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甲子]永興元年이라 〈漢高祖劉淵元熙元年이요 成太宗李雄建興元年이라
○ 初
에 太弟穎
이 表匈奴
劉淵
하야 爲冠軍將軍
하다
淵
의 子聰
이 驍勇絶人하고 博涉經史하고 善屬文
注+[通鑑要解]屬은 之六切이니 著也라하고 彎弓三百斤
이라
弱冠
注+[頭註]去聲이니 二十曰弱冠이라에 游京師
하니 名士莫不與交
러라
淵
의 從祖右賢王宣
이 謂其族人曰 自漢亡以來
로 我單于
徒有虛號하야 無復尺土하고 自餘王侯
는 降同編戶注+[釋義]編은 排也니 編戶者는 謂列次民籍也라라
今吾衆이 雖衰나 猶不減二萬이어늘 奈何斂手受役하야 奄過百年이리오
左賢王은 英武超世하니 天苟不欲興匈奴인댄 必不虛生此人也리라
今司馬氏
骨肉相殘하야 四海鼎沸하니 復
之業
이 此其時也
라하고 乃相與謀
하야 推淵爲大單于
하고 使其黨呼延攸
注+[釋義]匈奴名也니 複姓이라 呼延氏는 本曰呼衍이러니 後入中國하야 語轉衍爲延耳라[通鑑要解]北狄傳에 匈奴四姓은 有呼延氏, 卜氏, 蘭氏, 喬氏로되 而呼延氏最貴하니라로 詣鄴告之
하다
及王浚, 東嬴公騰
注+[通鑑要解]王浚은 幽州都督이요 東嬴公騰은 幷州刺史니 晉宗室之疎戚이라이 起兵
에 淵
이 說穎曰
請爲殿下
하야 還說五部
注+[通鑑要解]曹操分南匈奴하야 爲五部하고 以淵父豹로 爲左部帥也라하야 以赴國難
하리니 二豎之首
注+[通鑑要解]二豎는 謂浚與騰也라를 可指日而懸也
리이다
淵이 至左國城이어늘 劉宣等이 上大單于之號하니 二旬之間에 有衆五萬이라
遷都左國城
注+[通鑑要解]匈奴左部所居城也라하니 胡, 晉歸之者 愈衆
이라
淵
이 謂群臣曰 昔
에 漢有天下久長
하야 恩結於民하니 吾
는 漢氏之甥
注+[通鑑要解]漢高以宗室女로 爲公主하야 以妻冒頓하고 約爲兄弟라 故로 其子孫冒姓劉氏라으로 約爲兄弟
라
卽漢王位하야 改元元熙하고 尊漢安樂公하야 爲孝懷皇帝하다
○ 十月
에 李雄
注+[原註]李特子라 前年에 李特起蜀하니라[釋義]李雄은 字仲雋이니 特之第三子也라[附註〕初에 特이 隨流人入蜀하야 聚爲寇盜하고 自稱益州牧이러니 與益州刺史羅尙戰敗死하다 其子雄이 攻走羅尙하고 遂入成都하야 自稱成都王하니라이 卽成都王位
하다
○ 帝旣還洛陽
에 張方
注+[通鑑要解]河間王顒之將이라이 擁兵
하야 專制朝政하니 太弟穎
이 不得復
預事라
詔太弟穎하야 以成都王으로 還第케하고 更立豫章王熾하야 爲皇太弟하다
영흥永興 원년元年(갑자 304) - 한漢나라 고조高祖 유연劉淵의 원희元熙 원년元年이요, 성成나라 태종太宗 이웅李雄의 건흥建興 원년元年이다.
이해에 참국僭國이 둘이니, 대국大國이 하나이고 소국小國이 하나이다. -
성도왕成都王 사마영司馬穎을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 처음에 태제太弟 사마영司馬穎이 표문表文을 올려 흉노匈奴 좌현왕左賢王 유연劉淵을 관군장군冠軍將軍으로 삼았다.
유연劉淵의 아들
유총劉聰은 날래고 용맹함이 보통 사람보다 뛰어나고
경사經史를 널리 섭렵하고
문장文章을 잘 지었으며
注+[通鑑要解]족屬은 之六切(족)이니 저술하는 것이다. 무게가 300근이 나가는 활을 당겼다.
약관弱冠注+[頭註]거성去聲이니, 20세를 약관弱冠이라 한다. 시절에
경사京師에 유람하니,
명사名士들이 더불어 사귀지 않는 자가 없었다.
사마영司馬穎이 유총劉聰을 적노장군積弩將軍으로 삼았다.
유연劉淵의
종조從祖인
우현왕右賢王 유선劉宣이 집안사람들에게 이르기를 “
한漢나라가 망한 이래로 우리
선우單于가 단지 빈 이름만 소유하여 다시는 한 자 되는 땅도 없고 그 나머지
왕후王侯는 강등되어 일반 백성들과 똑같이 호적에 편입
注+[釋義]편編은 배열함이니, 편호編戶는 평민平民의 호적에 차례로 나열함을 이른다. 되었다.
지금 우리 무리가 비록 쇠미해졌으나 그래도 2만 명을 밑돌지 않는데, 어찌 손을 놓고 사역당하여 이대로 백 년을 지낸단 말인가.
좌현왕左賢王은 영명英明함과 무용武勇이 세상에 뛰어나니, 하늘이 만일 우리 흉노匈奴를 일으키고자 하지 않았다면 반드시 이 사람을 헛되이 태어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사마씨司馬氏가 골육간에 서로 해쳐서 온 천하가 솥의 물이 끓는 듯하니,
호한야선우呼韓邪單于의
왕업王業을 회복하려면 바로 지금이 기회이다.” 하고, 마침내 서로 모의하여
유연劉淵을 추대하여
대선우大單于로 삼고 그의
당黨인
호연유呼延攸注+[釋義]呼延攸는 흉노匈奴의 이름이니 복성複姓이다. 호연씨呼延氏는 본래 호연呼衍이라고 하였는데, 뒤에 중국中國에 들어와 어음語音이 변하여 연衍을 연延으로 쓴 것이다. [通鑑要解]《진서晉書》 〈북적전北狄傳〉에 “흉노匈奴의 네 성姓은 호연씨呼延氏‧복씨卜氏‧난씨蘭氏‧교씨喬氏가 있는데, 호연씨呼延氏가 가장 귀하다.” 하였다. 로 하여금
업鄴 땅에 나아가 이를 고하게 하였다.
유연劉淵이 사마영司馬穎에게 아뢰어 돌아가서 회장會葬할 것을 청하였으나 사마영司馬穎이 허락하지 않았는데,
왕준王浚과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注+[通鑑要解]왕준王浚은 유주도독幽州都督이고 동영공東嬴公 사마등司馬騰은 병주자사幷州刺史이니, 진晉나라 종실宗室의 먼 친척이다. 이 군대를 일으키자
유연劉淵이
사마영司馬穎을 설득하기를
“청컨대 전하를 위해서 돌아가서
오부五部注+[通鑑要解]조조曹操가 남흉노南匈奴를 나누어 오부五部로 만들고, 유연劉淵의 아버지 유표劉豹를 좌부수左部帥로 삼았다. 를 설득하여
국난國難에 달려오게 할 것이니, 이렇게 한다면 두 놈
注+[通鑑要解]이수二豎는 왕준王浚과 사마등司馬騰을 이른다. 의 머리를 머지않아 매달 수 있을 것입니다.” 하였다.
사마영司馬穎이 기뻐하여 유연劉淵을 북선우北單于‧참승상군사參丞相軍事로 삼았다.
유연劉淵이 좌국성左國城에 이르자 유선劉宣 등이 대선우大單于의 칭호를 올리니, 20일 동안에 5만 명의 무리를 보유하게 되었다.
도읍을
좌국성左國城注+[通鑑要解]좌국성左國城은 흉노匈奴의 좌부左部가 거주하는 성城이다. 으로 옮기니, 오랑캐와
진晉나라 사람들 중에 귀의하는 자가 더욱 많아졌다.
유연劉淵이 여러 신하들에게 이르기를 “옛날
한漢나라는 천하를 오랫동안 보유하여 은혜가 백성들에게 베풀어졌으니, 우리는
한漢나라의
외손外孫으로
한漢나라와 형제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注+[通鑑要解]한漢나라 고조高祖가 종실의 딸을 공주公主라 하여 묵특冒頓에게 시집보내고 형제兄弟가 되기로 약속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손들이 마침내 가탁하여 유씨劉氏를 성姓으로 삼은 것이다.
형이 죽으면 아우가 계승하는 것이 또한 옳지 않겠는가.” 하고 마침내 국호를 한漢이라 하였다.
한왕漢王의 위位에 올라 원희元熙라 개원하고 한漢나라 안악공安樂公 유선劉禪을 추존하여 효회황제孝懷皇帝라 하였다.
○ 10월에 〈
성成나라〉
이웅李雄注+[原註]李雄은 이특李特의 아들이다. 전 해(303)에 이특李特이 촉蜀에서 군대를 일으켰다.[釋義]李雄은 자字가 중준仲雋이니, 이특李特의 셋째 아들이다.[附註]처음에 이특李特이 유랑하는 사람을 따라 촉蜀으로 들어가서 무리를 모아 도둑질을 하고 익주목益州牧이라고 자칭하였는데, 익주자사益州刺史 나상羅尙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으니, 그의 아들 이웅李雄이 나상羅尙을 공격하여 패주시키고, 마침내 성도成都에 들어가 성도왕成都王이라고 자칭하였다. 이
성도왕成都王의 자리에 올랐다.
○ 황제가
낙양洛陽으로 돌아가자
장방張方注+[通鑑要解]장방張方은 하간왕河間王 사마옹司馬顒의 장수이다. 이 군대를 끼고 조정의 정사를
전제專制하니,
태제太弟 사마영司馬穎이 다시는 정사에 관여할 수가 없었다.
태제太弟 사마영司馬穎에게 명하여 성도왕成都王의 작위를 가지고 사가私家로 돌아가게 하고, 다시 예장왕豫章王 사마치司馬熾를 세워 황태제皇太弟로 삼았다.
○ 11월에 장방張方이 황제를 위협하여 장안長安으로 천도하였다.