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乙酉]〈魏咸熙二年이요 晉世祖司馬炎泰始元年이요 吳甘露元年이라
八月에 魏晉王昭卒하고 太子炎이 嗣爲相國, 晉王하다
○ 十二月에 魏主禪位于晉王하니 王이 卽皇帝位하고 奉魏主爲陳留王하다
漢室不綱
에 群雄糜擾
하야 乘輿播蕩
하야 莫之收省
이어늘 太祖獨奉迎而相之
하야 披荊棘
注+[頭註]喩難也라以立朝廷
하니 則其名義固足以結民心矣
요
加之英威明略
이 過絶於人
하야 驅策賢豪
하야 糞除
注+[通鑑要解]糞은 掃除也라奸宄
라
於是
에 張綉屈膝
注+[附註]張綉는 祖厲人이라 麴勝이 殺祖厲長하니 綉爲縣吏라가 間伺殺勝이라 郡內義之하니 遂招合少年하야 爲邑中豪傑이라 屯宛하야 與劉表合이러니 魏太祖南征하니 綉擧衆降하니라하고 呂布
注+[頭註]見上二十二卷丙子年이라授首
하고 公路
注+[頭註]袁術字라野死
하고 本初
注+[頭註]袁紹字라覆亡
하고 劉琮獻地
하고 韓, 馬
注+[頭註]韓遂, 馬超니 漢獻帝辛卯年에 魏祖擊破하니라 後에 超奔備하고 遂爲下所殺이라遁逃
하야 中原肅淸
하고 戎狄請服
하니 然則魏取天下於群盜
요 非取之於漢室也
라
惜其狹中多詐하야 猜忌賢能하니 此海內所以不盡服也라
及文帝
注+[頭註]曹丕라受禪
하고 明帝
注+[頭註]曹叡라繼業
하야 內綏外禦
하야 不廢前功
이러니 而明帝於彌留
注+[頭註]病彌甚而留連也 之際
에 爲奸臣
注+[頭註]司馬懿라牽率
이라
嗣子幼弱
하고 寄託非人
하며 曹爽驕戇
하고 黨(友)[與]輕佻
注+[頭註]佻는 薄也라하야 禍自內興
하야 遂衰微不振
하야 하니 悲夫
라
曹丕 因而簒漢을 如拾芥然하고 明帝는 性雖明敏이나 而好土功하니 其衰微之兆 已見矣요 邵陵孤幼에 寄托非人하야 陵遲至陳留하야 而晉人取之亦不難은 何歟오
曹操以亂世之奸雄으로 乘漢室之衰弱하야 欺人孤兒寡婦하야 狐媚以取天下하니 原情定罪하면 直巨盜耳라
傳曰
라하니 爲人臣而懷姦幸釁
하야 竊人宗社者
는 尙鑒于玆
어다
時
에 晉主承魏氏刻薄奢侈之後
하야 欲矯以仁儉
注+[釋義]矯는 以{謂}正其曲也라이러니 有司言御牛靑絲
注+[釋義]王氏曰 紖은 著牛鼻繩이니 所以牽牛者니 以靑絲爲之라[頭註]記祭統에 迎牲하여 君執紖〈注에 紖은 所以牽牲也〉라하니라 斷
이라하야늘 詔以靑麻代之
하다
○ 晉이 初置諫官하고 以傅玄爲之하니 玄이 以魏末士風頹敝라하야 上疏曰
臣은 聞先王之御天下에 敎化隆於上하고 淸議行於下러니
近者에 魏武好法術하야 而天下貴刑名하고 魏文이 慕通達하야 而天下賤守節하니
其後
로 綱維不攝
注+[頭註]攝은 整也라하고 放誕盈朝
注+[頭註]放誕은 謂何晏, 阮籍輩也라하야 遂使天下
로 無復淸議
니이다
陛下龍興受禪하사 弘堯, 舜之化하시되 惟未擧淸遠有禮之臣하야 以敦風節하시고 未退虛鄙之士하야 以懲不恪하시니
을유(265) - 위魏나라 함희咸熙 2년이고, 진晉나라 세조世祖 사마염司馬炎의 태시泰始 원년元年이고, 오吳나라 감로甘露 원년元年이다.
○ 이해에 위魏나라가 망하고 진晉나라가 대신하니, 모두 두 나라이다.〉
8월에 위魏나라 진왕晉王 사마소司馬昭가 죽고, 태자太子 사마염司馬炎이 뒤를 이어 상국相國과 진왕晉王이 되었다.
○ 겨울에 오주吳主가 도읍을 무창武昌으로 옮겼다.
○ 12월에 위주魏主가 진왕晉王에게 선위禪位하니, 진왕晉王이 황제의 지위에 오르고 위주魏主를 받들어 진류왕陳留王으로 삼았다.
이상 위魏나라는 다섯 군주에 모두 46년이다.
“
한漢나라
황실皇室이 기강을 잃자 여러 영웅들이 어지럽게 소요해서
승여乘輿(황제)가 파천하여 거두고 살피는 이가 없었는데,
태조太祖(曹操)가 홀로 받들어 황제를 맞이하여 도와서
고난苦難注+[頭註]형극荊棘은 어려움을 비유한 것이다. 을 헤치고
조정朝廷을 세우니, 그 명분과 의리가 진실로
민심民心을 결속시킬 수가 있었다.
게다가
영명英明한 위엄과 지략이 보통 사람보다 크게 뛰어나서, 현자와 호걸들을 몰고 부려서 간사한 자들을 제거
注+[通鑑要解]분糞은 소제하는 것이다. 하였다.
이에
장수張綉가 무릎을 꿇고
注+[附註]장수張綉는 조려祖厲 사람이다. 국승麴勝이 조려祖厲의 장長을 죽이자, 장수張綉가 이때 현縣의 아전으로 있다가 틈을 엿보아 국승麴勝을 죽였다. 군郡 안의 사람들이 이를 의롭게 여기니, 장수張綉가 마침내 소년少年들을 불러 모아 읍邑 안의 호걸이라 하였다. 〈무리를 이끌고〉 완宛 땅에 주둔해서 유표劉表와 연합하였는데, 위魏 태조太祖(曹操)가 남쪽을 정벌하니 장수張綉가 무리를 데리고 항복하였다. 여포呂布注+[頭註]여포呂布는 앞의 22권 병자년조丙子年條(196)에 보인다. 가 머리를 내주었으며,
공로公路(袁術)
注+[頭註]공로公路는 원술袁術의 자字이다. 가 들에서 죽고
본초本初(袁紹)
注+[頭註]본초本初는 원소袁紹의 자字이다. 가 패망하였으며,
유종劉琮이 땅을 바치고
한수韓遂와
마초馬超注+[頭註]한韓‧마馬는 한수韓遂와 마초馬超이니, 한漢나라 헌제獻帝 신묘년(211)에 위魏 태조太祖가 격파하였다. 뒤에 마초馬超는 유비劉備에게 망명하였고, 한수韓遂는 아랫사람에게 살해당하였다. 가 도망하여
중원中原이 깨끗해지고 오랑캐들이 복종하기를 청하였으니, 그렇다면
위魏나라는
천하天下를 여러 도둑들에게서 취한 것이요,
한漢나라 황실에서 취한 것이 아니다.
애석하게도 마음이 좁고 속임수가 많아서 덕이 있는 자와 유능한 자를 시기하였으니, 이것이 온 천하가 다 복종하지는 않았던 이유이다.
문제文帝(曹丕)
注+[頭註]문제文帝는 조비曹丕이다. 가
선위禪位를 받고
명제明帝(曹叡)
注+[頭註]명제明帝는 조예曹叡이다. 가 기업을 잇게 되자, 안으로는 백성들을 편안히 하고 밖으로는 적을 막아서 예전의 공을 실추시키지 않았는데,
명제明帝가 병이 오래 낫지 않을
注+[頭註]미류彌留는 병이 갈수록 심해지고 낫지 않는 것이다. 때에 간신(司馬懿)
注+[頭註]간신奸臣은 사마의司馬懿이다.에게 제재를 당하였다.
사자嗣子(曹芳)는 어리고 국정을 나쁜 사람(司馬懿)에게 맡겼으며,
조상曹爽은 교만하고 어리석으며
당여黨與는 경솔
注+[頭註]조佻는 경박함이다. 해서,
화禍가 안으로부터 일어나 마침내 쇠미하고 떨치지 못해서 왕조가 바뀌는 데에 이르렀으니, 슬프다.”
[史略 사평史評]내(劉剡)가 살펴보건대 위魏나라가 일어남은 실로 조조曹操로부터 시작되었다.
조비曹丕는 인하여 한漢나라를 찬탈하는 것을 지푸라기를 줍듯이 쉽게 하였고, 명제明帝는 비록 성품이 명민하였으나 토목공사를 좋아하여 쇠미할 조짐이 이미 나타났으며, 소릉여공邵陵厲公(曹芳)은 어린 고아로 국정을 나쁜 사람(司馬懿)에게 맡겨서 침체하여 진류왕陳留王(曹奐)에 이르러서는 진晉나라 사람이 또한 쉽게 차지하였으니, 이는 어째서인가?
조조曹操가 난세亂世의 간웅奸雄으로 한漢나라 황실이 쇠약함을 틈타서 남의 고아와 과부들을 속여 여우처럼 간사하게 천하를 취하였으니, 그 실정을 따져 죄를 정한다면 단지 큰 도둑일 뿐이다.
이로써 창업創業하여 또한 이로써 망하였으니, 어찌 천도天道가 없겠는가.
옛 책에 이르기를 “너에게서 나온 것이 너에게로 돌아간다.” 하였으니, 신하가 되어 간사한 마음을 품고 나라에 화禍가 있는 것을 요행으로 여겨서 남의 종묘사직을 도둑질하는 자들은 부디 이것을 거울로 삼을지어다.
이때
진주晉主가
위魏나라의 각박하고 사치한 정사의 뒤를 이어서 인자함과 검소함으로 바로잡고자
注+[釋義]교矯는 굽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다. 하였는데,
유사有司가 황제의 제사에 사용하는 소인
어우御牛의 청색 명주실로 만든 코뚜레 끈
注+[釋義]王氏가 말하기를 “진紖은 소의 코에 꿰는 끈이니, 소를 끄는 것인 바, 청색 명주실로 만든다.” 하였다.[頭註]《예기禮記》 〈제통祭統〉의 ‘희생犧牲을 맞이하여 군주가 희생犧牲의 고삐를 잡는다.’는 경문經文의 주注에 “진紖은 희생犧牲을 끌어당기는 것이다.” 하였다. 이 끊어졌다고 말하자 청색 삼끈으로 대신하라고 명하였다.
○ 진晉나라가 처음에 간관諫官을 두고 부현傅玄을 간관諫官으로 삼으니, 부현傅玄이 위魏나라 말기에 선비들의 기풍이 무너졌다 하여 상소하기를
“신은 들으니, 선왕先王이 천하를 다스릴 때에는 교화敎化가 위에 높고 깨끗한 의논이 아래에 행해졌는데,
근자에는 위魏나라 무제武帝가 법술法術을 좋아하여 천하 사람들이 형명刑名을 귀하게 여기고 위魏나라 문제文帝가 통달通達함을 사모하여 천하 사람들이 절개를 지키는 것을 천하게 여기게 되었습니다.
그 뒤로
강유綱維(紀綱)가 제대로 잡히지 않고
注+[頭註]섭攝은 가지런함이다. 방탄放誕한 자들이 조정에 가득하여
注+[頭註]방탄放誕은 하안何晏과 완적阮籍 같은 무리를 이른다. 마침내 천하로 하여금 다시는 깨끗한 의논이 없게 하였습니다.
폐하께서는 왕업王業을 일으켜 선양禪讓을 받으셔서 요堯‧순舜의 교화를 넓히셨으나 오직 식견이 깨끗하고 원대하며 예禮가 있는 신하를 천거해서 풍절風節을 돈독히 하지 못하시고 허황하고 비루한 선비를 물리쳐서 삼가지 않는 자를 징계하지 못하시니,
신이 이 때문에 오히려 감히 말씀을 올리는 것입니다.” 하였다.
진주晉主가 그 말을 가상히 여겨 받아들였으나 또한 개혁하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