以祜疾하야 不宜數入이라하야 更遣張華하야 就問籌策한대
祜曰 孫皓暴虐已甚하니 於今에 可不戰而克이어니와 若皓不幸而沒하고
吳人이 更立令主면 雖有百萬之衆이라도 長江을 未可窺也니 將爲後患矣리라
晉主欲使祜臥護諸將이어늘 祜曰 取吳는 不必臣行이어니와 但旣平之後에 當勞聖慮耳라
功名之際엔 臣不敢居어니와 若事了
인댄 當有所付授
니 願審擇其人
注+[通鑑要解]以東南壤界濶遠하니 當得人以鎭撫之也라也
하소서
是時
에 朝野咸知太子昏愚
注+[頭註]太子는 卽惠帝衷也니 武帝炎之子라하야 不堪爲嗣
어늘
瓘
이 每欲陳啓而未敢發
이러니 會
에 侍宴凌雲臺
注+[通鑑要解]卽魏文帝之所作也 할새 瓘
이 陽醉
하야 跪晉主牀前
하야 曰 臣
이 欲有所啓
하노이다
晉主曰 公所言이 何耶오 瓘이 欲言而止者三이라가 因以手撫牀하고 曰 此座可惜이로소이다
晉主意悟하고 因謬曰 公眞大醉耶아하니 瓘이 於此에 不復有言하다
○ 十一月
에 晉太醫
注+[通鑑要解]屬也라司馬程據 獻雉頭裘
注+[釋義]以雉頭毛로 織爲裘라어늘 晉主焚之於殿前
하고 勅內外
하야 敢有獻奇技異服者
면 罪之
하리라하다
○ 晉羊祜疾篤하야 擧杜預自代어늘 乃以預로 爲鎭南大將軍, 都督荊州諸軍事하다
南州民
注+[頭註]南州는 荊州也라이 聞祜卒
하고 爲之罷市
하니 巷
注+[頭註]邑中道也라 哭聲
이 相接
하고 吳守邊將士 亦爲之泣
이러라
祜好遊峴山
注+[釋義]在襄陽城南十里라이러니 襄陽人
이 建碑立廟於其地
하고 歲時祭祀
하니 望其碑者 無不流涕
라 因謂之
墮淚碑라하니라
무술(278) - 진晉나라 함녕咸寧 4년이고, 오吳나라 천기天紀 2년이다. -
정월에 진晉나라 양호羊祜가 진주晉主를 대면하여 오吳나라를 정벌할 계책을 아뢰니, 진주晉主가 이를 좋게 여겼다.
양호羊祜가 병 때문에 자주 들어올 수 없다 하여 다시 장화張華를 보내어 찾아가서 계책을 묻게 하자,
양호羊祜가 말하기를 “손호孫皓는 포악함이 너무 심하니 현재는 싸우지 않고도 승리할 수 있지만 만약 손호孫皓가 불행히도 죽고
오吳나라 사람들이 다시 훌륭한 군주를 세운다면 비록 백 만의 병력이 있더라도 장강長江을 엿볼 수 없을 것이니 장차 후환이 될 것입니다.” 하였다.
장화張華가 그의 말을 깊이 옳게 여기니, 양호羊祜가 말하기를 “내 뜻을 이룰 수 있는 자는 그대이다.” 하였다.
진주晉主가 양호羊祜로 하여금 누워서 여러 장수들을 지휘하게 하고자 하니, 양호羊祜가 말하기를 “오吳나라를 취하는 것은 굳이 신이 출전할 것이 없습니다만 평정한 뒤에는 성상聖上께서 심사숙고하셔야 합니다.
공명功名을 꾀하는 즈음은 신하가 감히 차지할 수가 없지만, 만약 일이 끝나고 나면 마땅히 맡길 사람이 있어야 하니, 적임자를 신중히 가리시기
注+[通鑑要解]동남쪽 경계는 넓고 머니, 마땅히 적임자를 얻어서 진무鎭撫해야 한다. 바랍니다.” 하였다.
○ 10월에 진晉나라가 위관衛瓘을 상서령尙書令으로 삼았다.
이때
조야朝野에서는
태자太子注+[頭註]태자太子는 곧 혜제惠帝 사마충司馬衷이니,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아들이다. 가
혼우昏愚하여
후사後嗣가 될 수 없음을 다 알고 있었다.
위관衛瓘이 매번 이것을 아뢰고자 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였는데, 마침
능운대凌雲臺注+[通鑑要解]능운대凌雲臺는 곧 위魏나라 문제文帝(曹丕)가 지은 것이다. 에서
진주晉主를 모시고 잔치할 적에
위관衛瓘이 거짓으로 취한 체하여
진주晉主의
용상龍牀 앞에 무릎을 꿇고 말하기를 “신이 아뢰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하였다.
진주晉主가 말하기를 “공公이 말하려는 것이 무엇인가?” 하니, 위관衛瓘이 말하려고 하다가 그만두기를 세 차례 하고는, 인하여 손으로 용상龍牀을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이 자리가 아깝습니다.” 하였다.
진주晉主가 마음속으로 그의 의향意向을 깨닫고 인하여 거짓으로 말하기를 “공公이 참으로 크게 취했는가?” 하니, 위관衛瓘이 이에 다시 말하지 못하였다.
○ 11월에
진晉나라
태의太醫注+[通鑑要解]태의太醫는 종정宗正에 속하였다. 인
사마정거司馬程據가
치두구雉頭裘注+[釋義]치두구雉頭裘는 꿩 머리의 털을 짜서 갖옷을 만든 것이다. 를 바치자,
진주晉主가 이것을 궁전 앞에서 불태우고
내외內外에 명령을 내려 “감히 기이한
기예技藝와 이상한
복식服飾을 바치는 자가 있으면 죄를 주겠다.” 하였다.
○ 진晉나라 양호羊祜가 병이 위독하자 두예杜預를 천거하여 자신을 대신하게 하니, 마침내 두예杜預를 진남대장군鎭南大將軍‧도독형주제군사都督荊州諸軍事로 삼았다.
양호羊祜가 죽으니, 진주晉主가 통곡하며 몹시 슬퍼하였다.
남쪽 고을 백성들
注+[頭註]남쪽 고을은 형주荊州이다. 이
양호羊祜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그를 위하여 시장을 파하니 거리
注+[頭註]항巷은 고을 안의 길이다. 에서 통곡하는 소리가 서로 이어졌고,
오吳나라의 변경을 지키는 장병들도 그를 위하여 눈물을 흘렸다.
양호羊祜는
현산峴山注+[釋義]현산峴山은 양양성襄陽城 남쪽 10리 지점에 있다. 을 유람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양양襄陽 사람들이 그곳에 비석을 세우고 사당을 건립하고는
세시歲時에 제사를 올리니, 비석을 바라보는 자들이 눈물을 흘리지 않은 자가 없었으므로 인하여 이 비를 일러
타루비墮淚碑라고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