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己未]延熙二年이라 〈魏景初三年이요 吳赤烏二年이라〉
春正月
에 魏主叡寢疾
注+[頭註]寢은 益也라이어늘 司馬懿入見
한대 魏主執其手
하고 曰 吾以後事屬君
하노니 君與曹爽
으로 輔少子
하라
是日
에 立齊王芳
注+[頭註]明帝無子하여 養爲太子하니 不知所來라 或曰 任城王楷之子라하야 爲皇太子
하고 叡尋殂
하다
魏明帝沈毅
注+[通鑑要解]毅는 果敢也라好斷
하고 優禮大臣
하며 開容善直
하야 雖犯顔極諫
이나 無所摧戮
하니 其君人之量
이 如此之偉也
라
然
이나 不思建德垂風
注+[頭註]建其德이요 垂其風이라하야 不固維城之基
注+[頭註]詩에 宗子維城이라하니 同姓也니 言猜忌宗室以亡魏라하야 至使大權偏據
하고 社稷無衛
하니 悲夫
라
加曹爽, 司馬懿侍中
하야 都督中外諸軍
하고 錄尙書事
注+[頭註]旣督中外諸軍하고 又錄尙書事하니 則文武大權이 盡歸之矣라하다
연희延熙 2년(기미 239) - 위魏나라 경초景初 3년이고, 오吳나라 적오赤烏 2년이다. -
봄 정월에
위주魏主 조예曹叡가 병이 위독하자
注+[頭註]침寢은 병이 더 심해지는 것이다. 사마의司馬懿가 들어가 뵈니,
위주魏主가 그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내 뒷일을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그대는
조상曹爽과 함께
소자少子를 보필하라.” 하였다.
이날
제왕齊王 조방曹芳注+[頭註]명제明帝가 아들이 없으므로 제왕齊王 조방曹芳을 길러 태자太子로 삼으니, 누구의 소생인지 알 수 없다. 혹자는 이르기를 “임성왕任城王 조해曹楷의 아들이다.” 한다. 을 세워
황태자皇太子로 삼고
조예曹叡가 얼마 후 죽었다.
“
위魏나라
명제明帝는 침착하고 과감하고
注+[通鑑要解]의毅는 과감한 것이다. 결단하기를 좋아하였으며,
대신大臣들을 예우하고 선한 사람과 정직한 사람을 관대하게 포용해서 비록 안색을 범하면서 지극히 간하더라도
박해迫害하거나 죽이는 바가 없었으니,
인군人君 노릇 하는 도량이 이와 같이 컸다.
그러나
덕德을 세우고 훌륭한
풍교風敎를 드리울 것
注+[頭註]건덕수풍建德垂風은 덕德을 세우고 풍교風敎를 드리우는 것이다.을 생각하지 않아서
유성維城(宗室)의 기틀을 공고하게 하지 못하여
注+[頭註]《시경詩經》 〈대아大雅 판板〉에 “종자宗子는 나라의 성城이다.” 하였다. 유성維城은 동성同姓이니, 종실宗室을 시기하여 위魏나라를 망하게 하였음을 말한 것이다. 대권大權을 다른 사람의 수중에 떨어지게 하고
사직社稷을 호위할 사람이 없게 하였으니, 슬프다.”
위주魏主 조방曹芳이 지위를 이으니, 나이가 8세였다.
조상曹爽과
사마의司馬懿에게
시중侍中을 가하여
중외中外의
제군諸軍을
도독都督하게 하고
상서성尙書省의 일까지 겸하여 관장하게 하였다.
注+[頭註]都督中外諸軍 녹상서사錄尙書事:이미 중외中外의 제군諸軍을 도독都督하고 또 상서성尙書省의 일까지 겸하여 관장하니, 문무文武의 대권大權이 모두 조상曹爽과 사마의司馬懿에게 돌아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