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辛亥]九年이라 〈魏太和五年이요 吳黃龍三年이라〉
二月에 丞相亮이 率諸軍伐魏하야 圍祁山할새 以木牛運하니 魏遣司馬懿하야 西屯長安하고 督將軍張郃等하야 以禦之하다
三月에 懿留兵守上邽하고 餘衆悉出하야 西救祁山이어늘
亮이 分兵留攻祁山하고 自逆懿于上邽之東하니 懿斂軍依險하야 兵不得交라
郃曰 彼遠來逆我하야 請戰不得하니 謂我利在不戰하야 欲以長計制之也요
且祁山이 知大軍已在近하고 人情自固하리니 可止屯於此하고 分爲奇兵하야 示出其後요 不宜進前而不敢偪하야 坐失民望也니이다
今亮
이 孤軍食少
하니 亦行去
注+[頭註]行은 猶將也라矣
리이다
懿不從
하고 故尋亮
注+[頭註]有意爲之曰故라 尋者는 隨而躡其後라이러니 旣至
에 又登山掘營
하고 不肯戰
이어늘 賈詡, 魏平曰 公
이 畏蜀을 如虎하니 奈天下笑何
니잇고
懿病之
注+[附註]病은 患也라 懿實畏亮하고 又以張郃嘗再拒亮하야 名著關右하니 不欲從其計하고 及進而不敢戰하야 情見勢屈하야 爲諸將所笑하니라하니 諸將
이 咸請戰
이라
五月
에 懿使郃攻無當
注+[頭註]蜀軍部之號니 言其軍精勇하야 無能當者라 或曰 地名이라하고 하야 向亮
이어늘 亮
이 使魏延, 高翔, 吳班
으로 逆戰
하니 魏兵
이 大敗
라
漢人
이 獲甲首三千
注+[頭註]謂所斬人頭被甲者三千首라하니 懿還保營
하다
漢兵이 乘高布伏하야 弓弩亂發하니 飛矢中郃右膝而卒하다
然亮之將略이 果有大過人者어늘 而陳壽乃以將略非亮所長貶之하니 則其妄肆譏評은 不攻自破矣라
時
에 亮
이 垂兵
注+[頭註]遠出之貌라遠出
하야 糧餉不繼
어늘 懿以銳師大衆
으로 乘氣而扞禦之
로되 猶狼狽
注+[頭註]詩에 狼跋其胡요 載疐其尾라하고 又狽前足絶短하야 每行에 常駕狼하니 失狽[狼]則不能動이라 故로 라하니라如許
라
況亮五丈原之出
注+[頭註]見下甲寅年이라에 恩信
이 行於中原
하고 威略
이 震乎遠邇
하며 屯田積聚
하야 軍旅雜於居民而莫之間
注+[頭註]去聲이니 隔也라하니 使不死數月
이면 懿其能與戰而遂取勝乎
아
건흥建興 9년(신해 231) - 위魏나라 태화太和 5년이요, 오吳나라 황룡黃龍 3년이다. -
2월에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이 제군諸軍을 거느리고 위魏나라를 정벌하여 기산祁山을 포위할 때에 목우木牛(나무로 만든 소)로 군량을 운반하니, 위魏나라가 사마의司馬懿를 보내어 서쪽으로 장안長安에 주둔시키고 장군將軍 장합張郃 등을 보내어 막게 하였다.
3월에 사마의司馬懿가 병력을 남겨 두어 상규上邽를 지키게 하고 나머지 병력을 모두 출동하여 서쪽으로 가서 기산祁山을 구원하였다.
제갈량諸葛亮이 병력을 나누어 남겨 두어 기산祁山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상규上邽의 동쪽에서 사마의司馬懿를 맞아 싸웠는데, 사마의司馬懿가 군대를 거두어 험고한 곳에 의지하여 지키니, 양군兩軍이 교전할 수가 없었다.
제갈량諸葛亮이 군대를 이끌고 돌아오니, 사마의司馬懿 등이 제갈량諸葛亮의 뒤를 따라 노성鹵城에 이르렀다.
장합張郃이 말하기를 “저들은 멀리서 와서 우리 군대를 맞아 싸우기를 청했으나 싸울 수가 없으니, 우리들의 이로움이 싸우지 않음에 있다고 생각하여 장구한 계책으로 제어하고자 할 것입니다.
또 기산祁山에서는 우리 대군大軍이 이미 가까이 있음을 알고 사람들의 마음이 자연 견고해질 것이니, 이곳에 멈춰 주둔하고 군대를 나누어 기병奇兵(기습병)을 만들어서 적의 후면으로 나감을 보이고, 앞으로 나아가면서도 감히 적을 핍박하지 못하여 앉아서 백성들의 희망을 잃게 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제갈량諸葛亮은 고립된 군대로 양식이 부족하니, 또한 장차
注+[頭註]행行은 장차와 같다. 떠나갈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의司馬懿는 그의 말을 따르지 않고 일부러
제갈량諸葛亮의 뒤를 밟았는데,
注+[頭註]의도를 가지고 하는 것을 고故(일부러)라고 한다. 심尋은 따라서 그 뒤를 밟는 것이다. 도착한 다음 또다시
산山에 올라가 진영을 파고 싸우려 하지 않자,
가후賈詡와
위평魏平이 말하기를 “공이
촉한蜀漢을 두려워하기를 범을 무서워하듯이 하니, 천하 사람들의 비웃음을 어찌하시겠습니까?” 하였다.
사마의司馬懿가 이를 걱정하니,
注+[附註]병病은 걱정함이다. 사마의司馬懿는 실로 제갈량諸葛亮을 두려워하였으며, 또 장합張郃이 일찍이 두 번이나 제갈량諸葛亮을 막아서 이름이 관서關西 지방에 드러나니 그의 계책을 따르고자 하지 않았고, 전진하였으나 감히 싸우지 못하게 되자 실정이 드러나고 세력이 굽히게 되어 제장諸將들에게 비웃음을 당한 것이다. 제장諸將들이 모두 싸우기를 청하였다.
5월에
사마의司馬懿가
장합張郃으로 하여금
무당無當注+[頭註]무당無當은 촉한蜀漢의 부대의 호칭이니, 군대가 정예하고 용맹하여 대적할 자가 없음을 말한다. 혹자는 이르기를 “지명地名이다.” 하였다. 을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중간의 길을 점거하여
제갈량諸葛亮을 핍박하였는데,
제갈량諸葛亮이
위연魏延‧
고상高翔‧
오반吳班으로 하여금 맞아 싸우게 하니,
위魏나라의 군대가 대패하였다.
한漢나라 군대가
갑사甲士의
수급首級 3천 명을 얻으니,
注+[頭註]갑수甲首 삼천三千은 갑옷을 입은 병사의 머리를 벤 것이 3천 명임을 이른다. 사마의司馬懿가 돌아와 진영을 지켰다.
6월에 제갈량諸葛亮이 양식이 다하여 군대를 후퇴시켰는데, 사마의司馬懿가 장합張郃을 보내어 추격하였다.
촉한蜀漢의 군사들이 높은 곳에 올라가 포진하고 매복하여 활과 쇠뇌를 어지럽게 쏘아대니, 유시流矢(빗나간 화살)가 장합張郃의 오른쪽 무릎을 명중시켜 죽었다.
“사마의司馬懿는 용병술用兵術이 신神과 같아서 계산함에 미비한 계책이 없으니, 쉽게 상대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매번 승상丞相 제갈량諸葛亮과 교전할 때에는 그때마다 번번이 패배하였다.
이 때문에 그의 무리들이 사마의司馬懿가 촉한蜀漢을 두려워하기를 범을 무서워하듯이 한다는 비난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제갈량諸葛亮의 장략將略(장수로서의 지략智略)이 진실로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난 점이 있었던 것인데, 진수陳壽는 도리어 장략將略은 제갈량諸葛亮의 소장所長이 아니라고 폄하하였으니, 그가 함부로 비평한 것은 공격하지 않아도 저절로 깨뜨려진다.
세상에서는 성패成敗를 가지고 인물을 논하여 진수陳壽와 같은 무리들이 한둘이 아니니, 한탄스러움을 말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때
제갈량諸葛亮은 군대를 끌고 멀리 출전하여
注+[頭註]수병垂兵은 군대가 멀리 나간 모양이다. 군량이 계속 공급되지 못하였는데,
사마의司馬懿가 정예병과
대군大軍으로 기세를 타고 막았으나 오히려 낭패함
注+[頭註]《시경詩經》 〈빈풍豳風〉에 “이리가 앞으로 나아가면 턱살이 밟히고 뒤로 물러나면 꼬리가 밟히도다.” 하였고, 또 《유양잡조酉陽雜俎》 〈모편毛篇〉에는 “패狽는 앞 다리가 매우 짧아서 언제나 갈 때마다 낭狼을 타니, 패狽가 낭狼을 잃으면 움직일 수가 없다. 그러므로 세상에서 일이 어그러지는 것을 일러 낭패狼狽라고 칭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 이와 같았다.
더구나
제갈량諸葛亮은
오장원五丈原에
출병出兵했을 때에
注+[頭註]오장원五丈原에 출병出兵한 것은 뒤의 갑인년조甲寅年條에 보인다. 은혜와 신의가
중원中原에 행해지고 위엄과
지략智略이
원근遠近에 떨쳐졌으며,
둔전屯田을 만들어 곡식을 모아서 군사들이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있었으나 간격
注+[頭註]간間은 거성去聲이니, 간격이다. 이 없었으니, 만일 몇 달 동안 죽지 않았다면
사마의司馬懿가 어찌
제갈량諸葛亮과 싸워서 마침내 승리를 취할 수 있었겠는가.
그러므로 사마의司馬懿는 제갈량諸葛亮의 적수가 아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