡授首
注+[頭註]元惡은 莽也라라
更始入雒之初에 天下已服矣로되 而素無人君之器하야 綱紀不修하고 諸將暴橫하야 不旋踵而亡하니 固其宜也라
光武以仁厚之德으로 濟英雄之志하야 昆陽之役에 驅烏合之衆하야 掃滔天之敵하야
宜陽之師 不戰而赤眉束手하고 百萬之盜 一朝而散하니 皆希(稀)世之奇功也라
至於待王郞劉盆子
注+[頭註]盆子는 見丁亥年이라 王郞은 甲申年에 王霸斬之로되 此云止於不死는 未詳이라에 止於不死
하고 首取良吏卓茂
하야 以爲太傅
하고 戒馮異安集關中
하고 不務以戰功取勝
하니 雖當草創之際
라도 可謂有帝王之遠略矣
요
及天下已定
하야는 不失舊物
注+[頭註]左傳文注에 不失治天下之舊事라하니라하야 乃偃武修文
하고 崇德報功
하야 勤政治, 養黎元
하고 興禮樂, 宣敎化
하고 表行義, 厲風俗
이라
繼以明章이 守而不失하니 於是에 東漢之風의 忠信廉恥가 幾於三代矣라
及孝和以降
으로 政令寢弛
하야 外戚專權
하고 近習放恣
나 然猶有骨鯁忠烈之臣
注+[頭註]如李膺, 桓典之屬이라이 忘身而徇國
이라
故雖衰而不亡
하니 豈非建武永平
注+[頭註]建武는 光武요 永平은 明帝이다. 之遺烈歟
아
至于桓靈하야는 而紀綱大壞하야 廢錮英俊하고 賊虐忠正하니 嬖倖之(儻)[黨]이 中外盤結하야 鬻獄賣官하야 濁亂四海라
何進見殺에 袁紹不勝其憤하야 遂燔燒宮闕하고 肆行誅殺하며 外召董卓하야 以脅朝廷이라
於是
에 虺蜴雖除
나 而虎貙
注+[頭註]似貍한대 能捕獸라入室矣
라
卓
은 貪愎殘忍
하야 廢主遷都
하니 州郡紛然
하야 稱兵
注+[頭註]稱은 擧也라以討之
러니 卓死而天下大亂
하야 漢室遂亡
하니 哀哉
라
건안建安 25년(경자 220) - 위魏 문제文帝 조비曹丕 황초원년黃初元年 ○ 이 해에 참람한 나라가 하나이다. -
정월에 위왕魏王 조조曹操가 낙양洛陽에 이르러 죽었다.
조조曹操는 인물을 잘 알아보고 잘 살펴서 거짓으로 속이기가 어려웠고,
注+[通鑑要解]거짓으로 속이기 어렵다는 것은 사람들이 그 명철함을 어지럽힐 수 없음을 이른다. 기이한 인재를 식별하여 발탁함에 신분의 미천함을 따지지 않고 재능에 따라 맡기고 부려서 모두 그 쓰임을 얻었다.
적과 대진對陣했을 때에는 의사意思가 편안하고 조용하여 싸우지 않고자 하는 듯하였으나 기회를 결단하여 승세를 타고 출격할 때에 이르러서는 기세가 가득 차서 넘쳤다.
공로가 있어 마땅히 상을 주어야 할 경우에는
천금千金도 아끼지 않았으나 공이 없으면서 상을 바랄
注+[頭註]‘망妄’은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과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모두 ‘망望’으로 되어 있다. 경우에는 털끝만큼도 주지 않았으며, 법을 적용함이 준엄하고 급하여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반드시 죽였다.
혹 죄를 범한 자를 대하여 눈물을 흘렸으나 끝내 사면하는 바가 없었고, 평소
注+[頭註]아雅는 평소이다.의 성품이 절약하고 검소하여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영웅들을 베어 제거하고 거의 해내海內를 평정할 수 있었다.
조조曹操의 태자太子인 조비曹丕가 왕위王位에 올랐다.
○
상서尙書 진군陳群은
천조天朝(漢나라 조정)
注+[通鑑要解]천조天朝는 한漢나라 조정을 이른다. 에서 인재를 선발하는 방법은 인재를 총망라할 수 없다 하여 마침내
구품九品으로
임관任官하는 제도를 확립하니,
주군州郡에 모두
중정관中正官을 설치하여 그 선발을 결정하게 할 적에
주군州郡의 어진 자와 인재를 식별하는 안목이 있는 자를 택하여 인물을 구별해서 그 고하를 차등하게 하였다.
○ 10월에
한漢나라 황제가
어사대부御史大夫 장음張音으로 하여금
부절符節을 잡고 옥새와 인끈과
조책詔冊을 받들어
위왕魏王에게
제위帝位를 선양
注+[頭註]선禪은 주註가 16권 건무建武 5년조年條에 보인다.하게 하니,
위왕魏王이
황제皇帝에 즉위하여
황초黃初라 개원
注+[頭註]위魏나라가 한漢나라의 선양禪讓을 받고 오덕五德의 운행을 미루어 토덕土德으로써 화덕火德을 이었으니, 토土의 색色이 황색이므로 기원紀元하기를 황초黃初라 한 것이다. 하고 천하에 크게 사면령을 내렸다.
한漢나라 황제(獻帝)를 받들어 산양공山陽公이라 하고 아버지 조조曹操를 추존하여 무황제武皇帝라 하였다.
“하늘이 뭇 백성을 내고 사목司牧(백성을 맡아 기르는 군주)을 세우니 천하에 군주가 없을 수 없고, 하늘에는 두 태양이 없으며 백성에게는 두 왕王이 없으니 천하에 군주가 둘일 수 없는 것이다.
당우唐虞(堯舜)가 선양禪讓하고 계승함으로부터 순舜임금과 우왕禹王이 이어받았으니, 그 이름을 따르면 그 실제를 책할 수 있는 바, 고인古人이 어찌 진실로 이를 빌려 천하 사람들을 속였겠는가.
성탕成湯이 걸왕桀王을 추방하고도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있었고 무왕武王이 주왕紂王을 정벌하자 의사義士인 백이伯夷‧숙제叔齊가 그르다 하였으나, 탕왕湯王과 무왕武王은 성인聖人이 됨을 잃지 않았고 상商나라와 주周나라는 정통이 됨을 잃지 않았으니, 또한 그 실제를 찾을 뿐이다.
후세에는 고아孤兒(어린 군주)를 속이고 과부를 깔보아 찬탈하고 도둑질함이 서로 이어졌다.
그 실제를 상고하면 모두 후예后羿‧한착寒浞‧왕망王莽‧동탁董卓의 무리였으나 그 이름을 구한 것은 바로 상商나라와 주周나라의 위로 높이 솟아나고자 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전의 역사책에는 그들의 거짓말을 믿고 쇠미한 세상에서는 그들이 남긴 자취를 인습하여, 한쪽에서는 선위禪位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선위禪位를 받았다고 하니, 어찌하여 한漢나라 이후로 어쩌면 이리도 요순堯舜이 많단 말인가.
지금 《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에 ‘위왕魏王 조비曹丕가 황제를 칭하고 헌제獻帝를 폐하여 산양공山陽公으로 삼았다.’고 곧바로 써서 책에 크게 기록하고, 전위傳位하여 선양禪讓했다는 말에 이르러서는 절대로 다시 거론하지 않았으니, 이 말이 한 번 나오자 여러 역사책이 다 폐지되었다.
어찌 주자朱子가 이론異論을 세우기를 좋아해서였겠는가?
또한 그 실제를 찾음에 지나지 않았을 뿐이다.
아, 난신적자亂臣賊子가 남의 집안과 나라를 도둑질할 때에 항상 취함에 명분이 없음을 근심하면 반드시 굽혀 곡절曲折을 만들어 문식을 하였다.
한韓‧위魏‧조趙 삼가三家가 진晉나라를 나누고 전씨田氏가 제齊나라를 겸병할 때에 주周나라의 황명皇命을 빌어서 스스로 미화하였고, 역적인 왕망王莽이 한漢나라를 찬탈할 때에 그 구실을 찾고자 하였으나 찾지 못하자 마침내 주공周公이 거섭居攝한 것을 칭하였으며, 조조曹操와 조비曹丕에 이르러서는 비로소 제위帝位를 전선傳禪한 것으로 문식文飾하였다.
이후로 찬탈과 도둑질이 서로 이어짐에 모두 이것을 뒤따라 행하였으니, 그 근원은 조씨曹氏의 작용作俑(나쁜 전례前例)에서 시작되었다.
주자朱子가 이미 그 내용을 설파하시니, 그런 뒤에야 간사하고 거짓된 무리들이 비로소 천하와 후세의 눈을 속일 수가 없게 되었다.
명교名敎에 보탬이 됨이 어찌 크지 않겠는가.”
이상 동한東漢은 광무제光武帝로부터 효헌제孝獻帝까지 12황제요, 모두 196년이다.
“신新나라 말기에 백성들의 마음이 한漢나라를 생각하기를 목마를 때 음료를 먹여 주기를 바라고 굶주릴 때 먹여 주기를 기다리는 것처럼 하였다.
이 때문에 여러
유씨劉氏가 팔을 걷어붙이고 한 번 고함치자
원근遠近이 메아리처럼 호응하여 일찍이 만 1년이 되기도 전에
원악元惡인
왕망王莽注+[頭註]원악元惡은 왕망王莽이다. 이 머리를 내놓았다.
경시更始가 낙양雒陽으로 들어가던 초기에 천하가 이미 복종하였으나, 경시更始는 평소 인군人君의 기국器局이 없어서 기강紀綱이 다스려지지 못하였고 여러 장수들은 사납고 제멋대로 하여 발걸음을 돌리기도 전에 멸망하였으니, 이는 진실로 마땅한 것이다.
광무제光武帝는 인후仁厚한 덕德으로 영웅英雄의 뜻을 더하여 곤양昆陽의 전투에서 오합지졸을 몰아, 죄악이 하늘에까지 닿는 적을 소탕하였다.
그리하여 온 천하로 하여금 번연幡然히 변하여 한漢나라가 되게 하였다.
의양宜陽의 군사가 싸우지 않았는데도 적미赤眉가 손을 들고 항복하고 백만에 이르는 도적들이 하루아침에 흩어졌으니, 이는 모두 세상에 드문 기이한 공이었다.
왕랑王郞과
유분자劉盆子注+[頭註]분자盆子는 주註가 정해년丁亥年에 보인다. 왕랑王郞은 갑신년甲申年에 왕패王霸가 목을 베어 죽였는데, 여기에서 ‘죽이지 않음에 그쳤다.[止於不死]’고 말한 것은 자세하지 않다.를 대함에 이르러서는 죽이지 않음에 그쳤고,
양리良吏인
탁무卓茂를 첫 번째로 발탁하여
태부太傅를 삼았으며,
풍이馮異에게
관중關中 지방을 편안히 살게 하고
전공戰功으로 승리를 취하는 데 힘쓰지 말도록 경계하였으니, 비록
초창草創할 때를 당해서도
제왕帝王의 원대한 도략이 있다고 이를 만하였다.
천하가 이미 평정됨에 이르러서는 예로부터 지켜 온 물건(국가)
注+[頭註]불실구물不失舊物은 《춘추좌전春秋左傳》 문공文公 주注에 “천하를 다스리는 옛일을 잃지 않은 것이다.” 하였다. 을 잃지 아니하여 마침내
무武를 억제하고
문文을 닦으며
덕德을 높이고
공功에 보답하여 정사를 부지런히 힘쓰고 백성들을 기르며
예악禮樂을 일으키고
교화敎化를 펴며
행의行義를 표창하고
풍속風俗을 장려하였다.
뒤이어 명제明帝와 장제章帝가 이것을 잘 지키고 잃지 않으니, 이에 동한東漢 풍속의 충신忠信과 염치廉恥가 거의 삼대三代에 이르게 되었다.
효화제孝和帝 이후로
정령政令이 점점 해이해져
외척外戚들이 권력을 독점하고
환관宦官들이 방자하였으나 오히려
직간直諫하는
충렬忠烈의 신하
注+[頭註]충렬忠烈의 신하는 이응李膺과 환전桓典과 같은 무리이다. 가 있어 자기 몸을 잊고 나라를 위해 희생하였다.
그러므로
한漢나라가 비록 쇠하였으나 멸망하지 않았으니, 어찌
건무建武와
영평永平注+[頭註]건무建武는 광무제光武帝의 연호年號이고 영평永平은 명제明帝의 연호年號이다. 의 남은
공렬功烈이 아니겠는가.
환제桓帝와 영제靈帝에 이르러서는 기강이 크게 무너져서 영준英俊들을 금고禁錮하고 충정忠正한 사람들을 해치고 모질게 대하니, 총애받는 환관의 무리가 중외中外에 서리고 얽혀서 뇌물을 받고 옥사獄事를 봐주고 관직을 팔아먹어 온 천하를 흐리고 어지럽혔다.
하진何進이 죽음을 당하자 원소袁紹는 그 분함을 이기지 못하여 마침내 궁궐을 불태우고 주살誅殺을 자행하였으며 밖으로 동탁董卓을 불러 조정을 위협하였다.
이에 이무기와 뱀은 비록 제거되었으나 호랑이와 이리
注+[頭註]추貙는 살쾡이와 비슷한데, 짐승을 잡을 수 있다. 가 방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동탁董卓이 탐욕스럽고 잔인하여 군주를 폐위하고 도읍지를 옮기니,
주군州郡이 분분하게 군대를 일으켜
注+[頭註]칭稱은 드는(일으키는) 것이다. 토벌하였는데,
동탁董卓이 죽자 천하가 크게 혼란해져
한漢나라 황실이 마침내 멸망하였으니, 아! 슬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