賈后
注+[頭註]惠帝后니 賈充女也라凶悍多權略
하야 每欲干預政事
로되 而爲太傅駿所抑
이라
遂構駿以謀反
하야 殺之
하고 廢太后
注+[附註]賈后爲太子妃時에 嘗以妬로 手殺數人하고 又以戟擲孕妾하야 子隨刃墮라 武帝大怒하야 將廢之러니 楊后曰 賈公閭有勳於社稷하니 豈可忘之리오하야 妃得不廢하다 后數誡妃하니 妃不知助己하고 反以爲恨이라 至是에 不以婦道事太后하고 又欲預政이라가 而爲楊駿所抑이라 故殺駿하고 廢太后하니라하고 徵汝南王亮
注+[頭註]亮은 宣帝懿第三子라과 及衛瓘
하야 秉政
注+[頭註]徵汝南王亮爲太宰하여 與太保衛瓘으로 皆錄尙書事하야 輔政이라이러니 賈后復召楚王瑋
注+[頭註]瑋는 武帝炎第五子라하야 使殺亮及瓘
하고 尋復殺瑋
하고 委張華以朝政
하다
華
盡忠帝室하야 彌縫遺闕注+[通鑑要解]彌縫은 猶補合也라하니 賈后雖凶險
이나 猶知敬重華
라
故로 數年之間에 雖闇主在上이나 而朝野安靜하니 華等之功也러라
가후賈后注+[頭註]가후賈后는 혜제惠帝의 황후이니, 가충賈充의 딸이다. 가 흉악하고 사나우며
권모權謀와
지략智略이 많아서 매양 정사에 간여하고자 하였으나
태부太傅 양준楊駿에게 억제당하였다.
가후賈后가 마침내 모반하려 한다고 모함하여
양준楊駿을 죽이고
양태후楊太后를 폐위
注+[附註]가후賈后가 태자비太子妃였을 때에 일찍이 질투하여 직접 여러 사람을 죽였고, 또 잉태한 첩을 창으로 찔러 뱃속의 자식이 칼날을 따라 떨어졌다. 무제武帝가 크게 노하여 태자비太子妃를 폐하려 하였는데, 양후楊后가 말하기를 “가공려賈公閭(賈充)가 사직社稷에 큰 공이 있으니,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하여 태자비太子妃가 폐위되지 않을 수 있었다. 양후楊后가 여러 차례 태자비太子妃를 경계하니, 태자비太子妃는 양후楊后가 자신을 도와주는 줄 모르고 도리어 한스럽게 여겼다. 이때에 이르러 가후賈后가 며느리의 도리로 태후太后를 섬기지 않고, 또 정사에 관여하려 하다가 양준楊駿에게 억제당하였다. 그러므로 양준楊駿을 죽이고 태후太后를 폐한 것이다. 하고는
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注+[頭註]사마량司馬亮은 선제宣帝 사마의司馬懿의 셋째 아들이다. 과
위관衛瓘을 불러서 정권을 잡게 하였는데,
注+[頭註]여남왕汝南王 사마량司馬亮을 불러 태재太宰로 삼아 태보太保 위관衛瓘과 함께 모두 상서尙書의 일을 총괄하여 정사를 보필하게 하였다. 가후賈后가 다시
초왕楚王 사마위司馬瑋注+[頭註]사마위司馬瑋는 무제武帝 사마염司馬炎의 다섯째 아들이다. 를 불러서
사마량司馬亮과
위관衛瓘을 죽이게 하였고, 얼마 뒤에 다시
사마위司馬瑋를 죽이고
장화張華에게 조정의 정사를 맡겼다.
장화張華가 황실에 충성을 다하여 임금을 보필하여 잘못을 바로잡으니,
注+[通鑑要解]미봉彌縫은 기워서 합하는 것과 같다. 가후賈后가 비록 흉악하고 음험하였으나 오히려
장화張華를 공경하고 소중히 여길 줄을 알았다.
가모賈模가 장화張華‧배위裴頠와 함께 한마음으로 정사를 보필하였다.
그러므로 수년 동안 비록 혼암한 군주가 위에 있었으나 조야朝野가 편안하고 조용하였으니, 이는 장화張華 등의 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